- 우진아. 이번엔 잠깐 들어와야 겠다. 아버지가...또 쓰러지셨어...

 

인천공항 입국장에 들어섰을 때 우진은 심호흡을 했다. 6월 중순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생면부지의 뉴욕으로 떠나며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서울에 20년 만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연락만 아니었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2019년에.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도망치듯 뉴욕으로 떠났을 때 아버지 나이는 50대 중반이었으니 20년이 넘은 지금 70대 중반의 나이에 심근경색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과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우진은 터울이 많이 지는 누나 미진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원망과 함께 혹시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느냐는 조심스런 물음까지 받았지만 우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심한 우진과는 달리 시원시원한 성격의 미진은 처음에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다 나중엔 그래도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우진은 미진이 자신과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도피유학을 떠난거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아들로써 아버지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아버지와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 복잡한 제 마음을 다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들었을 때 우진은 더는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고 일찍 엄마와 사별한 아버지를 더 이상 미진과 매형에게만 맡겨놓을 순 없었다. 제대를 하자마자 복학도 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시작도 못해본 첫사랑의 상처를 잊는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한건 모범생이었던 우진이에게 딱 어울리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영어를 잘했대도 원어민 수준은 아니었기에 6개월간의 랭귀지스쿨부터 밤낮으로 공부에만 매달렸고 학부생이 된 후에는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한 정도가 아니라 서울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민서가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번호가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책만 파고 들었다.

 

“삼촌.”

 

입국장을 막 빠져나오는데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4살 때 떠나와 사진으로만 보다 지난 겨울, 전역 직후 한 달간 미국 여행을 하며 잠깐 만난 적 있는 조카 동현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귀국하는 우진을 위해 미진이 동현을 마중 보낸다 했을 때는 택시 타고 들어가도 된다고 거절했었는데 막상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 생각하니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쑥스러워졌다. 지나친 낯가림은 한달을 같이 지냈던 조카앞에서도 여실없이 드러난다.

 

서울을 떠나올 때는 김포국제공항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인천국제공항이라는 걸 제외하면 우진이 떠나왔던 세기 말과 크게 바뀐 게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우진의 짐을 나눠 들며 주차장으로 안내한 동현은 태어났을 때부터 온 집안의 귀염을 받더니 우진이 떠나올 무렵엔 고작 4살짜리 꼬마였는데 지난 겨울 LA에서 만났을 때처럼 중간과정없이 어른이 된 모습으로 우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영화 <빅>의 톰 행크스처럼. 익숙한 솜씨로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현을 보며 우진이 말했다.

 

“운전 잘 하네.”

“지난 겨울, 샌프란시스코까지 갈 때 내가 운전한 거 잊었어?”

 

잊었을 리가. 초행길인데도 동현은 당황하지 않았고, 우진과 같이 있는 며칠 간 혼자서 LA 곳곳을 다 누비고 다녔고 우진이 일하는 영화제작사인 WB 스튜디오에 와서 헐리우드의 극비영화촬영현장을 직접 보고 영화 크레딧에서만 보던 감독과 유명 촬영감독들, 배우들 뿐 아니라 말로만 듣던 합리적인 촬영시스템을 눈앞에서 확인하곤 감격더니 조심스럽게 고등학교 재학 시절 자신이 만들어 청소년영화제 수상작이라는 단편영화를 우진에게 보여주기도 했었다.

 

“엄마가 병원으로 먼저 데려오라던데.”

 

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가림이 심해 말수가 적었지만 그런 우진의 성격과 달리 동현은 외할아버지의 병세며, 집안일들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하는 틈틈이 우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가는 내내 지루하지 않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번에 첫 휴가지? 그럼 어디 여행이라도 갈 거야?”

 

우진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모르겠어.

 

“늘 계획대로 행동하는 삼촌이 이번엔 웬일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가?”

“WB 스튜디오에 간 날, 삼촌 나 촬영장에 떨어뜨려 놓고, 그 자리에서 회의한다고 들락달락, 투자자들과 미팅한다고 왔다갔다, 비서는 석 달 전 스케줄 조정하느라 난리던데. 뭐.”

 

우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서도 강의시간표 외에 토익이며, 컴퓨터자격증 취득 계획을 꼼꼼하게 적어놓고는 했다. 우진의 인생에 세워놓았던 계획들이 어긋났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휴가라고는 해도 읽어야 할 책 목록이며 봐야 할 영화목록들이 빼곡이 적혀있긴 했지만.

 

“서울에서 잠깐 학교 다녔다고 했지?”

“응.”

