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영어 대화입니다!

 




졸업식의 가운데 선 동혁은 이제는 익숙한 제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독히 싸우고도 저렇게 사이가 좋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것 같았다. 동혁은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민형에게 눈을 돌렸다. 내게 편지를 전해주던 그 조그마한 아이가 참 많이 컸다. ‘여주’의 진짜 혈육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저 애의 얼굴에서 너를 찾을 수 있을 텐데. 분명 네가 있을 텐데.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동혁은 저와 달리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봤다. 모두 갈 길이 있고, 가고 싶은 목표가 뚜렷한 얼굴들이다.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너희는 알까. 길거리의 이정표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 되고 또 삶이 된다. 너희는 어떨까.

시선을 느낀 동혁은 목걸이를 옷 안에 넣고 저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민형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여전히 ‘여주’의 얼굴은 없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또 나를 알아본다. 동혁은 한숨인지 삶의 무게인지 모를 숨을 뱉으며 벽에 기댔던 몸을 떼어냈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민형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고, 동혁은 기꺼이 들어주겠단 듯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여주’를 많이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것.

 

 

“…졸업 축하한다, 이동혁.”

“너도.”

“앞으로는 뭐 할 생각인데?”

“글쎄….”

 

 

동혁은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렇다 할 계획이 없었기에 그런 답이 고작이었다. ‘여주’를 찾아야겠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여주’를 찾고 난 뒤는? 영원히 이렇게 살까.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여주’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어서 나를 만나러 올 때까지. 비죽 웃은 동혁은 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운 다홍색 저고리를 떠올렸다. 그때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싱거운 대답에도 민형은 그럴 줄 알았단 듯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동혁이 다정하다고 했지만, 민형이 본 그는 제 좋을 대로 행동하고 사는 무엇이었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것 같은 그런 존재. 민형은 그의 얘기를 하며 행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 보였던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저도 그때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도 안다. 눈앞에 그 증거가 있다.

할머니의 마이애미가.

그녀의 캐비넷.

민형은 어머니에게 받은 꽃다발에서 하얀 안개꽃을 한 움큼 뽑아 동혁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주는, 아니, 할머니의 손자로 주는 첫 선물이자 기원이었다. 부디 할머니를 잘 찾아가길.

 

 

“뭔데, 이거.”

“졸업 축하한다고. 내가 너한테 주는 꽃.”

“…별걸 다한다.”

 

 

동혁은 어이가 없단 듯이 웃으면서도 꽃은 거절하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안개꽃의 의미는 뭘까. 문득 꽃말이 궁금해졌다. 머나먼 과거의 ‘여주’는 그런 걸 곧잘 궁금해했기에.

할 말을 끝낸 민형은 머쓱하게 제 목덜미를 문지르다 고개를 까딱이고 몸을 돌렸다. 동혁에게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그가 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길로 영영 이별인 걸까. 할머니의 그것이었다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와 추억을 공유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를 그렇게 싫어했을까.

아니, 내가 걔를 싫어했지.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으니까. 민형은 그제야 동혁의 날 선 반응과 고고한 자태를 이해했다. 그토록 재수 없어 하던 부분이 사실은 사랑이고 약속이었다. 그것도 평생 사랑하는 그의 ‘여주’이자 나의 할머니와의 신실한 약속.

민형은 이게 끝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났던 것처럼 그는 또다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타나리라.

 

 

“…야, 할머니는 마이애미의 캐비넷에 계셔.”

“….”

“…간다.”

 

 

할머니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리라.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가족이었으니까.

 

동혁은 점점 더 멀어지는 민형을 바라보다 안개꽃을 가슴에 꽂았다. 아니, 이제야 ‘여주’와 닮은 구석이 심심찮게 보였다. 어디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동혁은 그렇게 느꼈다. 청명한 하늘은 영원히 맑고 푸를 것처럼 투명했고, 아이들은 졸업을 즐기고 슬퍼하며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리고 동혁의 친구들 역시도.

작게 웃은 동혁은 초코 바닐라 맛 막대 사탕을 입에 물며, 홍조가 올라온 여주를 슬쩍 바라봤다. 이제는 퍽 달콤하게 웃는다.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두려운 게 없다는 것처럼 웃어야지. 그래야 남은 날들도 잘 살 테니까.

그날, 동혁은 친구들과 가볍게 가진 뒤풀이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여주’에게 제 친구들을 소개해야 하니 여기서 끝은 아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두가 아는, 그 일을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마이애미로 가자.

나의 태양을 찾으러.

 

 

 

 

나는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대를 진학했다. 퀼 아트 하이스쿨에서 받은 좋은 성적과 교내 경연에서 우승한 경험으로 물 흐르듯 흘러갔다. 거기에 원어민과 소통해도 어색함 없을 정도의 영어까지. 말 그대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유학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졸업 이후 캐나다의 친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동혁은 마이애미로, 조와 제인은 프랑스, 인준은 호주, 다른 애들은 캐나다의 다른 지역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보던 친구들이니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하긴, 나만 해도 한국에 왔는데. 한국의 친구들도 충분히 많고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캐나다는 단 하나의 소장품처럼 특별했다.

민형은 여전히 캐나다, 그 집에서 살며 프로 데뷔에 성공했다. 그는 퀼 아트 하이스쿨의 자랑이자 명예였고 친구들의 희망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단박에 우승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나는 알았다. 그 애의 열정을 알고, 재능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그 후 조 역시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렸지만, 대학 진학을 꿈꿨기에 그 인기를 프랑스 국립 예술대에 쏟았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조의 합격 소식에 그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두개골이 아찔했다.

우리는 당연히 장거리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고비도 몇 번 있었다. 나는 그의 팬들을 질투했고, 민형은 내 마음이 멀어질까 매번 초조해했다. 얼굴을 직접 보고 얘기하지 못하니 숨기는 말들이 많아지고 속상한 대화가 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 다 언성을 높인 적은 없다는 점이다. 헤어지기 싫었고, 크게 싸우면 붙잡으러 가기도 힘드니 서로 참 많이도 참았다. 대부분 민형이 숙이고 들어갔지만.

친구들은 우리 둘의 사랑싸움에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영영 헤어질까 덜컥 겁을 냈다. 우리를 버리지 말라는 조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크리스탈, 제인, 제임스 그리고 제노까지. 그럴 때면 한국에 있는데도 캐나다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영영 열여덟인 것 같은, 그런 향수가 흘렀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좋았던 만큼 힘든 기억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 좋은 순간만 만끽할래.

