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아으으 피곤해…."


토요일.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수험생이랑 학원 강사 빼곤 다 쉬는 날 저녁까지 수업을 한 희수는 평소보다 배는 피곤한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낮에는 집에 들릴 틈도 없어서 거의 48시간만에 도착하는 집이었다. 

저녁 차릴 기운도 없어서 학원 앞 도시락 집에서 도시락을 사서 엘리베이터에서 터덜터덜 걸어 문앞에 섰다. 영인은 밤에나 올라온댔으니 대충 먹고 잠이나 좀 자야겠다 생각하며 도어락을 누르려는 찰나. 


"왔어?"

"꺄악. 어?!"

"놀라긴. 집주인입니다~"

"영인아!!"


희수는 덥썩 영인을 끌어안았다. 영인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현관 벽에 기대었다. 희수는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영인은 피곤할 걸 잘 알아서 말없이 그냥 한동안 안아 주었다. 몇 분을 안아 준 영인은 등을 툭툭 치며 떼어냈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응…!"

"진짜 솔직하네."

"한번만 더 안아 줘."

"포옹도 좋지만, 배고프지 않아?"

"아. 조금. 밥 안 먹었어?"

"어. 여자친구가 퇴근이 좀 늦네."


영인은 쪽 하고 키스를 해 주고선 개구지게 웃고선 한번 더 해 달라는 듯 팔을 잡아 끄는 희수에 다시 뽀뽀를 해 주고 데리고 집안으로 향했다. 


손을 씻고 식탁에 앉은 희수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식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자신이 밥을 차릴 때에도 영인이 차릴 때보단 많은 찬수를 놓긴 했지만, 오늘처럼 메뉴가 많은 날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갈비찜에 온갖 전, 잡채와 나물까지, 전형적인 명절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집에서 싸왔지."

"이걸 다?!"

"응. 식기 전에 먹자."

"너네 집 냉장고 거덜낸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빨리 드세요. 아가씨."

"허엉."


아까운 듯 젓가락을 들고 고민하다가 갈비찜을 드는 희수에 영인은 '은근 고기 좋아한다니까. 보면' 속으로 웃으면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자신도 전을 베어물었다. 




"얘. 며늘아기는 고향이 어디니? 저번에 보니까 사투리는 안 쓰던데."

"바로 고향부터? 원래 서울 사람인데. 지금은 제주도 사셔."

"어머! 사돈댁 인사드리러 가서 제주도 여행하면 딱이겠네! 어쩜 그것도 맘에 들어?"

"미쳤나 봐. 엄마가 거기를 왜 가?!"

"제주도는 추석 때 뭐 해 먹나~?"

"원래 서울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희수네는 요번에 부산 여행 갔어."

"어머 경상도는 왜? 전주로 놀러 오시라고 하지!"

"미쳤나 봐. 지역감정도 오지고. 진짜 옛날 사람이네. 부산이 훨씬 낫지. 맛있는 것도 많고."

"얘는? 아무튼 그럼 추석 음식도 못 먹었겠구나. 며느라기는."

"어. 그래서 전만 좀 싸가려고. 괜찮지?"

"얘느으으은?!"


빼액 소리를 지르는 엄마에 영인은 움찔했다. 뭐야. 전 좀 싸가는 것 가지고 이러는 거야? 전 반 넘게 내가 부쳤는데. 맞대거리를 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의 답은 영인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그거 갖고 누구 코에 붙이니? 우리 새아가 전라도식 추석이 뭔지 제대로 맛은 보여 줘야지!"

"뭐?"

"갈비찜이랑, 잡채랑. 희수 걔 나물은 좋아하니?"

"어? 어. 잘 먹어."

"그러면 나물도 싸가고. 콩나물잡채도 갖고 가렴. 붕어찜은?"

"붕어찜 극혐!! 그건 내가 싫어. 희수도 싫어할걸. 아니 뭐 얼마나 싸주려고."

"비닐로 싸서 큼지막한 록앤록에 넣어 줄 테니까. 따뜻하게 뎁혀서 줘? 알았지?!"

"아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부엌에서 음식을 담아대는 엄마에 영인은 저걸 내가 KTX에 다 이고 갈 수 있을까 싶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또 내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올 희수에게 따끈하게 추석 밥상을 대접할 생각에 같이 냉장고를 뒤졌다.


"나 그럼 내일 좀 일찍 가도 되지. 병원 갔다가 바로 올라갈래."

"엄멈머. 딸 자식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아주 와이프 사람이 다 됐구나."

"아 진짜 무슨 일이야? 선주 언니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니냐고."

"걔는 같이 안 살았잖아. 그리고~"


엄마는 솜씨 좋게 록앤록에 반찬을 덜며 영인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걔 때 못해 줘서 이러는 거야."

"뭐?"

