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욕실 바닥의 색은 밝은 나무색이다. 색깔을 표현하기에는 부정확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하나의 색을 띌 수 없는 존재였고 특정한 정보의 전달을 이루기 어렵다. 나무는, 여러 개의 색을 갖고 있다.

“눈을 떴네. 속은 괜찮아?”
“…….”

스팍의 고개가 느리게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나 의도 없이 반응을 따르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롭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불안과 모든 게 완전하다는 확신이 동시에 솟아나며 갈피를 잡을 수 없어지지만 신체의 감각은 그와 상관없이 돌아왔다.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선이 가는 목덜미와 부드러운 턱을, 이상할 정도로 촉촉한 질감을 접촉으로 습득하며 스팍은 눈을 깜박였고 몸을 일으킨다.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는 질문밖에 방법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니까, 내가 들어왔더니 바닥에 누워있더라고. 배를 끌어안고서. 아픈 거 같진 않아서 잠버릇인가 싶었지. 그렇지만 토할지도 모르니까…… 이리로 끌고 왔는데, 자는 사람을 앉혀 놓기는 힘들고, 맨바닥이라 옆으로 눕고서 버티기가 힘들었어. 이 바닥은 아무래도 진짜 돌 같고,”
“나를 이리로 데려왔다고?”
“그래. 진짜로 보기보다는 무겁더라.”
“내가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

바닥에 놓인 소년의 얼굴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숱이 많은 노란 머리카락은 습기에 젖은 모양으로 한데 뭉쳐 이리저리 갈라져있다. 끝이 아래를 향한 짙은 눈썹은 밝은 색의 체모와 어두운색의 체모가 섞여 천천히 살펴보게 된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푸른 눈은 짙은 색의 속눈썹과 함께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그대로 자리를 차지한다. 푸른색이라고 단번에 인식되지만 바라볼수록 그보다 많은 색의 눈동자다. 어두운 동공을 둘러싼 홍채는 시시각각 변하는 무언가와 닮아 흥미를 일깨우고 짙어지는 가장자리는 흰자위와 대조되며 더욱 확실한 선으로 변해 그 안의 바다를 일렁이게 한다. 바다? 그래, 물속을 바라보는 경험과 비슷한 걸까.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다가 아니다. 스팍이 떠올리는 과거는 수족관의 유리로 나눠진 장소였고 그때의 인상들이다.

“난 바다에 가본 적이 없어.”
“나도 한번뿐이야. 거기다 비가 오는 날이라 볼게 없었지.”
“하지만 네 눈은 바다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군. 혼합적인데도 하나로 통용되는 인상이 유사해서일까?”
“……그거, 칭찬이지?”
“흥미로운 유전자 변형이야.”
“여전히 좋고 싫고를 알기 어려운 대답인데. 아무튼 원하는 만큼 보라고.”

그래서 스팍은 소년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봤다. 계속해서. 기억속의 수족관은 드물게 전개과정이 불확실한 경험 중 하나지만 빛을 받아 흔들리는 물의 덩어리는 누적이 적어 독자적으로 남아있는 몇 개의 장면 중 하나였고 연관선상의 상세한 지식이 없어 최초의 반응이 보관되어있다. 그것은 눈앞의 상대도 마찬가지다. 깜박거리는 눈꺼풀은 인간의 것이고 푸른 눈동자도 인간의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관찰한 적 없었고, 일반적이지 못한 반응을 당연하다 정의하지만, 그 순간 이름을 기억해내고 상황을 파악한다. 체온이 높아진 자신의 육체와 축소된 작용으로 구조가 단순해진 사고에는 이유가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순식간에 되돌아온 현실인식은 욕실의 바닥에서 커크의 위에 주저앉아있는 자신의, 그들의 상황을 자각시켰다. 그리고 스팍은 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된 건가?”
“어, 어떤 부분이?”
“왜 교합이 일어나지 않지? 신체반응이 부족한가? 시도가 실패한 건가? 혹시 내가,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겠지?”
“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건 좋은 현상이지만, 섹스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잘못된 번역기 같은데도 맞는 말이라 신선하군.”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데.”
“걱정할 게 없으니까. 눈 뜨면 정신없이 끝났을 줄 알았던 거야?”
“…….”
“신체 반응은 우수하고, 시도는 아직 없었어. 섹스는, 이제 하고 싶을 때 하게 될 거야.”
“왜?”
“원래 그러는 건데. 분명히 온갖 공부를 했을 거 아냐?”
“하지만…….”

