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 나는...

 끊어지는 여자의 말에 눈이 뜨인다. 부드러운 잠옷 위로 새싹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뻐근한 어깨를 꾹꾹 누르며 옆을 돌아본다. 제이드, 라는 이름은 그이의 눈을 부르는 거 같다. 녹색이 우거진 눈동자로 나를 담는 사람. 숲으로 들어가면 다시 똑같은 길로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을 향해 계속 걸어오는 시선을 껴안는 눈꺼풀. 느리게 깜빡거린다. 오늘은 무엇을 만들어 주면 좋아할까. 에녹은 악마다. 하지만 악마로 사는 법을 잊는 중이다. 아무래도 자신은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이데아를 모방해서 태어난, 리플리컨트일지도 몰랐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지내봤기에. 가고 싶은 곳을 긴 날갯짓만으로 돈도 안 내고 여행할 수 있던 경험이 여행 이외로 쓸모 있어지는 순간은 앞치마로부터 시작하는 삶을 보내는 중이었다. 몽마인지, 아니면 부엌의 정령인지.

 

 아침부터 향긋하게 채소가 코를 간지럽힌다. 제이드는 갈색 머릿결을 라일락으로 물들이는 분홍색 커튼이 휘날리는 아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마다 꼭 다른 요리를 만들어서 차려주는 연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로 턱을 받치며 지긋이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뭐 만들고 있어, 에녹?

 에녹은 고개를 돌리고 환하게 눈웃음을 짓는다.

 일어났어? 라따뚜이 만들고 있지.

 머리카락에 쥐라도 숨어 있어? 더벅머리에.

 농담하기는! 그럴 리가 없잖아? 에녹은 대신 머리 뒤에서 꼬리 끝부분이 툭 튀어나오는 걸 보여준다. 뭐야 이게. 얼른 와서 드시지요? 시답잖은 유머를 나누며 식탁에 앉는다.

 

 제이드는 에녹의 요리 실력이 신기했다. 자신이 몇 살인지 모르는, 그냥 악마도 아닌 몽마. 그의 요리 실력은 이중도 아니고, 다중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데. 자신이 가보지 못 한 나라의 음식이라도 먹어보면 그 나라는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에녹, 너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나라에 정착해본 거야?

 나? 글쎄... 유명한 곳은 정말 많이 가봤지?

 그의 말은 정말이라는 듯, 이탈리아와 러시아,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중국과 일본... 그러면서도 영어를 국어처럼 쓰는데. 도저히 국적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몇 곱절은 살아본 에녹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실례였을지도.

 

 토마토와 가지, 애호박 위로 바질을 뿌리고, 올리브 오일을 둘러서 오븐으로 굽기. 그것만 가지고 프랑스에 온 기분을 낼 수 있다니. 제이드가 프랑스는 가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제이드는 어딘가 서러웠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보러 여행은 가고 싶은데. 이미 에녹은 지겨울 정도로 지내봤겠지?


 에녹.

 응, 제이드 씨?

 너가 안 가본 곳은 어디가 있어?

 제가 안 가본 곳? 으음... 그건 왜요?

 제이드는 포크로 라따뚜이를 휘적거리고만 있다.


 너도, 나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같이 여행 가고 싶어. 나는 너하고 여행을 가면,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사랑을 주고 싶은데. 너는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거 아냐. 그래서 유명한 곳도, 들어보지 못 할 법한 곳도 전부 가보고. 그렇다고 우주를 갈 수도 없고... 언젠가 신혼여행을 간다면 그런 여행을 가고 싶어서.

 신혼여행이, 이. 아.

 에녹은 꽤나 당황스러워 한다. 그런 포인트에서 서러워할 수 있다니. 제 연인이 귀여워서 뺨이 붉어졌다기보단,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너무 오래 살았어도 문제네.

 하, 하지만 저는 제이드하고 어디를 가도 정말. 행복한데!

 너는 그렇겠지만. 나는 더 잘 해주고 싶어. 내가 한 짓도 있는데.

 글쎄. 그건 잊기로 하지 않았어요? 오늘 따라 왜 이래, 우리 제이드 씨. 악몽이라도 꿨어요?

 그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쨌든. 말해봐. 한 군데는 있을 거 아냐.


 에녹은 이미 대답할 준비를 마친지 오래다. 악마니까. 주변에서 가지 마. 가지 마! 가면 죽는다고 몸서리를 치던 곳. 생각해보니 평생을 가보지는 않았다. 한국의 붉은 십자가 지뢰밭과 마늘 암살자들이 판치는 땅보다 훨씬 성스러운 땅이 있었지.


 음. 으음. 제이드. 정말 다 갈 수 있을리는 없으니까. 하나만 골라요.

 역시 있구나. 다행이다.

 다행인 거 아닐지도 모르는데요?

 어디길래 그래, 에녹?

 바티칸. 예루살렘. 베들레헴이요.

 너무 성스러운 지명들이 나타나자, 제이드는 다물리고는 꼬물거리는 에녹의 입술이 멀쩡할까 걱정이 된다는 명분으로 입술을 맞춘다.

 가, 갑자기. 갑자기 왜!

 이탈리아는 또 가봤으면서. 바티칸은 안 갔다는 게 귀여워서.

 


2월 14일 출생. 감정을 글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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