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낯]


명사

1. 물의 겉면.








그날은 비가 왔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정도를 모르고 점점 굵어져가더니,  오후가 되어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하루종일 어두웠고 그러면 아침부터 개운치 않았다. 자연히 하루종일 처지기 마련이었다. 세실은 그렇게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눈이라면 모를까. 겨울비라니 아쉬울 수밖에. 베수비아는 사시사철 지나치게 온난한 기후였다. 겨울이면 살을 벨 정도로 시린 칼바람과 함박눈이 몰아오는 조선과 달리 한겨울에도 눈이 한번 내리는 걸 구경하기 힘들었다.

좀처럼 무언가를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겨울비는 좀 싫었다.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게 비가 마구 오는 것도, 비가 와서 몸이 젖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보통은 비 오는 날이면 문을 걸어잠구고 방 안에 틀어박혀 과일이나 까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세실은 빠른 걸음으로 달음박질 치며 시장을 걸었다. 우산을 들고 가기는 했지만 어깨와 발목은 사선으로 쏟아지는 빗물에 전부 젖어버렸다. 그러나 세실은 그렇게 질색하는 물에 닿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비 때문에 더 빨리 걸어갈 수 없는 것을 답답해했다.



세실은 내달리듯 걷다가 모퉁이 끝에 서서야 숨을 골랐다. 시장의 끝부분, 주택가와 상가 사이에 우뚝 선 육오각형 모양의 삼층 주택이 보였다. 삼층 주택은 전체적으로 백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상아색이었지만, 맨 위에 얹혀진 동양풍의 푸른빛 기와와 둥근 창이 독특해 상가 곳곳에 화려하게 칠이 들어간 시장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세실은 그 집을 볼 때마다 얇은 은실로 장식된 담배갑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세실은 망설였다. 나무 차양이 일층 상점을 완전히 가린 채여서 가게 안을 볼 수 없었다.


오늘은 정기 휴일입니다. 다른 날에 다시 찾아주세요.


세실은 먹으로 흐트러짐 한 점 없이 반듯하게 적어내린 글씨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대문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대문에 달린 둥그런 문고리 위에는 나뭇가지에 앉은 길쭉한 새 한 마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 왔어."


빗소리에 파묻혀서 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문고리가 살짝 떨리더니 장식 새가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세실은 문고리를 강하게 잡아당겨 문을 열어젖혔다. 언제 망설였다는듯, 대문을 다시 닫지도 않고 그대로 빠르게 걸어들어갔다. 세실의 뒤에서 문이 혼자 잠기며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세실은 작은 정원을 지나 곧장 안문을 열었다. 



가게의 진열대에는 하얀 천이 씌워져 있고,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지만 역시 인기척은 없었다.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는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세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이층 왼쪽 복도 끝의 문 앞에서 잠시 숨소리를 골랐다. 신발을 벗어던진 세실이 나무문을 밀어 열자 욕탕의 열기와 자욱한 수중기가 세실의 시야를 덮쳤다. 나무욕조는 뜨거운 물을 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지 온통 김을 내뿜었다. 온통 뜨겁고 습했다. 세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고 내뱉었다.


"디로."


세실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세실을 돌아보았다. 


"왔구나."


물 속에서 어깨와 목선만 드러낸 채 목욕을 하는 디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커다란 나무 욕조통 안에 몸을 담군 채, 고개 한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세실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윤기가 도는 것처럼 매끄러워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짧은 머리카락은 얼굴에 착 달라붙어 물방울을 하나씩 떨구었다.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얼굴이었는데도 묘하게 수줍어보였다. 그의 촘촘한 속눈썹 사이에도 물방울이 맺혔는데 물방울이 떨어질 때, 눈 아래를 지나는 물방울 때문에 마치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물 속에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젖은 손은 세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실은 그의 손을 잡았다. 작고 얇은 그의 손은 부드러웠고 따뜻하게 젖어있었다. 그가 세실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을 때 세실은 자기도 모르게 큰 숨을 내뱉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욕실에 울려퍼졌다. 욕실을 가득 채운 뜨거운 물의 열기 때문에 다소 숨이 막혔다. 이대로 서 있다면 조금 어지러울 것 같았다.


"많이 젖었네."


그의 시선이 세실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지나갔다. 세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다 젖을텐데, 뭐."


일부러 넉살스런 웃음을 지었지만 디로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여전히 골똘하게 고민하는 듯 별 말이 없었다.


"괜찮겠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세실을 바라보는 그 표정은 그대로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며 묻는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역시 알 수 없었다. 그 무덤덤한 얼굴 아래의 감정은 그렇게 잔잔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괜찮다고 여러번 안 물어봐도 되는데.


말할 수만 있다면, 말해도 괜찮다면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심스럽게 굴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이 되려 그를 더 괴롭게 할까봐, 우리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할까봐. 너무나 이기적인 외침이 될까 무서워 입을 다물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세실은 조금 속이 상했다.


대체 왜 너는 나한테 자꾸 이럴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건데. 왜 자꾸 나에게도 의사라는 게 남아있는 것처럼 물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양해도 된다는 선택지를 남겨주지 않으면 좋았을텐데. 맨 처음 안아달라고 했던 그때처럼. 무리라도 원하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꼭 와달라고 강권했으면 좋을텐데. 차라리 우기기라도 하지. 오히려 그렇다면 섭섭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마주할 때의 세실은 평소의 자신이 아니었다.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당연하지!" 


