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돌이님께 드리는 연성교환입니다.

-한국 대학AU 드림글입니다.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원목 테이블에 물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손에 잡히는 맥주잔은 여전히 시원했지만 맥주를 들이키면 생맥주는 미지근하게 식은 채였다. 맥주잔을 잡았던 손이 축축했다. 맥주가 식도를 훑고 지나가자마자, 다시 목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별 수 있나. 또 마셔야지. 셰인은 망설임 없이 한 잔을 다 비웠다. 금요일 저녁답게 술집은 소란스러웠다. 작은 대학가의 술집답게 과잠바를 걸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들 목청을 높혀 떠들고 있어 소리지르듯 말하지 않으면 상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어절과 어절은 만나자마자 다른 소리들과 함께 섞이고 부딪혀, 서로의 소리를 뭉개버렸다.

오렌지빛 조명이 강해서 사람들이 무슨 색의 옷을 입고 왔는지 색을 알 수 없었다. 학교 앞 주점치고는 드물게,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올해 새로 개업했다는 호프집, 소위 '감성주점'이었다. 금요일 저녁 9시 이 술집에 홀로 앉아있는 사람은 셰인뿐이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알바생은 혼자 들어온 셰인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가, 셰인이 곧 일행이 올 거라며 튀김안주 2인 세트를 주문하자 군말없이 화장실 바로 앞의 테이블을 내주었다. 


셰인의 테이블을 지나는 작은 전구 장식은 벽을 한 바퀴 감싸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바탕체로 적힌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셰인은 인상을 찡그린 채 네온사인을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창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은 창가와는 떨어져있었지만 가로등이 훤해서 거리를 볼 수 있었다. 차도 맞은편에 있는 차차의 뒷모습이 빌어먹도록 선명했다. 차차는 십여분 전부터 그 놈한테 붙잡혀 길거리에서 계속 서 있었다. 차차는 손을 내저으다가도 그 놈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놈의 얼굴은 식멸할 수 없었지만 감색 코트 주머니에서 초콜렛을 꺼내며 차차에게 건내주며 이야기하는 폼은 잘 보였다. 둘이서 밖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인데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먼저 도착해 차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늦어질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괜찮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언제 들어올 것이냐는 연락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인지 이름도 잘 모르는 놈이지만 차차 주변을 자주 기웃거려 얼굴은 아는 놈이었다. 아마 그놈도 자신의 얼굴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전에 샘이 말했던 '그 후배'라는 게 저 녀석이라는 건 누구에게 전해 듣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둘이 사귀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친밀해보이는 거리였다. 단 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었다. 차차와 함께 걸어다닐때면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후드집업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니는 셰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마 분명 몇번쯤 둘이 사귀냐는 질문을 받았겠지. 차차의 친구들이 무엇이라 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차차와 자신과 대화를 할 때 동기들이 보이던 의아한 반응과는 다를 터였다.


셰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차차와의 관계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친해진 사이라는 것. 누군가 의아해해서 물어볼 때면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라도 친해서져서 다행이지만, 동시에 겨우 그게 다인 관계였다. 착각하면 안 된다고, 그대로 놓쳐버릴 각오를 하더라도 착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차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일렁였다.


셰인은 차차의 옆모습만 보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웃을 때는 어떻게 입꼬리를 올려 웃을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떤 각도로 고개를 숙여 상대를 올려다 볼지 눈에 선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버려.

자신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차는 셰인이 귀찮다는 듯 매몰차게 굴 때에도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언제나 곧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번 닿기만 해도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빛의 속성이다. 

자신을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보조개가 패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주지 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바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비춰야하는 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나만을 비춰달라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셰인은 차차가 난감해하는 얼굴은 그 무엇보다도 보기 싫었다. 







"늦어서 미안해!"

문이 급하게 열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차차는 거의 달려오다시피 오더니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큰소리로 연달아 사과했다.

"어."

평소처럼 대답했는데,차차는  빠르게 숨을 내쉬며 붉게 물든 채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안하면 네가 안주 사든가."

셰인이 차차를 향해 메뉴판을 밀어버리자, 차차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면서 싫다고 발을 빼었다. 그렇게 무슨 메뉴를 더 시켜야할지 아웅다웅하며 고민하다가 떢볶이와 닭다리 세트를 하나 더 시켰다.


"여기 닭다리 친구 세트 하나랑 맥주 1000cc, 소주 한병 주세요."

셰인은 안주를 시키다 말고 차차를 보며 물었다.

