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anie Martinez - Dollhouse

LUNA님 :)

드라큘라

Dracula
17




보통 정해진 시간보다 더 일찍 출근했던 여주는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머릿속을 헤집는 지난 기억들과 분노, 원망감, 그리고 한숨도 자지 못해 심한 숙취까지. 여주가 초췌한 얼굴로 들어서니 직원들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평소 행실이 바른 여주였으니 처음으로 한 지각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여주씨 어디 아파요? 옆자리 직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여주가 고개를 저으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말을 더 붙이려던 직원이 어딘가를 보고는 입을 꾹 다물고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분위기에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직원들이 하나같이 여주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주가 뒤를 돌았다.



"늦었네요. 팀장실로 오세요."



다른 직원들은 윤기가 화가 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윤기를 좋아하는 여주가 혹여나 상처받을까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여주는 그 말의 속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늦었다는 말은 여주를 애타게 기다렸다는 뜻일 거고, 팀장실로 오라는 건 어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겠지. 여주가 대꾸 없이 씹어버리니 직원들이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직급이라는 게 있으니. 결국 여주가 순응하고 일어나 팀장실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간 윤기가 팀장실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렸다.



"잠 한숨도 못 잤어?"

"누가 기억을 안 지워줘서요. 지워줬으면 다 까먹고 편하게 잤을 텐데."



여주가 비꼬며 답했다. 윤기가 미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건넸다.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윤기가 직접 여주의 손에 물을 쥐여주었다. 여주가 물병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쳤다.



"먹지도 않는 물이 여기 왜 있어요? 피밖에 안 먹으면서."

"너 주려고."

"..."

"마셔. 어제 술 많이 마셨잖아."



말문이 막힌 여주가 입술을 깨물며 물병을 뚫어져라 봤다. 사소한 배려에 또 바보같이 설레려고 했다. 그 마음을 일부러 외면하기 위해 책상에 소리 나게 물병을 내려놓았다. 윤기가 무표정으로 물병을 쳐다봤다.



"기억은 왜 다시 안 지웠어요?"

"..."

"팀장, 아니, 교수님. 아니. 그쪽 의지랑 다르게 내가 기억을 찾았잖아요."




"이젠 그쪽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민윤기씨. 기억 지워놓고 팀장으로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요?"



선을 긋는 여주의 말에 윤기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기억 조작이 실패한 건 천년을 살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 기억을 건드릴 때만 해도 여주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멀리서 지켜보겠노라 다짐했지만, 눈앞에서 기억을 되찾은 여주에게 한 번 더 능력을 쓸 자신이 없었다.



"…내가 나약해서 그래."



드라큘라가 나약하면 이 세상에 누가 세다고. 여주가 헛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금방 쓰던 가구 그대로 놓여있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방이 떠올랐다. 다시금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에 여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주가 쓰던 방이 그대로였던 것도, 여주가 다닌 회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했던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한번 시도했으면 끝까지 그렇게 내버려 뒀어야지."

"..."

"……일 년 동안 힘들었을 거 생각하면,"



울컥하는 기분에 여주가 말을 끊고 눈을 피했다. 빤히 쳐다보는 윤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지금처럼 보냈을 윤기를 생각하니 속이 상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여주가 뒤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안해."

"..."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럼 잘못 생각한 거예요. 여주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는 팀장실을 나갔다.








학술팀 직원들은 여주가 윤기에게 된통 혼이 나서 피하는 줄로만 알았다. 여주씨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데 처음으로 지각한 거 가지고! 다들 윤기가 나빴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여주를 달랬다. 여주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전혀 듣지 않았다.

수군대던 직원들은 팀장실에서 윤기가 나오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차피 안에서도 다 들렸을 텐데. 여주는 윤기의 발달한 청력을 떠올렸다. 윤기는 곧 출시될 신약의 팸플릿을 들고 있었다.



"이거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누가 담당했죠?"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여주에게로 향했다. …하필. 여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윤기를 돌아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윤기는 이미 그 담당이 여주인 걸 알고 묻는 거였다. 여주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윤기를 쳐다봤다.