 

 

나재민

> 우리 진짜 일주일 뒤에 보는 거야?

 

 

이동혁

> 어 진짜 본다니까

> 그만 좀 물어봐

> 하루에 이 말만 몇 번을 하는 거야?

 

 

인문학 강의를 듣던 중 핸드폰이 몇 번 울렸다.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화면을 슬쩍 밀고 두드리니 또 재민의 확인 질문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한국 여행을 계획했고, 일주일 뒤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을 벌써 수십 번 물어보니 동혁이 짜증 낼 만했다. 뒤이어 크리스탈이 설레 죽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꼬리를 물듯 조가 튀어나왔고, 민형이 끝을 장식했다. 그의 이름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었다. 화면에서 보는 것 말고, 진짜 얼굴을 보는 게 몇 달만이야.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내가 민형의 연인인 걸 안다. 요즘 시대는 참 무섭다. 직접 보지 않아도 외국의 프로그램을 볼 수 있고, 민형을 발굴할 수 있다. 유튜브의 힘을 빌린 민형은 한국에서도 퍽 유명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게 매번 신기했다. 한국 사람들이 널 안다니. 내게는 여전히 그 학생회장인데.

안 그래도 유명한 민형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건 러브스토리라고 하기도 참 민망한 우리의 일화 때문이었다. 으레 모든 스타들이 그렇듯 민형 역시 과거가 까발려졌다. 그의 폭력을 두둔할 수는 없으나 내가 용서했으니 됐다. 그걸로 다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페어 프로그램 영상이 민망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의 그림 역시도. 그걸 영상으로 찍었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낙지처럼 꾸물거리는 내 흑역사가 인터넷에 영영 박제됐다. 애들은 스타가 다 됐다고 하지만 나는 영 모르겠다.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이 대문짝 하게 찍혀있는걸.

영상이 털렸는데 사진이 안 나올 리 없었다. 물총 축제 때 사진부터 졸업 사진까지 완전히 탈탈 털렸다. 민형은 그걸 지독히 싫어했지만, 나는 모두에게 내가 여자친구라고 알린 기분이라 나쁘지 않았다. 걔의 세상은 이제 작은 학교가 아니었다. 더 넓었지. 내게도 안전장치는 있어야 했다.

 

 

>  바빠?

< 음, 나 강의 듣는 중.

> 아쉽다, 전화하고 싶었는데.

< 할까? 어차피 이거 시험은 다 봤어. 보강이라 괜찮아.

> 너만 괜찮으면.

< 오 분 뒤에 걸게. 나 몰래 나와야 해서.

> 천천히 해.

 

 

단체방을 멍하니 보던 그때 상단바에 새로운 메시지가 비죽 떴다 사라졌다. 두더지 잡기 하듯 누르자 민형의 유혹이었고, 나는 당연히 넘어갔다. 교수님의 눈치를 살핀 나는 결린 허리를 푸는 척 비틀며 가방에 노트를 쓸어 넣었다. 교수님이 칠판을 보실 때 필통, 다 마신 음료병을 하나하나 쑤셔 넣은 뒤 그가 칠판에 뭔가를 적을 때 잽싸게 튀어나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으니 나 하나 정도는 교수님도 모르실 게 분명했다.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보강도 짧게 하시지….

나는 들리지 않을 건의를 투덜거리며 가방을 제대로 메고 데이터를 켰다. 민형과 행복한 연애를 위해 요금제까지 무제한 데이터로 바꿨다. 남들이 듣지 못하게 이어폰까지 끼고 메신저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명쾌한 신호음이 이어졌다. 몇 초 가지 않아 전화를 받은 너는 기다렸단 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낮게 웃었다. 그게 좋아 뺨 근처가 근질거렸다. 벌써 사 년째 만나는 건데도 매번 첫날인 것처럼 설렜다.

 

 

“짐은 다 챙겼어?”

당연하지. 내일 오후 비행기니까, 들어가기 전에 메시지 남길게.

“…빨리 보고 싶다.”

나도. 어제도 너 보고 싶어서 잠 설쳤어. 빨리 안고 싶기도 하고….

“그런 말을 꼭 지금 해야겠어…?”

어, 난 차 안이거든. 더한 것도 들려줄 수 있는데, 할까?

“…제발, 나 아직 학교야….”

 

 

사람 없는 강의실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게 외설적인 대화를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의자를 빼 앉으며 붉어진 뺨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스물이 되는 날, 제야의 종이 울리는 날, 민형은 내게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했고 나는 응했다. 이 년 동안 키스만 하고 살았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더 닿고 싶기도 하고….

아니지, 이 이야기로 빠져서는 안 되지.

나는 잽싸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고 다시 여행 얘기로 방향을 틀었다. 민형은 비밀리에 다른 애들보다 5일 먼저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방송을 핑계로 먼저 떠나는 거지만, 사실 나를 만나러 온다. 그것도 반년 만에. 마음 같아서는 매일 보고 싶으나 나는 학업을 위해 한국에, 그는 그만의 일을 위해 캐나다에 있어야 했다. 누구 하나 거처를 쉬이 옮길 수 없었다. 서로의 일을 사랑하고 예술을 존중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남았다.

학교에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나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캐나다는 그 목록에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미국이 있긴 했으나 민형의 에이전시와 거리가 차를 타고 꼬박 이틀이라 쉽게 만나지 못한다는 건 비슷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내 나라에서 마음 편히 있는 게 낫다는 게 결론이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영어를 좀 해도 편하기는 우리나라가 편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더 자주 많이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사귄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네가 말한 것도 사뒀어. 그 색으로.

“진짜? 어떡해, 나 너무 좋아….”

또 더 필요한 거 없어?

 

 

민형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좀 미안하지만, 지금처럼 그를 통해 물건을 살 때가 있었다. 한국에서 출시되지 않는 운동화라든가, 립스틱 혹은 옷까지. 직구를 하는 방법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어렵고, 한국에서 구하려면 피가 너무 붙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5만 원짜리 신발을 40만 원에 파는 건 너무하잖아. 그 돈을 주느니 민형 혹은 친구들에게 부탁하는 게 나았다. 고맙게도 내가 돈을 주며 제품을 상세하게 알려주면 애들이 물건을 사서 보냈다. 민형은 돈도 받지 않고 무료 봉사였지만.

