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말을 해주긴 해야겠는데 성우의 머리는 일시 정지된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이렇게 된다고 하였던가. 성우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단어를 고를 여력도, 눈앞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필 기력도 없었다. 그저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성우의 얼굴 앞으로 민현이 휘휘 손을 흔들어 보았다. 성우의 눈동자조차 미동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민현은 부러 뜨거운 숨을 성우의 귓속으로 훅 불어넣었다. 낯선 자극 탓에 성우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민현을 밀쳐냈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민현은 순순히 멀어졌다. 그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 내가 말한 것 중 어떤 것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겠지. 너한테도 몹쓸 짓일 테고.”

“.......”

“걱정하지 마. 아무리 내가 쓰레기일지언정, 네가 싫어하는 짓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아.”


쓰레기라니. 성우가 힐긋 민현을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성우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민현은 쓰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성우는 눈앞의 민현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성우가 알던 민현은 항상 자신감 있는 태도로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자학하며 웃고 있었다. 성우는 그런 민현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성우는 민현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우선 방금 밀친 거 미안해. 내가 너무 깜짝 놀라서 그랬어. 그리고... 너 스스로 쓰레기라고 하는 건.... 너무 갔어. 민현아, 그건 아닌 거 같아.”


오랜 고민 탓에 성우의 말은 띄엄띄엄 느리게 이어졌다. 민현은 재촉하지 않고 듣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넌 나를 좋...아 하는 거잖아? 그.... 좋아하는 마음이 죄도 아닌데, 어떻게 너를  쓰레기라고 폄하할 수 있어....”

“성우야, 억지로 내 편들어줄 필요는 없어. 불쌍해할 필요는 더더욱.”

“아니, 이건 동정도 연민도 혐오도 아냐!”


차갑게 쏘아붙인 민현의 말에 성우가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 나는 기쁘단 말야! 네가 날 좋아한다니... 기쁜데... 그런데 네가 막 쓰레기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굳이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아까 대답하라고 몰아붙인 거 미안해. 내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어. 이상한 말도 함부로 쏟아내서 미안.”

“아, 아니, 그러니까 미안해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미안. 널 좋아하는 것도.”

“아니이....”

“.......”

“날 좋아하는 걸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응.”


성우는 답답함에 밤고구마 두 개를 물 없이 먹은 사람처럼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한편 민현은 조금 전에 보인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금 원래의 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넓은 어깨가 밑으로 축 처져서 잔뜩 풀죽은 모습에 성우의 마음이 약해졌다. 민현은 성우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굳이 둘 중에 어떤 고백이 더 좋으냐면 잘못을 고백하는 것보다 뜨거운 열망을 고백하는 쪽이 백 배 더 좋은데.... 


잠깐. 그럼 나도 민현을 좋아하는 건가? 성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과 행동을 멈췄다. 그의 모든 에너지가 마음으로 집중되면서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바쁘게 오갔다. 자연히 줄어든 성우의 움직임에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치열하게 각자의 생각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먼저 민현이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시간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가 성우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늦었다. 이제 집에 가라.”

“잠깐만!”


성우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조막만한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민현은 성우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성우가 말해줄 것이라 기대되었으므로.


“내가.... 만약에 나도 네가 좋다고 하면, 그럼 우리 앞으로 사귀는 거야?”

“.... 옹성우, 장난이라면 그만해.”

“아니야! 나 이런 걸로 장난 안 치는 거 알잖아. 그리고 아까 말했잖아. 난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기뻤다고.”


이번엔 민현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여졌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성우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해보려 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지자 성우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네가 막 부끄러운 말을 해서 그런데! 나... 나도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우정이 아닌 사랑으로?”

“으응.”


성우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흡사 군주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듯 정직한 모습이었다. 이런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보노보노가 땀을 흘리는 모습처럼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성우의 모습이 못내 귀여웠다. 민현은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성우에게 장난치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민현이 재차 성우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그의 입술은 시원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점점 겹쳐지며 아까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다. 민현이 또 뭐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해진 성우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민현의 눈치를 살폈다. 민현은 성우의 흐트러진 앞머리 한 가닥을 손으로 정리해주며 물었다.