"아. 너 소주 한병 맞지?"

곁눈질로 바라보며 무심하게 묻는 어조는 정말 알지 못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걸 확인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응!" 

차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셰인은 직원이 건네주는 술병을 받아 차차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셰인이 자기 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자, 차차가 잔을 들어 그를 막았다.

"쨘-하자! 쨘!"

"...쨘."

어색한 음성이 마치 나는 마지못한 척 잔을 친다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맥주잔에 가려진 입가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맥주잔을 내려놓자, 약간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신이 불렀으니 자신이 먼저 입을 떼어야 할 텐데, 그게 셰인에게는 쉽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어제 만났던 길고양이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났을 차차는 오늘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냐. 

걔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그래서 너는 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따져물을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해졌을까.

자신의 마음을 말할 때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한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유치한 질투라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해졌을까. 하지만 셰인이 차차에게 말해야하는 것은 그렇게 바보같을 정도로 유치하고 귀여운 투정이 아니였다.

그리드볼 선수였다는 것을 왜 차차에게는 말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셰인의 치부인 동시에 그만큼 차차를 의식했다는 고백이었다. 이젠 차차가 자신의 과거를 안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셰인에게는 그랬다. 셰인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차차가 적어도 석 잔은 비우길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셰인은 고민에 빠져 맥주 한잔을 정적 속에서 비우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시간 많냐?"

"오늘? 시간이야......"

차차가 셰인의 말에 대답하려 입을 열자마자, 방해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오래간만이다?"

 셰인에게는 짜증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셰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굳이 고개를 돌려 볼 필요도 없었다.

"너 왜 그러냐..."

"왜? 니들은 셰인한테 인사 안해? 정나미 없는 새끼들."

그는 자신을 말리며 어깨를 살짝 잡는 동료의 손을 팔꿈치로 쳐냈다. 한때 부모님보다 더 오래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옛 동료들이 어색하게 셰인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하고 캡모자를 까닥하며 대강 인사를 했다.  대여섯명 정도 되는 그들 대부분은 셰인의 후배였다.

"이제 나간 놈이라고 쌩까? 니들 너무하는 거 아냐?

셰인은 테이블 앞에 다가와 성큼 막아선 놈을 노려보았다. 조자콜라처럼 새파란 파란색 야구점퍼를 걸친 지저분한 덩치놈. 그리드볼 팀에서 쿼터백이었던 데릭이었다. 거의 늘 벤치로 빠졌던 셰인과 달리, 주전 쿼터백이었던 새끼.  감독은 그의 호전성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저 빌어먹을 쌈닭 본능 때문에 레드카드도 많이 받은 덕분에 셰인은 경기에서 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셰인 너 이 새끼 그동안 경기 안 오고 뭐했냐? 섭섭하게."

의도적인 셰인의 침묵에 그는 상대를 바꾸기로 결심한 듯 차차를 보며 떠들었다.

"안녕하세요? 와, 얘가 여자랑 둘이 있는 거 처음 보네. 얘랑 사겨요?"

차차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낯선 남자를 곁눈질로만 살피다가, 다시 셰인을 보았다. 차차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셰인에게 대답을 찾는 것만 같았다.

셰인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야. 데릭."

셰인은 데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꺼져."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드문드문 들리던 다른 테이블의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징글맞게도 헤실헤실 웃고 있던 데릭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셰인의 어깨를 잡았다.

"하. 새끼...여친 앞이라고 빼기는..."

셰인은 어깨를 잡은 데릭의 손을 강하게 밀어냈다.

"꺼지고 네 후배나 챙겨."

셰인은 뒤쪽에서 난감해하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후배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데릭은 눈썹을 더 찡그리더니 한 손으로 후배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구경났어? 니들 먼저 가서 앉아."  

 그는 손을 저으며 머뭇거리는 후배들을 반대편 테이블로 보내버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됐냐?"

이제 다 됐냐며 허락을 구하는 어투는 당연히 아니였다. 

"팀에 민폐만 끼치고 나간 새끼가 입은 뚫려가지고."

어떻게 그때랑 변한 게 없지. 셰인은 실소를 지으며 데릭을 올려다보았다. 이 자식은 일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모습에서 변한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저 놈이 변해버렸다면, 그 모든 게 자신의 실수였다 인정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욱 놀랄 일일 것이다. 작년 가을, 홈구장에서 결승진출을 내버려두고 선수의 부상으로 흐지무지 패배해버린 경기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셰인은 이쯤되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웃겼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나아지려고 할 때마다 자꾸 막히기만 할까. 늘 제자리걸음으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민폐는 네가 더 컸지, 성질머리 지랄맞아가지고 파울 때문에 점수 까먹다가 나랑 선수교체 당한 게 몇번이냐."

