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생을 끝내지 못한 이유는 너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늘 너와 나 사이에는 긴장감이 존재했다. 너는 내게 다가오는 듯 하면서도,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네가 선을 넘지 않기에 나도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 둘 사이에만 흐르는 기류가 되었다. 

너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너는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려진 공원, 거기의 터널을 보여준 건 그런 의미였다. 너한테 더 다가가고 싶다는 의미. 모든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한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어둠이 하늘을 잠식하면 사람들은 불을 켠다. 아니면 불을 끈 상태에서도 휴대폰을 보거나 티비를 보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본다. 어떻게서든 빛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자기 직전까지. 

깜깜한 터널에서 손전등의 전원을 껐다. 어둠 속에서 당황하는 너의 모습이 보인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나는 네가 잘 보여. 네 눈, 코, 그리고 입술까지."

입맞춘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느낌 그대로였다. 말캉하고 도톰한 입술. 때마침 비가 내렸다. 터널을 빠져나와 빗 속에 섰다.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 어깨, 등, 손, 그리고 신발까지. 세차게 내린 비에 나는 금방 젖었다. 상관없었다. 비는 모든 상념들을 흐리게 만든다. 아무런 생각없이 상대방에게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비다. 루카스, 너도 이 비에 취하길. 

"뭐야, 비도 무서워 해?"

그는 천천히 암흑의 터널에서 걸어나왔다. 비를 맞을 수 없는 터널 안의 너, 비를 맞고 있는 터널 밖의 나. 이보다 더 극적인 장면이 있을까. 너의 눈이 궁금증으로 빛났다. 그의 입에서 나올 재밌는 말이 기대되었다. 

"너는, 빛을 무서워 해?"

배에서 알싸한 기운이 올라왔다. 일말의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폴라리스를 보았다. 이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응, 엄청."

그가 두 손을 뻗어 내게 내밀었다. 굵은 빗방울이 그의 손과 손목을 빠르게 적셨다. 그가 어떤 장면을 만들어 주는 지 알아챈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루카스, 나는 이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거야. 그가 빗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약간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두 볼을 감싸고, 혀가 얽히는 순간에도 그와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다. 채워지지 않을 갈증이 일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그를 돌려세워 품 안에 가두었다. 지난번 파티때보다는 과감한 거리였다. 그의 이마와 코 끝이 닿았다. 긴 속눈썹에 작은 빗방울이 맺혀있었다. 그가 폴라리스를 보았다고 답했다. 성을 알려준 적이 없는 데, 어떻게 그걸 보았을 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너의 감상.

"처음엔 신기했어. 너가 이런 스토리를 만들었다는 게. 두 번째에는 몽환적이었고, 세 번째에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서 재밌게 봤지. 네 번째부터는 슬프더라."

조곤조곤 말하는 음성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는 이토록 나를... 애닳게 만들어.

"얼마나 많이 본 거야?"

"셀 수도 없이, 많이."

폴라리스를 구상했을 때에는 막연했다. 터널에 죽치고 앉아 하루종일 시나리오를 떠올리기도 했고, 스토리보드를 구상하며 트레이싱 할 때에도, 망상을 구체화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것을 즐겼을 뿐이었다. 제일 마지막 단계에, 두 캐릭터가 서로에게 나침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폴라리스'라고 이름 붙였다. 프로젝트 펀딩은 실패했다. 그것을 네가 보았다. 루카스, 네가 내 삶의 나침반이기에 우리가 만난 것은 아닐까. 

이마, 눈 두덩이, 코 끝, 광대, 뺨, 입술, 턱 끝, 차례대로 입맞추었다. 목덜미로 내려와 고개를 묻자, 그의 호흡이 거칠어 진 것을 느꼈다. 아, 어떡하지. 진짜,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샤워하자는 제안에 약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 마저 섹시했다. 

"그리고 자고 가."

".........."

"싫으면 안 건드릴 게."

"괜찮아. 진짜로."

흔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클리셰로 가득 한 말 따위를 내가 내뱉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가 간절했다. 그의 손을 잡아 욕실로 이끌었다. 순간 상체를 채운 상흔이 떠올랐다. 물어보면 운동하다 긁혔다고 해야겠다고 내 나름대로의 변명을 만들어 놓고 욕실의 불을 켰지만, 곧바로 꺼졌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샤워 해본 적 있어?"