그의 육체는, 이제, 원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도? 스팍은 커크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어떻게 질문해야할지를 알 수 없었다. 성교를 생각할 때마다 뒤따르던 불쾌감이나 거부반응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예상했던 광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예상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겪었던 실체다. 그는 눈을 떴고, 흥분한 성기와 무절제한 충동을 느꼈고, 끔찍한 욕망에 휩싸였으며…….

“스팍, 스팍! 생각은 그만두고 날 보라고. 뭘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까지 괴로워지니까, 어?”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는 낯설지 않다. 스팍은 어느새 감았던 눈을 뜨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엉성하게 몸을 일으킨 소년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져 있다. 바닥을 짚어 상체를 지탱하는 팔은 많지 않은 근육을 드러나게 하고 성장기의 시작을 알려준다. 어깨를 붙들다시피 둘러진 다른 팔은 뒷목덜미에 손을 얹지만 힘을 주지 않는다. 태연하게 밀착된 타인의 육체에 스팍의 이성은 의아함을 느낀다. 어째서 불편하지 않을까. 기억이 시간으로 저장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어머니조차 이렇게 가까운 적 없었는데.

“손을 떼면 좋겠어? 생각만 하지 말고 말을 하라고.”
“아니.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아. 기대되는 현상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넌 진짜 말하는 게 멀쩡해서, 잘 모르겠지만.”

스팍도 모르는 게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의 총합은 뒤늦게 이름을 갖는다. 편안함. 스팍은 자신이 맞닿은 피부와 겹쳐진 품에 편안함을 느낀다고 결정 내렸고 아무런 반발 없이 눈을 감았다. 마른 어깨는 흔들리지 않고 그를 받쳐주며, 깊게 들이키고 내쉬는 숨에는 습기로 더워진 체취가 고스란히 스며든다. 얼굴에 닿은 사람의 피부는 부드럽고 촉촉하며, 따뜻하다. 해가 높은 오후의 공기를 연상시키는 냄새에는 어딘가 동물적인 비린내가 섞여있지만 그것 역시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지 않았다. 핏방울처럼 선명하고 신선한 향은 달고 짜다 말하기 어려운 특수성을 가졌고 지속적인 호흡으로 스팍의 육체에 기억된다. 머리로는 판단되지 않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모종의 무언가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신체와 정신을 점령했고 너무나도 안정적인, 경계하기 어렵게 본능적인 환영을 이끌어낸다. 알 수 없는데도 긍정하게 되는 무방비한 상태를 흐릿하게 인식하면서도 스팍은 반대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래서 목소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이끄는 손과 닿아있는 체온을 따라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걷기 위해 움직이는 다리는 남의 것만 같고 등에 닿는 매트 역시 실체가 아닌 허상처럼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지식과 생각은 머무르지 않으며 흘러갔고 그는 육체의 무거움조차 감지하지 못하고서 취해가는 감각에 휘말려 스스로를 방치한다. 통제와 관리와 인식을 잃은 스팍의 육체는 손에 닿는 따뜻함을 끌어안고 닿아오는 피부에 뺨을 문지른다. 무엇을 허락받았는지 알 수 없는데도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는 기묘한 여유. 잠겨있고 싶은 평온.  


10

마냥 부유하고 싶은 마음에 저항하지 않으며 끌려가던 스팍이 눈을 뜨자 또다시 언제인지 모를 때다. 방안에는 약간의 빛이 들어와 사물의 모양을 알려주지만 시간은 알 수 없다. 체내의 시간관념이 사라져있다. 벌칸의 인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동떨어진 순간은 또다시 이상한 자유를 주면서 솟아나는 불안을 잠재우지만 생각은 끊이지 못했다. 이 불안의 근원은 무엇일까. 추구하지 않던 것을 획득해서? 올바른 상실을 따르지 못해서? 자꾸만 이어지는 고리는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동굴을 달려가는 발소리다. 빗소리에 눈을 뜬 아침처럼 자발적이지 않은 기상의 순간에 스팍은 자신을 향한 눈동자를 마주한다. 시야에 보이던 어린 턱과 입술에서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혈색이 도는 얼굴에서 부르튼 입술이 어색한 이유는, 열기가 느껴져서일까.

“열이 높군.”
“뭐?”
“체온이 높아. 해열의 처방이 필요한가?”
“아, 아니. 내 쪽이 원래 더 높잖아. 그래서 더운 거야?”
“…….”  