운동화만으로도 고마운데 더 필요한 거라니.

음, 있긴 하지.

 

 

“있어.”

뭔데? 내일 출발하기 전에 살,

“…너….”

 

 

흐흐, 참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한테 가장 필요한 건 너지, 뭐야. 반년을 못 보니 얼굴도 잊겠다 싶었다. 매일 밤 화상 통화를 하긴 하지만, 대면과 비교할 수 없었다. 종료 버튼을 끄면 얼마나 외롭고 사무치던지. 문을 노크하면 바로 만날 수 있고, 네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홈스테이가 그리웠다. 캐나다의 그 집이.

잠시 말을 잃은 너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이 내 귀에 닿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에 허리가 이리저리 꼬였다. 간지럽고 부끄럽다. 그래도 좋아서 자꾸만 입술을 깨물게 된다. 아, 빨리 보고 싶다. 빨리.

 

 

나도 네가 필요해. 이번 일 끝나면 한국에 좀 있을까 하는데, 어때?

“진짜로…?”

응. 일은 한국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안 그래도 우리 쪽에 컨택 들어온 게 몇 개 있어서. 우선 팀이랑 상의해봐야겠지만, 다들 긍정적이라 될 것 같아.

“언제? 언제 확정 나는데?”

그래도 한 달 내에는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민형의 얘기는 내게 달콤한 환희를 가져다줬다. 이번 여행 이후에도 볼 수 있다니. 당분간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니. 심장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아니, 떨어지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나는 핸드폰을 꼭 잡고 제발 결정이 좋은 쪽으로 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내가 캐나다로 가면 되니까, 제발, 제발. 무릎 꿇어서 될 일이면 나는 수천 번이고 꿇을 수 있었다.

너는 내 소원을 아는 것처럼 나른하게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분명 한국으로 가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새 운동화 신을 준비만 하라면서 나를 간질였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다정한 음색으로.

 

 

**

 

 

민형이 도착하기 두 시간 전부터 인천 공항에 도착해 게이트 근처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었다. 커피와 베이글을 먹으며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결국 반 이상 버리고 게이트만 노려봤다. 다리가 아니라 몸 전체가 떨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심장은 이미 나가떨어졌을지도.

입국 게이트가 서너 번 열리고, 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자 민형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전광판에 떴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두 눈으로 보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네가 진짜 오는 거야, 진짜로. 나는 급히 핸드폰 화면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붉게 상기된 뺨을 문질러 식혔다. 아, 어떡하지. 반년 만에 보는 건데….

민형은 매번 볼 때마다 선이 점점 더 굵어지고 분위기가 더욱이 묘해졌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저미고 꼼지락거릴 정도로 학생 때 모습이 사라졌다.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보다 더 먼저 사회에 뛰어들어서?

다시 한번 입국 게이트 문이 열리고 묵직한 짐을 끄는 사람들이 대거 쏟아졌다. 캐나다에서 오는 거니 이전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너를 단번에 알아봤다. 까만 볼캡을 푹 눌러쓰고 피곤한 얼굴이나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이민형, 너를.

 

 

“민형아!”

 

 

내 부름을 들은 너는 긴 팔을 크게 흔들고 단숨에 걸어와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 귀 바로 옆으로 울리는 걸걸한 음성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네 허리를 감싸자 귓불에 말캉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쪽.

 

 

“그새 마른 것 같아. 시험 기간이라고 또 잘 안 챙겨 먹었지.”

“…아니야, 나 좀 쪘어.”

“찌기는. 안는 것부터 다른데.”

 

 

나는 붉게 타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소심하게 대꾸했다. 시험 기간에 식사를 거르는 버릇은 캐나다에서도 있었다. 성적 욕심에 주방으로 내려오질 않으니 너는 밥을 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네가 만든 볶음밥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한 뒤 떠났다. 같이 살 때는 그렇게나마 챙겼지만,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있으니 영 불안한 얼굴이다. 음, 솔직히 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빠지지도 않았다. 밥이야 시험 끝나고 먹어도 되는 거잖아, 그치?

민형이 2주 동안 한국에서 머무는 만큼 짐도 많았다. 32인치 캐리어 두 개, 백팩 하나. 하나도 힘든 캐리어를 두 개나 그것도 32인치니 입이 떡 벌어졌다. 뭘 이렇게 가져온 건지 황망한 얼굴로 그와 캐리어를 번갈아 바라보자 다 쓸모가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쓸모가 있다? 이대로 한국에 눌러살려고 온 거면 좋겠지만…. 민형은 짐을 나눠 들겠다는 내 호의를 거절하고 백팩을 제대로 맨 뒤 두 손으로 캐리어를 끌었다. 캐나다에서 이렇게 왔다면서. 택시를 미리 불러두긴 했지만, 저 짐을 다 어떻게 넣을지 걱정이 앞섰다.

한국에는 다 기술자들만 사는 건지 다행히도 택시 기사님이 힘써 주셔서 짐을 다 실을 수 있었다. 민형은 한결 시원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 손을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나를 어찌나 빤히 보는지 자꾸만 고개가 푹 고꾸라지고 뺨에 붉게 올라서 죽는 줄 알았다. 나도 보고 싶은데, 그렇게 보면 자꾸 눈을 돌리게 되잖아.

 

 

“시험은 잘 봤어?”

“응, 뭐….”

“나 이번에 뮤직비디오 촬영했는데, 그건?”

“…봤지, 당연히. 근데 싸인은 받아왔어…?”

 

 

너는 싸인의 유무가 더 궁금하냐는 듯 서운한 얼굴을 잠시 내비쳤지만, 금방 거뒀다. 내가 왜 싸인을 모으는 줄 아니까. 해가 갈수록 인지도가 높아진 민형은 내로라하는 스타들과 끊임없이 작업하고 비디오를 찍었다. 여전히 다수의 회사가 그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서 기존 몸값의 서너 배를 제시한다. 그들은 민형의 디테일을 원했고, 그 일을 사랑한 민형은 기꺼이 모든 스케쥴을 소화했다.

그리고 나는 함께 일하는 스타들의 싸인을 원했다. 네가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증표로.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하고, 나를 여전히 바란다는 증거로. 다행히도 너는 싸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기억했다.

 

 

“무릎은 괜찮아? 이번 거는 무릎 쓰는 거 많던데….”

