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즐기는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뇌내 보상 체계에 이상이 생겨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그밖의 것들은 차츰 재미없어진다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상태인 것 같다. 근래에 들어 뭘 해도 오래 참고 기다리기가 힘들고, 만사가 다 재미없다.


특히 요즘 들어서 본 영화들은 대체로 타율이 낮았다. 팬으로서 아무리 재미없어도 재밌게 볼 작정이었던 ‘던전 앤 드래곤’과 이정재, 정우성이 나온다기에 벼르고 있던 ‘헌트’를 제외하면 대체로 실패뿐이었다. ‘언차티드’는 원작 게임을 재미있게 했고, 주연이 된 톰 홀랜드도 좋아해서 무척 기대했으나, 그냥 흔해빠진 형식으로 수수께끼를 풀고 악당과 경쟁하며 숨겨진 보물을 찾지만 결국은 동료만을 얻게 된다는 내용에 가까웠다.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영화들보다 나은 게 별로 없었다. 하기야 애초에 원작 게임을 하면서 ‘와, 이거 진짜 영화 같은 게임인데?’하고 감탄했던 것을 영화로 옮겨버리니 감동할 이유의 상당 부분이 증발한 셈이다. 드라마로 계속 나온다면 활극을 기대할 만하겠지만…….


‘서치 2’도 전작을 아주 감탄하면서 봐서 기대한 것에 비해 범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작은 작중 모니터에 비친 영상만을 보여준다는 형식도 참신하고 이야기도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극이라 정말 멋졌는데, 후속작은 참신성도 잃을 수밖에 없었고, 이야기도 중간부터는 대체로 짐작할 만하게 흘러갔다. 재미는 있었지만 심심한 편이었다.


후속작 개봉으로 여기저기서 얘기가 들리기에 의무적으로 본 ‘아바타’의 전작은 실망의 도가니탕이었다. 하기야 개봉 당시에 컴퓨터 그래픽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으니, 이것도 눈이 높아진 지금은 그다지 가점 요소가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그래픽을 떼어놓고 생각한 아바타는 이래저래 기분 나쁜 요소가 많은 이야기였다. 아주 불순한 의도를 품고 나비족에 잠입한 주인공이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나비족에게 감화된다는 것도 ‘미개하지만 조화롭게 사는 원주민의 지혜가 최고’라는 식의 무책임한 자연 숭상으로 느껴져 싫을 뿐더러 심경 변화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것 같았고, ‘추장 딸’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도 어째 잘 알 수 없었다. 이런 이민족 조우 영화의 클리셰 중에 ‘추장 딸’이라는 용어가 아예 있을 지경이니, 확실히 넌더리 나는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정체가 탄로나서 나비족에게 버려진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설적 날짐승을 제압한다는 흐름도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가 큰 날짐승 하나 길들여 왔다고 해서 떠받들어주다니, 나비족을 얼마나 바보로 그려야 속이 시원한 것인지……. 에일리언 시절부터 좋아했던 시고니 위버가 나왔다는 점을 제외하면 장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도 내가 비뚤어진 탓이겠지만.


침체기에 접어든 극장가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범죄도시2도 1만큼 즐길 만한 영화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의 매력도 덜했다. 1은 주인공이 약간 부패한 듯한 짓도 하지만 어쨌거나 갖은 수를 써서 지역의 균형과 평화를 지키려 하고, 경찰 조직 중간에서도 위아래의 갈등을 어찌저찌 중재하며 직업적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이 특히 매력적이었는데, 2에선 추격전의 비중이 높아진 탓인지 고유의 색채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듯했다. 나쁘진 않지만 그리 좋지도 않았다.


