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


"지...!"

"응? 네?"

"아! 어, 어서오세요!"


말을 더듬던 이연이 밝게 인사했다. 의아해하던 손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섰다.


"아메리카노 따뜻하게 두 잔, 맞으시죠?"

"네."

"그럼 결제해드리겠습니다."


착착 주문을 마친 이연은 바로 그라인더를 작동시켰다. 원두가 잘게 갈리는 사이 곁눈질로 출입문을 쳐다봤다.


'이제 올 시간이 됐는데 말야.'


원두가 전부 갈리자 포터필터를 빼내어 서둘러 템핑까지 마쳤다. 에스프레스 머신에 끼워두고 샷을 뽑으면서도 흘끔흘끔 문가를 살폈다. 하지만 손님은커녕 아무도 근처에 지나가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었으나 주문이 먼저였다. 뽑은 샷을 스팀워터에 따르고 섞었다. 금방 향긋한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다. 테이크아웃 잔에 따른 뒤 뚜껑을 덮고 컵 홀더까지 완벽하게 끼워넣었다.


"아케리카노 두 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캐리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커피를 든 방문객은 출입문을 밀고 떠났다. 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까지도 지나는... 오지 않았다. 다른 날엔 꼬박꼬박 일찍 오는 애가 오늘은 정시가 다 될 때까지 모습조차 비추지 않았다. 아직 출근 시간이 좀 남긴 했으나 불안해진 이연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지나의 번호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거침없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여러 번 울렸다. 시간 초가 점점 길게 흐르자 조급해졌다. 왼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그때 기다리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렸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나야 어디야?"

- 응? 왜요?

"왜긴! 너 아직도 안 와서 전화했잖아."


연신 호들갑을 떨어대니 건너편에서 쿡쿡대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무색한 웃음이었다. 이연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틱틱거렸다.


"언니가 걱정하는데 웃기나 하고!"

- 하하, 아뇨 그냥. 언니는 미워할 수 없겠다 싶어서요.

"어엉? 무슨 소리야?"

"좋은 아침이란 뜻이에요."


이상하게 목소리가 한층 더 선명히 들렸다. 이연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놀랍게도 지나가 보란 듯이 서있었다. 이연은 화들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섰다.


"우왁!"

"왜 이렇게 놀래요?"

"너 언제 왔어? 분명 내가 제일 먼저 출근했었는데...."

"아아~. 언니 못 봤어요?"


지나가 등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락커룸이 있었다.


"안쪽 휴게실에서 잠깐 자고 있었어요."


직원들 전용인 락커룸 안엔 작은 휴게실이 함께 딸려있었다. 웬만하면 잘 이용하지 않아 문이 꼭꼭 닫혀있었기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픈 시간이니 더욱 그럴 만 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연은 번뜩 떠오른 의문을 표현했다.


"잠깐, 그럼 몇 시부터 출근한 거야?"

"엄청 일찍 오진 않았어요."


지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좀 피곤해서 혹시 못 일어날까봐 미리 온 거예요."

"그래도 집에서 편하게 자지 그랬어."


이제 보니 지나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항상 밝던 낯이 조금 어두워보였고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입 끝이 미묘하게 처져있었다. 이연은 함께 풀이 죽어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 때문에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네?"

"아니, 그렇게 나갔으니까.... 걱정 돼서."


한동안 눈만 깜빡이던 지나는 금방 푸스스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저번엔 오히려... 미안했어요."

"아냐! 오히려 내가 신세졌잖아. 죽도 만들어줬는데...."


말끝을 흐리던 이연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으악! 보온병 가져다 주려고 꺼내놨는데 깜빡했다!"

"흐흠, 역시나."

"미안.... 내일 가져다줄게."

"으응. 신경 쓰지 말아요. 급한 거 아니니까요."


이연을 토닥이던 지나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면 제가 직접 가지러 가도 좋구요."

"응? 뭐라 했어?"

"아! 연이 언니, 손님 왔어요."


때마침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따라 오픈 주문이 많이 없다 싶었더니 뒤늦은 손님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대화를 나누던 둘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손님들을 맞이했다. 다른 날처럼 바쁘지만 평화로운 근무시간이었다.


'다행이야.'


휴우. 샷을 내리던 이연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은설과 함께 했던 살벌한 삼자대면 이후, 어쩌면 지나와 사이가 소원해질까봐 내심 걱정했던 차였다. 하지만 기우였는지 착하고 귀여운 동생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나중에 제대로 소개하면 둘의 사이도 괜찮아지겠지.'