“친구들도 많겠네.”

 

친구...그 말에 우진은 제일 먼저 영석이 떠올랐다. 대학에 들어와 가장 먼저 친구가 됐고 마음도 잘 맞아 늘 같이 다니던 좋은 친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영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1997년 가을,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간 후 영석과의 연락은 자연히 끊어졌다. 영석과의 연락을 끊는 게 영석에게도, 민서에게도, 자신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대휘...이대휘...우진은 늘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제 인생에서 계획에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22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이름...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폰 번호였다.

 

“삼촌은 왜 SNS 안 해? WB 마케팅 담당인 삼촌 같은 경우는 파워 인플루언서를 넘어 셀럽인데 꼭 필요하지 않나? 하다못해 삼촌이 읽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회사며 관련 주식이 요동칠 텐데...”

 

SNS...다시 떠오르는 이름.

 

- 1977년 생 박우진 왤케 많아요?

- 걱정마요.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볼게요. 페북, 인스타, 트위터, 블로그, 카스 뒤지면 다 나와요.

- SNS요. 2019년 쯤 되면 개인 블로그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서 이제 어디 가서 뭘 먹었는지도 다 나와요.

 

도망치듯 뉴욕으로 와서 대학을 다닐 때 거짓말처럼 페이스북이 학생들 사이에 퍼졌을 때 우진은 멍해지고 말았다. 대휘가 말했던 페북이 이 페이스북이고, 2019년 엔 전세계 수억명이 사용하는 SNS가 된다는 말을 떠올린 우진은 SNS을 활용한 마케팅모델과 기존 마케팅을 비교한 논문 덕에 교수 추천으로 졸업과 동시에 LA의 글로벌영화 제작사 마케팅팀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안하는 거야. 관심 받고 싶지 않아서.”

“대박. 완전 언행불일치. SNS를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을 처음 시작한 게 삼촌 아니었어? 사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Right Now)’을 더 관심 있어 한다고.”

 

상사인 팀장에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이용한 SNS 영화홍보 마케팅 전략과 함께 블로그를 통한 바이럴마케팅에 집중했던 사람도 우진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트위터나 페북 등 SNS를 안 하는 건...그랬던 거다. 21살의 우진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미래를. 민서의 미래를. 그리고 대휘를. 자신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대휘에게 빚을 졌고, 아울러 대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대휘를 만나서도 대휘가 자신을 찾게 만들어서도 안된다는 걸.

이런저런 말을 하던 동현은 우진의 침묵에 눈치가 보였는지 센스있게 마무리했다.

 

“20년 만이라면서...꼭 보고 싶은 사람 있어? 첫사랑이라든지.”

 

눈치 빠른 녀석...

첫사랑...우진은 이제 잘 모르겠다. 자신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민서인지...민서를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끝나버린 풋사랑 때문에 자신이 서울에서 도망쳤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지금 우진이 보고 싶은 사람은 대휘였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절대 마주쳐서도 안되는 사람 역시 대휘였으니까. 자신을 만난다면...대휘는 더 힘들어질 테니까.

 

- 예나야. 통화 괜찮아...공항에서 삼촌 픽업해서 병원에 모셔다 드리면 바로 갈 수 있어. 대휘, 어제 뭐 좀 먹었어?

 

대휘? 동현의 질문에 상념에 잠겼던 우진이 정신을 차린 건 동현의 입에서 나온 대휘란 이름때문이었다. 세상에 대휘라는 이름이 한사람뿐일리는 없지만 우진이나 동현만큼 흔한 이름은 아니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대휘...이대휘...H대 연영과 19학번이랬지...

 

-....그래. 네가 고생스럽더라도 챙겨줘. 이따 점심은 내가 살게. 그래.

 

동현은 우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통화를 마치고 화제를 돌렸다.

 

“참, 삼촌, 우리 학교랬지?”

 

동현의 말에 우진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설마, 대휘가 좋아했던 김동현인가 동동이가? 우진은 고개를 돌려 동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다 냅따 동현의 귀를 잡아 꼬집었다. 아얏. 뭐하는 거야? 동현의 말에 우진이 말했다. 제대로 보고. 함부로 들이대지 말고. 나 무사고 운전자라고. 우진의 소심한 복수라는 걸 알 턱 없는 동현은 꼬집힌 귀를 만지작거리며 투덜대는 것과 다르게 처음으로 제게 장난을 걸어오는 우진이 조금은 편해졌다.