".....아니?"

"그럼 오늘 해 보자. 갑자기 불 켜니까, 조명이 너무 밝아."

"너도 이제 빛을 무서워하게 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널 따라서 어둠에 익숙해져 보려는 거야." 

넌 지금 네가 어떤 말을 하는 지 모르지. 네가 한 말들이 내게는 어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지 알지 못할 거야. 루카스, 나의 폴라리스, 나의 흰 토끼. 



흥분의 열기에 쌓인 너를 떠올리며 자위한 적이 있었다. 상상 속의 너보다,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흥분에 잘게 떨고 있는 너는 훨씬 생동감 넘쳤고,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낮게 울리는 너의 신음, 허리를 감싼 네 다리, 내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쾌감에 젖은 너의 두 눈. 

루카스, 너는 나를 얼마만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나는 너에게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새벽 내도록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몇 번의 사정을 끝낸 후에야 관계를 끝낼 수 있었고, 뒷 정리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는 이미 잠에 취해있었다. 암막 커튼을 치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준 뒤 옆에 누어 그가 자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손가락으로 눈썹, 콧잔등, 턱 선을 쓸어 내리며, 손가락 끝으로 감각을 익혔다. 어떤 얼굴형인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6:00 a.m.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암막커튼을 친 덕분에 침실에 햇살이 들어오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에 홀딱 젖은 옷가지들을 챙겨 나와, 부엌에 딸린 빌트인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침실로 돌아가 플로어 스탠드 조명을 켜서 밝기를 최소한으로 낮춘 뒤, 셔츠를 입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져온 책의 중반부까지 읽자, 그가 일어났다. 건조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찾기에,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삐죽삐죽 뻗친 머리칼도 귀여웠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깬 건 아닌지, 그는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셔츠는 언제 입은 거야?"

"너 잘 때."

좀 잤냐고 물어보는 그의 말에, 나는 몸은 괜찮은 지 물어보며 말을 돌렸다. 그는 처음인 듯 했기에, 분명히 무리가 갔을 테다. 

"엘리엇. 말 돌리지 말고."

"어제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 잠이 잘 안오더라구. 너도 옆에 있고."

"그래.. 나 두 시간 뒤에 깨워줘. 요즘 잠을 잘 못 잤거든. 너무 피곤해." 

 루카스는 고개를 반대쪽을 돌린 채 엎드렸다. 곧바로 잠이 들었는 지 느리게 등이 오르내렸다. 아무래도 루씨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미뤄둔 상담에 나가야겠다.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 루씨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10시 30분. 루카스가 부탁한 시간이었다. 암막커튼을 걷고, 그를 깨웠다. 그는 거의 바로 잠에서 깼다. 눈을 몇 번 비비더니 무슨 책을 읽고 있는 지 물어왔다. 책은 이제 후반부를 달리고 있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안 읽어 봤어."

"원한다면 빌려줄게."

상체를 숙여 그의 입술에 짧게 입맞추고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조금만 더 읽으면 책이 끝나는데, 루카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 통에 읽었던 문장만 계속 다시 읽게 되었다. 

"foyer에서 나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했어?"

"'쟨 분명, 어둠을 무서워 할 거야.'라고"

루카스는 나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둠을 무서워 하는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널 처음 본 거, 모임에서가 아냐."

결국은 읽던 책을 덮고, 그의 옆에 모로 누워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널 처음 본 건 복도에서였다. 

"복도에서 널 봤었어. 전학 온 첫 날. 친구들이랑 있는 널 스쳐지나갔어. 넌 날 못 봤지만, 난 널 봤어. 너 밖에 안 보였어. 네가 나에겐 흰 토끼였어."

그의 머리칼을 헤집어놓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춤췄다. 루카스가 내 허리에 두 손을 두르며, 품에 파고 들었다.

"내가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그 날 널 따라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그래도 우린 만났을까?"

글쎄,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조금 더 그를 꽉 껴안아 그의 머리칼에 턱을 묻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만났을 것이다. 그런 강한 기분이 든다. 

"응. 호기심이 많은 앨리스는 절대로 회중시계를 가진 흰 토끼를 지나칠 수 없을 테니까."

