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 저기요..

딸랑. 안녕하세요-

딸랑. 저어.. 이거 보고 왔는데요.


"죄송합니다. 저희 집은 커피가 없어요...."

불과 몇시간 만에 태섭은 밖에 붙여둔 전단지의 심각한 구조적 결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우선 샌드위치를 사고 나온 사람이 저의 가게 앞에 서서 전단지를 본다. 전단지를 볼 확률과 그렇지 않을 확률은 반반 정도다.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으면 백프로다.) 일단 발견하고 나면 그 다음 유리문 안 쪽을 들여다보고 대충 뭐 파는 집인가 파악을 한다. 갸우뚱한 표정으로 일단 문을 열고 들어와보는 여자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태섭의 가게 외장이 카페로 헷갈릴 여지가 많긴 했다. 아케이드 상가의 흔한 은색 샤시 위에 인테리어 필름을 붙여 우드톤으로 바꾸었고 외벽 아래 단은 타일을 붙여 골목길에서 마주친 소담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주었다. 가게 전면을 차지하는 유리 통창 중에 한 쪽 면은 파사드 형태로 목공을 해서 창문을 달았다.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지 않으면 물 위가 산란하는 모양처럼 반투명한 유리창이 나타나 안 쪽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도록 호기심을 심어 주었고, 나머지 한 면과 출입문은 통유리로 해서 답답함을 없앴다. 가게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방은 오픈 키친처럼 노출 형태로 만들었는데 주방 집기류의 차가운 느낌이 인테리어 자체로 보였으면 해서 벽면은 전부 톤 다운시킨 시멘트 스타코*로 마감했다. 

태섭은 또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창문 앞에 로스팅 기계를 배치하던 상상을 멈추었다. 그래 언제 원두를 볶고 있어 차라리 필터 업체에 전화해서 캡슐 커피 렌탈도 하냐고 물어보자.

"엄마야... 완전 넋이 나가부렀네."

"제가요?"

"인자 이거 먹고 해. 또 굶고 그냥 있었지?"

별로 바쁘지 않은 것 같아도 혼자 가게를 보면 밥탐이 제일 애매하긴 했다. 요새 입맛도 없어서 더 챙겨먹기 귀찮았다. 플라스틱 용기 두개를 열어보자 하나엔 시장 안에서 파는 김밥 두줄, 다른 쪽엔 육전이 수북히 들어있었다. 계란 지단 위를 흐르는 윤기에 저도 모르게 침이 흘렀다.

"헐.. 감사해요. 웬 전이에요 이모? 명절도 아닌데."

"으응. 어제 부쳤는데 좀 많이 했다.... 남아 처져서 준 거 아니다! 너이 먹으라고 빼둔거다 그거!"

"아이 알죠~."

드물게 쑥스러워 하시는 기색이 아마도 작년에 결혼한 딸 부부가 와서 음식을 하신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잘 먹겠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육점 사장님은 3대 째 한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 시장 토박이였다. 괄괄한 목소리에 말투도 사나운 편이라 손님과도 자주 마찰을 빚지만 장사는 언제나 잘 되는 편이다. 섭이네 사랑방 트리오의 마지막 멤버이기도 했다.

"형아는? 어디 갔나? 통 안 보이고 그래."

"놀러갔어요. 내일 올 거예요."

"아이 콱 죽이버린나. 얼라 버려놓고 저는 놀고!"

제 편을 들어주는게 좋아 낄낄 웃음이 나왔다.

"근데 엄마는? 좀 어떻드나. 아니아니 먹고 해. 먹고."

전을 먹는 중이라 다행이었다. 핑계 삼아 바로 답하지 않고 천천히 씹었다. 정육점 사장님은 유독 우리 세 남매를 챙겼는데 엄마를 친 동생처럼 아껴서였다. 사장님네 외동 딸이 아라와 동갑내기인데, 딸이 태어나기 전까진 형과 나를 자기 자식처럼 돌봐줬다. 어린 아라와 본인의 딸 둘만 데리고 여름 휴가도 자주 가셨다. 외갓집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 태섭은 이모가 있다면 이런 느낌인가 하고는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형이 보러 갔어요."

"니는 그럼. 전화라도 해봤나."

"예......."

"목소리에 금칠 해놨나. 한번씩 새끼 목소리도 듣고 하고 해야 사람이 기운도 나고 빨리 낫지 않겠나."