 

 

우진은 저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는 미진에게 미안해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다 겨우 한마디 했다. 누나 미안. 엄마의 장례식을 끝나고 제대 후 바로 떠나버린 우진이 20년 만에 아버지가 쓰러진 다음에서야 나타난 것이 서운한데다 이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는 게 지쳤는지도 모른다. 미진과 나란히 앉아 야윈 아버지를 보니 새삼 70대 중반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이럴 때 조카 동현이라도 있었으면 좀 더 나았을 까. 여자친구 만난다고 우진만 병원에 내려주고 가버린 동현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이라도 수다스런 미진이 아니었기에 잠든 아버지를 말없이 바라보다 긴 비행시간에 피곤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라고 등을 떠미는 미진에 우진은 내일 오겠다고 말하고 먼저 병원을 나설 때였다.

 

“박...우진...맞지?”

 

자그마한 키에 언제나 웃는 하얀 얼굴의 웅을 보는 순간 우진은 다시 스무살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넌 어떻게 그대로냐.”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창시절부터 우진의 부모도 알 정도로 친했던 단짝이었고 대학도 같은 H대로 와 친했던 웅과의 만남은 우진이 숙소로 쓰는 호텔 바에서의 가벼운 술자리로 이어져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우진의 명함을 받은 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작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터뜨린다는 마이다스의 손, J. Park이 너였단 말야? 세계 영화제 같은 공식 석상에도 안 나오고 인터뷰 기사에도 사진이 없고, 개인 SNS도 없고. 이름도 바꿨으니 누가 알겠냐.”

 

웅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H대학교 연영과 교수 전웅. 한때 교수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대학시절이 떠올라 부러움 반, 씁쓸함 반 복잡한 마음으로 마티니를 들어 입술을 축이던 우진은 잠깐 망설이다 웅에게 물었다.

 

“혹시, 너 이영석이라고 기억해? 나랑 과 동기였는데...”

“알지. 우리 학교 경제학과 교수였다가 작년에 교환교수로 가족과 LA로 갔는데.”

“친했나 보네.”

 

갑작스런 물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애정과 아련함이 묻어나는 웅의 말에 질문은 자신이 해놓고 우진은 씁쓸해졌다.

 

“어떻게 모를 수 있어.뉴욕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많은 학교의 교수 제안을 거절하고 우리 학교로 왔는데. 그 친구 박사학위논문이 노벨 경제학상 수준이라고 학계에선 인정받았지. 훌륭한 인품에 능력과 실력, 행복한 가정...사람이 다 갖추면 무엇 하나 모자르기 마련인데 이교수는...후우...”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좋아하기라도 했어? 떠나간 첫사랑 말하듯 하네.”

“넌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도 안 해봤어?”

 

언젠가 대휘도 그렇게 말했었다.

 

- 잠깐, 네이버인가 네버인가에 나는 안 나온댔지? 네 아버지는 나와? 거기?

- 당연히 나오죠. 얼마나 훌륭한 분인데.

 

영석이는 좋겠다. 아들에게, 아내에게, 동료교수에게도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어서. 웅은 누군가 우진 자신에 물어보면 이렇게 애정어린 답변을 해줬을까. 지난 22년간 누군가가 웅에게 자신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있었을까. 혹시...이대휘...라면...

 

“...아마도 신이 그걸 시기했나 봐...교환교수로 간지 얼마 안 되서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어. 아내랑 같이.”

 

 

창문을 열자 습기 찬 초여름의 공기가 집안으로 훅 들어왔다. 얼마 만에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보는지 모르겠다. 마당 한쪽의 화단에 핀 수국이 눈에 띄었다. 작년 이맘때까지는 엄마가 나무와 꽃들로 예쁘게 꾸몄던 화단이었다. 제법 날이 더워지고 공기 중에 습기가 섞여 장마가 멀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평소 더위를 잘 타진 않는 대휘였지만 손목의 가로로 긴 붉은 흉터가 눈에 띄어 짧은 소매를 입는 게 주저되었다.