“괜찮아, 옷 안에 보호대하고 했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그래도 좀 사려가면서 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장난스레 웃는 네 무릎을 쓰다듬으며 한 번 더 걱정했다. 민형은 몸으로 예술을 했고,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돈을 많이 벌면 뭐 해, 몸이 다치고 아프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줄 수도 있는데, 너는 꼭 숨겼다. 이번에 무릎이 안 좋아졌다는 소식도 인터뷰 영상에서 알게 하고. 마음 같아서는 콩 박아주고 싶지만, 내 어깨에 기대오는 걸 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래, 오랜만에 보니까 좋은 소리만 해줘야지.

이 주간 머물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민형은 나를 꽉 끌어안은 뒤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장시간 비행을 하고 왔으니 찝찝할 만도 했다. 아마도 일을 끝내고 바로 공항으로 갔을 테니까. 나는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의 짐을 한 곳에 놓고 차근차근 풀었다. 한두 번 해보니 뭘 빼놔야 하고, 그냥 둬도 되는 물건인지 감이 잡혔다. 처음엔 그가 쓰는 스킨 하나 찾기도 힘들었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거 풀어보지.”

“어, 다 씻었어?”

“응, 기다려봐.”

 

 

캐리어 하나를 풀고 진이 다 빠져서 소파에 엎어진 순간 물소리가 끊기더니 가운 차림의 네가 나왔다. 열린 욕실 문 너머로 기분 좋은 라일락 향기가 천천히 울렁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던 민형은 보여줄 게 있다는 것처럼 손도 대지 않은 다른 캐리어를 능숙하게 풀었다. 출장이 잦은 직업이다 보니 나보다 손이 퍽 빨랐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잘 포장된 상자 여럿이었다. 다른 물건 하나 없이 정말 순수하게 선물만 있는 캐리어. 민형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씩 웃더니 내가 부탁했던 운동화 상자를 내밀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해당 브랜드의 집업과 후드티, 한국에는 출시되지 않은 립스틱까지 온갖 것을 내 품에 안겼다.

 

 

“이, 이게 다 뭐야?”

“네 선물. 아, 이게 마지막.”

“…뭐야, 이거…?”

“네 앞으로 들어온 협찬.”

 

 

민형이 마지막으로 건넨 건 C사의 명품 핸드백이었다. 깜짝 놀라 멍하니 있자 민형은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비하인드를 술술 풀었다. 이번에 내 가방이랑 같이 들어왔어. 원래 잘 안 받는데,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것만 받았으니까 써.

네 말은 잘 알아들었지만, 엄청난 걸 받아버린 기분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부탁한 건 운동화 하나뿐이었는데 갑자기 명품백이 떨어졌다. 고급스럽게 처리된 가죽은 기스가 잘 나지 않을 것 같았고, 어디에 걸치든 잘 어울릴 것처럼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너무 흔하지 않은 디자인이었기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렇게 무난하고 고급스러운데도 이 가방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가격이 세니까.

이럴 때면 너와 내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네 인지도도. 여전히 학업에 열중하는 나와 달리 너는 팬층이 두꺼웠고, 그들은 언제나 네게 사랑을 고백했다. 우리를 응원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지독히 미워하는 부류도 분명 존재했다. 예전에는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라는 작은 세상에서 응원만 받는 커플.

 

 

“왜,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싫은 건 아니지?”

“응, 안 싫어. 좋아. 고마워.”

“다행이다.”

 

 

내가 방긋 웃자 민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래, 남의 시선과 인지도가 무슨 상관이겠어. 너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데.

가방과 선물을 옆에 밀어 놓고 네 허리를 안으며 뜨끈한 입술을 물었다. 서로 다른 체온의 숨이 섞이는 것만으로도 뒷목이 오싹했다. 민형의 거친 손이 내 뒷목을 감싸고 물컹한 혀가 과감하게 얽혔다. 오랜만의 키스니 이보다 달콤한 건 없었다. 너는 금방이라도 내 입술을 씹어먹을 것처럼 덤벼들고 혀를 빨았다. 나 역시 네게 매달려 외설적인 소리를 잔뜩 주고받다 아예 네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나른하게 울리는 신음이 네 것인지 내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 연신 내 허리를 어루만지다 상의 안으로 침범했다. 맨살에 거칠한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 떨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야 했지만, 너는 안중에도 없는지 계속 입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허리를 쓸던 손은 이내 갈비뼈로, 더 위로, 위로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저절로 달뜬 소리가 흐르고 혀가 빠질 정도로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녹아 네게 눌어 붙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너랑 지금처럼 이렇게 애정을 나누고 싶어.

 

 

“하….”

“…잠, 까안,”

 

 

민형은 숨을 부족해 고개를 잠깐 돌린 틈도 참지 못하고 내 턱을 움켜쥐며 입술을 삼켰다. 입술과 입술 새로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가자고 해야 하는데, 자꾸만 허리가 무너졌다. 작정하고 달라붙는 널 내가 무슨 수로 떼어놓을까. 그래, 점심은 거르고 넘어가도 될 것 같아. 저녁을 거창하게 먹으면 되잖아.

그것도 안 되면 아침 식사를 해도 되고.

 

 

 

 

하루하고도 반나절 더 시달리다 눈을 뜨니 또다시 저녁이었다. 그동안 들어간 게 하나 없는 위는 쫄쫄 굶은 티를 냈고, 저녁은 당연히 룸서비스가 됐다. 찌르르르 울리는 허리를 짚고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으니까. 이틀을 이렇게 날려버린 게 아쉽다 못해 민형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방학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캐나다로 가면 되지. 그가 일하는 모습도 눈으로 보면서.

민형은 룸서비스가 오자마자 축 늘어진 나를 제 품에 기대게 한 뒤 해물 리조또를 직접 떠먹였다. 내가 내 손으로 먹겠다고 해도 고집이라 하는 수 없이 한 번 받아먹었지만, 그 뒤로도 숟가락을 쓸 수 없었다. 편하긴 해도 민망해서 자꾸 툴툴거렸다. 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냥 먹으면 되는데….

 

 

“이거 맛있다.”

“그치, 여기 매콤 간장이 진짜 별미래. 아, 조도 좋아하겠다.”

“나랑 있는데 다른 남자 얘기는 좀 그렇지.”

“걔는 친구잖아….”