"할 게요.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거 없고. 암튼 천천히 먹고 일 봐라."

"예 들어가세요 이모~"

해야지.... 김밥을 한알 집어 입에 넣었다. 제 입엔 좀 짜게 간이 된 시금치가 아작 씹혔다. 엄마는 늘 통화 중에 '잘 하고 있지' 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들으면 그렇다는 답 외에 할 말이 없기도 하고, 잘 못하고 있을 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찝찝하고... 변명 섞인 마음이 점점 연락을 점점 피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훅 피로감이 올라왔다. 빈속에 음식이 들어와서 그런가 갑자기 몸이 더운 것 같기도 했다. 으 약간 으슬으슬한데 퇴근 할까 그냥. 

벽에 기대서 김밥을 마저 주워 먹는데 옆 시야에 사람 그림자가 걸렸다.

"응?"

문 밖에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가 서 있었다. 한명은 척 봐도 또 저희 집에서 커피 할인을 해준다고 착각한 샌드위치 손님이었고 한명은....

들어오려나. 들어오나.

헐 들어옴.

흰 셔츠에 검은색 양복 바지를 입은 심플한 차림의 남자가 제 가게 문을 밀어 열었다. 극도의 인지부조화를 느끼며 태섭은 양볼 가득 물고있던 김밥을 우적우적 삼켜내려고 애썼다.

"콜록, 으서. 어서오세요."

"죄송합니다. 식사하시는데…."

"아뇨, 큼!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낮은 음이지만 꽤나 느낌 좋은 목소리였다. 상대적으로 철딱서니 없는 꼬맹이가 된 기분에 볼이 후끈거렸다. 카운터 아래 잡동사니 중에 여분으로 가져다둔 마스크가 있길래 급하게 비닐을 찢었다. 물티슈로 손까지 전광석화로 닦아냈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업 톤을 되찾은 저가 웃으며 물었다. 샌드위치 가게 시트지가 입체 조형물이 되어 제 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소매 단추를 풀어 일부러 반절 접어 올려 스타일링을 해둔 듯했다. 잘 다듬어진 팔 근육이 팔짱을 꼈다.

"플로렌스가.. 뭘 까요? 밖에서 많이들 헤매시길래."

"아……."

뭐라고 설명해야 오해가 없으려나. 태섭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광고 모델은 저의 팬에게 물어봤지만 해답은 못얻었을 것이다. 왜냐면 팬 역시 플로렌스가 어디있는 카페인지 묻고 싶었을 거니까....

"배우님! 어디 가셨나 했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 때 태섭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면서- 종소리와 함께 눈앞의 배우가 나타났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후광이 보이는 듯 했다.

"부장님!"

"어머 저 기다렸어요?"

"아, 그게…."

태섭은 최대한 워딩을 신경쓰며 부장에게 사정을 전했다. 점주는 계속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가장 강조했다. 역시나 애매한 미소를 짓긴 했지만 부장은 저를 이해해줬다.

"아무래도 시장 정서상 안 된다 하시기 힘드시겠죠.."

"네에.. 그리고 아는 형이기도 하고."

"아아 글쿠나. 아유 가게 운영 하시기도 바쁜데. 그죠."

태섭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남자를 몰래 올려다 봤다. 연예인 오오라라는걸까. 메이크업 하고 온 거겠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연예인을 본 건 처음이라 자꾸만 관찰하게 되었다. 어디 촬영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요란하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세팅 받은 머리였다. 가게 외벽 사진은 지금보다 머리 기장이 훨씬 긴,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흘려내린 중단발 스타일에 가까웠다. 저야 매일같이 출근길에 보아서 이목구비가 완전히 각인이 되어 알아보았지. 지금같은 스포츠 헤어에 가까운 스타일이라면 언뜻 봐서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만큼 인상이 딱딱해 보였다.

혹시 성격 까탈스러운 연예인이고 그런가. 태섭은 무언가 꼬투리가 잡히는 것인가 불안하게 시선을 내렸다.

"혹시… 농구 하지 않으세요?"

"예?"

태섭은 크게 되묻고 말았다. 느닷없는 루즈볼이 제 몸을 맞고 튕겨져나간다. 노파심에 저물어가던 표정에서 힘이 풀어졌다. 

"농구?"