 

상처를 감추려 다시 긴소매셔츠를 꺼냈던 대휘는 긴소매셔츠와 반팔 셔츠, 제 손목의 상처를 번갈아 보며 잠시 생각하다 긴소매셔츠를 내려놓고, 반팔 셔츠를 입은 후 생각난 듯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긴 붉은색 매듭을 꺼냈다. 지난 봄 학교 중도에서 빌린 책 안에 있던 붉은색 매듭이었다. 혹시나 싶어 매듭을 팔찌처럼 오른손 손목에 둘러 리본처럼 묶엇더니 제법 꾸안꾸 분위기로 어울렸다. 상처는 감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듭을 손목에 묶는 순간, 무언가 알수 없는 안도감과 용기가 솟는 것 같은 건 아마도 기분탓이거나 플라시 보효과려나. 대휘는 심호흡하며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매일 환기를 시켜야겠다. 서재의 아빠 책들이 상하지 않게. 장마는 아직 시작 안했지만 비가 오려나...꾸물꾸물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휘는 우산을 챙겼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예나가 대휘에게 손을 흔들다 반소매차람인 대휘의 옷을 보고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예나에게 향했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현에게 이어졌다. 마치 그런 대휘의 시선을 예상했다는 듯 동현이 대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주었다. 대휘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예나의 손에 끌려 자리로 왔다.

 

“손목...어?”

 

붉은 자상흔이 진하게 남은 대휘의 오른손 손목엔 붉은색 매듭이 팔찌처럼 감싸고 있었다.

 

“이쁘다. 이건 뭐야?”

“그때 말했잖아. 도서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예나는 얼마 전 동현이 때문에 냉랭했던 대휘와 예나가 다시 붙어있는 모습에 동기들과 선배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이마를 맞붙이고 소곤거렸다.

 

“홍연...뭐 그런 건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은 보이지 않는 붉은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그땐 오래된 책 사이에 있었다는 건 원래 주인도 자신이 잃어버린 줄 모르는 물건일 거라며 버리라더니.”

“그랬어? 근데 혹시 알아? 갑자기 이 붉은 끈의 주인이 나타날지.”

“연애가 좋긴 좋구나. 냉소주의자인 최예나를 최강긍정으로 만들게.”

 

예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대휘의 손목을 꼬옥 쥐었다 놓았다. 강의가 끝나고 동현과 예나를 위해 자리를 피하려던 대휘는 여지없이 예나의 손에 이끌려 학식을 먹으러 끌려왔다. 그날은 정신없어 어영부영 동현이 끓여주는 죽을 받아 먹었지만 사실 동현과 마주하는 게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 자기 여친의 절친인 대휘가 부모의 사고로 상실감과 슬픔으로 자존감도 떨어진 채 늘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된 동현의 친절을 오해한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대휘가 예나의 손에 끌려 동현과 마주앉아 있는 건 예나의 팔힘이나 고집이 세서가 아니라 어쩌면 예나 외엔 학식메이트조차 없는 자신의 얄팍한 교우관계에 기인한 혼밥보다는 꼽사리 끼어있는 게 낫다는 나약함 아니었을까.

 

“너도 갈 거지?”

“응? 뭐?”

 

그럼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어 두 커플 사이에 끼어 최대한 존재감없이 밥만 먹고 대화에 참여는 하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대휘가 예나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뭐해? 아무것도 아닌데...대휘가 부끄러운 듯 감추려는 휴대폰을 예나가 가져가 들여다보니 부동산어플이었다.

 

“먼저 갈게.”

 

대휘가 얼른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왜? 예나와 동현이 동시에 물었다.

 

“야. 이대휘.”

 

대휘는 예나의 부름에 잠시 멈추더니 이건 꼭 말해야 겠다는 듯 심호흡하더니 동현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앞으로는 이 CC들과 같이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동현을 매번 볼 순 없었다.

 

“저...지난번엔 죄송했어요. 눈치도 없이 맨날 예나 독차지해서. 좋은 곳 데려가 주신 것도 고맙구요. 그것도 예나의 부탁이었겠지만요. 그런데 제멋대로 오해하고 화내서 죄송해요. 그치만...이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두 돼요. 꼭 가야할 곳이 있어서...먼저 갈게요.”

“대휘야.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제일 먼저 형이랑 예나한테 연락할게요. 먼저 가요.”

 

씩씩하게 말하는 대휘는 분명 지난 가을과도, 어제와도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고통과 상처속에 침전된 지난 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엇이 대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더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예나의 눈빛에 동현이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보고 형이랬지? 방금?

 

 

외할머니도 이미 돌아가시고 가까운 친인척이 없어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미국으로 달려간 대휘는 영석과 민서의 화장한 유골을 수습해 온 후 장례식을 치루고 납골묘에 유골을 안치한 그날부터 집밖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었다. 삼총사처럼 행복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엄마아빠의 죽음을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던 대휘는 혼자 남았다는 상실감에 결국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내 대휘의 곁에 있었던 예나에게 발견된 덕에 대휘는 위험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지만 매일매일 왜 그때 자신이 부모와 동행하지 않았는지, 왜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하며 지냈다. 민서가 떠나기 전 녹음해준 민서의 음성을 모닝콜처럼 들으며 언제나 영석과 민서는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빠...엄마...대휘 왔어...

