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Angela


보고 싶었어요, 하고 앙겔라는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저와 마주보고 누운 그녀, 디바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일까. 마지막으로 디바와 만난 것이 벌써 1년도 전의 일이었다. 한때는 매일같이 만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런 앙겔라의 마음을 느낀 듯 디바가 손을 뻗어 앙겔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달래는 듯한 손길에 앙겔라의 입가에도 웃음이 새겨졌다.

디바를 만나서 기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그저 섭섭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었다.

*

18살이 된 어느 날, 앙겔라는 부모님의 이혼 소식을 통보받았다. 태어나 줄곧 자신을 둘러싸왔던 세계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충격과 슬픔에 앙겔라는 밤새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처음에는 꿈속에서도 흐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 따스한 손길에 울음이 잦아들었다. 정신차려보니 앙겔라는 낯선, 그러나 마음이 절로 누그러지는 느낌을 주는 여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여자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자, 긴 머리의 여자가 살풋 웃으며 앙겔라의 눈가를 문질렀다. 마주치는 눈동자가 다정했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잘게 몸이 떨렸고, 그러자 여자가 다시 앙겔라를 품에 안고 심장박동에 맞춰 천천히 다독여줬다. 괜찮아요.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앙겔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긋나긋한 어조에 응어리졌던 마음이 사르르 풀려가는 것을 느끼며 앙겔라는 여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 잘 될 거예요. 냉철한 이성은 그 와중에도 그 말이 단순한 위로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보았지만, 앙겔라의 마음은 따스하게 덥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동안 앙겔라를 안아주며 간간이 웃어주었고, 앙겔라는 그 따스한 품속에서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슬렀다. 어릴 적 안겨들었던 부모님의 품보다도 더 안락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살풋 웃음 지었을 때, 여자가 따라 웃더니 앙겔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한 듯 저를 대하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앙겔라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고, 그리고 몰려드는 잠기운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제 방 침대 위에 홀로 누워있는 상태였다. 꿈이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함이 밀려들었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안정된 느낌이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니, 제가 간절하게 위로를 바라니 그런 꿈을 꾸었나보다, 처음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쨌든 그 꿈을 꾼 덕에, 앙겔라는 이튿날 부모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혼하더라도 부모님은 여전히 앙겔라의 부모였고, 그들은 그 점을 확실히 했다. 앙겔라는 슬펐으나 부모님의 이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날 또다시 울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전날 꾼 꿈에서와 똑같이, 앙겔라는 여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흐느끼는 앙겔라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여자가 등을 쓸어내렸다. 앙겔라의 이마며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해서, 앙겔라는 점차 눈물이 멎어들었다. 여자는 그런 앙겔라에게 웃어주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채워지는 다정한 웃음이었다. 앙겔라는 여자의 웃음에서 위안을 느꼈다.

꿈속에서는 모든 감각이 생생했지만, 앙겔라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그저 의식만이 또렷했다. 그래서 여자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여자는 갸름한 미인형에 갈색 눈동자와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마주보고 있으면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앙겔라는 이 모든 것이 제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라 여겼다. 그래도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은 앙겔라에게 있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여자는 앙겔라에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꿈에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 앙겔라는 꿈속의 여자에게 ‘디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디바는 언제나 앙겔라에게 다정한 말과 온기를 건넸다. 앙겔라는 힘든 시간들을 디바의 위로를 받으며 견뎌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꿈속의 디바에게 빠져들었다. 허상에 지나지 않는 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꿈속의 디바는 정말이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디바에 의지하며 1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서른일곱, 세계적인 의학박사가 된 앙겔라는 예전처럼 힘들거나 괴로움에 흐느끼며 잠드는 일이 없다시피 했고, 그랬기 때문에 디바를 만난 것이 참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미소 지으면서 앙겔라는 생각했다. 딱히 슬프거나 괴로운 일도 없는데 디바가 꿈에 나오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의아한 것도 잠시, 앙겔라는 그저 디바의 품을 즐기기로 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위안을 주는 디바가 너무나도 좋았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더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앙겔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디바가 등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올려 앙겔라의 볼을 살며시 매만졌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곧 이어질 행동에 앙겔라는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러자 디바가 빙그레 웃으며 앙겔라의 입에 살짝 입을 맞췄고, 앙겔라의 입에 걸린 웃음은 짙어졌다. 앙겔라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

“아…….”

의식이 부상하며 입에서 절로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금 더 버텼어야 했는데. 앙겔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디바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잠이 들면, 언제나 현실에서 깨어나곤 했다. 아무리 졸리더라도 의식을 붙잡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디바가 깊은 키스를 해줬을 게 분명했다. 앙겔라는 멍한 머리로 아쉬움을 곱씹다가, 곧 휴대폰 알람을 듣고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첫 일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했다.