의식은 천천히 대답을 찾아본다. 모로 누운 육체에서 뒤엉켜있는 팔다리는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지만 무게와 부피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습해진 피부의 마찰은 연쇄되는 감각으로 신경을 주의시키고 반응을 만들어낸다. 그로서는 그 이상의 판단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커크의 질문은 단순했고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아니, 덥지 않다고? 아니면 덥지만 괜찮다고?”
“불편하지 않아. 벌칸은 높은 온도에 익숙해.”
“그러게. 그래서 체온도 높을 줄 알았어.”

작은 목소리는 질문이 아니지만 스팍의 사고는 주체를 떠나 부유하는 중이었고 나오는 말 역시 그랬다.

“더운 것은 그쪽인가? 이런 자세는…… 불균형하고, 신체에 무리를 줄 텐데.”
“아냐 우린 편안하다고. 그렇지?”

눈앞에 있던 얼굴이 사라진다. 시야를 벗어난 고개가 목덜미를 파고들자 사이에 있던 조금의 틈이 빠져나가는 공기처럼 자리를 잃는다. 단단한 뼈를 덧씌운 근육과 매끄러운 피부가 스팍의 몸에 닿고, 겹쳐지고, 모양을 잃으며 박자를 키운다. 인간의 심장박동은 느리고 완만하다. 흐트러짐 없는 두근거림을 따라 점차 감기던 스팍의 눈이 또다시 떠진다. 체온으로 데워져있던 피부표면에 서늘한 공기가 닿으며 감각을 일깨우고, 갑작스럽게 멀어진 얼굴이 시선을 마주치고 물어온다.

“지금 그, 신체의 무리가 어쩌고 한 거, 혹시 다른 얘기였어?”

무엇을 뜻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어 미간이 좁아지지만 곧이어 알게 된다. 묻지 않은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압력이 이동하자 겹쳐진 피부와 피부의 사이에서 모양을 잃지 않는 커크의 성기가 새롭게 닿아온다.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이제야 생각하게 되다니. 하지만 스팍이 생각하지 못한 대상은 그밖에도 많았고, 시작되어 버린 감각의 수집은 막아지지 않았다. 명확한 인식이 불가능한 이유는 반복이 부재된 최초라서 인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모르겠던 불안은 사실상 무엇을 향해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거기에 응원 받듯이 크기를 키워갔다. 움직임이 느려진 스스로는 중력에 짓눌리지 않은 우주의 존재처럼 제어가 어려운 침묵의 덩어리다. 생각은 또다시 부유하고, 갈라진 겹처럼 분리된 신경은 꾸준히 당겨져 팽팽하게 날을 세우지만 원인과 결과를 가늠하지 못한다. 인간의 귀로는 듣기 어려울 벌칸의 심장은 스팍의 귀로도 쫓아가기 힘들게 빨라져있고 그를 휘감은 평온은 사라지지 못했지만 이 한 겹을 들어 올리면 다 보일 것처럼 바로 곁에서, 바로 밑에서 꽁꽁 묶인 불안을 무시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나는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모르겠어.”
“뭘 모르겠는데?”
“답을 안다는 확신이 있지만 떠오르는 게 없군.”
“배가 고프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그래?”
“허기는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유사한 감각이지.”
“그리고…… 벌칸은 울지 않지.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

보이는 얼굴은 큰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다. 하지만 스팍은 조심스레 이동하는 시선의 끝을 알았고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을 느꼈다. 옷자락 위로도 전달되는 뜨거움에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잠시 후 그것이 감탄이었음을 깨닫는다. 순간의 접촉으로 전달된 감각의 총량은 이미 포화상태인 스팍의 의식을 잠시나마 흔들었고 발밑의 땅이 사라진 것처럼 균형을 잃게 했다. 그래서 그는, 커크의 질문을 듣지 못한다. 멀어졌던 얼굴이 다가와 내쉰 숨이 섞이자 소리가 아닌 말이 전달된다. 이제 해야 한다고.

“계속 자는 게 좋은 건줄 알았는데, 지금 얼굴 엄청 하얗다고. 벌칸은 울지 않는다는 걸 깜박했어. 그리고 몸이 차.”
“평균 체온부터가 낮을 텐데.”
“아까는 안 그랬어. 그래서 욕실로 간 건데, 지금은 정말로 차가워. 방금 전부터 그래. 아무래도 더는 미루기 힘들겠어. 이제 와서 얘기할 건 많지 않지만…….”