 

 

내 입에 매콤 간장 닭강정을 밀어 넣어준 민형은 그래도 질투 난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라 엷은 웃음이 터졌다. 다행이다. 떨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조가 간장 치킨을 좋아하는데 어떡해. 당연히 생각난단 말이야. 우리 모두 연습을 핑계로 연습실에 모여서 치킨을 나눠 먹었던 일, 간장 치킨을 처음 맛본 조의 얼굴, 내가 그린 친구들까지. 그 뒤로 조는 간장 치킨 매니아가 됐지만…. 뭐,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 한국에 와서 배가 터지도록 먹으라고 해.

 

 

“우리 이거 먹고 저기 남산 가자.”

“허리 아프잖아. 내일 가도 돼.”

“…아니, 나갈래. 안 나가면 내일 더 아플 것 같아.”

 

 

자꾸 내게 뭘 먹이려는 네 행동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 이상 밤을 보내면 허리가 아프다 못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 돼. 앞으로도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녀야 하는데. 너는 아쉬운 소리를 내며 캔맥주를 들이켠 뒤 상표를 봤다.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 건지 표정이 묘했다. 우리나라 맥주는 좀 물 탄 맛이긴 하지. 캐나다에서 먹었던 그 술과는 완전히 달라.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같이 술 마신 추억도 있구나. 뭘 되게 많이 했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서둘러 외투를 입고 호텔을 나와 남산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버스를 이용해서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됐다. 아까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야지. 그리고 서울 구경은 애들이랑 해도 되는 거고. 남산으로 가는 내내 너는 내 손을 주무르고 뺨에 입을 맞추며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로 사이가 참 좋다는 말을 택시 기사님에게 들을 정도로.

 

 

“천천히 걸어. 나한테 기대고.”

“…응, 근데 나도 남산은 처음이야.”

“아, 그러면 그….”

“그…?”

“…자물쇠 거는 것도 있다는데, 그것도, 뭐, 처음이겠네.”

“…당연하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쑥스럽게 구는 민형 때문에 덩달아 나까지 민망해졌다. 그 조그마한 자물쇠가 뭐라고 이렇게 부끄럽고 설레는 걸까. 입술을 꾹 깨문 나는 허리 핑계를 대며 민형에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서울의 밤공기가 이렇게 좋았나. 언제 답답하고 추웠냐는 것처럼 마냥 좋기만 했다. 이게 다 이민형 덕분이겠지. 아,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결혼해야겠지? 결혼, 음, 결혼하면 좋지. 결혼…

잔근육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팔뚝에 기대서서 케이블카 티켓을 끊고, 줄을 따라 이동했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처음엔 욱신거리던 허리도 차츰차츰 차도를 보였다. 여전히 민형 없이는 엉거주춤하지만.

 

 

“이리 와, 사람 많다.”

“으응….”

 

 

줄을 따라 차례로 입장하다 보니 어느새 둘의 순서였다. 단둘만 타는 케이블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단체로 아무렇게나 모이다 보니 소란스럽고 혼잡했다. 금방 비좁아지는 내부에 민형은 나를 안아 뒤쪽 구석에 안전하게 세웠다. 아, 이러니까 또 떨리잖아…. 등 뒤로 느껴지는 네 체격과 은은한 살냄새에 심장이 쿵쿵 거세게 찧기 시작했다. 꽤 오래 만나긴 했지만, 떨어져 있는 기간이 그만큼 있다 보니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점점 더 묘하게 구는 그의 행동이 한몫하기도 했다. 틈만 나면 내게 붙고 입을 맞추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달뜨게 된다. 은근히 내 손등을 덮으며 깍지를 끼는 지금처럼.

민형은 남들의 눈을 피해 내 뒷목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 떼어냈다. 이어 손등을 더 세게 움켜쥐며 입술로 귓바퀴를 집적대고 사랑한다는 말을 작게 읊조렸다. 안이 워낙 소란스럽고 아이도 있어서 시끄러운지라 그가 하는 말은 나만 들을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장대한 야경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네게 서울의 야경을 소개하고 내가 사는 나라가 어떤지 알려줘야 하는데.

 

 

“…조금만 떨어져 봐….”

“싫어. 우리 그동안 많이 떨어져 있었잖아.”

“여기는 다른 사람도 다 있고….”

“둘만 있으면 더 힘들어질걸.”

 

 

내가 뭐라든 너는 비킬 생각이 없었고, 케이블카가 길고 긴 여정을 끝낼 때까지 우리는 틈이라고는 없이 딱 밀착해 있었다. 네 열기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망대에 도착한 케이블카가 덜컹거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파, 터져 나왔다. 참으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서울의 야경이 어땠는지, 내가 뭘 보면서 온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우루루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섞여 재빨리 나온 나는 널 원망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투정 부릴 시간은 없었다. 같이 있는데도 더 같이 있고 싶을 정도로 시간이 아까운걸.

 

 

“사람 많다.”

“응, 그래도 평일이라서 없는 거야. 주말에는 진짜 미어터질걸?”

“미어터져?”

“음, It’s packed.”

“아.”

 

 

아주머니가 한국인이시라고 민형이 모든 한국말을 아는 건 아니었다. 잘 대화하다가도 지금처럼 모르는 게 하나씩 있었고, 나는 그걸 열심히 설명하고 또 고쳐줬다. 네가 그러는 것처럼. 미어터지다의 뜻을 알게 된 민형은 그걸 복기하듯 몇 번 중얼거리다 우리 차례가 되자 전망대 티켓을 끊었다. 이럴 때면 참 외국인 티가 난다. 그래서 더 좋아. 힘든 만큼 푸른 캐나다가 떠오르니까.

전망대 안으로 입성한 우리는 쳇바퀴 돌 듯 둥글게 돌며 서울의 야경을 감상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해가 약하게나마 있었는데, 제대로 보니 완전히 사라졌다. 이걸 케이블카에서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한가한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반짝거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민형은 한국에 있다. 그것도 내 옆에. 딱 붙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팔뚝에 더 엉겨 붙자 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떨어져 있기 싫어서 어떡해.”

“…당연히 싫지. 넌 좋아?”

“I really can’t stand it.”

“그러니까….”

 

 

나는 너와 함께 매일 이 광경을 보고 싶었다. 배울 게 많은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것도 그리웠다. 그때의 우리는 참 많은 걸 경험하고 몸으로 익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캐나다는 나의 또 다른 고향이었다.