한국 모 대학 부속 연구소에서 앙겔라를 초청한 것이 1년 전의 일이었다. 앙겔라를 원하는 연구소는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반년 동안, 앙겔라는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어제 오후 한국에 도착해서 연구소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였기에 제 시간에 맞춰 출근하기만 하면 됐다. 앙겔라는 오피스텔을 가로지르며 출근할 준비를 시작했다. 첫 날이니만큼 조금 일찍 출근할 생각이었다. 어젯밤 준비해 놓은 정장으로 갈아입으며, 앙겔라는 문득 디바에 대한 것이 떠올라 미소하게 됐다. 괴로운 일도 없는데 꿈에 나타나 준 디바 덕분에 오늘 하루는 참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연구소는 대학 캠퍼스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정문을 지나 잘 꾸며진 가로수길을 걸어 연구소로 향하는 앙겔라의 발걸음이, 한순간 멎었다. 앙겔라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저 멀리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앙겔라의 두 눈에 커다랗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디바?”

설마, 그럴 리가. 디바는 어디까지나 앙겔라의 꿈속에서만 나타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봐도, 디바가 맞았다. 앙겔라는 허둥지둥 캠퍼스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캠퍼스에서, 오직 단 한 명만이 선명한 색채를 지닌 채 앙겔라의 눈에 박혀들고 있었다.

“거기,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줘요!”

애타게 불렀으나 디바는 멈춰주지 않았다.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있어 앙겔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전력을 다해 달린 끝에, 앙겔라는 디바의 어깨를 낚아챌 수 있었다.

“잠시 만요!”
“네?”

얼떨떨한 소리를 낸 디바가 몸을 돌려 앙겔라를 돌아보았다. 앙겔라는 절로 새어나오는 탄성을 막을 수 없었다. 살면서 디바와 비슷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만나보았지만, 이토록 디바 그 자체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19년 동안 만나왔던 꿈속의 여인이 그대로 실체화한 것 같았다. 물론 오늘 아침에 본 디바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지만, 그래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역시, 디바였다.

“누구시죠?”

어쩜,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갸름한 얼굴에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동그란 갈색 눈동자. 아시아인 특성상 비슷한 사람들은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앙겔라는 그 특유의 색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요? 저 아세요?”

매끄러운 영어 발음을 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디바의 얼굴을 감상하다, 앙겔라는 디바가 두 번째로 한 말을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디바, 아니 디바를 한없이 닮은 여학생이 저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반가운 마음에 후다닥 달려와 붙잡기는 했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여자가 다짜고짜 저를 붙잡은 것으로 보일 터였다. 짧은 만남에서는 첫인상이 호감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앙겔라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놀랐죠?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실례하고 말았어요.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정말로 오랫동안 당신을 만나는 걸 기다려왔거든요. 사실, 기다려왔다기보다는 꿈꿔왔다는 말이 옳을 거예요.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디바, 아니, 이름이 뭐예요? 전 앙겔라 치글러라고 해요. 만나서 정말, 정말로 반가워요.”
“…….”

앙겔라의 진심이 담긴 말에도 불구하고, 디바를 한없이 닮은 여학생은 답이 없었다.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앙겔라를 쳐다보자, 앙겔라는 속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앙겔라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송하나, 아니 하나 송이요.”
“아, 하나. 하나 양이군요. 이름 참 예뻐요.”
“…감사합니다.”

빈 말이 아니었다. 무려 19년 만에 디바의 이름을 알아낸 것에 대해 앙겔라는 작은 감동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하나라고 이름을 밝힌 디바는 앙겔라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앙겔라는 제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난데없이 19년 동안 당신을 꿈꿔왔다는 말을 하면 제 인상이 더 나빠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달리 무슨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앙겔라의 귀에 높은 알람음이 들려왔다. 디바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기, 할 말 더 없으시면 가볼게요. 수업이 있어서요.”
“잠깐, 잠깐만요.”

앙겔라는 서둘러 백에서 명함을 꺼내, 그 뒷면에다 제 개인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디바의 손에 그것을 반쯤 억지로 쥐어주었다.

“꼭 연락해요, 알았죠? 꼭이에요?”

디바는 대답하지 않고 앙겔라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확답을 듣고 싶었지만, 이 이상 허둥지둥 거리는 건 디바에게 있어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없는 행동 같았다. 그리고 앙겔라 역시 연구소로 출근해야했다. 가볼게요, 하고 인사하자 디바가 바이바이, 하고 말했다. 앙겔라는 활짝, 디바에게 웃어 보인 후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연구소로 향하는 내내 몇 번이나 아쉬움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디바의 모습이 점점이 멀어지는 것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

그 날, 앙겔라는 휴대폰 진동을 최대로 맞춰 놓은 후 조그만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구소를 안내받을 때도, 연구 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받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연구소 직원들과 점심 식사를 할 때도, 그리고 해가 져서 어쩔 수 없이 오피스텔로 돌아와서까지도. 휴대폰은 그 동안 몇 번이나 울렸지만, 모두 일과 관련된 연락이었을 뿐이었다. 디바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앙겔라는 5분에 한 번씩 제 개인 메일함을 들락날락거렸다. 앱 푸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메일함에 뭐라도 온다면 곧바로 알아챌 수 있을 텐데도 그렇게 하게 됐다.

자정이 다 되어 잠이 들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꼭 쥐고 잠들었으나, 이튿날이 되어서도 울리는 일이 없었다. 디바는 앙겔라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앙겔라는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어제 안내 받았던 대학으로 향했다.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문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채로, 앙겔라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앙겔라가 찾는 인물은 그 안에 없었다. 소장이 앙겔라의 시차적응을 배려해서 당분간 오후 출근을 하도록 배려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다릴 수조차 없을 터였다. 10분, 30분, 1시간, 2시간 그리고 3시간이 흐르는 동안 앙겔라는 조금 지치고 말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피곤해하는 게 당연했다.