“어떻게 확신해? 그럼 나랑 키스할 수 있겠어? 섹스도?”

“아......... 아.............”

“시험 삼아 지금 해 볼까?”


민현의 말투는 흡사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평탄하고 고저가 없었지만, 그 내용이 전하는 파급력은 상당했다. 성우는 가오나시같이 입만 벌리고 아,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그러다 이내 입술을 꼭 앙다물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민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 무언가를 준비하는 자세였다. 비록 양주먹을 꽉 쥔 것은 오류 같지만. 


민현이 픽 웃고는 검지 손가락으로 성우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꾹꾹 눌렀다. 성우의 두 눈이 반짝 떠졌다. 물음표 백 개가 그득한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민현이 말했다. 


“아쉽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첫 키스를 여기서 낭비할 수는 없지 않겠어?”

“아... 안 하는 거야?”


성우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이거 눈 감고 들었으면 성우가 엄청 아쉬워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 같다. 민현은 못내 아쉬웠지만,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기실, 이건 그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하는 말이었다. 


“당연하지. 우린 아직 고등학생이고 수능까지 일 년도 안 남았어. 할 게 많아. 전부 끝내고 성인이 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 그럼 나한테 왜 시험해볼까 그랬어?!”

“도망가나 안 가나 보려고.”

“하!”


줄곧 발갛게 물들어있던 성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갔다. 할 수만 있다면 황민현을 한 대만 세게 때려보고 싶다! 기껏 고르고 골라 건넨 말을 의심한데다가 장난까지 치다니. 한순간이나마 민현의 고백을 받아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성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민현이 뒤에서 성우를 품에 안았다. 


“놀려서 미안.”

“됐어. 끝났어.”

“끝난 거야?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집에 갈 거야.”

“가지마.... 성우야.”


민현이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는 애교부리는 고양이처럼 이마를 비비며 온몸으로 한 번만 봐달라고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 고마워. 좋아해.”

“.......”

“너도 날 좋아한다고 해줘서 고마워. 키스 못 해서 아쉽지만, 우리가 어른 되면 하자.”

“나, 나는 안 아쉽거든?”

“내가 아쉬워.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책임도 질 수 없어. 적어도 너한테 뭘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때 하고 싶어.”


속 깊은 민현의 진심이 나직하게 이어졌다. 성우의 등에는 쿵, 쿵 뛰는 민현의 심장 맥박이 느껴졌다. 이래서야 미워할 수가 없잖아.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말은 불퉁하게 튀어 나갔다. 


“알겠으니까 이거 놔.”

“응. 이제 집에 가자.”


성우가 후다닥 민현의 팔을 떼어내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잊고 있던 현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엌과 식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던 할머니가 성우를 보고 인심 좋게 말을 건넸다. ‘마침 밥이 다 되었으니 밥 먹고 가렴!’ 하지만 성우는 차마, 할머니를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을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사실 할머니의 손자와 제가... 방금.... 방 안에서... 


“죄송합니다!”

“응?”


성우는 드물게 허둥지둥거리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는 운동화 왼쪽과 오른쪽을 잘못 신은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런 성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할머니가 민현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내려쳤다. 


“또 성우한테 장난쳤지?” 

“조금요.”

“착한 애를 자꾸 놀리면 되겠니? 그러다 미움받아.”

“음.... 좋아서 저러는 거예요.”


민현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그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레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자 할머니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손자가 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 것이 대견해서 칭찬이나 한두 마디 해 주었다. 


민현은 그릇을 싹 비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자리에 앉았다. 전보다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 게 느껴졌다. 한동안 그를 괴롭히던 답 없고 음울한 고민거리는 눈 녹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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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의 힘이 굉장하네요. 무슨 러트 온 것처럼 글썼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 편은 대화가 많았는데, 사실 현생에서 말을 거의 안 하고 텍스트만 보고 살다보니 대화 부분이 너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훗날... 언젠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ㅠㅠ)/ 덕분에 외롭지 않은 덕질이에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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