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을 뿐인데 한두 뼘은 커 보이는 녀석이 있었다. 집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시종일관 웃고 떠드는 녀석밖에 없다.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동시에 중얼거렸다. 악마 꼬맹이?


“누가 꼬맹이라는 거지, 토드? 빨리 비켜.”

“지금 배트맨을 내 집안에 들이라는 거냐?!”


제 키의 반 정도일 때부터 봐왔던 꼬마가 어떤 시비를 건들 제이슨은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는 편이었다. 데미안 또한 (상대가 팀 드레이크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불필요한 마찰을 귀찮아할 정도로 철이 든 지는 꽤 되었다. 훌쩍 커버린 덩치만큼 말이지……. 그렇지만 저 복장을 뒤집어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문은 반쯤 열고 주시하는 제이슨에게, 데미안은 재차 말했다.


“뭐해? 빨리 비켜.”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 그놈 아래에서 배워먹어서 그런가 말본새도 아주 제멋대로지, 엉?”

“얼른.”


그제야 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난 제이슨을 밀치고 데미안이 들어왔다. 아. 큰 덩치가 반만 보여 몰랐을 뿐이었는데, 완전히 열린 문 너머로 데미안이 부축한 채 옆구리에 끼고 온 인물은 나이트윙이었다.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이런 미친, 이건 또 뭐야? 이거 또 어디서 굴러다닌 거야?”


또 혼자 뭔짓 거릴 한거래? 여기에 뭐가 있다고 여길 기어들어와! 저택으로 꺼지던가 해야 할 거 아냐!! 버럭 외치는 제이슨의 말은 무시한 채 데미안은 딕을 좁은 집안 침대 위에 서둘러 눕힌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저택보다 여기가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그레이슨이 네게 가라고 했어. 덧붙인 말에 제이슨은 낮게 욕을 뱉었다. 이런 미친, 뭐 그딴……. 중얼거리면서도 제이슨은 나이트윙 수트를 서둘러 벗기는 데미안의 옆에 붙어 그를 도왔다. 밝아진 불빛 아래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수트가 벗겨질 때 마다 여기저기 멍들고 찢어진 상처가 가득했다.


“이 녀석 왜이래?”

“몰라. 나도 신호 발견하고 온 거니까.”

“같이 있었던 거 아녔냐?”

“그레이슨이?”


데미안이 잠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쯧, 혀를 차는 소리에 곧이어 뱉은 말은 무어라 대꾸할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꾸하는 말이 영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뭐, 그랬긴 했는데.


“어차피 나중엔 너랑 있잖아, 토드.”

“…….”


제기랄. 오늘 아침 깨끗하게 갈아둔 침대의 시트가 지저분해 지는 것이라던가, 흙 묻은 부츠 굽에 카펫이 지저분해 지는 일이라던가, 짜증과 성질을 토로할 상황이었음에도 그럴 기분이 싹 사그라졌다.


“……내가 왜 디키버드랑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 하냐?”

“그거야,”


데미안은 무심코 입을 열다 말고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나이트윙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얼굴 위에 붙어 있는 아이마스크를 조심스레 떼어내자,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뻗은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 채 입을 다물고 있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식은땀이 살짝 솟은 이마를 큰 손으로 짚어본 데미안은 예의 그 퉁명스러운 말투 그대로를 꾸미지 않고 내뱉었다.


“그레이슨이 원하는 건 그런 거 아닌가?”

“저 녀석이 지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거라면, 글쎄, 미안하지만 난 평생 그럴 생각은 없는데.”

“그레이슨이랑 매번 섹스 하잖아.”

“…….”


말문이 또 막혔지만, 이번엔 대놓고 험악한 인상을 써 버렸다. 데미안을 마주보는 것 보다는 정신을 잃고 있는 딕에게로. 이 엉덩이도 가볍고 입도 가벼운 놈이.


“그레이슨이 말한 건 아냐. 그냥 추측이지.”