눈자위를 꾹꾹 누르면서도 앙겔라는 정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현실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디바를 19년 만에 만난 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나눠보고 싶었다. 디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애타는 마음으로 캠퍼스에 들어서는 학생들을 살피던 앙겔라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저 멀리에서 디바가 휴대폰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앙겔라는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디바의 앞에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디바가 고개를 들었다.

“어…….”
“왜 연락 안 했어요?”

말해놓고서 아차 했다. 너무 조급한 나머지 본론부터 꺼내버린 앙겔라는 황망히 손을 내저으며 방금 전에 한 말을 무마했다.

“아니,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어제 하루 종일 전화 기다렸거든요. 전화.”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해보이자 디바가 물끄러미 앙겔라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햇볕을 받아 빛나는 것이 영롱하게 느껴졌다. 앙겔라가 디바의 외모에 반쯤 정신이 팔린 사이, 디바가 입 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예쁜 미소를 입가에 그려냈다.

“전화는 왜 기다렸는데요?”

앙겔라는 순간 말이 막혔다. 초대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대고 ‘19년간 당신을 꿈에서 봐왔다’며 접근하는 게 미친 짓이란 건 정신없는 와중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그 어떠한 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에 디바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씩 웃었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대놓고 하는 질문에 앙겔라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저 19년간 꿈에서 그려오던 디바를 현실에서 만나게 되니 기쁜 나머지 앞뒤 생각 않고 연락처를 쥐어줬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하는 행동이 꼭 헌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열 살도 더 어린 까마득한 애한테 들이대고 있는 행동을 자각하자 부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앙겔라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디바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옷 입는 센스는 좀 구리지만 얼굴은 내 취향이고, 그래요, 그럼. 사귀어요.”
“네에?”
“폰 줘봐요. 명함은 잃어버려서.”

앙겔라는 당황해서 허둥지둥 핸드폰을 내밀었다. 디바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전화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제 주머니에 꽂았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시켜주더니 싱긋 웃었다.

“그럼 난 수업 들어가야해서, 나중에 봐요. 이따 연락할게요!”

그러고선 기습적으로 앙겔라의 볼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앙겔라는 순간 제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멍해지고 말았다. 귀엽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것을, 앙겔라는 한참동안이나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디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앙겔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말랑한 입술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제 볼을 매만졌다. 그저 디바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연락을 주고받고 싶었을 뿐인데 사귀게 되다니……. 심지어는 한참이나 어린, 대학생인 아이와!

디바의 나이가 몇인지는 몰라도, 서른일곱 살인 앙겔라와의 나이차가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될 터였다. 그렇게 어린 아이와 사귀게 된 저를 생각하니 난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앙겔라는 제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얼마든 간에, 상대는 무려 19년 동안 앙겔라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심과 욕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앙겔라는 결국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가볍게 디바와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선은 넘지 않고,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앙겔라는 제 나이는 커녕 이름도 제대로 듣지 않고 떠나간 디바에게서 연락이 올 것을 대비해서 휴대폰을 꼭 쥔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을 통째로 디바를 기다리는 데에 썼으니 이제 슬슬 출근을 해야 했다.
연구소로 향하는 앙겔라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 2. Hana



한창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며 리듬을 타던 하나는 아까부터 눈치를 보다 가까이 들러붙은 남자 때문에 진절머리를 내며 스테이지에서 내려갔다. 오늘은 밤을 같이 할 상대를 찾기보다는 그저 신나게 춤을 추고 싶어서 홍대에 위치한 클럽을 찾은 거였는데, 그냥 L바나 갈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에서 칵테일을 한잔 마시고 룸으로 향했다. 룸에는 같이 온 친구들이 주문한 술병이 즐비했다. 또 몇 백 깨지겠네, 그렇게 별 감흥 없이 생각하며 하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모르는 여자를 데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하나를 불렀다.

“하나야, 너 핸드폰 울리더라.”
“그래?”

하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살폈다. 부재중 통화에 뜬 민나라는 이름에 갸웃했다. 아마도 술에 취해 이름을 잘못 입력한 모양이었다. 미나라면 사흘 전에 홍대에서 만났던 애고, 민아라면 어제 전에 강남에서 만난 애였다. 기분도 망친 김에 불러서 놀까, 고민하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하나는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면 한 가운데에 떡하니 뜬 ‘애인’이라는 단어에는 생각나는 대상이 없었다. 두 달 전에 사귀던 전 애인이 남자와 제게 양다리를 걸친 것을 알고 헤어진 이후, 짧은 만남만을 이어가고 있는 하나에게 있어서는 몹시도 낯선 단어처럼 느껴졌다. 지문인식 잠금이라 저 말고는 누가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바꿀 수도 없을 텐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하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 Hello?

받자마자 들리는 영어 발음에 하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외국인이라니, 반년쯤 전에 클럽에서 만나 2주일쯤 사귀었던 여자를 빼곤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을 떠난 게 아니었던가? 이름이 제인이었나 제니였나… 잘 기억나지 않는 바람에 하나는 얼버무리기로 했다.

