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물살이 콸콸 흐르는 소리, 아이들의 물장구 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유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 게 진정한 힐링이지 싶었다. 수박 먹고 이러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매미들이 우렁차게 울었다. 신록이 우거진 수풀 속에서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한결은 유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심심한 듯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고 있었다. 

유하는 시원한 계곡의 바람을 쐬며 잠시 멍을 때렸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저절로 쫑긋거렸다. 

“여어. 태준아! 너 늦게 도착했네. 크큭. 수박 먹어.”

유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을 알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누구!

태준이 동훈 옆에 앉았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무심한 듯한 눈동자는 여전했다. 유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어.”

유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해서 뺨이 떨렸다. 

한결은 태준을 보며 활짝 웃으며 반겼다.

“태준 선배! 안녕하세요!”

“응. 안녕!”

태준 역시 한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유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유하야,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 같아.”

태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유하는 태준에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원래 좀 창백한 피부잖아. 잘 왔어. 아주 아주 대환영이야.”억지로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그냥 집에서 쉬지 왜 온 거야. 태준아…. 

유하는 뭔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아무것도 잘못 한 게 없는데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한결의 눈치가 보였다. 바보라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

우빈은 태준을 보며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이 녀석의 인생의 목적은 단 하나 인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여자다. 방금 한결에게 퇴짜를 맞은 미녀들에게 퇴짜를 맞고 잔뜩 기가 죽어있었다.

“야, 태준아. 너 왔으면 빨리 말해야지. 너만 있었어도 그 미녀들 안 놓쳤을 텐데….”

우빈이 태준의 잘생긴 외모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렇게 남자들만 있으니 왜 이렇게 우울하냐. 에고.”

우빈은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며 우물거렸다.

한참 신나게 물놀이하던 소현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유하 선배는 물놀이 안 해요? 여기까지 와서. 뭐해요. 한결이도.”

“어…. 난 별로.”

유하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소현이 유하에게 말을 걸자 그때부터 한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소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급기야 싫다는 유하의 팔을 붙잡아서 물속으로 끌고 갔다.

“어…어. 난 싫데도. 으악.”

유하는 결국 소현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어푸푸푸. 너무 차가워. 와, 나 방금 심장 마비 걸릴 뻔했어.”

“엄살은….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요.”

소현이 유하에게 물장구를 쳤다. 한결은 한숨을 한 번 깊이 쉬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어휴. 그만해. 소현아. 나 눈 안 보여.”

“크큭.”

소현은 곧 유하와 노는 게 시들해져서는 친구들과 함께 다른 쪽으로 갔다.

유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채로 나왔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바위를 적셨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유하 선배 왜 하필 흰 티를 입은 거야. 미쳤나 봐. 젖꼭지가 다 비치잖아. 자세히 보면 배꼽까지 보여. 

한결은 다른 사람이 볼까 너무 놀라서 서둘러 입고 있던 난방셔츠를 유하에게 덮어주었다.

“어… 난방셔츠를 왜 줘? 어차피 다 젖었는데….”

유하는 영문을 몰라서 한결에게 다시 벗어주려고 했다.

“미쳤어요. 지금 다 비치잖아요. 온 동네방네 광고를 해요. 그냥.”

유하는 한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한결은 유하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거요. 그거.”

한결은 대신 눈짓으로 유하의 가슴을 보았다.

“이게 왜? 남자들은 상체를 벗은 채로도 수영 많이 하는 데 이게 왜?”

“그냥…. 말 좀 그만하고 난방이나 제대로 걸쳐요. 알았어요?”

한결은 유하의 반응에 더 짜증을 내며 난방의 단추까지 채웠다.

야…야하니깐.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단 말이에요.

유하는 한결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했다.

혼자 조용히 들리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서…설마…. 이게 야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니고.”

유하는 한결의 떨리는 동공을 보며 흠칫했다.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우빈이 심심한지 태준에게 물놀이를 하러 가자며 꼬셨다. 아마도 진짜 목적은 물속에서 놀고 있는 여자들 같았다. 태준은 싫은 내색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며 꺼려했다. 

“혼자 가. 나는 별로야.”

“야…. 친구 돕는 셈 치고 가자.”

물속에 혼자 들어갔던 우빈이 태준을 향해서 물을 뿌렸다.

“야! 그만해.”

뜻밖의 물세례를 맞은 태준의 티셔츠가 물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러자 감추어졌던 탄탄 복근과 가슴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변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준에게 꽂혔다.

유하는 물을 마시다가 태준의 몸을 보고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얼굴이 빨개졌다.

한결은 유하의 시선이 향한 곳이 태준의 복근임을 알아보고 질투가 났다.

하…내 복근 보고는 아무 반응도 없더니.