소리 없이 떨어진 물방울이 비스듬한 표면 위를 흘러내린다. 머릿속의 괴상한 비유를 고스란히 납득하며 스팍은 커크의 얼굴에서 감정을 골라낸다. 약간의 긴장, 정직한 걱정, 숨기는 게 불가능한 욕구의 내용들을, 쉽사리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는 낯설어서가 아니다. 스팍은 마음속 장막의 정체가 회피라는 걸 알아차리고 포기한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그는 피로하지 않다. 무게가 없는 세상에서 손발을 묶어둔 제약은 추락을 지탱해준 생명줄처럼 이중의 목적을 수행하고 그것의 주체는 눈앞의 상대다.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억눌린 것인지 모르겠는 신체능력을 되살리며 스팍의 사고가 목표를 향해 힘겹게 다가서고 그는 천천히, 당연한 사실을 추궁한다.

“뭘 했지?”
“…….”
“커크, 알려줘야 해. 난 지금 평온하지만 완전치 않아. 자아가 반대하는 혼돈을 즐기고 있는 건 건강한 정신상태가 아니야.”
“아무것도 안했어! 그건 그냥 호르몬 작용이라고.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오고 가는 게 있으니까.”
“근접거리를 유지하는 게 그래서인가?”
“그래. 넌 제대로 된 경험이 적고, 거기다 인간이 아니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원래 이런 편이고, 보통은 처음 만났을 때 반응이 일어나는데,”
“어떤 종류의 반응이지?”
“좋은 반응이지. 신뢰가 생기는 거야.”
“……이것이?”
“다른 것도 생기겠지만 일단은 그게 목표일 걸.”

논리적인 조건이었다. 굳이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가 아닐지라도, 내밀한 육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반사적인 신경반응일지, 아니면 본능적인 추구일지? 하지만 이야기에 설득되면서도 스팍의 정신은 불규칙한 박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정신일지 아니면 감각일지도 구분이 어려워진다. 불안은 초조하게 몸을 불리고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적어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서는, 처음 느끼는 것만 같다. 왜지?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나지?

“지금 화났지? 눈이 너무 커져서 떨어질 거 같다.”
“안구는 원래 크기보다 커질 수 없어.”
“그러면 크게 떴다고 하자.”
“…….”

마음속의 질문을 들은 것처럼 속삭이는 얼굴은 태연하고 그래서 스팍은 더욱 화가 난다. 왜지? 어느새 주먹을 쥔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놓으며 호흡을 골라보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웅크리는 고갯짓에 앞머리가 부딪혀 흩어진다. 살과 뼈로 닿아있는, 호흡이 전해지는 타인의 육체는 화의 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만 같아 어지럽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 한 번의 호흡부터 힘겨워진다. 괴로움을 해결하고 싶은 애원과 견디고 싶은 고집이 충돌하며 뒤엉킨다. 왜냐면, 알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는 거부하지 못하고, 헤집고 들어온 손에 자리를 내준다.


11

스팍의 옷을 벗기는 커크의 움직임엔 서두름이 없다. 단순히 수월해서일지도 모른다. 스팍도 알고 있었다. 충돌하지 않고 맞이하는 자신의 육체는 사실상 그런지 오래였다. 들끓는 감정은 분노라는 이름으로 소용돌이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그는 이미 커크의 체온에 취해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도 익숙해져있다. 몇 개의 단추가 풀린 긴소매의 가운을 벗자 그대로 온몸이 드러난다. 맨살에 닿는 침대 시트는 서걱거리는 종이처럼 거추장스럽지만 추위를 느낀 어깨 너머로 등줄기가 떨려온다. 그의 신체는 추위와 더위를, 그리고 자극과 흥분을 느끼지만 의식은 그렇지 않다. 어떤 기분인지조차 모르겠군. 저절로 솟아나는 자괴감과 함께 무책임한 방관이 쫓아왔고 그것조차 반가워해야할지 비난해야할지 구분하기 싫어진다. 모든 게 야만적인 생리 탓이라고,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회의 탓이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스팍은 설득되지 않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래서 그는 울지 못하는 운명이 처음으로 원망스럽고, 밑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발을 들이지만, 잠을 깨듯이 끌려나온다. 감겨있던 눈꺼풀에 지그시 눌러진 입술이 숨을 불어넣듯이 머무르다 떨어졌다. 순식간에 악몽에서 빠져나온 스팍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고 몇 번이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눈동자와 만난다. 손목을 붙들고 놓지 않는 소년의 손등이 도드라진 가슴뼈에 닿아 있다.  