“갑자기 웬 일이에요?”
- 아, 그게……. 연락이 없기래요. 저기, 저 앙겔라예요.
“앙겔라?”

얼핏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나에게 전화 너머의 여자가 말했다.

- 일주일 전에 A대학 정문에서 만난…….
“…아, 아아! 기억났어요, 그때 그 예쁜 언니구나. 아, 맞다. 나 애인 있었지?”

번호를 교환하고 애인으로 저장한 뒤, 그 뒤에 있던 수업에서 조별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바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휴대폰이 안 울리기에 그냥 그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1주일이 지나서야 연락이 오다니. 어지간히 답답한 성격이거나 혹은 그쪽도 저처럼 심심풀이로 만나려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겠다 싶었다. 하나는 후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예요? 만날까요?”
- 네? 지금 10시가 다 된 시간인데요?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내일 출근해요?”
- 그렇지는 않지만…….
“나랑 술 마셔요. 마셔줄 수 있죠, ‘언니’?”

한국어로 발음하는 언니, 라는 단어에 상대가 곤혹스러워하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하나는 그런 상대를 재촉해서 지금 A대 바로 옆에 붙은 연구소라는 말을 들었다. 30분 정도 있으면 도착한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자, 친구들이 모두 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려고?”
“어, 그렇게 됐어.”

대충 대답하고서 백을 챙기다, 하나는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눈치 채고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먹은 건 내가 계산하고 갈게. 그럼 됐지?”
“아니이, 그건 고마운데 우린 그냥, 너 술 마시고 운전해도 되나 싶어서 쳐다본 거야.”
“칵테일 두 잔밖에 안 마셨어. 나 간다.”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인 후, 계산을 마치고 클럽을 나섰다. 바깥 공기가 시원했다. 하나는 차를 몰아 대학으로 향하며 1주일 만에 이름을 알게 된 제 애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보다 반 뼘은 큰 키에 반짝이는 금발이 인상적인 미녀였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만나서 알아 가면 되지, 뭐. 오늘 밤에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하나는 입술을 삐쭉였다. 재미있는 사람이면 좋겠단 감상을 안으며 엑셀을 밟았다.

*

“세상에, 술 마시고 운전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의 기대는 애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깨졌다. 금발머리 애인은 차에서 내린 하나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다가서다, 놀란 얼굴을 하더니 그렇게 물었다. 뭔가 잔소리를 들을 것 같단 예감에 하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 가볍게 한 잔만 마신 거예요. 도수 낮은 걸로.”
“그렇지만 한 잔이라도 음주운전은 위험해요.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여태 사고 난 적 없어요. 그보다 일주일 만에 본 애인한테 하는 첫마디가 잔소리예요?”

하나의 말에 금발의 애인이 조금 난감하단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말했다.

“저기… 애인이라기엔 제 이름도 모르잖아요.”
“아, 맞다. 전 송하나예요. 아, 저번에 말했지. 언니 이름은 뭐라고 했죠?”
“제 이름은 앙겔라 치글러라고 해요. …그리고 그 ‘언니’라는 단어 말인데…… 그냥 이름 불러줄 수 없을까요?”
“왜요? 한국어라 어색해요? 그래도 참아요. 난 나보다 나이 많으면 다 언니라고 하거든요. 뜻 알죠?”
“뜻은 알아요. 하지만 제가… 저기, 하나 양. 하나 양이라고 불러도 돼요?”
“네, 그러세요. 그냥 하나라고 해도 되고요.”
“그럼 하나 양. 제가 하나 양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아요. 애초에 초대면에 애인이라는 것도 너무 갑작스럽고, 그러니까 우리 친구 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 내가 싫다는 거야? 완곡하게 말하고 있지만 요지는 애인은 싫다는 것이었다. 얼굴 보고 까인 것은 아멜리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 하나는 오기가 생겨서 말했다.

“언니는 내가 싫어요?”

그 말에 금발머리 미인-앙겔라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냥 우리가 나이차가 있으니까…….”
“언니 몇 살인데요?”
“…서른일곱이에요.”
“네에?”

퉁명스레 물었던 하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는 다시 한 번 앙겔라의 나이를 물었다. Thirty seven, 이란 단어가 이번엔 똑똑히 하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른일곱…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서른일곱에 그 외모를 유지할 수가 있어요? 와, 말도 안 돼!”

하나가 앙겔라에게 바짝 다가서자 앙겔라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고 탱탱한 피부가 마치 20대 중후반처럼 보였다. 이 얼굴로 37살이라니. 사기나 다름없다 생각하는 하나에게서 앙겔라가 반걸음 떨어지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나이차는 나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게…….”

제게서 떨어지는 앙겔라의 태도에 하나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눈썹을 들썩였다. 37이라는 나이엔 놀라고 말았지만, 어쨌든 저는 일주일 전에 눈앞의 여자를 애인삼기로-비록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했고, 그러므로 현재 실시간으로 그녀는 제 애인이었다. 제게서 멀어지려는 애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나는 한걸음 성큼, 앙겔라에게 다가섰다.