"그래, 그랬겠다. 우리의 만남이 단순 우연에서 그친 게 아니라 필연이었다면, 제 802 지구에 있는 루카스도 결국엔 엘리엇을 만났을거야."

802지구에 있는 엘리엇도 나처럼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을까. 죽음을 생각할 까. 문득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엘리엇을 만나고 행복한 제 99번 루카스는 영원히 기쁘기 위해 삶을 내던졌을까?"

나의 물음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런 건 없어, 앨리엇. 기쁘면, 그냥 그 기쁨을 만끽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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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루꺄한테 말하려고."

루씨가 맞은 편 자리에 앉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괜찮겠어? 걔가 다 받아들일까?"

"응, 루꺄는 이해할 거야." 

"약은 잘 챙겨먹고 있어? 상담은 다니고 있는거 맞아?"

사실 루씨가 신신당부해도 그 때 뿐이었다. 상담도 몇 번 다니다가 최근에는 계속 미루고 있었다. 루씨, 넌 알지 못해. 약을 먹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 지. 뇌의 속도가 느려지는 기분이라고.. 담뱃갑에서 한 개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그제랑 어제는 루카스랑 있느라 약을 안 먹었다. 오늘은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먹어야겠다. 모든 게 다 잘 풀릴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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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은 멀리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진 나는 미친 사람이 맞았고, 그는 나의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를 의레 하는 장난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아침에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오늘은 꼭 이야기하리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왔다. 그를 찾으러 가는 것도, 모두 다 좋았는데. 내가 너무 들떴던 것일까. 

"그래서, 내 캐릭터는 고슴도치야?"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어 펼친 것은 내가 그에게 그려준 그림이었다. 지난 주말의 일이 갑자기 아득히 멀어져가는 기분이었다. 기운이 훅- 가라앉았다. 

"응, 맞아. 넌 삐죽삐죽하잖아."

"정말로 잠자는 걸, 죽음의 연습이라고 생각해?"

농담이라고 둘러댔다. 미친 사람을 경멸하는 그에게 나의 가친관을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비주한 후 수업에 늦겠다는 말로, 그와 헤어졌다. 미친 사람은 멀리 하고 싶다,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더 이상 미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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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하우스메이트한테 말했어. 그리고 아빠한테도 말했어. 어떻게 생각해? - 앨리스]

띠링- 알림음은 루카스에게서 온 문자 수신을 알라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너도 네 나름대로 준비하는 구나. 나도 네 옆에 있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해. 

[멋지다. 정말 기뻐. 근데 미안하지만 당분간 만나기 힘들겠어.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해보여. 네 탓은 아냐, 루카. 내 잘못이야. 미안해 - 엘리엇]

루카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게. 빨리 돌아갈게. 넌 3월의 토끼와 미친 모자장수를 진심으로 싫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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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루씨의 문자였다. 하는 수 없이, 퇴근 후 루씨가 일하고 있는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부모님께서 본인에게 연락이 왔다며 나를 타박했다. 비주로 인사를 나눈 나는 자리에 앉아 바로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엘리엇, 꾸준히 안먹으면 더 나빠져. 너도 알잖아."

"루씨~! 나 다 나았어! 이제 3일째인데 별 일 없잖아? "

루카스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슬프긴 했지만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며칠 떨어져있으면서 약을 먹지 않고 내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제 학교도 열심히 다닐거야. 옅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미소지었다. 

"엘리엇, 루카스한테 얘기했어?"

"루씨. 내가 생각해봤는데, 어차피 조금 지나면 나을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될거야."

그녀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그녀는 당장 루카스에게 연락해야겠다며 휴대폰을 내 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냐, 루씨. 루카스에게 전화 안 해도 돼."

"너, 걔한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지금 이래?"

"그 아이는 내 삶의 나침반이야. 미친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대,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거야. 이거 이해해, 루씨?" 

네 맘대로 하라며, 루씨가 화를 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부모님께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세지를 남겼다. 그 자리에서 몇 번 연기를 더 내뱉고,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이 동네, 루카스의 셰어하우스 근처인 것 같다. 보고 싶다. 그래서 셰어하우스로 찾아갔다. 물론 벨을 누르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도로의 반대편, 맨 처음 루카스를 데려다줬던 그 날 자리에 서서 루카스가 있을 법한 집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는 너가 원하는 조건으로 네 옆에 서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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