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걸 느낀 신명은 대화창을 살펴보았다. 


[축하드려요] (오후 5:20)

[장진우 선배: 고마워]

[장진우 선배: 신명이한테 축하한다는 말 듣고 싶었어] (오후 5:21)

[장진우 선배: 목요일 저녁에 과 사람들이랑]

[장진우 선배: 간단히 술자리 갖기로 했는데]

[장진우 선배: 신명이도 시간되면 올래?] (오후 5:23)

[안 바빠] (오후 5:25)

[장진우 선배: 그러면 신명이도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 (오후 5:26)


대화방을 착각해 고지운에게 답장을 보낸다는 걸 실수로 진우에게 보낸 것이었다. 진우는 넓은 아량을 가진 너그러운 선배인지 두 학번 아래 후배가 반말로 메시지를 보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신명은 당황해서 입을 쩍 벌렸다.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최대한 수습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안 바빠요] (오후 5:29)

[조금 전에는 실수로 요를 빼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술자리는 저도 좋습니다] (오후 5:30)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오후 5:30)

[장진우 선배: 그런거 같았엌ㅋ]

[목요일에 보자] (오후 5:31)


한신명이 얼마 없는 사교성을 최대한 끌어모아 뒷수습에 바쁠 때 고지운과의 대화방에는 이런 메시지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고지운 소장: 도련님?] (오후 5:31)

[아가?]

[한신명?] (오후 5:32)

[고지운 소장: ?]

[?]

[?]

[?]

[?]

[?] (오후 5:33)

[고지운 소장: 신명씨]

[대답] (오후 5:36)

[고지운 소장: 1이 안 없어진다?] (오후 5:57)

[고지운 소장: 안읽씹?] (오후 6:31)

[고지운 소장: 읽씹????] (오후 8:11)



***



고지운 심령 상담소에 새로 의뢰가 들어온 일은 인터넷 오컬트 커뮤니티 소모임의 폐가 체험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오컬트 매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핫스팟으로 그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여러 가지 오싹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었다. 이번 주말 지운과 신명이 소모임 회원들과 함께 폐가에 방문해 이곳이 정말 귀신이 나오는 곳인지 검증하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것이 의뢰받은 내용이었다. 폐가가 위치한 장소가 강원도 깊은 산골이다 보니 이동에 시간이 걸려 주말로 날짜가 잡혔다.

오랜만에 상담소에 방문한 신명은 리클라이너 의자에 길게 누운 듯이 앉아 지운이 타준 애플민트 티를 마시며 새로 들어온 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언제 앉아도 정말 푹신하고 편한 의자라서 마음까지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거기 정말 귀신 나오는 곳이야?"

"나온다고 해줘야 흥이 안 깨지겠지?"


지운은 책장 선반 위에 놓인 장식품들에 쌓인 먼지를 타조 깃털 먼지떨이로 꼼꼼히 털어내는 섬세한 손길과는 사뭇 다른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했다. 신명은 무어라 토를 다는 대신 조용히 애플민트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지운은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상담한 이상 귀신의 소행이 된다는 기조를 유지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사기꾼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명이 보기에도 어느 정도의 힘과 실력을 갖춘 지운이 왜 저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타조 깃털 먼지떨이로 장식품 하나하나 조심히 먼지를 털던 지운이 갑자기 몸을 뒤로 확 돌렸다.


"아! 너 그래서 주말에 시간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사람이 보낸 톡을 읽씹을 하고 말이야!"


신명은 지운이 보낸 정신 없는 메시지 때문에 대화창이 헷갈려 가고 싶지도 않은 술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 때문에 짜증이 나 지운이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잊어버렸다. 오늘이 바로 그 원치 않는 술자리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학교를 마친 후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뜨는 바람에 애매하게 비는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하다가 마침 잘 됐다 싶어 상담소에 온 거였다. 신명은 지운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두 손으로 머그잔을 꼭 쥐었다.


"...... 시간 돼."

"을신명 씨 제가 질문을 하면 바로바로 대답을 하세요."

"지가 이상하게 톡을 보내놓고..."

"아가?"

"......"


지운의 매서운 눈빛에 신명은 애플민트 티만 홀짝였다. 지운은 청소를 중단하고 자신의 커다란 원목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더니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토요일에 오전 9시까지 동서울터미널로 와."

"동서울터미널? 왜?"


무슨 소리인지 조금도 이해가 안 가 신명은 리클라이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머그잔의 애플민트 티가 조금 쏟아져 입고 있던 맨투맨 티셔츠를 조금 적셨다. 지운이 책상 위에 놓인 갑 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네며 말했다.


"강원도 정선까지 가려면 고속버스 타야지. 거기서도 시외버스 타고 또 한참 들어가야 돼. 아, 버스표는 내가 사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운의 너무나도 차분한 설명에 오히려 신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차 없어?"

"없는데. 차가 있었으면 저번에 구로에 있는 의뢰인 집에 갔을 때 지하철을 타고 안 갔겠지? 너희 집에 갔을 때도 택시 타고 안 갔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강아지 두부 일 때는 너무 자연스럽게 지하철을 타고 가길래 고지운이 차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고, 며칠 전 자신의 집에 지운이 택시를 타고 왔을 때도 어떻게든 제집에 붙들어 둘 생각만 했지 지운이 차가 있는지 없는지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명은 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제힘으로 산 건 아니고 부모님이 어린 아들을 집에서 내쫓은 게 미안해 죄책감을 덜려고 사준 거긴 했지만 대학생에게 차를 사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이 흔치 않다는 건 신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왜 나도 가지고 있는 차를 너는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도 자꾸 '왜?'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지운은 신명보다 여섯 살이나 많고, 특이하지만 직업도 있고, 상담소라는 이름의 자기 가게도 있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구심에 결국 신명은 선을 넘는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아니, 왜 차가 없어?"