둘 사이 뭔가 오해가 있어서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게 틀림 없었다. 후에 가볍게 술이라도 마실 수 있는 자리라도 마련하면 틀림없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튼 생각에 빠져있으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몰려왔던 손님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카페 안엔 유려한 음악만이 흘렀다. 조금 있으면 오전 근무도 끝날 참이었다. 한층 여유가 생긴 카페 직원들은 가볍게 주위를 정리했다. 이연이 싱크대 물기를 닦을 때 묶었던 머리를 다시 정리하던 지나가 다가왔다.


"언니, 저 뒷머리에 핀 좀 다시 꼽아줄 수 있어요?"

"그래! 이쪽에 꽂으면 될까?"

"응. 잔머리가 자꾸 빠져나와서요."


이연은 작은 실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 뜨고서 열심히 지나의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잔머리를 한 데 모으느라 손길이 목덜미를 살풋살풋 건드렸다. 간지러운지 지나가 작게 꺄르륵거렸다.


"아하하, 간지러워!"

"에엥? 아무것도 안 했어!"

"살살 해 줘요. 살살."

"기다려 봐봐."


작게 혀까지 빼 문 이연은 집중력을 한 데 모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실핀을 뒷머리에 꽂아넣을 때였다.


"저기...."


실날같이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다. 바람 소리라고 착각할만큼 희미한 목소리였으나 어떻게 들었는지 이연이 즉각 반응했다.


"헉, 네! 잠시만요!"


실핀을 고정시켜 적당히 마무리 지은 뒤 잰걸음으로 손님에게 다가갔다. 카운터 쪽에 어떤 여성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메뉴판과 이연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조그맣게 벙싯거렸다. 아무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지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네!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연이 씩씩하게 답하며 포스기를 매만졌다. 계속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던 손님이 조그맣게 물었다.


"몸이 안 좋을 때 마실 만한 메뉴가 있을까요?"

"어디 아프세요?"

"저는 아니고... 저희 병원 선생님께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시길래요."

"그러면 티 종류로 보시는 건 어떨까요? 따뜻한 걸로 주문하시면 될 것 같아요."


친절하게 메뉴를 짚어주던 이연의 눈에 문득 여성의 차림새가 들어왔다. 남색 가디건 아래 병원 근무복.... 어디서 많이 보던 옷차림이었다.


"죄송한데 혹시 이 근처 다은 이비인후과에서 오셨나요?"

"네? 그걸 어떻게... 어라?"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손님이 처음으로 이연과 시선을 맞추었다. 몇 초간 뜸을 들이던 그는 뭔가 떠올랐는지 숨을 작게 들이켰다.


"최근에 자주 오시던 환자분... 아니, 채 선생님 손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이연은 헤실헤실 웃어댔다. 이제 보니 병원 데스크에서 몇번 눈인사를 주고 받던 직원이었다. 그래도 눈에 익는 상대여서 그런지 직원의 경계가 한층 허물어졌다.


"여기서 일하시나봐요."

"맞아요. 오전 근무만 하니까 다음에도 아침에 들러주세요!"

"...그럴게요."


직원은 수줍게 미소지었다. 뒤에 있던 지나가 뾰로통하게 쳐다봤지만 이연의 너른 등판에 가려져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런데 병원이니까 아프신 분은 바로 진료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게... 채 선생님께서 안 좋으신 거라서요."


엥?

이연은 그대로 멈추었다. 누가 안 좋다고? 누구? 채 선생님?


"누가 아파요?! 채 선생님? 설마...."

"네. 채은설 선생님이요.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시대요."


직원은 가디건 소매 끝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하시던데 좀 힘들어 보여서요. 따뜻한 음료라도 드릴까 해서 왔거든요."


믿을 수 없었다. 이연은 앞치마 끝을 꽉 쥐었다. 아침에 간단히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은설에게 아프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오늘 혼자 진료 보시는 날이어서요."

"......"

"그래도 한 시간 후엔 다른 선생님께서 와주신다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

"어,저기요?"

"...아!"


미동도 없이 굳어있던 이연이 뒤늦게 답했다.


"죄송해요. 어떤 거 주문하셨죠?"

"아... 아직 안 하긴 했는데 어-. 그럼 유자차 한 잔이랑요."