부장이 되묻는 소리에 배우의 고개가 스륵 돌아간다. 가게 허공을 보다가 저를 다시 보는 눈이 뭔가… 화가 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겸염쩍은 건가.

"…어?"

똑바로 마주보니 착 가라앉은 눈매가 엄청 익숙하다. 태섭은 제자리에서 파닥 떨었다.

"삼점슛!?"

스포츠웨어 마스크 뒤로 상상만 해보았던 얼굴이 쿵 현실로 떨어졌다. 말라붙은 혈관을 타고 오감이 만개했다.





스타코* : 이탈리아 대리석에서 유래한 도장 방식. 여기선 대리석 돌벽 느낌을 주는 빈티지 페인트의 의미로 사용.





요즘 드라마 좀 본다하는 이라면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거 원작 있나.‘를 생각 해 볼 것이다. 보장되는 퀄리티, 소위 산으로 가지 않는 스토리의 안정감 때문에 원작 있는 드라마를 선호하는 층도 늘어났다.

거기다 원작 팬덤이 알아서 입소문 영업까지 해주다보니 콘텐츠 업계의 원작 확보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또하나의 슈퍼 원작 드라마가 종영 후에도 연일 화제몰이 중이다. 오랜만에 대중들을 찾아온 열혈 청춘 스포츠 드라마  『버저비터』의 이야기다.


90년대 중반, 당시 청춘스타들을 대거 캐스팅하여 대한민국 자체를 ’농구대잔치‘로 만들었던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이 발표 되었을 때부터 주요인물들의 가상캐스팅 표가 네티즌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다음 철준, 동민은 누구냐‘, ’나의 다슬이는 역시 000‘ 등. 댓글로도 캐스팅투표 행진을 이어갔다.


제작발표현장에서 ‘영광이다’라고 운을 뗀 감독 OOO는 ‘어쩌면 많은 분들이 기대하신 그림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다소 도발적인 인사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그는 ’글로벌한 인기 시리즈 뿐만 아니라 원작 초월이라 불리는 리메이크, 리부트 작품들을 보면서 많이 연구했다.‘, ’지금 마지막 승부의 버저비터 소리를 부활 시킬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스스로에게 찾아왔다는 것이 현실감이 없어 잠도 못자고 있다.‘며 각색의 고충을 화두로 내세웠다.


1화부터 4화까지 동시공개한 드라마 『버저비터』는 실시간 트렌드로 감상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드라마의 제목뿐만 아니라 많은 점이 달라졌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배역'. 드라마의 모든 등장인물을 배우의 본명을 극중 역할 명으로 사용했다. 주연은 모두 ‘농구’와 관련 된 이력이나 사연이 있는 이들이다. 

‘배우들을 모아뒀을 때 이건 되겠다. 싶었다.’ ‘내 고집 때문에 제작팀이 많이 힘들어했다. 직함상 마이크를 쥐고 있는 게 나일 뿐이지 기적을 보여준 그들이 주인공이다.’ 

이 말을 듣고 스태프 중 한명이 손을 들고 ‘울었던 날마다 표시했더니 달력이 까매졌다.’고 해서 장내가 잠깐 웃음으로 덮이기도 했다.


첫방영 당일 OTT 최대 동시접속자 수가 42.1만명으로 집계 되었다. 지난 분기 대형 기대작이었던 드라마 ‘헤븐스 아워’의 신기록 32.6만명을 가뿐하게 갱신했다. 하지만 평가는 냉정하게 갈린다. ‘원작이 남아있지 않다.’ ’추억 소환 실패‘ ‘마지막 승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괜찮다’ 라며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편 일각에서는 ‘비싼 개런티의 유명인들로만 섭외해서 흐지부지 된 드라마 보다 찬성’ ‘이렇게 농구와 연이 많은 배우들이 있었다니 신기하다’ 라며 스스로를 ‘버즈단’이라 자칭하는 본방 사수팬들의 애정은 영상 클립 조회수로 증명하고 있다.


발표회 질의 응답 시간에는 OOO 감독이 ‘어렸을 때부터 선재라는 캐릭터에게 끌렸다. 최애캐다.’ ‘여기서 제목을 말하기 애매하지만 다들 아실 농구만화도 100번은 재주행했다.’ 외에도 NBA 직관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평소 농구에 대한 애정도 과시했다.