누구나 다 인정할 만큼 빼어난 명작만 골라서 본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한다면 부정할 순 없겠다. 그러나 예전에는 분명 요 정도의 작품을 보고도 적절히 만족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이럴 때 회의감이 든다. 시간을 적절히 사용해서 내게 괜찮은 보상을 주지 못했다는 회의감이다. 이럴 때면 삶과 여가란 대체 무엇인가 싶기도 하고, 무엇이었으면 내가 만족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방편으로 게임을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는데, 그렇게까지 효과가 좋지 않았다. 오래도록 하지 않았던 축구 게임을 월드컵 이후로 종종 하긴 했으나 이것도 한때뿐이었다.플레이스테이션 2 시절에 플스방까지 만들어냈던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의 후계자인 ‘e풋볼’은 처음엔 좋았다. 해설이나 조작, 흐름 모두 익숙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스포츠 게임을 한다면 당연히 기대할 만한 ‘대회’ 콘텐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회에서 점점 더 강한 상대를 만나 이겨나가고, 그러다 지면 새 선수를 영입하기도 하고 작전을 바꾸기도 하는 게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축구 게임의 흐름인데, 그런 게 도통 보이질 않아서 조금씩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에 시도한 ‘피파’는 대회는 찾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선수를 어떻게 영입하고 키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켜기만 하면 무슨 보상을 받으라는둥, 이벤트에 참여하라는 둥 오만가지 배너가 연속으로 뜨는 게 지긋지긋해서 지워버렸다.


모바일 게임계에서 엄청난 규모와 그래픽을 선보여 지금도 인기가 많은 ‘원신’도 그럭저럭 새 지역도 탐방하고 스토리도 따라가곤 했으나, 언제부턴가 피곤하기만 했다. 내 실력으로 어쩔 방법이 없는 부분에 부딪히니 캐릭터를 열심히 키우든가 뭘 사든가 해야 하는데 돈을 쓰기도 싫고, 아이템 재료를 모으러 다니는 것도 넌더리 났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지름길로 가는 것도 싫고 성실하게 우회로를 택하는 것도 싫은데 게임은 재미있게 하길 바란다면 이건 도둑놈의 심보일까? 원신이 여전히 잘 나가는 것을 보면 게임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내가 게임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이리라.


‘그랑 사가’도 그래픽과 캐릭터 조형이 마음에 들어 제법 오래 했고, 심지어 아트북까지 샀는데, 지금은 내려놓게 되었다. 이 역시 진행하다 턱 막혀버린 탓이다. 이것도 꾸준히 로그인하고 하루에 거둘 수 있는 보상들을 잘 찾아먹다 보면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 그것조차 귀찮아졌다. 뒷얘기가 궁금하면 그것을 보상으로 여기고 하게 될 텐데, 이제 얘기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로그인도 안 하는 게 너무 편한 것을 보면 아마 영영 못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별로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난이도를 높이면서 여러 판 해본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이제 여차하면 총 맞아 죽는 일에 지쳤고, 한 번 끝을 본 드래곤즈 크라운은 무난하기만 했다. 죽든 말든 다시 살아나면 그만이고, 퀘스트를 수행해서 무슨 보상을 얻는대도 그걸 갖고 딱히 고생하길 잘했다는 느낌을 주는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기나 스토리도 본 것들이라 신비감이 없다. 게임의 수명이란 이런 식으로 다하는구나 싶다.


오랜 취미이자 영혼의 고향인 보드게임을 혼자서 조금 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시도해보기도 했다. 보드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걸 어떻게 혼자 하나 싶을 수도 있는데, 보드게임계에서 1인 플레이는 역사가 깊다. 사람들을 만나서 보드게임을 할 기회가 충분하지 않아서 혼자 여러 사람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모임을 대비해서 새 게임을 익히기 위해 혼자 돌려보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 확산 시기를 거치며 아예 혼자 하도록 나오는 게임이나 전자 오락처럼 자동 플레이어의 알고리즘을 따로 짜서 넣어주는 게임도 늘었다.