“씨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지. 제이슨은 딕을 부라려 노려보던 눈길로 데미안을 쓱 바라본 뒤, 곧이어 딕을 치료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상처는 그리 큰 것들이 아니었다. 적당히 닦아내고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고, 작은 상처들에겐 반창고를 붙여주고 편안한 옷을 입혀둔 뒤, 이불을 덮어주는 것만으로 치료는 끝났다. 숨을 쉴 때 마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아파하는 것이, 갈비뼈가 좀 신경 쓰이지만 지금이야 알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뒤척이지 않게만 잘 지켜보면 되겠거니. 문득 바라본 딕의 얼굴은 두툼한 반창고 하나를 볼에 붙이고 있어서인지 더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무심코 이마에 들러붙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손이 갔다. 하나하나 떼어보는 제이슨의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미안은, 곧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마, 이 녀석 데려가야 할 거 아냐.”

“갈 거야. 토드 네가 데려와.”

“어차피 신경 쓸 거잖아?”

“네가 그레이슨이랑 섹스 하는 건 별로 신경 안 쓸 건데, 토드.”


이 집안은 어째 부끄러움이나 민망스러운 건 잘 모르는 것 같다. 이제는 난감함마저도 느끼는 걸 포기한 채 제이슨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저 꼴로 뭘 뒹군다는 거냐……?


“레드후드에게 목덜미 잡혀 저택으로 던져지는 나이트윙은 그 보기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배트맨에게 얌전히 안겨서 돌아가는 나이트윙이 더 낫지 않겠어? 이어지는 말에 데미안은 아주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뒤집어쓰려던 카울을 도로 벗었다.


“난 아버지가 아냐.”


아직은 그래도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이 젊은 청년과 브루스와의 차이점이었다지만, 인상을 찌푸린 어린 모습에서 브루스가 느껴져 제이슨은 아주 조금 웃었다.


“아니, 그나마 네가 나을지도 모르지. 너도 사실 그런 걸 원하잖아?”

“……됐어. 그레이슨은 어차피 날 그렇게 보지 않으니까.”

“누군들.”

“넌 그래도 그레이슨이랑 섹스 했잖아.”


아 거참, 아까부터 진짜 아무렇지 않게…….


“거 섹스, 섹스, 계속 강조하는데, 그냥 그 뿐이다. 착각 마.”

“넌 그럴지 몰라도, 그레이슨은 아닐 텐데.”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네가 상상하는 쪽은 아니야. 정말로 딱 그 뿐이지.”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그 뿐이야. 되풀이한 말 속에 딕과 자신, 그리고 데미안에게도 늘 그림자를 드리우던 사람이 생각났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고, 이런 이야기를 그 시절 새파랗게 어렸던 꼬맹이의 장성한 모습을 대면하며 봇짐 흘리듯 내보낼 거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식어버린 브루스의 부재를,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움이라. 사실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날이 있을 것이란 것도.

과묵하고 나이답지 않게 고지식했던, 나름 그저 꼬마취급 했던 집안의 막내 입에서 섹스란 단어가 적나라하게 튀어나와서일지, 그저 이렇게 좁은 집안에 떠든다면 혼자 떠들었지 침묵할 리는 없었던 상대가 정신을 잃고 자빠져 있는 모습이 어색해서였을지. 그 어떤 것도 변덕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세월이 흐르면 그렇게 보고싶어지기도 하는가 보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로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대상이 곁에 있음에도 언제나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제이슨은 잠들어 있는 딕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병신.


“저 녀석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너나 나나 둘 다 아는 사실이잖아?”


후 하고 내뱉는 연기 속에서 제이슨은 숫자를 가늠했다. 그가 가버린 지도 참 오래 지났다.


“채워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저 녀석을 완벽하게 붙잡을 수 있는 건 이제 없어.”

“그럼 토드 너는?”

“나?”


제이슨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데미안을 향해 피식 웃었다. 브루스를 닮아가는 이맛살에 슬쩍 구김이 갔지만 그는 그 이상 제이슨의 웃음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 나도. 그 이상은 얻을 수 없는 거지.”


지금의 네가 이해한다면 이제 더 묻지 마. 네가 결코 저 녀석을 붙잡지 못하는 이유와 같을 테니까. 내뱉는 담배 연기가 어두운 허공으로 흩어졌다.


“멍청하군.”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이슨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이후로 아무 말도 없는 데미안을 바라보다 다시 먹처럼 깜깜한 하늘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나, 나나 참 멍청하지. 침묵속의 동의가 그렇게 흩어졌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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