"부잣집 도련님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하네."


지운이 안타깝다는 듯이 신명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지운은 이 상담소 월세가 얼마인 줄은 아느냐, 손님들 사주 봐주고, 타로 봐주고, 의뢰 들어온 사건 해결해주고 받는 돈으로 월세 내고, 세금 내고, 건보료 내고, 네 알바비 주면 남는 것도 없다. 서울처럼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는 도시에서 잘 갖춰진 인프라를 이용하지 않고 차를 굴리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말했다.


"그러면 좀 더 제대로 된 큰일을 맡아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오랜 기간 함께 일한 건 아니었지만 그간 신명이 지켜본 바로는 지운은 보통 젊은 사람들에게 사주나 점을 봐주거나 가볍고 간단한 일을 맡아 해결해 주고 사례를 받는 것이 주된 수입원 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일도 툭 까놓고 말해 공포 체험 동아리 MT에 함께 하는 인솔자 선생님 역할에 불과했다. 신명은 어려서부터 귀신을 보는 체질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뛰어난 영능력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대부분은 아예 영능력이 없거나 아주 작은 능력을 크게 포장해 사람들을 혹하게 만들어 큰돈을 벌려는 사기꾼들이었다. 잘은 몰라도 지운 정도의 능력이면 이런 작은 일들 말고 제대로 된 일을 의뢰받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였다. 지운이 한 쪽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한층 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아가가 정말 뭘 모르는 소릴 하네. 이 바닥도 레드 오션이라고. 그런 큰돈 쓰는 일 의뢰하는 노친네들은 나처럼 얼굴 반드르르한 젊은 애는 안 믿어요. 입소문 난 경력 오래된 사람한테 가지."


노인네들이 시장을 꽉 선점하고 있는 데다가 요새는 백세 시대라 은퇴하는 사람도 없고 시장의 특성상 오히려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한다. 바늘 하나 꼽을 틈도 찾기가 힘들어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중이라고 했다. 지운이 어딘지 모를 곳을 바라보며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난 이렇게 소소한 일 맡는 게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 그러면 버스 예매한다?"


고속버스 예매 버튼을 클릭하려는 지운을 신명이 온몸을 날려 막아섰다.


"아아아아! 잠깐!! 내 차! 내 차! 내 차 타고 가."

"어? 정말?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안 그래도 되는데."


집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정선 버스 터미널까지 가고 거기서 또 시외버스를 타고 산속에 있는 폐가까지 이동해서 일을 하고 그 역순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신명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미안할 거 없어. 제발 내 차 타고 가."

"그래? 그러면 토요일에 잘 부탁해, 한 기사."


지운이 생긋 웃으면 노트북 커버를 탁 덮었다. 정말 고지운은 여러모로 열받게 하는 인간이었다.



***



신명은 지운을 만나면 좋은 건지 피곤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 안 보이면 궁금하고 만나고 싶기도 한데 막상 지운을 만나서 좋은가 하면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어쨌건 오늘의 고지운은 정말로 열 받고 피곤했다. 그러나 아직 진짜 피곤한 이벤트가 남아 있었다. 장진우가 부른 술자리에 가야 했다. 학교에 친구가 없는 신명은 당연히 이런 술자리에도 몇 번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막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학과 행사에 몇 번 불려 나간 것과 제대 후 복학한 이번 학기에는 전세림이 억지로 끌고 나간 개강 파티에 잠깐 앉아 있다 온 것이 전부였다. 진우가 친한 사람들만 모이는 간소한 자리라고 부담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인원수가 많은 단체 행사는 사람들 속에 적당히 묻혀 있으면 되는데 소수로 모이는 모임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신명은 묻는 말에 대충 대답이나 하다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학교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다양한 한식 안주들을 파는 곳으로 인기가 많아 평일 저녁인데도 가게 안은 빈 자리가 없었다. 신명은 입구에 서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으나 손님들 중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명이 일찍 왔네."


진우였다. 막 가게에 도착한 듯 진우가 입은 트렌치코트 위에는 늦가을의 쌀쌀한 바깥 공기가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저기 다들 와 있다. 세림이는 10분 정도 늦는대."


가게 안쪽에서 서너명의 사람들이 진우를 향해 손을 높이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크게 관심이 없어서 누가 오는지 묻지도 않았고 누가 온다는 얘기를 듣지도 못 했는데 같은 과 동기인 세림이 오는 모양이었다. 신명과 진우가 자리에 앉자 먼저 도착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격하게 신명을 환영했다.


"신명이다, 신명이."

"신명이랑 술 마셔보고 싶었어."

"신명아, 안녕. 이런 데서 봐서 반가워."

"아... 네... 안녕하세요."


가게 입구에 서서 봤을 때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 했던 얼굴들이 가까이서 보니 낯이 익었다. 이름은 몰랐지만 같은 과 사람들이라 전공 수업에서 자주 마주치던 얼굴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다들 제 이름을 알고 있는데 자기 혼자 당신들 이름이 뭐냐고 묻기도 뭐해 신명은 조용히 앉아 있기로 했다.


"신명아, 술은 뭐 마실래? 아, 술... 마시지?"


신명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진우가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전 소주요."


맥주는 배만 불러서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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