그래도 역시 화가 나기는 났던 모양이었다. 삼년 내내 머릿속으로만 하던 생각이 그대로 입 밖에 나오자, 다들-얼굴도 잘 모르는 후배들과 차차가지-놀라며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 새끼가 진짜..."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더니 데릭은 이를 갈았다. 셰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차에게 눈빛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곳에서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차에게 사과하고 어디로 가면 좋을지, 그냥 매일 가던 포차에서 오뎅국물이나 마셔야하나. 하고 태평하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꺄악-!!


자신의 뺨이 얻어맞는 소리에 연이어 곧바로 비명이 들렸다. 술집에 있던 다른 손님들 중 하나가 외친 소리같았다.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셰인은 가까스로 벽을 짚어 의자에서 굴러 넘어질 뻔한 몸을 지탱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뺨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통증의 아픔보다도 뺨을 주먹으로 냅다 얻어맞은 충격이 더 컸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셰인은 똑바로 서자마자 데릭의 배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야 이 새끼야!!" 

데릭은 맞고 나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데릭은 쿼터백답게 셰인의 멱살을 잡고 곧바로 바닥에 밀어넘어뜨리더니 배를 강하게 내려쳤다. 셰인은 그 덩치를 밀어내는 건 포기하고 맞서서 데릭의 얼굴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 뒤는 육탄전이었다. 자신이 언제 데릭의 코에서 코피가 흐를 때까지 때렸는지, 어느 때부터 일방적으로 맞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좆만한 새끼가!" 

어느새부터인가 주먹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던 사람들의 말소리도 희미해져서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맞서 때리던 셰인의 힘이 떨어지자 데릭은 기고만장한 채 입을 활짝 벌리며 큰소리를 질렀다.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지랄이야, 시발새꺄!"


아 그래. 나 별 거 아니다. 새끼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손가락이 까닥이지도 않았다. 지도 별 것도 아니면서, 지랄하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한심한 새끼한테 체급으로 당해내지 못해 바닥에 누워서 얻어터지고 있는 자기 꼴이 제일 우수웠다.


진짜 나는 왜 이리 되는 게 없지.

아니, 내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구나.


차차에게 나와달라고 한 게 근 일년간 제대로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오기라고 불려도 좋았다. 그런데 결국 이모양 이 꼴이었다. 옆에 있는 차차는 생각도 안하고  계속 멋대로 굴기나 하고. 한심했다.


왼쪽 뺨을 맞고 고개가 확 돌아가자 자신을 바라보던 낯선 사람 하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나 상대는 셰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잠깐 동요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나는 그냥 안 되는 새끼인가보다.

괜히 발악했어, 내가. 그렇게 후회해놓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한번 시작된 후회는 끝없이 이어졌다. 차라리 외면하던 게 마음 편했던 본심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것이라, 마주하고 나면 스스로 멈출 줄 몰랐다.


그저 조금만 더 욕심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어차피 잃을 거라면 한번만이라도 붙잡아보고 잃고 싶었는데.


조금 더 달라붙고 싶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셰인은 다시 자신의 멱살을 잡아 주먹을 드는 데릭을 말라지도 않고 그저 웃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셰인을 깨운 것은 차차의 목소리였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렇게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데릭은 셰인을 때리던 것을 멈췄다. 차차는 데릭과 자신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뻗어 데릭을 말리고 있었다. 자기가 말리는 놈은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훨씬 큰 근육질 덩치인데. 무섭지도 않은지 차차는 매섭게 데릭을 노려다보다 셰인을 붙잡았다. 자신을 일으켜려는 차차의 손에 이끌렸을 때 셰인은 다시 정신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속이 조금 울렁였다.

차차가 부끄럽지도 않냐고 따져 물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데, 듣고 있던 자신이 오히려 더 부끄러워졌다.


"셰인, 그만 가자."

차차는 셰인의 눈을 마주 보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차는 성난 데릭이 무엇이라 말하든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수근대는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차차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이제 가자."

셰인은 차차와 마주 잡은 손 끝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마주 잡은 차차의 손은 따뜻했다.