“스팍, 하나는 지금 정해야 해. 이대로 괜찮을 거 같아? 알고 있겠지만 불편한 자세로…… 좀 오래 있을지도 몰라.”
“네 의견은 어떻지?”
“난 뭐든 상관없어.”
“경험자는 내가 아니야.”
“하지만 너도 최소한 한 번은 했으니까, 편한 쪽으로 잘 생각하자고.”
“그렇지 않아.”
“뭐가?”
“한 번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난번에, 사고가 있었다며.”
“그래. 유일한 결과였지.”

망각이 불가능해 묻어둔 잔상이 스팍의 눈앞에 떠오른다. 침대 매트에 가려진 시야는 답답하게 한 면이 잘려있다. 등을 누르던 큰 손을, 그 선명한 감촉을 되살려낸 몸이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것에 그는 입술을 깨물고 의식을 집중해 감각을 지운다. 잊지 못하더라도 무시할 수는 있었고 지난 2년간 해온 외면은 오래된 습관답게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스팍은 시간과 분초를 따져 얼마나 오래된 과거인지를 되새길 수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고 그래서 닫힌 문 너머로 모든 걸 밀어낸다. 초점을 잃었던 눈에 힘을 주며 시선을 되돌린 그는 결심한 자의 얼굴이고 창백해진 뺨으로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지난 경험과 비교해도 나로서는 선택할 만큼의 지식이 없어. 그런 맥락에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
“뭐 때문에?”
“혼돈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 너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 약속을 지켜줬군.”
“…….”
“그러니까 커크, 네 결정을 따르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 위로 땀으로 무거워진 노란 머리카락이 가라앉는다. 시야를 가리지 않아도 거슬리는지 움직인 커크의 왼손이 머리카락을 넘기지만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멈춰 머뭇거린다. 구부러진 손목 아래에서 밑을 향한 소년의 눈동자는 생동감 넘치는 색으로 기분을 드러내고 스팍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 달라진 감정을 알아차린다. 원래의 흐름은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물위에 떨어진 잎사귀처럼 하나 둘 얹어진 게 있다. 조금의 당황과, 다급하게 치워낸 분노와, 약간의…… 기대? 두려움? 아, 획득의 논리가 불확실해 계산도 되지 않는군. 그러나 이것은 무지가 아니었다. 최초는 손쉽게 판단될 수 없는 게 당연했고 지금의 그는 평소의 사고체계를 갖지 못했다. 스팍의 입이 가볍게 벌어지고 긴 숨을 흘린다. 부재를 용납하는 긍정을 통해 조금의 논리를 얻어내자 평온이 돌아왔다. 또는, 다른 이의 확신에 안심을 얻는다.

그리고 커크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제안한다.

“나중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 첫째로, 커크라고 부르지 마. 진심인데 분위기를 깬다고.”
“……짐?”
“정답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던 새파란 눈동자가 다시 돌아와서, 말을 이으며, 미세한 선의 변화로 새로운 작용을 일으킨다.

“키스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식으로, 입을 맞추는 건데…….”

확연하게 달라지지 못한 얼굴은 분명히 웃고 있다. 끝이 흐려지는 문장은 부탁하는 자의 그것이다. 그래서 스팍은 눈을 깜박이고, 그 입술을 바라보고, 소리를 내서 대답한다.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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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은 최소 상편보다 길듯한.. ㅠ끊어서 올리기 싫었는데 요새 넘 글 안써지고 이제 이삼일은 컴을 못해서;; ...흑흑 

이 글은 3~4개의 단편 연작으로 예정되어있습니다

14/17세

17/20세 <- 하이스쿨 커크 배경 좀 설명되고 타ㄹ서스 사건 요소 언급

20/23세 <- 아카데미 : 여기서 설정에서 나오는 클리셰를 하고 싶은  

이후 : ?? 나이 아직 미정인데 함선에 탄 시점


pwp써야지 하다가 이렇게 대충 엔딩까지 생각난 이야기인데요 굳이 말하자면 변화를 나타내는게 목적입니다 시작이 이렇게 늘어지는 이유는 아주 없지는 않은데 아무튼 다 쓰고나서 편집 좀 하게 되기를...  나중엔 재밌을거에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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