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소녀의 곁을 맴돌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질녘이면 성벽을 비잉 돌아 소녀가 있는 정원까지 들뜬 발걸음으로 향했다. 몸은 늘 만신창이였으나 소녀를 보러 가는 발걸음이 왜 그리 가벼운지 소년은 늘 의문이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소년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면 그 아이가 정원으로 나오지 않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발걸음은 익숙한 길을 향해 거침없이 내딛었다.





"젠장.."





성벽 근처에 가기도 전에 한 두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정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굵어져 소년의 검은 머리칼을 흠뻑 적셨다. 뛰다시피 도착한 정원 울타리 너머에서 소년은 숨을 멈췄다.


소년의 눈에 검은색 사냥개 한마리를 끌어안고 작은 처마 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녀가 들어왔다.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치솟았다. 





'멍청하게.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거야'





소년은 숲으로 뛰어들어가 최대한 큰 잎을 가진 활엽수들을 모아 다급한 손놀림으로 엮었다. 서툰 솜씨였지만 그럭저럭 굵은 빗줄기를 피할만큼의 우비가 만들어졌다. 허둥지둥 우비를 들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때 소녀가 있던 자리는 이미 휑하니 비어있었다. 소년은 입술을 비틀었다.



비가 오면 집으로 들어가면 되는거잖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보같은 짓이었다. 저 커다란 성에 곱게자란 공주님과 개 한마리 따뜻하게 있을 곳 하나 없을까봐.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이 만든 허술하기 짝이 없는 풀잎쪼가리를 내려다봤다.





멍!





"카,카일..."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녀의 곁에 있던 사냥개가 소년의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사냥개를 쫓아온듯한 소녀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소년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가,가야돼.. 여,여기까지 나오면...호,혼날꺼야.."





기어들어가는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 역시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소녀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구름같이 포실포실하던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아무렇게나 작은 얼굴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는 스스로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사냥개의 몸을 잡아 끌었지만 카일이라고 불리는 사냥개는 꼼짝도 하지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년의 올려다봤다.





"왜 집에 들어가지 않은거야"




소년의 날선 목소리에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그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비가 오면 집에 들어가야지, 왜 멍청하게 비를 맞고 서있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자신의 거친 말투에 소년은 스스로도 놀랐다. 자기가 걱정할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자신의 말에 소녀는 들러붙어있는 머리카락 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입도 다물지 못한채 쏟아지는 비를 맞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소년은 소녀를 바라봤고, 소녀는 말없이 사냥개를 내려다 봤다. 그때 카일이 소년의 손에 들려진 우비를 낚아채 소녀에게 가져갔다.





"아, 그거..."


"....어...?"



소녀가 우비 모양의 나뭇잎더미를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소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 오잖아. 빗줄기가 굵어서 맞으면 꽤 아프니까. 쓰고 있으면.."



본인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를정도로 횡설수설 하던 소년을 바라보던 소녀가 작은 미소를 띄우며 우비를 사냥개의 위로 덮어줬다. 



"이 바보가..."



소년이 낮게 신음하며 소녀의 손에 있던 우비를 낚아채듯 뺏어 소녀와 사냥개의 위에 덮어씌웠다. 갑작스러운 소년의 손놀림에 몸을 움츠리던 소녀는 한참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더이상 자신의 얼굴에 물이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신기한듯 소년을 바라봤다.




"고,고,고마...워..."




소녀의 말에 소년은 무언가에 찔린듯한 통증을 받았다. 나뭇잎우비는 겨우 개의 등과 소녀의 얼굴을 가릴만큼의 크기 밖에 안됐고, 여전히 자신은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왜 안들어가냐니깐. 여기서 이딴거 쓰고 있지말고, 이제 들어가"




또 다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퉁명스러운 말투가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소년은 입을 주먹으로 올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같이 작은 애는 이런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죽어"




죽어, 라는 말 끝에 또 한번 알 수없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소년은 계속되는 알 수 없는 통증에도 소녀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카,카,카일은...집에..모,못들어가...그래,그래서..."