그날, 셰인은 가게 주인에게 사과를 하는 차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차라를 따라 기계적으로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정작 죄송해야할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셰인은 그가 사과를 하든 말든 차차를 따라 말했다. 술집에서 갑자기 행패를 부렸다는 게 부끄러웠고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죄 없는 차차가 먼저 고개를 숙여 낯선 사람들과 알바생에게 사과하게 한 것이 제일 죄송스러웠다. 셰인은 연달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술집에서 나오고 둘은 한동안 말 없이 걸었다. 갑자기 서늘해진 가을, 밤바람은 쌀쌀했지만 부어오른 뺨이 얼얼해서 오히려 서늘한 공기가 반가웠다. 셰인과 차차의 집은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있었고, 셰인은 도무지 그 사이 감정을 정리한다거나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집에 연고있어?"

침묵은 깬 것은 늘 그렇듯 차차의 한 마디였다. 그러나 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집에도 별 거 있는 건 아닌데 잠깐 들렀다 갈래? 씻고 약 바르고 가면 될 것 같은데..." 

셰인은 고개를 저었다.

"셰인...너 다쳤잖아..."

차차는 곁눈질로 셰인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데릭을 당당하게 말릴 때의 기백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셰인은 아까보다 더 굳게 입술을 닫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

차차가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돌려 차차가 사는 원룸을 가리켰다. 

"너..."

망설이는 음성은 계속 셰인을 붙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셰인을 뚫어져라 똑바로 바라보는 차차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그 티없이 맑은 시선이 자신을 더 옥죄었다.

"미안한데 제발 먼저 가라..."

셰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가 땅에 꺼지는 것처럼, 이대로 땅에 꺼져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셰인은 차차가 더 이상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천천히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한참 쌀쌀해지는 늦가을 밤에 차차를 거리 한복판에 홀로 두고. 차차가 자신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는 걸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셰인은 그날부터 차차를 만나지 못했다.


일단 차차를 만날 일이 딱히 없었다. 그동안 차차와의 만남은 차차가 먼저 편의점에 찾아오거나, 밥먹자는 연락을 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학교 학생이라도 해도 마음 먹기만 하면 졸업할 때까지 굳이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차차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연결될 이유가 없는 사이였다.

차차는 항상 셰인을 먼저 찾아줬다.

이번에도 그랬다. 차차가 계속 연락해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셰인은 메세지가 얼마나 왔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사흘 내내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편의점 출근에만 열중했다. 그 전에는 매일 같이 편의점에 들락거리던 차차도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솔직히 차차가 자신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다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다가 문득 딸랑이는 벨소리를 듣다보면 차차가 떠올랐다. 이 시간 때쯤에는 항상 왔는데 하고.


여기가 걔네 집에서 제일 가까운 편의점인데. 

야작할 때 불닭볶음면 먹고 싶을텐데.


말도 안 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사과해야할 것은 차차가 아니라 바로 자신인데, 마치 차차가 와주는 게 당연하단 것처럼 매일 차차가 편의점에 오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차차는 먼저 찾아오지 않았고, 아무리 느리게 느껴져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 오늘도 근무 시간은 끝나갔다. 이제 새벽 두시가 다 되었고, 샘이 올 시간도 지났다. 샘 녀석은 평소엔 십분씩 일찍 와서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사람 정신을 빼놓더니, 오늘따라 늦었다. 차차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편의점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샘이 도착할 때가지는 방도가 없었다.

정산을 마치고 셰인은 카운터 뒷편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결국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갔다.

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아무 의미없이 헛되게 하루가 흘러갔다. 앞으로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런 느낌이겠지. 지독하게 허무하고, 허탈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붙잡고 고집을 부려본 게 그리드볼이었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처참하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게 끝이 났다. 어렸을 때는 이 길이 후회없는 선택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지라는 게 있기는 한가. 의심이 피어올랐다.

예전에는 필드에서 상대와 부딪히고 굴러가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서둘러 일어나 상대의 허벅다리를 붙잡고 제대로 짓누르려고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다시는 필드에 자주 나가면 나갈수록 셰인은 그때의 그 선수가 아니였다. 언제까지나 주니어 시절과 같을 수는 없었다.  


기계적으로 수업을 듣고, 대충 한 과제를 시간에 맞춰 내고, 시간에 맞춰 대충 편의점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겨우 그것만으로도 유지되는 삶에 만족한 적은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뿐이었다.

차차를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그랬다. 