“생각보다 많긴 한데, 난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이름 부르는 건 좀 그러니까, 언니라고 할게요. 그래도 되죠, 언니?”
“하나 양, 저는…….”
“아, 됐어요. 아무튼 우리 사귀기로 했잖아요. 싫었으면 1주일 전에 거절했어야죠. 안 그래요?”
“그때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나 싫어요?”

말을 뚝 잘라먹고 묻자 앙겔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열린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못했다. 하나는 싱긋 웃으며 앙겔라의 손을 잡아 차 보조석으로 이끌며 말했다.

“싫은 거 아니잖아요. 그냥 사귀어요,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게요. 괜찮죠?”
“저기, 아무래도 제가…….”

하나는 앙겔라를 보조석에 앉히며 기습적으로 볼과 입술 사이 그 어딘가에 입을 맞췄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앙겔라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피부가 하예서 그런지 가로등 불빛에도 그 변화가 똑똑히 보였다. 하나는 외국인에게도 먹히는 제 외모에 뿌듯함을 느끼며 예쁘게 웃어보였다.

“나 성인이에요. 성인끼리 사귀는데 뭐 어때요.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요.”

우물쭈물 거리는 앙겔라에게 다시 한 번 웃어 보이고 하나는 차를 빙 돌아서 운전석에 앉았다. 이번 ‘언니’는 시끄러운 술집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둘만 있기에 적당한 바를 떠올리며 하나가 물었다.

“언니 칵테일 좋아해요? 아니면 와인?”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칵테일로 해요. 그거 마시다 와서 땡기거든요.”

앙겔라는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곧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어색하게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격은 재미없는데 반응은 재미있네. 하나는 그 모습을 힐끗 훔쳐보며 핸들을 돌렸다.

*

“그럼 한국에는 앞으로 6개월간 있게 되는 거예요?”
“연구 진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보다 짧아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3개월보단 오래 있겠죠?”
“그럴 거예요. 어차피 지금은 슬슬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단계니까요. 아마 한 5개월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 중이에요.”
“아하, 5개월.”

엄청 길잖아? 하나는 모히토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5개월이 다 되기도 전에 헤어질 터였다. 여태 사귄 수많은 애인들 중 그렇게 길게 사귄 사람이 없었다. 2개월이 가장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이 뭐였더라? 김…… 김 누구인데. 하나는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한 제 전 애인에 대해 떠올리다 생각을 떨쳐냈다. 어차피 지난 인연,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눈앞의 현 애인도 곧 그리 될 거라 생각에 하나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조용한 바를 찾아 들어온 지 한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몇 잔의 칵테일을 시켰고, 그러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앙겔라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태도가 풀어지고 있었다.

앙겔라는 모스크바 뮬을 시키고는 천천히 한 모금씩 맛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색이나 눈동자의 초점으로 보아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즐기며 마시는 타입 같았다. 다음은 도수가 높은 마티니로 시켜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하나에게 앙겔라가 물었다.

“하나 양은 영문학을 배우고 있나요? 발음이 좋네요.”
“아뇨, 어릴 때 미국에서 자랐어요. 한국 온 뒤에도 계속 영어 공부를 했고요. 대학은 공대 다녀요. 컴공과.”
“IT쪽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네. 생각해둔 아이템이 있는데, 만들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배우고 있어요.”
“어린 나이인데 벌써 목표가 확실하네요.”
“안 어리거든요? 술도 담배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하나의 말에 앙겔라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담배도 하는 거예요? 하나 양, 담배가 니코틴을 포함한 천여 가지 발암물질로 되어 있다는 건 들은 적 있죠? 폐암은 물론이고 방광암이나 췌장암 등의 각종 암을 유발하는 게 바로 담배예요. 게다가 젊어서 흡연을 한 경우일수록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요. 20대에 흡연을 시작해서 10년 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이, 30대에 시작해서 40대가 될 때까지 흡연을 한 사람보다 훨씬 위험하단 말이에요.”

그냥 예시를 들었을 뿐인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앙겔라에 하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세상에나… 화려하게 생긴 미녀 주제에 하는 말은 꼰대나 다른 없었다. 아참, 나이가 서른일곱이랬지. 겉모습과 나이가 매치가 잘 안 되는 바람에 깜박 잊었다. 하나는 입을 삐쭉이며 대답했다.

“담배 잘 안 피워요. 하루 한 개비 피울까 말까 한단 말이에요.”
“그래도 흡연을 하긴 한다는 거네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줄여나가는 게 하나 양의 몸에 좋아요.”
“…저 담배 피우면 섹시해 보인다는 말 자주 들었는데, 한번 보여드릴까요? 언니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글쎄요, 전 하나 양이 섹시한 것보다는 건강한 게 더 기쁠 것 같네요.”

무슨 도덕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히토를 마저 들이켰다. 외모는 정말로 하나의 취향 그 자체인데, 속은 완전 꼬장꼬장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못가서 헤어지겠네,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하나가 마티니 두 잔을 주문했다.

“더 마시게요? 게다가 두 잔이나요?”
“여기 마티니가 진짜 맛있어요, 언니. 같이 한잔씩만 더 해요. 네?”
“전 슬슬 취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좀 더 이야기하게요, 네?”

앙탈부리듯 옆자리에 앉은 앙겔라의 어깨에 몸을 기대자 그녀가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교가 먹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째 반응이 생각보다 별로였다. 이따 침대에서는 좀 달랐으면 좋겠는데. 하나는 입가를 똑같이 들어 올리며 예쁘게 웃어보였다.