『버저비터』는 사전제작 드라마로 편성되어 이미 30화로 종영하였고,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극장용 특별편이 현재 제작 중이다. 또한 고등학교 농구로 배경을 옮긴 『버저비터:courtside』 프로젝트 티저 페이지가 금일 공개되었다.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가슴이 들썩여봤다면 내년이 더욱 반가운 소식이다. 


000기자 작성일 2023.11.13 수정일 2023.11.14



키오스크 앞에 나란히 서서 메뉴 화면을 슬라이드 하며 구경했다. 맨 앞 페이지 추천 메뉴에 떠 있는 탕후루 사진에 태섭은 마른 하늘 비구름 처럼 웃었다. 잠깐 고민하다 기타 음료에서 쌍화차를 선택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쌍화차를 좋아하실 수도 있죠."

"헉! 맞아. 나 너무 찌든 회사원 같아!"

태섭은 부장의 말이 재미있어 크크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 약간 목이 아파서요. 따뜻한 거 마시려고요."

그리고 여기 음료는 대부분 맛없어서요… 선원이 들었다가는 영업 방해로 쫓아나올 생각을 삼키며 두 사람이 부디 메뉴 선택에서 모험하지 않기를 빌었다. 부장과 대만은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잠시 아웅다웅 했다. 단순한 클라이언트와 광고 모델의 관계 이상으로 친밀해보였다. 결국 대만의 카드가 결제기에 꽂혔다.

"아우. 지난 번에도 사주셔 놓고.. 제발 법카 좀 쓰고 싶어요!"

"저랑 먹었다 하고 다른 분들이랑 맛있는 거 드세요."

태섭은 딱히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조금 떨어져서 오랜만에 와 본 카페 구경이나 했다. 유리 진열장 옆에 키오스크가 설치 된 것 외에는 크게 바뀐 게 없었다. 언젠가 현관 쪽에 세워져 있었던 것 같은 화분들이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말라 죽은 축 처진 누런 이파리가 불쌍했다. 주방에서 과일 세척과 방울토마토 손질을 하던 선원의 사촌 누나분과 눈이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잘 마시겠습니다."

4인석 소파 자리에 둘러 앉아 저가 가장 먼저 음료를 받았다. 돈 계산을 해 준 사람 쪽을 향해 말하자 어서 마시라는 듯이 싱긋 미소가 돌아왔다.

"어머! 원두가… 특이하네."

부장은 아이스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부터 반응 하나하나가 맛깔났다. 부장 옆자리에 앉은 배우는 따뜻한 티백 차 한잔과 탕후루를 하나 주문했는지 그의 앞에 당고처럼 작은 사기 접시에 담긴 세알짜리 토마토 꼬치가 나왔다. 저거 한 접시에 사천 원… 태섭은 자꾸 원가를 계산하려드는 몹쓸 뇌를 멈추었다.

"근데 두분 구면이었어요? 삼점슛이 뭐예요? 나는 배우님 드라마 얘긴가 했는데.."

단 맛이 너무 강한 쌍화탕을 한모금 마시는데 부장이 물어보았다.

"전에 우연히 봤어요. 체육관에서."

"와. 사장님도 농구 잘 하세요? 배우님 진짜 짱이거든요. 직접 본 사람들은 선수같대요."

"잘 하시더라고요."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둘은 쿵짝이 잘 맞았다. 우와. 감탄사와 함께 저를 보는 부장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선수 같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 입에서 잘 한다는 칭찬이 빈틈도 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혹시 남자가 저를 기다렸을까. 그때 이후로 가게를 혼자 봐야했고 정신없는 일들이 연이어 터져 동네 체육관 뉴페이스에 대한 생각은 빠르게 뒷전이 되었다.

"저는 중학생 때까지 농구부였어요."

"사장님은 쭉 여기 사신거죠?"

"네 그렇죠."

"헉. 그럼 두 분. 동문이시고 그런거 아니에요?"

"음?"

갑자기 배우의 눈에 총명한 빛이 떠올랐다. 일종의 권태가 건져내진 얼굴이었다.

"농구부? 이름이 뭐였어요?"

"어.. 파이터즈.."

"충전중?"

왜 알고 있지. 정확히 제가 나온 중학교 이름을 말하는 상대를 저도 부장도 약간의 긴장과 흥미가 뒤섞인 얼굴로 보고 있는데 요! 하는 목소리가 위에서 날아들었다.

