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책으로 내려고 준비하다가 마감하지 못한 무언가의 번데기 2입니다.... 당연히... 미완입니다.

* 로시난테가 스파이로 들어가지 않고 로가 돈팸에서 병이 낫고 해군에 스파이로 잠입했다는 설정의 AU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하늘. 새의 울음소리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귀 뒤를 베일 듯 스치고, 갈라져 있던 두 개의 푸른색이 이내 한데 엉클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기고, 곧 까맣기까지 한 푸른색이 눈꺼풀 밑으로 몰려들어왔다. 다시 눈을 살짝 뜨자 조그마한 방울들이 줄을 지어 눈 위로 올라갔다. 새까만 풍경 속에서 하얀 방울들이 기다란 밧줄처럼 올라가는 건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멍하니 비눗방울 같은 것이 작아지며 터지는 것을 바라보는데, 그 옆으로 얇은 금색 실이 너울지듯 넘실거렸다. 산호초인가. 꿈결과도 같은 장면 속에서 마치 잠이 오듯 눈이 감겼다. 곧 모든 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위가 소란스러웠다.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묵직한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자 눈 안에서 소금기가 버스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수갑 따위에 묶인 듯 손발은 무거웠고, 바닥에 붙박인 듯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뇌기능은 정지한 것처럼 멍했고, 폐는 탐욕스럽게 산소를 요구해댔다. 숨이 가쁘다.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저 한순간 보았던 금빛 너울만이 눈 안에 각인된 듯 선명했다.

돌연 뺨을 맞은 것처럼 얼굴이 얼얼했다. 얼굴을 때리듯 쏟아진 물에 소금기가 조금 씻겨 내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멍청하게 있는 사이 물 한 바가지가 더 쏟아졌다.


“좀 낫지? 그래도 바닷물보다야.”


바닷물 소리 때문인지 온몸을 뒤덮은 물비린내 때문인지 정지했던 머리가 가까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바다에 빠졌었다. 그 빌어먹게 길기만 한 대걸레 때문이다. 대걸레가 미끄러지면서 일순간 중심을 잃어버렸고 그 순간 아래로 점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졸병이라도 해군은 해군. 보통이라면 머쓱해 하며 수영으로 함정의 벽을 기어오르는 결말이겠으나, 악마의 열매 능력자에게 물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건, 얼마나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건, 바다에 한 번 빠진 순간 제 코와 입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를 바라보며 익사를 기다리는 결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 바닷물보다 민물이 나은 건 사실이지만, 소금기를 좀 씻어내서 정신을 들게 만드는 정도일 뿐이지 빠지면 온몸이 죽기 직전의 문어처럼 축 늘어지는 건 똑같다.


“푸핫!”


짠기를 씻어냈다고 해도 팔다리는 어딘가에 꽉 묶인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고개를 겨우 돌리게 만든 건 옆에서 들린 커다란 기침 소리였다. 옆에는 물에 흠뻑 젖은 흰색 덩어리가 있었다.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사람. 아니, 기침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사람이겠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봐도 다리라던가 머리라던가, 아무튼 인간에게 달려 있음직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사람임이 분명한 ‘덩어리’였다.


“나참, 어디 가서 해군이라고 하지도 마세요. 동네 창피해서, 원!”

“대장들 귀에 들어가면 강등은 따놓은 당상이겠네요.”

“야, 야……. 부하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고 해 주면 어디 덧나?”

“능력자가 능력자를 구한다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덩어리’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거대한 개처럼 몸을 마구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뜩이나 덩치가 산만한데 태양을 등진 채 쳐다보기까지 하니,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없는 조그맣고 새까만 주먹처럼 보였다.


“괜찮아?”


너 같으면 괜찮겠냐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흐릿하게 남은 이성과 소금물이 잔뜩 들어가 말라붙은 목구멍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던 말을 멈춰 세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로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는 게, 가만히 있었다가는 눈알도 까뒤집어볼 것 같아 대충 고개를 까닥였다. 어쨌든, 의사소통은 될 터다.

그는 내 몸을 일으켜 앉힌 후 제 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코트이니 덮어봤자 따뜻해지지도, 힘이 나지도 않았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결국 보다 못한 다른 해병이 얼른 코트를 치우고 모포 두 장을 가져와 몸을 덮어주었다. 그는 그제야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목구멍을 쿡쿡 찔렀지만 참았다. 아무튼 이 일에 인내심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었고, 상사에게 뻗대지 않는 것도 인내심의 하위 항목에 들어갔다. 그가 아무리 유순하고 화 안 내는—어디까지나 부하에게— 인간이라고 해도, 굳이 얌전한 개의 옆구리를 쿡 찔러놓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오도카니 앉아 주변 풍경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는 이제 완전히 멀쩡해졌는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키득거렸다. 시선을 숨기려 애쓰면서 슬쩍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복장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잘 웃는 얼굴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에는 꽤 다르게 보이는 낯이었으나, 찬찬히 들여다보니 골격이나 이목구비의 생김새 같은 건 상당히 닮아 있었다. 성격은 그렇게나 달라도 혈연은 혈연이란 건가. 새삼스럽게 어이가 없었다.