*

적당히 취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마니티를 두 잔 더 시키고 말았다. 기분 좋게 취한 것을 확인한 하나가 이제 슬슬 나가자고 하자, 앙겔라가 몸을 일으키나 싶더니 갑자기 앞으로 푹 꺾였다. 하나는 깜짝 놀라서 앙겔라의 몸을 받아들였다. 살펴보니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아, 텄네. 하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사람을 덮치는 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달래면서 휘청이며 잘 걷질 못하는 앙겔라를 열심히 부축해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헉헉대며 침대 위에 앙겔라를 눕히자 그녀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꼬았다. 하나는 어느새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내고 어깨를 주물렀다.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 힘들다. 땀이 다 나네. 언니, 내일 일어나면 내 허리 좀 주물러줘야 해요. 알았죠?”

당연하지만 앙겔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나는 샤워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줄기를 한참동안 맞고 서 있었다. 노곤 노곤한 것이 씻고 나서 바로 잠이 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깨끗이 씻은 다음, 샤워가운을 걸치고 샤워실에서 걸어 나온 하나는 당연히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앙겔라가 관자놀이를 짚은 채 침대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걸 보고 흠칫 놀라서 물었다.

“언니? 정신이 들어요?”
“아…… 여기가 어디죠…?”

멍하니 풀린 눈으로 앙겔라가 물었다. 하나는 앙겔라의 앞에 쪼그려 앉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대답했다.

“근처 모텔이요. 언니가 바에서 일어서려다 정신줄 놨거든요. 기억나요?”
“아… 네, 어렴풋이는요.”
“언니, 내일 저 안마 해줘야해요. 언니 부축하느라 허리 아직날 뻔 했단 말이에요.”
“미, 미안해요, 하나 양.”
“미안하면 얼른 씻고 나와요. 12시가 넘었으니 이제 자야죠. 일어설 수 있어요? 부축해줄까요?”

앙겔라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더니 침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나가 그런 앙겔라를 부축해서 샤워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선 침대로 돌아와 한켠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매트리스가 흔들리는 진동에 눈을 떴다. 앙겔라가 침대에 조심스럽게 몸을 누이는 것이 희미한 수면등에 비쳐 보였다.

“미안해요, 다시 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고작 10분 정도 잠든 것 같은데, 몸의 피로가 씻겨나간 듯한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돌려서 앙겔라를 보았다. 씻고 나온 앙겔라에게서는 제 몸에서 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바디워시 향이 풍겼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가운을 유심히 살펴보던 하나는 제 가슴이 조금씩 조금씩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밤에 들기는 글러먹은 것 같았다.

앙겔라는 하나의 빤한 시선을 받으며 천장을 바라보고 바른 자세로 누웠다.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그런 앙겔라를 불렀다.

“언니, 나 좀 봐봐요.”
“……?”

앙겔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하나와 마주보았다. 흐릿한 불빛 속에 하얗게 떠올라 있는 앙겔라의 얼굴이 참 뽀얗게 보였다. 하나는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그 얼굴을 한동안 조용히 감상하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가볍게 앙겔라의 볼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고선 깜짝 놀라는 앙겔라의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앙겔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나를 불렀다.

“하, 하나 양…….”
“왜 그래요? 애인 사이인데. 언니가 예뻐서 그러는 거니깐 놀라지 말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럼 익숙해지면 되겠네요. 그죠?”

그렇게 말하고선 앙겔라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놀라서 굳은 앙겔라의 아랫입술을 살살 입술로 비비자 앙겔라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응을 살폈다.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맨 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술기운이 가신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하나의 기준으로 이 상황에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혀를 살짝 내밀어 굳어있는 앙겔라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사이 잇몸을 훑으면서 고개를 틀어 깊이 입을 맞췄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등을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연신 앙겔라의 볼과 뒷목을 매만지며 키스를 이어나가자 딱 맞붙은 앙겔라의 몸에 아주 천천히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는 가슴에 불이 붙은 듯한 감각과 함께 열렬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앙겔라의 호흡도 하나의 것처럼 거칠어져 있었고, 하나는 앙겔라의 위에서 덮치듯이 올라타 키스를 퍼부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반쯤 풀려버린 가운 매듭을 붙잡고 살살 풀어내는 도중에, 몽롱하게 녹아들었던 앙겔라의 눈동자가 순간 초점을 되찾더니 입술을 떼고 다급한 손길로 하나를 붙잡았다.

“저기, 하나 양. 우리가 사귀기로 한 건 맞지만, 이건 너무 빠른 것 같…….”

하나는 고지식한 소리를 하는 앙겔라의 얼굴을 붙들고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 몸을 굳힌 앙겔라의 볼을 어루만지다, 손을 내려 목과 쇄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앙겔라는 그 야릇한 손길에 어정쩡하게 허공에 손을 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하나가 앙겔라의 가슴께에 걸쳐진 가운 자락을 살짝 집자, 깜짝 놀라서 하나의 손을 붙들었다.

“하, 하나 양…….”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잠이 들곤 했어요.”