그래서 나도 좀처럼 안 하던 1인 플레이를 좀 해봤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단 1시간을 넘기는 게 보통이라 너무 길었다. 전자 오락처럼 저장해놓고 이어하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구성품이 어떻게 놓여있었고 내 손에 무슨 카드가 있나, 상태는 어떤가 모두 기록해놓고 나중에 도로 맞춰놔야 해서 선택할 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어려운 판을 깨고 나면 당장은 신나지만, 좀 지나고 보면 그렇게까지 보람있는 일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맛있는 음식을 공들여 차린 다음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혼자 먹어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나를 그렇게 공들여 즐겁게 해주는 일은 분명 훌륭한 일이지만, 이 비용을 아꼈다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보드게임보다 더 신나고 자극적인 전자 오락이 즐비하니 굳이 이 번거로운 짓을 혼자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보드게임의 재미는 게임 내부보다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더 많이 나오는 법이니까. 몇 달 전에는 시스템도 독창적이고 이야기도 소설적이라 아주 훌륭하다고 정평이 난 보드게임, ‘로빈 후드의 모험’을 혼자서 좀 해보다가 준비와 정리를 혼자 하기가 너무 벅차서 팔아버렸다. 다른 게임 몇 가지도 맛만 보고 집어넣었다. 여가에 노력과 즐거움의 가성비를 따지는 게 슬프지만, 시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자원이 얼마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시도해봤지만 손대는 것마다 재미가 없거나 지금 생활과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요즘 여가랍시고 즐기는 것이라곤 태블릿으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유튜브 방송을 틀어놓고 스마트폰으로 커뮤니티나 중고 장터 앱, 할인 앱 따위를 뒤적이는 것이 되고 말았다. 전부 스크롤할 때마다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자극원이 나타나는 유희니까, 그야말로 어떤 의사나 상담사라도 작작하라고 말릴 법한 인스턴트 도파민의 대표적인 예시다. 두뇌에 전극을 달고 쾌락 스위치를 반복해서 누르는 실험쥐와 다를 바도 없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잠깐은 신나고 재미있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지속적으로 즐겁고 치유적인 여가는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바람직한 여가란 대체 무엇일까? 보통 학술적으로는 느리고 지루하고 따분해 보이는 것들을 바람직한 여가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명상, 그림, 글쓰기, 악기 연주, 독서, 운동, 꽃꽂이 등등. 하지만 요즘 말로 ‘갓생러’라 불리는 족속 말고 대체 어느 누가 더러운 하루 일과를 겨우 마치거나, 혹은 마지못해 내일로 미룬 뒤에 남은 짧은 시간을 그토록 아름답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보상이 몰입 속에서 천천히 찾아오는 활동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여가라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솔직히 시도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보람찬 결과가 남는 여가는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여가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요컨대 이상적인 여가는 느린 과정도 즐겁고 결과도 남지만 좋은 결과를 낼 필요도, 뭘 배워야 한다는 의무도 없는 행위여야 한다는 뜻이다. 재미있게 만드는 것 말고 아무 목적도 없는 눈사람 만들기 같은 게 좋은 예인데, 안타깝게도 일상속에서 비슷한 활동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독서는 독서 대로 배울 거리를 찾게 되고, 게임은 게임 대로 견딜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영화는 자꾸만 실패하는 데다가 너무 길기도 하다. 남는 것은 기껏해야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혹은 만화 감상 정도다. 이것들은 유튜브의 대세처럼 짧지도 않고 영화처럼 너무 길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느긋하게 내용을 즐길 수 있는 정도다. 사실 이것들도 실패한 경험이 너무 많아 두렵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으니 또 시도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빠른 보상을 향해 움직이게 되는 법이라 뭘 보더라도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인스턴트 도파민을 탐닉할 것 같은데, 돛대에 자신을 묶게 한 오딧세우스처럼 뭘 볼 때마다 손을 묶어야 하는 것 아닐까?



*추신

브런치북 프로젝트 특별상 수상작인 저의 신간,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출간되었습니다. 고장난 물건, 주워온 물건을 수리하거나 중고 거래를 하며 소비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생활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종이책으로도, 전자책으로도, 밀리의 서재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카카오 페이지)을 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두서없는 잡상들을 올립니다. 간혹 게임이나 영화 얘기도 합니다. 트위터 @memo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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