한결은 유하가 힐끔거리며 태준의 복근을 계속 쳐다보자 은근히 신경에 거슬렸다. 이번 펜션으로 오기 전에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해서 복근에 자신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랑하고 싶었다. 원래 목적은 유하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한눈파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자꾸 이…이러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한결은 게다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던 여자들의 시선이 태준에게로 쏠리자 자존심이 상했다.

에이, 몰라.

“아… 덥다.”

한결이 갑자기 티셔츠를 홀랑 벗었다. 조각으로 새긴 듯한 선명한 복근에서 빛이 났다.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질렀다.

“한결이, 복근 장난 아니야.”

“미치겠다. 대박. 오늘 내 눈 호강한다.”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결에게 돌아왔다.

유하는 한결의 벗은 상체를 보고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더…덥다고 옷을 그렇게 훌렁 벗냐.”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태준을 보던 시선이 한결에게로 돌아왔다.

한결은 만족스러워하며 씩 웃었다.

“만져볼래요?”

“미쳤어! 뭘 만져. 나보고는 가슴이 어쩌고 했으면서 너는 그렇게 훌렁 벗어도 되냐?”

유하는 한결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계곡에서 찬바람이 불자 추워서 한결이 준 난방셔츠를 여몄다. 셔츠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한결의 벗은 몸을 본 여자들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다들 군침을 삼키는 것 같았다. 

어느정도 만족한 한결은 다시 옷을 입었다.

유하에게 바짝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궁금하면 나중에 밤에 만지게 해줄게요. 큭.”

한결이 쑥쓰러워하며 말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아까 몰래 곁눈질로 훔쳐보는 거 다 봤어요. 부끄러워하지 마요. 크큭. 

어차피 이 복근을 단련한 것도 다 유하 때문이었기에 한결은 그런 유하의 은밀한 시선이 좋았다. 

“싫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귓속말하지 마.”

유하의 동공이 떨렸다. 사람도 많은데 뭔지 모르게 야한 소리 같아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동훈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또 시작이네’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태준은 유하와 한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저녁은 늘 그렇듯 술판이 벌어졌다. 큰 방에서 다들 옹기종기 보여서 술을 마셨다. 유하는 애초에 술을 마실 계획이 없었기에 여자 동기들과 함께 술상을 차렸다. 안주를 만들어서 부지런히 날랐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잠시 쳐다보다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한두 명씩 취하기 시작했다. 소현이 안주를 만드는 유하를 불렀다.

“선배, 일 그만하고 우리 이제 게임 하러 가요. 놀러 왔으니 좀 즐겨요.”

“게임?”

유하는 무료하던 차에 게임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내가 게임을 좀 하긴 하지. 안 그래도 좀 심심했어. 크큭.

유하는 왕게임을 하게 됐다. 소현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유하가 한쪽에는 한결이 앉았다.

소현은 왕이 되었다. 급히 유하와 한결의 쪽지를 짧게 스캔했다. 

“1번 9번 뽀뽀!”

소현은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유하가 짜증을 내며 1번 종이를 들었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보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멀리 있던 태준이 9번 종이를 들고 민망한 듯 서 있었다.

소현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이가 없었다. 급히 한결의 종이를 뺏어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6번이었다. 종이의 숫자를 거꾸로 본 것이었다.

유하는 태준의 종이를 보자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빠져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남자 둘이 걸리자 구경꾼들은 재미없다는 듯 야유를 보냈다. 

소현은 당황한 듯 한결의 매서운 눈빛에 어쩔 줄을 몰랐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유하와 태준에게 급히 말했다.

“벌주! 벌주 마셔요.”

유하도 마음 같아선 벌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벌주는 무려 소주 1잔이었다. 그것도 음료수 컵에 1잔이었다. 분명히 저 한 잔을 마시면 바로 술에 취해서 헤롱거릴 것 같았다. 소주에 특히나 약했다. 흑기사를 간절히 찾아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눈알을 사방팔방 굴렸다.

흑…흑기사를 찾습니다. 저 오늘 술 취하면 안 돼요.

한결은 분명히 유하가 취하기를 바라고 있기에 안 됐다. 처음에 소현의 말을 듣고 빡쳤다가 벌주로 끝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오히려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느긋하게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유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훈은 잠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하가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언제 왔는지 태준이 유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태준도 술에 약해서 거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퍼뜩 기억해냈다.

설마…. 저 먼 자리에서 여기까지 온 건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유하는 애써 태준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바짝 긴장했다. 유하 앞에선 태준을 불살라 버릴 듯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태준은 유하에게 더 바싹 다가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구경꾼들은 당연히 벌주를 마실 줄 알고 딴짓을 하다가 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보며 집중했다. 유하는 태준을 마주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은근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이 되어서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목울대가 넘실거렸다.

태준의 눈빛이 일순간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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