잡아서는 안 된다고, 잡을 수 없는 것을 아는데도......무리하고 싶어졌다. 


다시는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내 주제를 알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데도 또.

차차 네가 그대로 날 지나쳐버리게 두는 것도 사무치게 괴로워서.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편안해져야 하는데 매일 더 괴롭기만 할 뿐이었다. 


딩동-.


셰인은 딸랑대는 벨소리가  들리는 걸 알았는데도 고개를 푹 수그린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마감 시간대에 찾아온 손님이 차라리 나가줬으면 싶었다. 


"셰인."

어쩐지 차분한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차."

단 두 음절도 똑바로 발음하지 못하게 된 멍청이가 된 것처럼, 셰인은 멍하니 위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차차가 바로 셰인의 눈 앞에, 편의점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음...괜찮아?"

그건 자기가 물어볼 말이었다. 셰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진작 차차에게 말했어야했는데. 죄책감과 자괴감이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셰인을 날카롭게 찔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의 형태가 무엇이라고 하든 눈 앞의 차차가 훨씬 더 중요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냐."

셰인은 성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온 말은 생각보다 더 둔탁하게 들렸다. 

"어...미안해. 내가 좀 더..."

차차는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다가, 다시 웃음을 거두고 셰인을 살폈다. 셰인은 얼굴을 다시 확 일그러뜨렸다. 

아, 젠장.

미안해할 건 난데 왜 네가 머쓱해하는데.

셰인은 스스로에게 난 짜증을 애써 삼키고,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 찡그린 미간을 풀었다. 하여간 자신의 말투가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너...나한테 화난 거 아니였어?"

차차는 그런 꼴을 보고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셰인은 대답하는 걸 잊을 뻔 했다. 


그럼 그동안 안 온 건 내가 화났을까봐 기다린 거였구나.


자신이 싫어서나 실망해서도 아니였다. 오히려 자신을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차차는 셰인이 연락에 답을 하지 않은 데에도 화나지 않았다. 계속 자신을 걱정하기만 할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에게도 걱정 받고 싶지 않았었는데. 특히 그리드볼 때문이라든가, 옛날 동료에게 얻어맞는 꼴을 보였단 이유로 동정 받고 배려받고 싶을 리가 없는데. 빌어먹을 성질머리대로라면 분명 짜증이 나야하는데도......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안심되는 것을 넘어선 오묘한 안락함이 불안함을 녹여버렸다.

 

"...네가 뭐가 미안한데. 내가 다 형편없어서 그런 건..."

셰인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차차에게 서둘러 대답한다고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다 꺼내 보여주고 있었다.

"하...시발. 아니...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는데..."

셰인은 침을 삼켜 성마른 목을 축였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차차는 셰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날 많이 놀랐지."

셰인은 차차의 눈을 마주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진짜 미안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하고 나니...어렵지 않았다. 내내 말하고 싶었던 말이여서 그랬을까.

"그 날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였는데. 계속 꼴사나온 모습만 보이고. 미안하다..."

평소와 달리 역으로 조용해진 차차를 보다가 머쓱해진 셰인은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때 제대로 너한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무, 무슨 이야기?"

차차의 다급한 반응에 셰인은 조금 당혹해하며 말했다. 

"그거...그거 있잖아. 내가 너한테 말 못한 거."

차차가 잊었을 리가 없는데. 처음부터 그 일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그러나 셰인은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왜 말을 못했는데?"

다시 물어보는 차차의 얼굴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셰인은 무심코 내뱉을 뻔한 욕설을 겨우 삼키며 답했다. 사과할 때보다 훨씬 더 긴장되어서 등허리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거야 한심하고 쪽팔리니까...당연한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조심스러운 듯 말했지만 차차는 단호했다. 셰인은 잠시 고개를 들어 괜히 과자 코너를 노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느릿느릿 대답했다.

"알아. 하지만...그냥 네가 아는 게 싫었어."

"왜?"

차차가 빠르게 되물었다. 차차가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굉장히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붓기도 다 빠진 뺨에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시선을 어디다가 맞춰야할지 곤혹스러웠다.

"그건..."

도무지 솔직하게 극 이유를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건 내가 한심한 새끼라 말 못 하겠다."

셰인은 결국 털어놓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그냥, 적당하게 얼버무릴 말은 많았다. 부끄러운 일이라 굳이 내 입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든가. 그러나 아무리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 못해도 가짜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채로 입을 다물어버리려고 했다.

"어?"