"우리가 걔를 네 파트너로 못 대해서 걔가 그런 건가 싶어서. 서운했나 하는 거지……."

"……."

"또 지금 네 여자친구가 사람도 괜찮아 보이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팔아치워야지. 우리 못난 딸."

"……뭐래."

"우는 얼굴도 못 났네. 하여간 공 씨들~~"


부모님이 마음을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영인은 뜻밖의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는 더 먹고 싶은 거 없냐며 꽈리고추 장조림이 담긴 봉지를 야무지게 묶었다. 



42.2.


숟가락을 열심히 놀리면서 모든 반찬을 골고루, 맛있게 먹는 희수를 보며 영인은 무언가 따뜻한 게 마음속에 몽글몽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진짜 맛있다. 저번에 반찬 가져왔을 때도 그랬지만, 영인이네 어머니 음식 솜씨 좋으시다!"

"그런가. 보통 아닌가."

"왜 미식가인 줄 알겠어."

"난 네가 해 준 게 더 맛있던데."

"와. 진짜 사랑의 콩깍지가 입에도 꼈네~"

"사랑의 백태 이런 건가."

"음 그건 좀 더러워……. 밥 먹는데."

"미안. 나도 말해 놓고 좀 후회함."


영인은 멋쩍게 사과를 하곤 깻잎지를 먹으려고 젓가락으로 끙끙대는 희수 대신 한 장을 뜯어 밥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희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와구 밥 한 술을 크게 물었다. 그리곤 오물오물 씹으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응?"

"한동안 뭐 이슈였잖아. 깻잎논쟁."

"아. 어."

"영인이는 어때? 나랑…. 다른 친구랑 있으면?"

"안 떼어줘. 내가 최유민 깻잎 떼어주는 거 봤어?"

"유민이 말고~~ 다른 친구도 있을 수 있잖아."

"너네 부모님이나 연우 아니면 안 떼어드려."

"히."

"또 반했네. 또 반했어. 으이구 조희수 내가 그렇게 좋아?"

"어. 진짜 좋아.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는 게."


입가에 미소가 어린 채 얌냠냠 씹는 희수에게 영인은 네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핀잔을 주면서 웃었다. 


"너는 떼어줄 것 같아."

"에에?"

"아니야?"

"나도…. 안 떼어 줄 수도 있지이!"

"됐어. 그거 떼어 주는 게 조희수다워."

"…그른가."

"붙들어 주는 것까진 오케이. 밥술에 놓는 건 안 돼."

"아. 웅."

"나는 밥숟가락 위에도 놔 줘."

"푸하하. 응. 근데 영인이가 나보다 젓가락질 잘하는 것 같아."

"맞아. 그럴 일이 잘 없긴 하지. 나중에 새우나 까 줘."

"응. 나 새우 잘 까!"


별걸 다 자랑한다며 웃는 영인과 달리 희수는 정말 의기양양하게 새우 까는 법을 늘어놓았다. 영인은 갈비찜을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아 지금 그러고보니 새우철이네."

"아. 그래? 대하?"

"응. 언제 소금구이나 먹으러 갈까."

"으. 나는 그거 좀 너무…… 좀 그래. 마음이."

"엥?"

"그 막, 뜨거운 소금 위에서…. 막 뚜껑치면서 죽는 거 보는 게 좀."

"어차피 먹힐 새우들인데?"

"그래도! 뭔가 인도적이지 못한 느낌이라."

"갑각류한테 인도적일 필요가 있나? 죽는 건 매한가진데."

"왜 그래도 차라리 뭔가 괴롭지 않게……."

"새우한테까지?"

"그런가……."

"그런 걸로 소금구이 못 먹는단 건 넘 어이없는 일이라고."

"…응."


명백하게 납득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영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응?'

식사가 끝나고 더 달라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울하게 바로 씻고 방으로 들어가는 희수에 설거지를 하던 영인의 촉이 섰다. 

'조희수 삐졌네.'

보통 뭘 마음에 안 들어하는 일이 잘 없기도 했거니와 친구들에게는 화내기 전에 곱게 말을 해 주는 희수였다. 드물게 토라진 모습에 영인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일 때는 그냥 냅두면 풀리겠거니 하거나 직접 물었겠지만, 애인인 지금은 달랐다. 영인은 희수가 왜 서운했을지를 고민해 보았다.  




42.3.


'나도 참. 영인이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침대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은 희수 역시 바로 방으로 들어온 걸 후회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영인이라면 자신이 토라진 걸 모를 리 없었다. 고작 새우에 대한 공감(?) 여부 같은 걸로 기분 상해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래도 새우 불쌍한 걸…….'

중학생 정도 됐을 때였다. 가족끼리 다 같이 갔던 횟집에서 회를 못 먹는 희수를 위해 시켰던 대하 소금구이. 뜨거운 소금 위에서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새우들이 어린 희수는 너무 불쌍했다. 