"IL-6, CRP, IL-8 단백질이 감소했다고 쓴 건 잘했습니다. 근데 임상시험 ORR이 100%였던 결과가 빠졌네요. CRS나 NT 경험 환자가 없다는 것도. 그래야 의사들이 CAR-T 치료제와 같이 쓰지 않겠어요?"

*ORR: 객관적 반응률.

*CRS: 중증 사이토카인 방출 증후군.

*NT: 중증 신경독성.



아.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면역학 수업을 들을 때는 기습 질문에도 잘 받아쳤는데. 차이 나는 지식에 말문이 막힌 여주가 얌전히 팸플릿을 받아들었다. 수정해서 다시 제출해 주세요. 윤기가 팀장실로 들어갔다.

레퍼런스를 다시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주는 퇴근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수정을 끝냈다. 닫힌 블라인드로 빛이 새어 나오는 팀장실 앞에 선 여주가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다.



"들어오세요."



털 슬리퍼라도 신어서 발소리 안 나게 해야 하나. 여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팀장실 문을 열었다. 윤기가 보던 논문을 덮어놓고 여주를 올려다봤다. 여주가 인쇄된 팸플릿을 윤기에게 내밀었다.



"앉아요.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윤기가 팸플릿을 꼼꼼히 확인하며 말했다. 대화를 위해 부르면 여주가 오지 않을 걸 안 윤기가 일부러 공적인 일을 만든 거였다. 여주가 툴툴거리며 윤기 바로 옆에 놓인 의자를 책상 반대편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냥 여기 앉아. 윤기가 막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다.



"왜 갑자기 반말이세요."

"옆에 앉길 바라는 건 학술팀장이 아니라서."

"..."



훅 치고 들어오는 윤기의 말에 여주가 입을 꾹 다물고 앉았다. 윤기는 여주가 찾아온 레퍼런스를 확인하며 수정된 부분을 비교했다. 여주가 두발을 이용해 조금씩 조금씩 윤기에게서 의자를 멀리 떨어뜨렸다. 팸플릿에 꽂혀있던 윤기의 시선이 여주에게 향했다. 멀어지려는 의자를 당겨 둘의 무릎이 가볍게 부딪혔다.



"왜 자꾸 가."

"붙어있기 싫어서요. 다 확인하셨으면 가도 되죠."

"아니."



윤기가 책상에 팸플릿을 던지고는 여주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양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가둬진 모양새가 됐다. 여주가 시선을 피했다. 윤기가 돌아간 여주의 눈을 따라 고개를 꺾었다.



"화난 거 알아."

"모르는 게 이상하죠."

"네가 괴로워 보여서 그랬어."

"그러니까 그걸 왜 마음대로 생각해서 기억을 지우냐고요. 이렇게 되면 내가 화낼 거 몰랐어요?"

"응.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었으니까."



결국엔 돌아왔고 난 화가 나요. 여주가 또박또박 말했다. 사고 이후로 왜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죽는 것만큼 힘들었던 장례식 날 왜 옆에 있어 주지 않았는지. 여주가 서러움을 터트렸다.



"……네가 날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어."

"멍청이."



윤기를 확 밀쳐버린 여주가 일어섰다. 수정은 다 됐죠? 앞으로 일 얘기만 해주세요. 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윤기가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온 여주가 벽에 기대섰다. 윤기를 향해 드는 원망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영영 마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중적이고 복잡한 마음이 뒤섞였다.





Agnes Obel - Run Cried the Crawling

꼬오옥 틀어주세요







여주야, 많이 아프니? 모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주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으응, 그냥. 여주가 뒤집어쓴 이불에서 눈만 빼꼼 내밀며 대답했다.

꾀병이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는 윤기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급하게 박대리에게 연락해 연차를 냈다. 어제 여주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박대리는 바로 허락해 주었다.



"안 아프면 왜 그래?"



모친이 여주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며 다정하게 물었다. 여주가 말없이 모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부친의 죽음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 모친을 생각하면 윤기에게 고마웠다. 끔찍한 추락사는 윤기 말대로 괴로웠다. 기억하고 있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떠올라서."

"..."

"엄마는 어떻게 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말이야."