"썹이잖아? 아닛! 이분들은 누구시냐."

어색한 리액션에 애꿎은 저의 귀로 열이 올랐다. 아까 조리대 뒤에서 누나분이 전화 통화하는 것을 다 보았던 태섭은 그냥 끄떡 인사했다.

"여기가 플로렌스 사장님, 김선원 씨세요."

"서먹하게 왜이러나~ '김선원 씨세요~'가 뭐냐."

선원은 딱히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제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작게 한숨 쉬었다. 맞은편에 앉은 정대만 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솜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검은 빛이다.

"아~ 두분이 친하신가 봐요."

"아 썹이 제가 키웠죠 거의."

부장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낯설지 않은 기색으로 능숙하게 웃음을 이어붙였다. 허나 저는 개소리에 굳은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어깨동무 하듯이 등받이에 턱하니 팔을 펼치길래 몸이 붙지 않도록 최대한 벽으로 붙었다.

"아우. 근데 실물이 아주 그냥 대단하시네요."

"아아. 예."

"사진이 별로 안 나오시네. 사진 찍히기 무섭죠? 연예인도."

태섭은 선원이 등장한 그 순간부터 쌍화차 위에 동동 떠있는 건대추 갯수를 세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저 아무 말을 닥치게 하려면 그냥 실수인 척 쏟아버릴까...  

"그...러고보니까! 배우님, 여기 궁금하신 거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아. 그랬죠."

아까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와는 달리 급속도로 고요해지는 분위기에, 저보다 훨씬 요령있고 세련된 방식으로 부장은 이 자리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애초에 그도 자기네 모델이 '플로렌스라는 곳에 가보고 싶다.'는 말에 그냥 따라왔을 뿐이었다. 용건만 간단히. 태섭이 사랑하는 미덕이기도 했다.

정대만 배우는 느릿한 동작으로 종이 한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접힌 자국이 생긴 흰 종이를 보고 태섭은 아, 소리 냈다.

"어머. 이거 가져오셨어요?"

선원은 본인이 만든 인쇄물이 왜 여기로 돌아왔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말없이 저를 보았다. 태섭은 저가 급하게 네임펜으로 적어둔 >>>>카페 플로렌스<<<< 라는 강조 글씨가 괜히 창피해졌다.

"아까 조금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제가 곧 카페 체인과 네이밍 스폰서 예정이라...."

마디가 굵직한 흰 손가락이 유리 테이블 위를 천천히 유영하여 선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느릿한 동작만큼 느른한 말투가 이어졌다.

"동종업계 계약금지 규정 위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양해 좀 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예예 그러셨군요. 하하."

흡사 살금 살금 사냥감으로 곁으로 다가가는 포식 동물의 움직임과 닮았다. 선원은 그가 방금 구석에 몰렸다는 인지도 못하고 제 자리에 돌려놓인 종이를 보다 말다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그리고 이거 대외비 조항 깨고 말씀드리는 거니까. 신경 좀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럼 물론이죠. 저 입 무겁습니다. 하하!"

이런. 태섭은 정작 입조심을 당부 해야할 건 부장 쪽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보았던 표정 중에 가장 상기 되어있었다.



부장과 태섭은 선원이 대만에게 사인을 받아내는 광경을 밖에서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정대만 배우님과 동문은 아니신가 보네요. 제가 기억하기로 충전중 같은 이름은 아니었어요."

"아아."

"그래도 동향 사람 이렇게 사회에서 갑자기 만나면 괜히 반갑지 않나요? 제가 좀 올드한가?"

"아뇨. 전혀요. 저도 반갑네요. 농구도 하시고...."

사실 태섭은 동향을 벗어나 본 일이 짧은 대학교 기숙사 시절을 제외하고는 전무했지만 여러모로 오늘 어색한 위기들을 견디게 해준 부장에게 괜히 빈축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요! 담에 기회 되시면 알려주세요. 농구 스토리."

스토리랄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섭은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정대만 배우는 카페에서 유유히 걸어나와 저희들 앞에 섰다. 팬츠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멋이 있어서 보기 좋았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태섭은 그에게 사과 받을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질색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업이 쉽지 않잖아요. 나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엄두도 안 나더라고요."

그는 부장을 보면서 설풋 미소를 지었다. 아까 선원에게 지어보이던 플라스틱 같은 웃음과 비교하면 인간적이었다. 직원 역시 대놓고 앓는 소리하는 걸 보니 역시 꽤 친해보인다.