그걸 시켜 준 부모님의 호의도 있었고 또 그렇게까지 조리가 되었는데 안 먹고 버리는 게 더 나쁜 일인 것 같아 울며 겨자먹기로 먹었지만 (맛이 있어서 더 눈물이 났다) 양심의 통증에 대차게 체했던 희수였다. 

그러나 자신이 채식주의자인 것도 아니고, 모든 생물에 그런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위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비록 영인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함직했다.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사소한 것까지도 이해해 주길 바란 것 같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라더니…. 영인이 워낙 잘해 주니까 더 더 욕심꾸러기가 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고 괜히 성질을 내서 (사실 성질 낸 것도 아니지만) 보고 싶던 얼굴을 못 보는 것도 아쉬웠다. 


"똑똑"


그렇기에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소리가 희수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라는 말에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영인은 침대에 기대어 앉은 희수를 확인하곤 조심조심 걸어와 살포시 옆에 앉았다. 그리곤 눈을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곤 손을 꼬옥 잡았다. 


"왜애."

"애완새우라도 키웠어?"

"뭐?"

"아니. 농담이야."

"……이잉."

"내가 공감을 못해서 서운했지?"

"으으응. 괜찮아."

"그냥 나한테는 새우가 생명이 아니라 먹을 거라고 생각돼서 그랬나 봐."

"응. 그럴 수 있지."

"사람마다 생각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르니까."

"응. 미안. 피곤해서 예민했나 봐."

"이야. 우리 처음으로 싸우네."

"이게 뭐 싸운 거야……."


포옥 어깨에 기대는 희수에 영인은 피식 웃고선 히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잔잔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린 다른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뭔가 서로 이해 못할 수도 있어."

"응."

"그러면 싸우기도 하겠지."

"싸우기는 싫은데……."

"나도 그건 싫지만 그래도."

"응. 나도 영인이 네가 참는 건 싫으니까."

"응. 이야. 조희수 좀 치는데. 이심전심인데?"

"뭐래~"

"암튼 뭐 싸워도 꼭 화해할 거니까. 서운하면 말하라고."

"응. 고마워. 먼저 말 걸어 줘서."

"응. 먼저 삐져 줘서 고마워."

"그게 왜 고마워?"

"그래서 함 싸워 봤잖아."

"…뭐래. 진짜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쪽 뽀뽀를 하는 희수에 영인은 배시시 웃었다. 희수는 허리를 포옥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앙탈을 부리다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출근만 아니며언…."

"진짜 누가 너 성욕 없다 그랬어?"

"…?! 그, 그거 하자는 거 아니었거든?"

"찔린 것 같은데."

"오늘 아주 싸우려고 작정한 거야?"

"그럴 리가요. 그거는 안 해도 같이 잘래?"

"진짜?"

"응. 얘기하다가 자자. 팔베개 해 줄게."

"뼈라 딱딱해서 아플 것 같애."

"날 무시하는군. 근육 하나도 없어서 물렁살이라고."

"자랑이세요……."


희수는 밉게 째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영인의 품에 다시 기대었다. 




파자마로 갈아입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마주 보니 뭔가 두근두근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같이 자는 것도 아닐 뿐더러 사귀고 나서도 정사 후에는 같이 잤는데, 아무 것도 안하고 침대에 있는 게 이렇게 두근거릴 일인가 싶었다. 희수가 눈을 꿈벅거리자 눈을 감고 있던 영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안 자. 졸리다며."

"설레고 좋아서…."

"나 참. 대책 없는 친구네."

"빨리 수능 끝났으면 좋겠다."

"? 수능 끝나면 안 안고 잘 건데."

"뭐? 진짜아?"

"아 말 잘못. 안고 안 잘건데."

"뭐, 뭐래애. 진짜 공영인 변태야."

"네 상상이 더…? 왜 빨개져. 토마토네."


어깨를 밀어내는 희수에도 영인은 안은 팔에 힘을 줘 바싹 당겨 안았다. 희수는 못 이긴 척 안겨서 그만 놀리라며 입술만 삐죽댔다.


"우리 100일도 수능 바로 며칠 전이더라."

"아. 맞아. 히잉."

"집에는 와?"

"오지. 늦어서 그렇지……."

"그럼 뭐 케이크 같은 거나 먹을까? 제대로는 수능 끝나고 놀지. 뭐."

"응. 미안해."

"괜찮아. 돈 많이 벌어와. 세입자야."

"응. 집주인님."

"자. 좋은 꿈 꾸고."

"이미 꿈이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야."

"야한 꿈 꾸면…. 아야! 알았어. 그만 놀릴게. 굿나잇."


영인은 쪽 뽀뽀를 하고 품에서 잠이 든 희수를 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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