 

 

“그럼 우리 결혼할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 소망이 너무 커서 잠깐 꿈을 꾼 건 아닐까? 아니면 환청일 수도 있지. 그러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널 바라본 순간 꿈도 환청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민형은 내 반응을 예상했단 듯이 부드럽게 웃고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

“….”

“너만 괜찮다면,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게. 나 기다리는 거 잘하잖아.”

 

 

믿지 못해서 눈을 깜빡, 너무 놀라서 깜빡, 완전히 이해하고 깜빡한 나는 내 입이 벌어져 있다는 것도 몰랐다. 네가 내 턱을 닫아준 덕분에 험한 꼴은 피했지만, 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금, 그러니까, 결혼하자고 한 거 맞지? 너랑 나랑, 어, 나랑 이민형이랑?

싫냐는 네 불안한 음성에 냅다 고개를 젓고 놀란 심장을 다독거렸다. 아니,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놀란 거야.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결혼하자는 말을 이렇게 바로 들을 줄은 몰랐으니까.

솔직히 결혼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떨어져 있는 거리와 시간이 기니 자연스럽게 외로워졌고, 매일 얼굴 보며 살았던 캐나다가 그리웠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결론은 결혼이었다. 결혼하면 불안하지도,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되는데. 꼭 그게 아니어도 사귄 기간이 사 년 가까워지니 결혼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이제 스물둘, 만으로 따지면 스물하나였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빠른 결혼은 본능적인, 제도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참, 나도 어쩌자는 건지.

 

 

“나도 좋아, 좋은데….”

“좋은데?”

“…우리가 아직은 어리니까. 음, 하더라도 나 졸업한 뒤에 해야지…않, 을까…?”

 

 

당연한 말인데, 민형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지. 솔직히 그렇잖아. 이민형이 아무리 잘 나가도 그는 스물하나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하기도 하지만, 나를 배신하고 잘못할 애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짐짓 심각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너는 느슨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당연하지. 너 졸업하고, 나도 자리 더 잡으면 하자. 지금은 그냥 약속하는 거지. 너랑 나랑 꼭 결혼하겠다고. 민형은 ‘꼭’을 강조하며 내 손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좋아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명치 부근이 근질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넣고 벅벅 긁고 싶을 정도로.

전망대 구경을 끝낸 우리는 천천히 걸어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내 방에 뒹굴던 자물쇠가 떠올랐지만, 가져오지 않았으니 구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에서 자물쇠를 구입한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네임펜을 빌려 소망을 적었다. 민형은 수도 없이 걸린 자물쇠가 신기한지 한참을 바라보다 내 네임펜을 슬쩍 뺏었다.

여주♥민형 영원히.

이건 내가 적고,

Until the next life.

이건 네가 적었다.

잘 적힌 문구를 빤히 본 민형은 민망하게 웃으며 네임펜을 한 바퀴 돌렸다. 이제는 영어가 어렵지 않아도 한국인은 한국인이었고, 한국어를 할 수 있어도 캐나다인은 캐나다인이었다. 누가 봐도 국제 연애를 하는 느낌이 나는 자물쇠였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히, 웃다 철조망의 빈자리에 자물쇠를 쑤셔 넣었다.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둘이 동시에, 달칵.

 

 

“민형아, 이거 왜 하는지 알아?”

“아니, 그냥 유명하다고만 들어서. 왜 하는데?”

“절대 떨어지지 말라구.”

 

 

내 얘기를 들은 민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네 체온이 든든해서인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정말, 하나도.

열쇠 보관함에 열쇠를 넣은 우리는 카페로 가 커피를 주문했다. 안에서 먹고 갈까 했지만, 민형은 은근히 걷고 싶어 하는 눈치라 아웃해 밖으로 나왔다. 날이 추우니 둘 다 따뜻한 라테로. 따뜻한 음료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손이 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헤이즐넛 시럽을 추가해 달콤한 향이 그득했다.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안 믿겨.”

“나도. 어제까지만 해도 캐나다였는데.”

“아주머니는 잘 지내셔?”

“어, 요즘은 꽃꽂이도 배우셔. 거기 선생님이 잘생겼다고.”

“선생님이?”

 

 

혹하는 얘기에 흥미를 보이자 민형은 미간을 구기며 나무라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음, 큼. 눈을 돌린 나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라테를 홀짝거렸다. 아니, 그냥, 음, 잘생겼다니까.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보여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지?

그러나 그는 내가 그럴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핸드폰을 몇 번 두드려 아주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줬다.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형이 그렇게 나오니 나도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눈을 슬쩍 돌려 아주머니 옆에 선 남자를 뚫어져라 봤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김정우’라는 명찰이 매달려있었다. 한국의 주민센터 비슷한 곳에서 배우시는지 아주머니 역시 명찰을 달고 계셨다. 그나저나 진짜 잘생겼네….

ㅇ,

나도 모르게 ‘오’하고 나오려는 감탄사를 ‘ㅇ’에서 끊고 냅다 커피를 마셨다. 여기서 감탄하면 은은하고 기분 좋은 분위기가 끝장이었다. 나는 입술을 말아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아주머니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도 참 오랜만이다. 저번에 영상 통화를 하긴 했지만, 확실히 사진은 달랐다.

 

 

“큼, 근데 왜 갑자기 꽃꽂이 하셔?”

“나도 몰라.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

“재밌어 보인다. 재밌어하셔?”

“뭐, 얼굴이 잘생겼다고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시지.”

 

 

가슴이 콕콕 찔리는 발언에 다시 커피를 호록 들이켰다. 아니, 그래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입술에 묻은 커피를 핥으며 네게 더 붙었다. 이왕 하는 거 팔뚝에 머리까지 기대자 잔잔한 울림이 전해졌다. 네가 또 웃는다.

 

 

“유여주, 눈치 보지. 지금.”

“…아, 아닌데?”

“아니긴. 표정이 딱 눈치 보는데.”

“…아니라니까. 너 좋아서 그래. 아, 방학 때는 내가 캐나다로 갈까?”

“우선 팀이랑 얘기 좀 해보고. 전에 말한 거, 그거.”

“얘기 잘 됐으면 좋겠다. 매일 보고 싶은데….”

“나도.”