"그래서?"


"카,카일은...아,아..아직 어려...호,호..혼자 비,비 맞으면...무,무...무섭잖아..."





빗소리에 섞여 간간히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소년은 본능적으로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불이 데이기라도 한듯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일어나. 거기서 옷까지 더 젖으면 진짜 감기걸릴꺼야"



소년은 소녀에게 손을 뻗다가 순간적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대장간에서 일하고 난 후 자신의 손이 깨끗할리 없었다. 손에 붙은 기름때는 비에 섞여 더 얼룩덜룩 해졌을뿐이었다.


소녀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년은 맞은편에 보이는 커다란 오크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금방 그칠꺼야. 조금만 더.


소년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소녀의 드레스 허리춤에 늘어진 리본끝을 잡아 끌었다. 사냥개 역시 기다렸다는듯 보폭을 맞춰 소년의 뒤를 따랐고, 엉겁결에 소녀도 소년의 뒤를 따라 커다란 잎을 늘어뜨고 있는 오크나무 밑까지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비는 금방 그칠꺼야. 그럼 니 개도 이제 안무서워 할꺼고. 넌 당장 집에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이상했다. 자꾸 본인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자신은 소녀를 매일같이 봐왔지만 소녀는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소년은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저 멀리서부터 개어오는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고,고..고마...ㅇ..."



소녀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소년은 홀리듯 다시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자신이 담겼다. 잔뜩 헝크러진 머리에 얼굴 군데군데 검은칠을 한 풋내기 얼치기의 한심한 표정이 보였다. 소년은 얼굴을 붉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이거..."




소녀가 소년의 손위에 푸른빛이 도는 작은 유리구슬을 올려놨다. 소년이 멍하니 유리구슬을 쳐다보자 소녀는 또다시 자줏빛으로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고,고...고마워서....내,내가 제..제일 좋아하..하는..."




소녀는 말을 잇지못하고 빗물에 흠뻑 젖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올려진 유리구슬을 움켜쥐었다. 





번쩍-




갑작스레 하늘이 환해지며 소리없는 번개가 순간 주위를 환하게 물들였다. 그 순간, 소년은 충동적으로 소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어..,..어어?"


"고마워, 평생 간직할게"




당황한듯 말을 잇지못하는 소녀의 귓가에 소년이 작게 속삭였다. 소녀는 한손으로 뺨을 감싸쥐고는 멍하니 소년을 올려다봤다.




"이름이 뭐야?"


"매,맥시...맥시..ㅁ.."



"아가씨!!!!!!"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우렁찬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 소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소년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소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수풀 사이에서 나타난 중년여인은 소녀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한숨과 함께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성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소녀는 뒤를 돌아 소년을 보며 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소년이 반사적으로 손을 올리기도 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개인 하늘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엎드려 있던 카일이 몸을 일으켜 우아하게 기지개를 켰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구슬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맥시..."




소년은 줄곧 자신의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비록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날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_Fin




  • Epilogue




"사냥개 한마리 구해줄까?"


"추..충분해요"




리프탄의 말에 맥시는 고개를 저었다. 리프탄의 눈에 고양이를 쓰다듬는 맥시와 어린 시절의 사냥개를 쓰다듬던 작고 여린 소녀가 동시에 스쳤다. 그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맥시"



그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마주봤다.

소년은 어린날의 추억에 묻혀있던 감정에 붙였던 이름을 처음으로 입밖에 꺼냈다.




"사랑해"




* 본 연성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배경 및 소재의 저작권은 '상수리나무아래' 김수지 작가님께 있습니다.

* 본 연성은 2차 창작 요소가 짙으므로 문제가 될시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불펌 또한 절대 금지합니다.


상수리나무아래_연성을 쓰고 있습니다. 죽기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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