차차는 당황해서 셰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아니...왜 자꾸 너한테 한심하다고 해?"

셰인이 예상한 사유와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치켜올라간 눈썹, 힘이 잔뜩 들어가서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는 갈색 눈... 차차가 화나는 모습은 상상한 것과 달리 좀 귀여웠다.

"...한심하잖아."

셰인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차차는 고개를 가로젖더니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왜 한심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잖아."

말문이 막혔다. 당황했는데도 목구멍 끝까지 부드러운 것이 차올라 입을 열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네 기분이 왜 나쁘냐..."

난처한 듯 웃으며 차차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차차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뭐라고?"

"그, 그거야...!"

차차는 더듬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건 셰인 너니까...!!"


차차가 크게 외친 말이 편의점을 울렸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가,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셰인은 느릿하게 차차를 향해 손이 뻗었다. 차차는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셰인의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너 지금...뭐라고..."

이럴 때 멍청하게 되묻기만 하면 안 되는데, 셰인은 조바심이 났다.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차차 네가 좋아하는 게 정말, 정말 나라고? 대체 왜? 언제부터?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지만 겨우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그게...몰라. 묻지 마..."

차차는 손틈 사이로 셰인을 잠깐 보다가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리곤 몸을 꼬았다.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해하는 저 모습은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았다. 

"이쪽 좀 봐봐."

"...아니...지금은 네 얼굴 못 보겠어..."

차차는 고개를 흔들면서도 슬쩍 손틈을 넓혀 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셰인도 차차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귀끝이 붉어진 게 보였다.


아, 진짜 귀엽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열이 돌아서 도무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다 차차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더 다가가고 싶었다. 잡으면 으스러질까 두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데도 꽉 쥐어잡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이라도 멋대로 굴고 싶었다.


"...야."

셰인은 카운터에 손을 짚고 차차에게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차차는 눈을 깜박거리면서도 손을 내리고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어...왜..! 왜?" 

"그대로 눈 감아봐."

셰인은 차차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차차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작은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겹치지는 감촉이 좋았다. 셰인은 입술을 떼는 듯 하다가, 곧바로 다시 입을 맞췄다. 어깨를 움츠리며 깜짝 놀라던 차차는 두번째 입맞춤부터 눈을 감고 가만히 셰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셰인은 눈을 뜨고 차차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면서, 차차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차차의 입술이 점점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셰인은 움찔거리는 작은 입술 바깥쪽을 살짝 깨물었다. 당혹감에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차차는 어깨를 떨면서도 얽힌 혀를 풀지 못하고 무방비하게 셰인에게 끌려갔다. 고개를 틀 때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흐읍, 하고 숨을 겨우 쉬는 차차의 억눌린 신음이 들릴 때마다 셰인은 아주 잠시 입술을 떼었다 다시 맞췄다. 

셰인은 오른쪽 손으로 조심스럽게 차차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려갔다.


너무 잘 맞았다. 차차의 입술은 자신에게 너무나 잘 맞았다. 

차차의 촉촉한 입술과 부드러운 머리결, 상기된 뺨의 홍조나 작은 혀의 말캉이는 이 촉감까지...전부 자기 것이었다. 셰인은 드디어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웃음이었다. 더 없이 행복했다.



새벽 두시 십삼분, 조자대 옆길 삼거리 빌라촌 골목 끝에 위치한 조자대6길점 조자24시는 늘 그렇듯 상시 영업중이었다. 다만 오늘은 원래 당번인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오는 중인 자색 머리 알바생이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인적이 한산한 거리에 영업중이던 가게는 문을 다 닫아 거리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자24시는 언제나 푸른 빛이 도는 형광등이 시리도록 빛났다. 저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그 빛은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나 그곳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했다.






EPILOGUE 1. 

Sam & Sebastian & Abigail 




"와, 대박."


새벽 두시 십분. 조자24시 편의점 맞은편 길에서 편의점을 바라보던 샘은 딱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샘은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선 친구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내가 이겼네!"


충격도 잠시, 샘은 생글생글 미소를 띄며 팔을 크게 벌리고 기쁨의 표시를 했다. 물론 그 팔은 애비게일을 향한 것이었다. 밴드 연습이 끝나고, 친구들에게 편의점에 들러달라고 조르고 졸라 조자24시 앞까지 왔건만....이런 대박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샘에게는 정말 기대 이상인 날이었다.