곤란한 목소리로 부르자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앙겔라가 눈을 깜박였다. 하나는 그런 앙겔라와 시선을 맞춘 채로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거든요. 아빠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엄마는 애인이 따로 있었죠. 쇼윈도 부부라고 알죠? 그런 집에서 자랐으니까 언제나 혼자였어요.”
“아…….”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시긴 했지만, 학교 가 있는 동안 낮에만 잠깐 들리는 분이라 마주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 엄마가 젊은 애인이랑 같이 집을 나가버렸죠. 결국 넓은 집에서 혼자 자랐어요.”

앙겔라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하나를 보았다. 생각보다 쉬운 가드라고 생각하며 하나가 말을 이었다.

“한창 보살핌이 필요할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전 혼자였어요. 밖에선 잘 웃고 떠들었으니까 친구들이 많았는데,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정말 싫은 거예요. 어차피 텅 비어 있을 게 뻔 하니까요. 그렇게 외톨이로 자라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너무 그리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집 밖으로 나돌게 됐어요. 그러다가 만난 사람들이 사주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게 되고 그랬죠.”

처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하나를 바라보는 앙겔라가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하나는 눈을 깜박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앙겔라를 마주보았다. 곧 눈이 따가워지며 눈물이 눈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앙겔라가 안타까운 듯한 소리를 내더니 손을 들어 하나의 볼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냈다. 하나는 그런 앙겔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사람들하고 어울려 지내도 외로운 건 똑같았어요. 같이 놀 땐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지만, 잠들 때는 아니잖아요. 애정결핍이라고 하죠? 그런 게 있어요. 그게 유난히 심해요. 그래서 혼자 자면 악몽도 꾸고 잠도 잘 못 자고 그러거든요. 언니, 난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
“그렇다고 외롭다는 이유로 아무하고나 자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언니는 내 애인이잖아요. 하루를 사귀었든 1년을 사귀었든 애인은 애인인걸요. 시간 같은 건 아무런 의미 없는 거예요. 중요한 건 관계죠. 안 그래요?”
“하나 양…….”
“난 누군가의 온기를 원하고, 그 누군가가 내 애인인 언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내가 싫어요?”

하나의 물음에 앙겔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나는 아주 천천히 가운을 잡은 뒤 천천히 벗겨내며 앙겔라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난 언니가 좋아요.”

제 팔을 잡은 앙겔라의 손에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하나는 앙겔라의 귓가에 작게 키스했다. 움찔, 작게 튀어 오르는 몸이 귀엽게 느껴졌다. 귓바퀴를 따라 키스한 후, 유려한 목선을 타고 쇄골을 향해 점점이 입을 맞추며 하나는 앙겔라의 몸을 가리고 있던 가운을 벗겨냈다. 아주 미미한 저항의 끝에, 마침내 가운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곡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나는 앙겔라와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예뻐요, 언니. 정말로 예뻐요.”

수면등의 흐릿한 불빛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붉어진 볼에 입술을 묻으며, 하나는 천천히 앙겔라의 몸을 뒤로 눕혔다. 아무런 장애 없이 와 닿는 따뜻한 살결을 살살 어루만지며 하나는 앙겔라에게 깊이 입을 맞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설핏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윙윙거리며 진동해대는 휴대폰 소리에 하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팔을 더듬더듬 뻗었다. 그러나 손끝에 와 닿은 것은 딱딱한 기계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확인하니 방금 전까지 가쁜 호흡으로 흐느끼고 있었던 앙겔라가 눈앞에서 안정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아직은 낯선 애인의 얼굴을 확인한 뒤, 하나는 협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같이 클럽을 다니는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시계를 보니 막 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또 술값 대신 내달라고 온 전화인가? 귀찮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이 달아났기 때문에 하나는 전화를 받으며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넌 시간이 몇 신데…….”
- 아멜리가 왔어!
“…뭐?”
- 아멜리가 왔다고! 네가 보면 연락 달라고 했었잖아.
“진짜? 아멜리 언니가 한국 왔어?”
- 그래! 너 잘 지내냐고 나한테 물어보던걸?
“지금 어딘데?”
- B바. 올 거야?

B바라면 여기에서 차로 15분 거리다. 하나는 제 상태를 되짚었다. 술기운은 앙겔라를 괴롭히던 도중에 가신 지 오래였고, 몸은 조금 피곤하긴 한데 움직이기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전화로 잠이 완전히 가셔버렸다. 곧바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짧은 고민 끝에 그러겠다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모델 출신이자 현재는 잘 나가는 쇼핑몰 사장인 아멜리는 반 년 쯤 전에 중국에 쇼핑몰을 차리면서 한동안 그 쪽에 주력해야겠다며 중국으로 건너 갔었다. 그 뒤로 종종 한국에 들렀단 소식을 접했지만 매번 타이밍이 어긋나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잠깐만 보러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음…… 하나 양? 어디 가요…?”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는데 침대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앙겔라가 흐릿한 눈동자로 하나를 불렀다. 짧게 메모지만 남기고 떠나려고 했던 하나는 생각을 바꿔먹고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는 앙겔라의 흐트러진 금발을 가만가만 정리해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 중요한 볼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잠깐만 혼자 자고 있어요. 그럴 수 있죠?”
“아…….”
“얼른 다녀올게요. 사랑해요.”