직원은 메뉴판을 짚어가서 음료 몇 잔을 주문했다. 다른 건 모두 차가운 음료인 걸 보니 유자차가 은설의 몫인 듯했다. 반쯤 넋이 나간 이연은 카드결제를 두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주문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뒤에서 빤히 지켜보던 지나가 다가와 알려주지 않았으면 영원히 재결제를 할 뻔했다.


"언니, 카드가 반대 방향이잖아요."

"아, 아아. 그렇네, 그치."

"...너무 걱정 말아요. 실려간 것도 아니잖아요."


대화 내용을 전부 듣긴 했다. 그렇다고 이연이 저렇게 넋이 반쯤 빠져서 허둥거리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까짓 몸살 쯤이야 뭐가 대수인가 싶었다. 게다가 의사면 알아서 주사를 맞든 약을 주워먹든 할 텐데 왜 저렇게 걱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탐탁치 않은 게 더 컸지만.


"일단 제가 샷 내릴게요."

"응...."


이연은 유자청이 든 통을 꺼냈다. 그리고 기다란 스푼으로 몇 술이나 크게 떠 컵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내려 붓고 휘휘 젓자 점점 노란색이 번져갔다. 그는 한손으론 끊임없이 유자차를 휘젓고 다른 손으로 슬쩍 핸드폰을 꺼냈다. 엄지로 톡톡 눌러 아침에 나누었던 메시지 대화를 훑어봤다. 역시나 아프다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일부러 말을 안 한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치만 아프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지나갈 수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유자차는 알맞게 완성되었다.


"언니, 다 됐어요?"

"응, 잠깐만."


테이크아웃 잔을 꺼내 담자 지나가 컵을 가져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병원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주문하신 음료들 나왔습니다."

"감사해요."


직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캐리어를 받았다. 야무지게 손잡이를 잡고 뒤를 돌아 출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막 문을 열어젖히려 했다.


"잠시만요!"


카운터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깜짝 놀란 직원이 어깨를 떨며 뒤돌아봤다. 카운터 앞에 서있던 이연이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언니, 왜 그래요?"

"지나야, 정말 미안. 나 일찍 좀 나가보면 안 될까?"

"네?"


그는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다행히 시침과 분침이 퇴근 시간 언저리에 걸려있었다.


"부탁할게. 은설 씨가 아픈가 봐.... 걱정되서 좀 가보려고."

"아...."


지나는 숨을 꾹 참았다. 마음 같아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자신은 자격이 없었다. 초라한 패잔병일 뿐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심을 눌러담았다.


"...그래요. 먼저 가요."

"고마워!"


어찌나 기뻤는지 이연이 지나를 꽉 끌어안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욱신거리는 가슴에 지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남의 속도 모르는 그는 금방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고 뒤에 우두커니 서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저기,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네?"

"제가 가봐야겠어요."


영문을 모르는 직원이 물음표를 띄운 사이 이연은 번개같이 탈의실에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앞치마를 던져두고 겉옷을 팔에 휘휘 감아 밖으로 뛰쳐나왔다. 카운터 밖으로 나가기 전 이연은 한번 더 지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 지나야. 진짜로."

"아녜요. 대신 나중에 부탁 들어줘야 해요?"

"물론이지! 그럼 가 볼게!"


벌컥, 카운터 문을 열어젖힌 그는 성큼성큼 직원에게 향했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 끌었죠?"

"아니에요. 그럼... 가도 될까요?"


이연은 대답 대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직원은 꾸벅거리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둘은 나란히 보도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좀 있으면 저희 점심 시간인데 괜찮으세요?"

"어차피 진료 받을 거 아니어서요."


그러던 이연은 직원이 들고 있는 음료잔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5잔을 주문했기에 4구짜리 캐리어엔 아이스 카페라떼들이 담겨있었고, 유자차는 다른 손에 들려있었다. 이연이 커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캐리어 제가 들까요? 무거우니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아아, 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그가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럼 유자차는 제가 들고 갈게요."

"네? 제가 들어도 되는데...."


이연은 기어코 직원의 손에서 유자차를 가져왔다. 두 손으로 감싸자 정성껏 탄 차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는 직원에게 씩 웃어보이며 덧붙였다.


"은설 씨가 마실 건데 식으면 안 되잖아요."

백합 원두를 사용하여 맛이 좋습니다. 메일 : cottenlatte@gmail.com 트위터 : @CottonLatte_ice 출간작 : 케이지 매치 / 원수 그대로 출간 예정작 : Follow Up 투비 독점 연재작 : 멜라토닌(Melat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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