샘에게 거의 끌려오다시피한 밴드 맴버인 애비게일과 세바스찬은 뒤쪽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애비게일은 발을 까닥이며 오묘한 미소를 지은 채 편의점을 바라봤고, 세바스찬은 편의점에서는 시선을 돌린 채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편의점 안에선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았지만 바깥쪽에서 편의점을 보는 건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이 새벽에 유일하게 형광등 여러개를 켜서 전면 유리창이 번뜩이게 빛났기에 이 쪽에서는 아주 잘 보였다. 샘은 보고 싶어서 본 것이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서로에게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저거 누가 봐도 차차 언니가 먼저 고백한 거 아니야?"

애비게일은 특유의 옅은 미소를 띄우고 샘의 말을 가볍게 쳐냈다. 그러나 샘은 굴하지 않았다.

"아니지. 어쨌든 키스는 셰인 형이 먼저 할 거라고 내가 만원 걸었잖아. 맞았으니까 네가 돈 줘!"

"글쎄? 자세히 알기 전까지 못 주지."

애비게일은 검은색 조거 팬츠 주머니에 찔러넣은 두 손을 빼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세바스찬 둘을 바라보면서도 내내 흥미없다는 듯 담배 연기만을 내뿜을 뿐이었다.

샘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편의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두고 봐. 내가 지금 당장..."

그러나 샘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허망하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입맞춤이라고 생각했던 셰인의 키스가 아주아주 길어지고 있었다. 샘은 차차에게 몸을 기울여 탐닉하듯 강하게 입술을 맞대는 셰인의 옆모습을 약간 거북해하는 얼굴로 보다가 서둘러 말을 바꿨다. 

"...은 무리겠지만 내일 셰인 형을 탈탈 털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올 테니."

"뭐 그래. 어차피 고백은 차차 언니가 먼저 했겠지만...소식 들리면 다 알려줘."

애비게일은 샘의 자신 넘치는 호언을 의식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애비게일이 서 있는 자세를 바꿨을 때, 군화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작은 한숨 소리가 묻혔다. 


"아무리 봐도 차차 언니가 아까운데."

그렇게 말하는 애비게일의 표정은 특별하다고 칭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덤덤한 무표정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둘이 아주 좋아보이는데."

세바스찬은 역시 표정 없는 얼굴로 담뱃재를 털다가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다 잘된 거지!!"

샘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유쾌하게 엄지를 들어올려 '최고' 하는 표시를 해보였다. 

"그래."

애비게일은 금방 평소의 옅은 웃음을 지어 샘에게 대답했다.


"......근데 나 언제 알바하러 들어 갈 수 있을까?"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멍하니 편의점 유리를 들여다보다 못해 친구들에게 반문했지만...그 말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입을 다른 사람에게 쓰느라 정신이 나간 채였다.

"셰인 형만 이어주지 말고 나도 연애 좀 할 걸 그랬다."

샘은 어쩐지 아까보다 가을 밤바람이 더 쌀쌀맞게 옆구리를 파고드는 감각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샘이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계속 오늘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뉘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삼키고, 샘은 천천히 야상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결국 그날 새벽 두시 삼십분, 샘은 셰인에게 전화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화난 셰인에게 쌍욕을 들었다.






EPILOGUE 2.

Abigail & Chacha & Shane 



 

"셰인이랑 첫 키스 어땠어?"


햇볕이 기분 좋을 정도로 따스하게 내려쬐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천천히 가로수길에 떨어지는 가을 오후였다. 애비게일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차차는 애베게일의 눈이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는듯 빛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음...그게 사실은..."

차차는 당황스러워하면서 말끝을 흐렸지만 동시에 살짝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 애비게일에게 그렇게 키스를 오래할 줄은 몰랐다고 책망같은 놀림을 들은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차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조금 까끌까끌했어."

차차의 말을 듣자마자, 애비게일은 곧장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시원하게 웃어댔다. 

"아니!! 걔도 참 면도 좀 하지 정말..."

노골적인 웃음소리에 민망해졌는지, 차차는 큰소리로 외치다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헛기침을 해댔다.

"언니 얼굴 빨개졌네."

애비게일은 여전히 꺄르르 웃어대면서 차차의 붉어진 볼을 가리켰다.

"으...너무 놀리지 마!!"

차차는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며 몸서치를 쳤다. 애비게일은 그런 차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차차 뒤 편에 시선을 보냈다.

"...그래. 언니 남자친구 왔으니까 그만해야겠네."

"어, 셰인 벌써 왔어?"