 

 

한국은 캐나다, 미국보다 훨씬 훨씬 작으니까 어디 있든 만나기 수월했다. 한국 에이전시가 부산에 있어도 서울에서 비행기 타면 금방이었다. 국내선이니까 비용이 엄청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제주도여도 괜찮아. 물론 협업 문제 때문에 에이전시 본사가 제주도나 부산일 리 없지만.

커피가 들어가니 몸도 마음도 느슨하고 따뜻해졌다. 이 마음으로 어디를 가면 좋을까. 설렁설렁 걷느라 내려오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지만, 같이 있으니 다 좋았다. 자꾸만 웃음이 나고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건 아무래도 너무 행복해서겠지?

 

 

**

 

 

낮에는 서울의 곳곳을 구경하고, 밤은 민형의 품에 안겨 쉬지 않고 입술을 맞물었다. 하루하루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 시간 가는 게 눈물 날 정도로 아쉬웠다. 하루만 더 있을 수는 없을까. 하루만 더, 더, 더….

그동안 우리는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가고, 인생네컷을 찍고, 유명하다는 카페를 죄다 돌았다. 워낙 체력이 좋은 애라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밤마다 나를 당기니 내가 더 죽어 나갔다. 그 괴물 같은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씻고 나오기만 하면 나를 안달 냈다. 보는 내가 더 달아오를 정도로.

그렇게 진득하게 붙다가도 낮은 또다시 아주머니에게 드릴 화장품과 손수건을 고르고, 커플 운동화를 사고, 즉흥으로 같은 디자인의 코트를 사서 커플룩처럼 입고 다녔다. 매일 같이 붙어 다니니 여기가 캐나다 같았고, 네가 내 옆에 사는 것 같았다. 이러니 더 보내기 싫지. 시간이 안 갔으면 하지.

아쉬운 일주일은 초고속 열차처럼 빠르게도 지나갔고, 당장 내일이 애들의 입국 날이었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밤밖에 없었다. 하나 그것도 애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파티하면 훅 줄어들게 된다. 남은 시간도 일주일밖에 안 되는데…. 아쉬운 소리가 절로 나는 상황이었다. 그냥 내가 캐나다로 갈까? 방학 내내 캐나다에 있을까?

침대에 뚱하게 앉아있던 나는 민형이 씻고 나오자마자 드라이기를 찾았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라면, 그 속에서 마음껏 즐기리라. 민형은 비장한 나와 드라이기를 번갈아 보다 피실피실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말려주게?”

“응, 오늘은 내가 말려줄게.”

“이런 호사가 또 없지.”

 

 

민형의 능청에 웃으며 드라이기를 켰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살살 움직이자 라일락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라일락 향의 어메니티를 제공하는 호텔 덕분에 우리는 라일락 인간이 되어 여기저기 향기를 전파했다. 지금의 민형처럼. 너는 머리를 말리는 중간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네 입술과 눈빛으로 그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살짝 촉촉하게 말린 머리카락을 한 번 헤집은 뒤 드라이기를 놓고 네 목을 끌어안았다. 라일락 향기, 그리고 막 씻고 나와 따끈한 네 살결. 가만히 안고만 있어도 심장이 살금살금 녹을 정도로 사랑이 흘렀다. 열여덟의 나는 너와 이럴 줄 몰랐는데. 우리는 영영 원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워….”

“나도.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으응, 근데 너도 일 때문에 바빴잖아. 그때도 촬영 끝나고 바로 온 거면서.”

“아쉬워서 그래. 너랑 더 오래 있고 싶은데.”

“그럼 캐나다 가지 마, 응?”

“그럴까?”

“응, 나랑 한국에서 살자.”

“얼마나?”

“평생….”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이 맞붙었다. 보드라운 촉감은 보지 않아도 뭔지 알았고, 그는 내 허리를 감싸며 단숨에 침대로 올라탔다. 정신없이 얽히는 혀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인 것처럼 절절했다. 일주일 내내 붙어먹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갈구했고 애정을 보이기 부족했다. 짓눌리다시피 붙었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더운 숨이 가쁘게 흘렀다. 그는 굵은 핏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내 어깨와 허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을 쏟아냈다. 나는 그걸 받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너는 항상 내게 쏟고 나는 그걸 감당하기 급급했다. 열여덟의 어린 우리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

“…뭐가…?”

“너랑 평생 사는 것도, 네가 날 잡아준 것도. 그냥 다.”

“아…!”

“…미안, 오늘은 참으려고 했는데.”

 

 

들끓는 음성으로 낮게 속삭인 민형은 내 입술을 핥고 다시 입을 맞췄다. 꽉 묶였던 가운의 매듭이 풀리고 그 안으로 성난 손길이 침입했다. 일주일 내내 침대에서 사느라 허리가 지끈거렸지만, 네 손을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하라고 말하기 싫었다. 그냥 지금이 느리게 흘러가길, 아예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나는 쏟아지는 열기를 견디며 네 목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거라고.

그리고 문득 생각해본다.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처음을, 꽤나 맹렬했던 폭우를.

그날의 너는 망가진 우산을 들고 있었고, 나는 얼룩진 마음을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 빗속에서 뭘 주고받았을까.

그날의 나는 네게 멀쩡한 우산을 씌워줬고, 너는 나를 마주 보며 참 서럽게도 울었다.

우리는 그 빗속에서 무엇을 주고받은 걸까.

 

 

 

 

누구 때문에 못 움직이겠다고 엄살을 좀 부렸더니 민형이 직접 씻겨주는 서비스까지 해줬다. 더불어 어젯밤의 나처럼 머리도 말려주고 덤으로 옷을 입혀주기까지 했다. 옷을 입는 동안 벗기네, 마네 하는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입국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둘은 호텔을 나오자마자 손을 꼭 붙들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조그마한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고 목소리를 들었다. 도보를 걷든 지하철을 타든 그건 변하지 않았다. 민형은 내가 없는 캐나다의 이야기를 했고, 나는 네가 없는 한국을 말했다. 서로가 없는 삶은 단조롭고 슈크림 없는 붕어빵처럼 허전하고 밍밍했다. 내가 느낀 외로움을 너도 느꼈다니 입안이 쓰면서도 달다. 네가 쓸쓸한 건 슬프지만, 나랑 같다는 건 기쁜 일이잖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공항이었다. 나는 깍지 낀 손을 살살 흔들며 캐리어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았다. 대부분 얼굴이 밝았고 그중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극히 일부였다. 열여덟의 나는 반반이었던 것 같다.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에 밝다가도 우는 엄마 때문에 눈물을 줄줄 쏟았다. 지금은 음, 그냥 웃기만 할 것 같아. 더는 캐나다가 두렵지 않으니까.