대휘는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삼키고 봉안함의 유리문 너머 영석과 민서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고 후 유골을 안치한 후 처음 온 이곳은 작년 가을 같이 왔던 예나가 반쯤 혼이 나간 대휘를 대신해서 꽂아준 시든 꽃다발을 빼내고 들고 온 작은 제비꽃 화분을 봉안함에 넣었다. 여전히 환하게 웃는 영석은 대휘가 기억하는 그 날부터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매일 매시간, 매순간 봐왔던 미소였다. 바닷가에서 어린 대휘를 튜브에 태운 채 환하게 웃던 영석이, 모래성을 쌓는 대휘를 옆에서 지켜보던 영석, 매년 크리스마스 새벽에 산타할아버지로 변장해 대휘에게 선물을 주던 영석...매일, 순간, 영석은 민서와 대휘에게 충실하고 다정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대휘는 더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단 한순간이라도 이런 좋은 아빠를 배신했으니까.

 

“난...그냥...내 엄마 아빠가 되지 못했더라도 엄마 아빠를 살리고 싶었어...”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젠 인정해야만 했다. 아빠와 엄마는 죽었고, 현재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22년 전의 그날이 지났지만 바뀐 건 하나 없었다. 대휘는 아직도 모르겠다. 과거를 바꿔 오늘이 변하기를 바랬을까. 무엇을 바란 걸까. 사실은...

 

“...그런데...형한테 아빠대신 엄마를 도와주라 말하면서도 혹시라도 정말 엄마를 선택했을까 봐 불안했어. 나도 모르겠어. 그 형이 진짜 엄마를 선택하길 바란 건지 아니면 그래도 아빠가 먼저 도착하길 바란 건지. 그 형이 엄마를 선택하지 않아 엄마아빠가 사랑을 이룬 게 좋은 건지, 아니면 그 형이 엄마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건지...그 형이 첫사랑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존재가 엄마인지도 모르고 너무 부러웠거든. 그런 좋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그 첫사랑이 엄마라는 걸 아는 순간, 엄마와 잘 되길 바라는 것과 동시에 잘되지 않길 바란 것 같기도 하고. 21살의 엄마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그 멋진 사람을 아무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고...결국 내가 아빠를 배신해서 벌을 받나 봐. 결국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아...아빠 미안해. 아빠 미안해...너무 보고 싶어...결국 참았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히끅히끅...끕끕...대휘는 소리없이 울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해주면 좋겠다. 넌 아무 잘못 없다고.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그건 그냥 정해진 운명이었다고...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 속이 후련해졌다. 이런 못난 아들인데도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오히려 영석이 저를 위로하는 것 같아 그 미안함에 대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괜찮아. 대휘야. 이건 네 탓이 아니야. 아빤 엄마를 만나 행복했고 대휘의 아버지라서 더 바랄 게 없었어. 아빠가 오랫동안 네 곁에 있지 못해 미안해...

 

작은 목소리로 고해성사를 하듯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이던 대휘는 고개를 숙인 채 지난 가을, 갑작스런 영석과 민서의 죽음에 차마 울지도 못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간 듯 소리내어 오래오래 울었다. 그때는 갑작스런 비보에 망연자실해서 차마 눈물도 나오지 못했던 거라면 지금의 눈물은 자책감과 미안함으로 눈물이 흘렀다.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참을 울고 나니 기분은 조금은 조금 후련해졌다. 빨개진 눈과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닦아 가리며 봉안실을 나서던 대휘는 나오는 사람의 가슴팍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엄마야! 탄탄한 몸에 부딪혀서인지 휘청거리는 대휘는 저를 붙잡아주는 남자의 탄탄한 팔과 갓 샤워를 하고 나온 듯 깨끗한 비누향에 조금 전까지 죄책감과 슬픔, 그리움으로 혼란스럽던 머릿속 맑아지는 걸 느꼈다.

 

...괜찮아요?

앗. 죄송합니다.

 

듣는 것만으로 안정이 되는 듯 한 살짝 부산 사투리가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 생각했지만 대휘는 창피해 차마 올려다 보지도 못하고 웅얼거리듯 사과한 후 그대로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느라 남자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선 것을 알지 못했다.

 

 


 

**********************************

 

 

 

이제 이야기는 한편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쓰고 싶은 에피는 많았지만 전개 상 늘어지기만 할 것 같아 여백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눌러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구독해주시는 분들....감사합니다.

 

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너란 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