지금껏 헤아릴 수도 없이 내뱉었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입에 담자, 앙겔라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살짝 볼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일곱에 이런 표정이라니, 진짜 반칙이네.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앙겔라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가볍게 가슴팍을 도닥이자 앙겔라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방금 전까지 밤을 같이 보낸 새 애인을 두고 아멜리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금방 보고 올 거니까 상관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어차피 얼마 안 가 헤어질 사람보다 아멜리가 훨씬 더 중요했다. 하나는 차키와 지갑, 그리고 휴대폰을 챙겨들고 모텔을 나섰다.

*

“아, 왔어?”

아멜리는 바 스툴에 앉아 긴 다리를 꼰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막 바에 들어선 하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연스런 모습에 하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서 아멜리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는 아멜리의 얼굴은 반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는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아, 뭐야. 반 년 동안 소식이 없길래 뭔 일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 멀쩡하잖아? 괜히 왔네.”
“괜히 왔긴? 내 운전기사 해주러 온 거 아니었니?”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머금는 아멜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하나는 픽 웃고 말았다. 아까까지 같이 있던 앙겔라가 선하고 따뜻한 이미지라면, 아멜리는 그와는 정반대인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이미지였다. 그런데도 몸 전체에 배어있는 도도한 분위기가 그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곤 했다.

처음 아멜리를 보았을 때, 하나는 건조한 듯 하면서도 도도한 분위기의 아멜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아멜리는 그런 하나를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성인이 되면 찾아오라는 말로 번번이 쫓아내기 일쑤였고, 그로부터 벌써 4년 가까이 하나는 아멜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를 어린 친구로 대할 뿐, 거듭되는 고백은 번번이 거절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어색하게 구는 일 없이 자연스레 하나를 대하는 아멜리를 하나는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안 돼. 나 술 마셨단 말이야.”

직접 차를 몰고 온 주제에 그렇게 한번 튕겨보자, 아멜리는 대수롭지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
“마셨다고 했는데도 술을 주네.”
“그래서, 안 마실 거야?”

아멜리가 모히토를 주문하며 나른한 눈길로 하나를 돌아보았다. 하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아멜리의 옆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냥 그랬어.”
“언니는 맨날 그런 말만 하더라. 내 안부 같은 건 안 물어보는 거야?”
“네 안부를 물을 필요가 뭐 있니. 이 시간에 달려온 거 보면 뻔하지 뭐.”
“꼭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나 방금 전까지 애인이랑 완전 깨 볶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언니가 귀국했다니까 얼굴 보러 온 거거든?”
“애인은 무슨. 아직도 질 떨어지는 애들이랑 자고 다니면서?”

한심하다는 듯 아멜리의 말에 하나가 발끈해서 말했다.

“아니라니깐? 존나 예쁜 애인 생겼단 말이야!”
“어제 강남에서 만난 걔? 걘 별로던데.”
“어? 나 어제 강남 갔던 거 어떻게 알았어? 아니, 거기에 있던 거야? 봤으면 말을 하지.”
“어젠 나도 일행이 있었거든.”
“그래? 아무튼 걘 아냐. 오늘 새로 사귄 애인이거든. 무려 금발 미인이라고.”
“누군지 몰라도 안타깝네. 아니,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애일 테니 그럴 필요도 없나?”
“거기서 거기라는 게 무슨 뜻이야?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겉만 번지르르한 네 껍데기나 돈만 보고 달려드는 수준 낮은 애들이란 뜻이지.”

여태 만나왔던 애인들을 싸잡아 정리하는 아멜리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제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아멜리가 제 쪽으로 밀어주는 모히토를 단숨에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다르거든? 완전 샌…, 아니 바른 생활 어른이라고.”

저도 모르게 샌님이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꾸자 아멜리가 피식 웃었다.

“웬 일로 그런 애를 다 사귀게 됐어? 그런 타입은 딱 질색이라지 않았어?”
“얼굴이 진짜 내 취향이거든.”
“그래? 이번엔 한 삼일 가려나? 잘 해보렴.”

이번에도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아멜리의 말대로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하나는 심통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갑게 만나러 왔다가 기분만 상했네. 나 간다!”
“잘 가렴.”

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블랙 러시안을 주문하는 아멜리를 힐끔 돌아보며 입구로 향하던 하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거의 제 쪽으로 쓰러지다시피 한 여자를 똑바로 세운 뒤, 하나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앞을 못 봤어요.”
“미안할 건 없고, 술 한 잔 할래요?”
“아뇨, 이제 가봐야해서. 나중에 또 보면 그땐 술 살게요.”

얼굴도 기억 안 날 테지만 말은 그렇게 하고서 얼른 자리를 떴다. 싸구려 향수를 얼마나 뿌려댄 건지, 잠깐 몸이 닿았던 것만으로 냄새가 그대로 묻어버린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오자 새벽 공기가 꽤나 쌀쌀했다. 하나는 얼른 모텔로 돌아가 앙겔라의 따뜻한 품에 파고들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올라타 엑셀을 밟았다.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밝은 도로가 익숙했다.



끝.



프롤로그 격인 1~2장이라서 밋밋합니다.
제목 바꿨습니다.
+ 아멜리 관련 내용 수정 (17.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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