차차는 활짝 웃으며 얼굴 핀 채로 뒤편을 돌아보았다. 과연 두꺼운 바람막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채 가로수길 저 끝에서 걸어오는 키 작은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남자는 차차가 자신을 돌아보니 잠시 멈추더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럼 이만 갈게. 둘이 저녁 잘 먹어."

애비게일은 차차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셰인이랑 인사하고 가."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그렇게 말하니 붙잡을 수 없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애비게일은 그 한마디를 두고 빠르게 다시 캠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차는 빠르게 멀어지는 애비게일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먼저 갔네."


셰인이 뒤에서 차차의 어깨를 쥐더니 자기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차차는 셰인의 품 안에 있는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차차는 아, 하고 소리내며 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둘은 몸을 돌려 상점가를 향해 내려갔다. 


"둘이 뭐했는데?"

"음...네 이야기!"

차차는 잠시 고민하다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뭐야, 내 이야기는 왜 해."

셰인은 투덜거리며 불평했지만, 그게 별 생각없는 볼멘소리일 뿐이라는 건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어...글쎄...네가 엊그제께 편의점에서..."

"아, 알겠어. 그러니까 그만..."

차차가 셰인의 옆얼굴을 힐끗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자, 셰인은 서둘러서 대답했다. 스스로도 부끄러운 줄 아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인상을 찌푸르는 그의 표정을 차차는 가만히 바라봤다. 



어느새 햇볕도 점점 옅여져 노랗던 빛이 붉게 잠식해가고 있었다. 차차는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셰인."

"어."

셰인의 말투는 언제나 무뚝뚝한 듯 들리는 말이었지만 조금 긴장한 채로 자신의 말에 집중하느라 그렇다는 걸, 차차는 이제 잘 알았다. 


"나 어렸을 때 화가가 되고 싶었어."

갑자기 꺼낸 옛날 이야기에, 셰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셰인에게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학원도 정말 열심히 다니고...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 좋아하고...아, 나 사생대회도 여러번 나갔고 그랬어."

굳이 옆을 바라보지 않아도 셰인이 어떤 얼굴로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 차차는 알고 있었다. 셰인은 모든 것에 무심한듯, 나는 상관없다는 듯 냉담하게 굴어도 차차의 말만큼은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음...근데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디자인과 쪽에만 원서 넣었어."

차차는 말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셰인의 걸음은 전보다 느려졌지만 멈추지 않고 차차와 함께 계속 걸었다.

"사실...마지막 수시 원서 봉투를 붙여야하는데, 그때 고민 제일 많이 했어. 우체통에 넣기 직전에 한참 그 앞에 서서 가만히 있었어. 이 원서만 보내지 않으면 원서 하나는 회화과에 써서 보낼 수 있는데...하고."

차차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저물어가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어렸을 때는 아침에 뜨는 해와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 하늘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고 싶었다.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었는데도, 이상하게 약간 미련이 남아 있었나봐." 

아무렇지도 않게 차차의 목소리는 고저도 없이 무덤덤했다. 셰인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조용했다. 


"음...셰인. 너는 내가 타협했다고 생각해?"

차차는 걸음을 멈춰 셰인을 돌아보았다. 

"끝까지 가서 부딪히지 않았으니까, 겁쟁이 같다고 할 거야?"

명랑하게 울리는 음성은 명료해서 물음이 아니라 선언과 같았다. 

셰인은 얼굴을 들고 눈썹을 찡그린 채 차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셰인의 얼굴은 차차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지독하게 슬퍼하면서도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옆얼굴은 차차는 혼자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다. 

"아니."

짧고, 조금 늦은 대답이었지만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안 그래."

절대로. 셰인은 그 말을 몰래 삼켰다. 

"그래! 그러면 됐잖아."

차차는 눈을 접고 환하게 웃었다. 바람이 불자 숱 많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셰인은 물기 어린 눈동자를 한 채로 웃어보였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셰인은 차차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차차의 옆에 섰을 때, 셰인은 처음으로 차차의 손을 잡았다. 


바람은 계속 불었고, 태양은 완전히 꺼져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로수들 사이 주홍빛을 내쬐던 가로등은 두 사람을 비춰 길을 밝혀주었다. 차차와 셰인은 아주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playlist. 


we fell in love in october - girl in red 

Orchard Waltz - 9와 숫자들

Wonderwall - Oais 

별똥별 - 전기뱀장어




그림 : 처돌이님





글연성 백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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