 

 

“너무 오랜만이라서 좀 떨린다….”

“얼마 만이지?”

“…나는 음, 2년 반?”

“꽤 됐네. 근데 애들 하나도 안 변했어. 제인한테 남자친구 생긴 거 빼면.”

 

 

아는 이야기인데도 네 입으로 들으니 참 신선했다. 제인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한국어를 마스터한 조였다. 처음에는 나 때문에 그리고 간장 치킨에 푹 빠져서 시작했던 그는 결국 한국 드라마까지 섭렵했다. 듣기로는 제노에게 모르는 말을 물어보며 한참 괴롭혔다고 한다. 무슨 말이든 한국어로 먼저 뱉어서 재민까지 혀를 내두른다고. 그 생생한 소식이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

아침 식사로 블루베리 베이글과 커피 한 잔을 끝내자 애들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떴다. 아, 드디어. 냅킨으로 눌러 입술을 닦은 민형은 이제 가자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지는 않겠지?”

“어색하기는커녕 시끄러울걸.”

 

 

네 손을 덥석 잡고 일어났지만, 영 자신이 없고 심장이 요란하게 내달렸다. 2년 반만이었다. 애들이 얼마나 변했을지, 얼마나 근사하게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열여덟의 우리는 서로의 페어 결과를 확인했고 모두의 성장을 축하하며 술병을 들었다. 스물둘의 우리는 얼마나 더 찬란할까.

일주일 전, 나 혼자 민형을 기다렸던 입구에 이제는 둘이 서서 곧 나타날 너희를 기다렸다. 한국 여행을 가자던 그날의 약속을 오늘에서야 지켰다. 앞으로 있을 일주일이 얼마나 시끄럽고 활기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캐나다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 그때였다. 출입문이 넓게 열린 순간 혼자 우뚝 선 조가 보였다. 이어 줄줄이 얼굴을 보이는 친구들까지.

 

 

“Hey!”

 

 

반가운 마음이 앞선 나는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고 애들을 불렀다. 손을 잡고 있어서 민형까지 덩달아 팔을 들어 올리게 됐지만, 너는 시원하게 웃기만 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발견한 애들은 금방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달려왔다. 2년 반만의 만남이었다.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애들은 짐을 내팽개치고 나를 얼싸 끌어안으며 그간 보고 싶었다는 말을 열렬하게 쏟아냈다.

 

 

“여주야~ 나 진짜 너 없어서 애들이 얼마나 구박했는지 몰라.”

‘유, 왜 이렇게 말랐어? 또 그림 그린다고 안 먹은 거 아니야?’

 

 

여기는 한국어, 저기는 영어가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나는 언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모두의 말에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더는 어렵지 않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알아들었다. 둥글게 모인 애들을 크게 안아주던 그때 한 발자국 떨어진 동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낯선 미소를 보였다. 마치 자신의 평생을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민형도 봤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이미 봤는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짧게 들어 올렸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열여덟의 나를 찾아가 지금을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아, 울지 마. 많이 힘들겠지만, 금방 친구들이 생길 거야. 너는 퍽 근사한 그림을 그리고 어색하겠지만 춤도 춰볼 거야. 애들의 얼굴에 물총 축제의 추억을 그릴 거고, 혀가 녹을 것 같은 랍스터도 먹겠지. 응, 모두 근사할 거야. 내가 장담할게.

아, 그리고 사탕은 꼭 챙겨가.

그게 네 인생을 바꿀 테니까.

 

 

“이러지 말고 우리 뭐 좀 먹자. 한국은 내가 잘 알아!”

 

 

나는 울고 웃는 친구들의 손을 단단히 잡고 나란히 선 민형과 동혁을 돌아봤다. 분수대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주먹을 말았던 둘은 이제 서로에게 공명했다. 둘을 그렇게 만든 건 세월일까, 다른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이렇게 완벽한데.










홈스테이 로망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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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나의 젤리들!

홈스테이 로망스!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어흐흑 끝은 언제나 슬픈 것 같아요 아련하구 떠나기 싫구~

음 해석할 건 많이 없구, 음음.

초반에는 동혁 시점이었구, 그 이후는 다 여주 시점입니다. 


그날의 너는 망가진 우산을 들고 있었고, 나는 얼룩진 마음을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 빗속에서 뭘 주고받았을까.

그날의 나는 네게 멀쩡한 우산을 씌워줬고, 너는 나를 마주 보며 참 서럽게도 울었다.

우리는 그 빗속에서 무엇을 주고받은 걸까.


요 부분, 울 젤리들은 뭘 주고받은 것 같나용? 저는 서로가 잃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민형은 여주를 알 수 있는 시간을 잃었고, 여주는 캐나다에서 설렐 수 있는 시간을 잃었으니까. 저 폭우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넵, 동혁이는 동혁만의 여주를 찾았습니다. 초반에 '여주'라고 하는 건 다 마이애미 여주를 뜻합니다요~! 그리고 중간에 정우가 나오잖아요? 마이애미 로맨스를 보신 분들이라면 정우가 누군지도 알 거라고 생각해요. :) 정우 역시 마이애미의 여주 근처를 맴돕니다. 그러다 뭐 헤어지게 되지만, 그래도 그 흔적을 느끼고 싶을 때면 그 집 근처를 서성거리긴 해요. 그러다 우연(이 아님, 우연을 가장한 만남임)으로 진을 찾죠. 그녀에게서 여주의 흔적을 찾고자.

모두 행복할 거랍니다. 여주 역시 화가로 크게 성공할 거고 둘은 아주아주 유명한 셀럽 커플이 되고,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조는 한국인 여자친구를 만나요. 한국에 푹 빠져서 더는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다른 애들 역시 각자의 영역에서 행복하고 멋진 미래를 그립니다~! 모두 분명히 행복할 테니 울 젤리들은 마음 놓으셔요~! 

여기까지 홈스테이 로망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간 저와 함께 열심히 달려주시고, 좋아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젤리들에게 감사와 애정 그리고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움쪽쪽 항상 감사했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움쪽쪽 알라뷰💕💕💕


아래는 소장을 원하시는 젤리만 구매하시면 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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