여주는 저보다 오래 산 모친에게 조언을 자주 구했다. 그 대상에 부친도 포함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으음. 모친이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그런 일들도 기억하려고 해.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르는 거니까. 네 아빠가 죽던 날도 그렇고."

"…교통사고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좀 나을 수도 있겠다. 엄마 기억까지 바꾼 건 고맙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 모친이 들으면 전혀 이해하지 못 할 말이었기에 경계심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여주는 납골당에서 봤던 모친의 똑같은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엄마? 여주가 모친의 얼굴을 살폈다.



"여주야. 기억 찾았니?"

"……뭐?"



여주가 충격받은 얼굴로 겨우 반문했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모친이 일어나 닫혀있던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여주가 막혀버린 말을 겨우 꺼냈다.



"그때 너 구해주러 왔던 남자 말이야. 소중한 사람이니?"

"..."

"여주 너랑 엄마가 많이 괴로워 보였나 보다. 행복하게 살라고 기억도 바꿔주고 가고."

"엄마 기억 찾았어? 언제? 아니, 그 사람이 그런 거 어떻게 알았는데?"



납골당에서. 모친의 말에 여주가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이었구나. 깨달으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모친은 여주와는 다르게 단단했다. 소용돌이치는 기억 속에서도 딸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모른척했던 거였다. 여주를 위해 기억까지 바꿔버린 윤기의 배려를 생각해 이후로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때 다 얘기했잖아. 뱀파이어라고."

"……아."



옥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뱀파이어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태형. 피 냄새에 반응하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속도와 힘을 보였던 태형과 윤기. 상황이 너무 끔찍해 잊고 있었다. 병원에서 회복하고 장례식을 치른 모친이 그날의 기억을 조금만 되짚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라는 것을.



"네 아빠가 그렇게 된 건 사고였어. 엄마는 그 사람 원망 안 한다고 좀 전해줄래."

"..."

"너도 그러지 말고."

"…엄마."

"널 얼마나 사랑하면 그랬겠니. 안 아프게 하려는 최선이었겠지. 엄마는 평생을 아빠한테 사랑받고 살아서 괜찮아. 그러니까, 여주 너도 널 사랑하는 사람한테 평생 사랑받고 살아. 엄마는 그거면 돼."



모친이 방문을 닫았다. 여주가 울음을 터트렸다.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모친이 기억을 되찾고, 여주가 기억을 되찾은 이유를.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뱀파이어의 능력을 거뜬히 뛰어넘은 거였다. 그만큼 여주는 윤기를 사랑했다.



"보고 싶어……, 민윤기."





"울지 마."



울던 여주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윤기가 열린 창문의 창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은은하게 윤기를 비췄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

"매일 왔었어요?"

"매일 왔고, 매일을 후회했어."



윤기가 창틀에서 내려와 여주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랑 하는 얘기 다 들었어요? 여주가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렇게 괴로워 보였어요?"

"..."

"그래 놓고 후회는 왜 했는데요."

"다시 날 사랑하려는 네가 예뻐서."



여주가 윤기를 껴안았다. 윤기가 말없이 여주의 등을 토닥였다. 맞아요, 나 괴로웠어요. 아빠가 떨어져 죽는 그 장면만 생각하면 끔찍했고 매일 악몽도 꿨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더 괴로운 게 뭔지 알아요? 여주가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뭔데. 윤기가 힘없이 물었다. 여주가 고개를 들어 윤기와 눈을 맞췄다.



"내 기억 지우고서 혼자 살아가려고 했던 당신이 안쓰러워서. 외로워서 친구도 놓지 못했으면서, 나 없는 몇백 년을 혼자 살아가려고 했던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서."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왜 혼자 힘 드려고 했는데요."




"……네가 아플까 봐."



바보. 멍청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 여주가 울며 윤기의 가슴팍을 세게 때렸다. 윤기는 가만히 맞기만 했다.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요, 나 달래줘요. 여주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윤기가 계속해서 저를 때리려는 여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너보다 더 많이 사랑한 건 아무것도 없어."



윤기가 여주의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 닦아준 손이 무색하게도 다시금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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