세실은 평소처럼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세실의 목소리는 작은 메아리를 남기며 수중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세실은 그의 손을 놓고 팔을 들어올렸다. 흠뻑 젖어버린 망토 팔토시를 하나씩 풀고, 귀걸이와 반지를 수건 위에 올려두었다.


"너는 물을 싫어하니까……."


"괜찮다니까! 디로 너랑 같이 가는 건 언제든지 좋아."


세실이 고개를 저으며 외치자,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동굴처럼 둔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들렸지만 그래도 그 말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진심이었다. 

세실은 빠르게 옷 고름을 풀었다. 하나씩 벗은 옷자락이 허물처럼 바닥에 하나씩 떨어졌다. 옷을 개켜놓을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나야말로 들어가도 되는 거야? 이대로 들어가기에 너무 지저분하지 않나?"


"같이 씻으면 돼."


세실이 머리를 긁으며 어설프게 말하자, 그가 웃으며 세실의 손을 잡아당겼다. 접혀서 웃는 그의 눈매를 볼 때면…먹지도 않았는데 뱃속이 따뜻하게 불러오는 것 같았다. 세실은 발끝부터 뜨거운 물에 천천히 담구었다. 세실이 마침내 가슴까지 전부 들어가자 물은 찰랑대며 흔들리더니 욕조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위가 낮아지자 살풋 드러난 그의 가슴선이 보였다. 세실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그가 붙잡은 손가락의 얽힘과, 일렁이는 열기, 그리고 축축하게 온 몸을 적시는 수중기는 그대로 느껴졌다.


"기분 좋다……."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감탄사가 내뱉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뜻한 몸에 물을 적시니 뜨겁다는 느낌도 잠시 차가웠던 몸이 풀리면서 온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이젠 머리까지 열기에 잠식되어, 조금 몽롱했다. 산소가 약간 부족한 것처럼 답답한 공기였지만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드디어 들어가는 걸까. 그를 직접 만나 같은 곳에 몸을 담구고 있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세실은 어젯밤 작은 파랑새가 전해준 편지를 다시 떠올렸다.



세실.

너에게 내 공간을 보여주고 싶어.

아직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지만, 너만 괜찮다면.

내일 오후 신시(申時)에 우리집 욕실에서 들어가는 걸로 하자.


 

처음 디로의 편지를 읽었을 땐 조금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몰랐다. 자신의 등이 뻣뻣하게 긴장해있는데 이게 그저 떨림인지, 기쁨인지 혹은 겁이 나는 건지는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와 관련된 문제는 늘 그랬다. 너무 분명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알 수 없거나. 극단 뿐이었다.

필요한 내용은 전부 있었지만 세실이 가장 궁금한 부분은 없었다. 왜 하필 이럴 때일까. 저번의 소요 이후, 세실은 디로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몇 번 만나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기 때문에 세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날로 초조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그를 강하게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던 와중에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초대를 해온 것은 마냥 기쁘다기보단 좀 얼떨떨했다. 기쁘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이 마음은 무엇이라 불러야할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세실은 '들어갈게' 단 한 마디만 써서 답장을 보냈다. 종이 한 장을 꽉 채워 적은 답장을 찢어버리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자신이 소란스럽게 반기면 오히려 더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자 어떤 말이든 쉬이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고, 보여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기엔 아직 일렀다.


일전에 세실은 자신의 공간에 디로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디로가 자신을 초대해주는 것은 한번도 기대해보질 않았다. 

그때에도 디로는 자신의 공간에는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묻고 싶어졌다.


아스라도 들어간 적 없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동시에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마법사의 공간. 그곳은 어느 정도 훈련된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정신의 차원에서만 갈 수 있는 곳이기에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공간이기도 했다. 마법사가 자신의 공간을 직접 구상해 창조하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그 규모와 생김새는 완전히 달랐다. 누군가의 공간은 총천연색으로 빛나며 커다란 해마가 잔디밭을 지나가도 했고, 상상력이 부족한 마법사의 경우에는 베수비아 궁전의 모습과 똑닮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모든 마법사들은 그곳에 들어가 정신을 수양하고 마력을 회복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본인의 공간이라면 명상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었지만 둘이라면 절차가 필요했다. 일단 하반신을 담굴 수 있을 정도의 물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어설프게 마법을 쓸 경우에 상대방을 두고 가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마법이기도 했다.

디로가 재차 세실의 의사를 확인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처음이니 실수할 수도 있다고 디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실 역시 마법사였다. 무엇보다 디로가 잘못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물소리가 따라오더니 어느새 그의 얼굴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세실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세실을 안았다. 둘의 키 차이 때문에 디로가 세실의 품에 안긴 거나 마찬가지의 꼴이 되었지만, 세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면 입을 맞출 수도 있을 듯했다.  얼굴에 점점 더 열이 몰려왔다.

그의 살갗에 자신의 살이 스쳤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그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뱉을 때마다 자신의 목 뒤를 스치는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에 붙으니 그의 체취가 섞여들어왔다. 아몬드의 기름을 넣어 만든 향유와 자신이 이름을 모르는 꽃들의 향기였다. 그 향기처럼 온통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 몸의 윤곽과 감촉은 세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안으로 깊히 들어가고 싶었다.


세실은 디로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였다. 만져지는 뺨은 매끄럽고 자신의 손으로 전부 가릴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그는 세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가자."


"응, 같이 가자."


세실은 '같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수면을 향해 주문을 읖조렸다. 곧 수면이 거칠게 일렁이더니 물이 솟구쳐오르며 세실을 덮쳐왔다. 어두워져가는 시야 속에서도, 세실은 분명 그가 웃었음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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