"아참!! 배우님. 어디에요? 어디어디??? 카페 어디랑 해요."

"아직 비밀이라니까."

"에이… 우리 홍보실 사람들 일 잘하는데…."

"뭐야 캐보겠다고요?"

"아뇨오?! PR 자료 잘 내서 이때다 싶어 샌드위치 좀 더 팔아보려고요!"

"아 저기! 저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태섭은 밖으로 나오니 아까 느낀 으슬으슬한 기운이 올라와서 뒷목을 주물렀다. 두사람에게 허리를 몇번 숙이며 걸음을 떨어트렸다.

"아고, 생각보다 늦었네요. 조심히 들어가셔요."

"어디로 가세요?"

몸을 돌리려던 태섭은 대만이 부르는 말에 놀란 얼굴을 지우지도 못하고 홱 돌아보았다.

"네?"

"방향 같으면 태워다 드릴까 하고요. 저 지금 상현 천락 타워레이크 살아요."

익숙한 이름에 눈이 떠졌다. 선원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 이름이다.

"어머, 잘 됐다. 잘 됐어. 저도 차 갖고 와서요. 주차장까지 같이 갈까요?"





"자꾸 일이 생기네요. 미안하게."

조수석에 앉은 태섭은 어색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을 지우려고 괜히 무릎에 잡힌 바지 주름만 피고 있었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해 찍어주고 앉아있는데 침묵에 금을 그었다.

“어, 아뇨.”

왜인지 자꾸 저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태섭은 불편함을 느꼈다.

”농구는 얼마나 하셨어요?“

차라리 무난한 화제로 돌리자 싶어 태섭은 저가 화두를 끊었다.

”공 들고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생 때까지. 2년 쉬고 다시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오….“

”선수같다는 말. 심한 과장이에요. 그냥 일반인들 눈에나 그런거지… 이러다 진짜 프로선수랑 대결하라는 예능 불려갈까봐 겁난다니까.”

태섭은 이 말이 진짜 걱정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상대라면 잠시 난처한 빛을 띄다가도 승부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승산이 없어도 부딪쳐보고 피 흘려 깨지는 것을 원하는 독종스러움이 흘러나왔다.

“아, 다음 신호에서 세워주세요.”

“편의점 안 보이는데요?”

“차 한번 넣으면 돌리기 복잡해요. 골목이 좁아서.”

배우의 차는 덩치가 있는 SUV였다. 올해 신차 라인중에 역대급으로 잘 빠져서 작년에 주문했어도 일년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모델이었다. 아마도 풀옵션일게 분명한 내부는 전면이 엄청 탁트여 운전하는 맛이 있겠다싶었다. 몸을 감싸는 시트도 승차감도 마음에 들었다.

“계속 바쁘죠?”

”어..“

”아침에는 온다길래.“

체육관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끌어올리는 남자 말에 안전벨트를 풀다 말고 멈췄다. 뭐지. 태섭은 묘한 공기에 눈이 가늘어졌다. 손가락으로 벨트를 튀기듯이 긁다가 드르륵 풀어냈다. 

“한판 할까요?“

”좋죠.“

”언제가 편하세요?“

”저는 백수 기간이라 부르면 나갈게요.“

그냥 지금 날짜를 정하면 안 되나. 태섭은 남자의 의도가 읽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가 눈치껏 먼저 제안했으니 그 이상의 방아쇠는 당기고 싶지는 않은 오기가 있었다.

“그런데 성함이?”

“송…태섭.”

“송태섭 씨.“

태섭은 이제 차 안의 히터가 조금 덥게 느껴졌다. 아직 한 겨울도 아닌데 온도 설정이 좀 높은 거 아닌가. 빨리 내려서 시원한 공기로 뇌속을 씻어내고 싶었다.

썹이. 낯선 울림에 반사적으로 태섭은 손잡이를 꺾었다. 덜컥. 차문이 열렸다. 물기 먹은 낙엽이 흐드러진 가을 냄새가 자욱한 남자의 체취를 몰아냈다. 

“지금 못 정하면.”

태섭은 제 앞에 내밀어진 핸드폰의 검은 화면에 비친 저의 얼굴이 꼴사나웠다. 발 밑이 진창 속에 잠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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