그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고, 마린포드에서 근무하는 해군 대령이었으며, 현직 해군 대장의 양아들이고, 초인계 악마의 열매를 먹은 능력자였다. 그러나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가 도플라밍고의 동생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에게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었다.





물 속의 칼




 

자그마한 사고—목숨이 날아갈 위기를 겪긴 했지만 살았으면 그만이다— 이후 사흘 정도가 지났다. 거칠기 짝이 없는 대해적 시대, 해적이건 해군이건 눈 깜짝할 새 모가지가 날아가는 거야 흔한 일이니, 해군에 갓 들어온 잡병이 어느 순간 죽었다고 해도, 그 정도야 하루에 열댓 번도 더 일어나는 사소한 해프닝일 뿐이다.

어쨌든 그날 또 그를 만났다. 늘 옷 어딘가에 눌은 자국을 남기고 다니던 평소와는 달리 웬일인지 멀끔한 옷차림이었다. 말을 걸고 싶은지 슬쩍슬쩍 다가오는 걸 무시하고 잡고 있던 대걸레 자루에 더 힘을 줬다. 최대한 온몸으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풍기려 했지만, 노력의 보람도 없이 그는 바로 옆까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야, 안녕!”


귓속에 콕콕 박히게 큰 소리로 말을 걸어 온데다가, 어깨까지 두들겼으니 더 이상 모른 체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시는 그저 말을 걸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불러도 할 수 있는 한 못 들은 체 하는 것뿐이었으니 여기까지 온 이상 더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짜증나. 목구멍 속으로 웅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흠뻑 젖은 대걸레가 바닥을 싹싹 지나갔다. 청소하느라 바쁘니까 말 걸지 말아주시오. 대충 그런 의사표현이다.

남이 청소를 하고 있거나 말거나, 대꾸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거나 말거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붙여 왔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냐던가, 다른 사람에게 혼이 나지는 않았냐던가, 자기는 상사에게 불려가서 머리 나쁘다고 한 소리 들었다던가 하는 아무래도 좋은 헛소리였다. 그가 자신의 진정한 멍청함이 저도 능력자면서 사람을 구하겠다고 바다에 뛰어드는 면이 아니라, 상대가 대화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언제쯤 깨닫게 될지 생각하며 일부러 그의 발치를 향해 걸레를 밀어댔다. 그는 스텝을 밟듯 이리저리 걸레를 피하며 낄낄거렸다. 이게 뭔가 재미있는 놀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이지 이딴 게 도플라밍고의 동생이라니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다. 물론 혈연이라는 게 제삼자가 납득 못한다고 부정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기분상으로는 그랬다. 닮은 건 머리카락이나 눈 색깔, 그리고 멍청할 정도로 큰 키 정도인가. 그 정도야 생판 남이라도 닮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까 너, 신기한 열매를 먹었다며?”


열매 소리에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눈가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침착하자. 그가 알고 있는 건 그저 내가 희귀한 악마의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건 그 이상을 방증하지 않는다. 해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졸병이 악마의 열매를 먹었다는 게, 그가 순수한 해병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말없이 계속해서 바닥을 밀었다. 몇 번이고 물걸레질을 반복한 바닥은 얼굴이 비칠 만큼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악마의 열매가 다 그렇긴 하지만, 특히 희귀한 걸로 유명한 열매라던데. 어떻게 먹은 거야?”


웬만한 소리는 대부분 무시해 버리겠지만 여기까지 오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게 숨을 고르며 빠르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차피 이런 질문을 듣는 거야 당연히 상정 내의 일이었고, 그에 따른 ‘적합한’ 대답 따위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우연히 먹었어요. 어쩌다가. 계속 떠돌아 다녔으니까.”


백 퍼센트 거짓말은 아니다. 행운과 우연과 노력의 컬래버레이션이니까. 목적을 가지고 도플라밍고를 찾아갔지만, 그가 열매를 손에 넣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과 노력―이고, 그 열매를 나에게 준 건 행운이니까.


“운이 좋았어요.”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서너 명은 있어야 겨우 비슷할 만큼 키 차이가 났던 터라, 그는 무릎을 한껏 굽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해질녘 노을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헤실거리는 낯짝이나 허둥대는 태도와는 영 맞지 않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그런데 왜요?”


더 이상 쳐다보기 곤란해 일부러 말을 던졌다. 그는 내가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 깜짝 놀라 두 눈을 두꺼비처럼 끔벅거리더니 입을 한껏 벌리며 웃었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웃음이다.


“아―니. 뭐 별 거 아니고. 그거 해군도 찾고 있던 열매거든. 엄청 쓸모가 있는 거라면서…….”


그야 그랬겠지.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의 효용성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유용한 열매라는 건 생초보인 나조차 알 정도였다. 게다가 도플라밍고도 이걸 손에 넣었을 때 해군보다 먼저 얻어서 다행이라며 좋아했으니.


“뭐, 결국 능력자가 해군에 들어왔으니까 잘 된 거지! 안 그래?”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되긴 했다.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려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굳이 이 귀찮은 인간과 오래 놀아줄 이유도 없고,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도 없었다. 대걸레 자루를 꼭 붙잡고 그를 향해 강하게 밀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딱 그런 얼굴이다.


“이제 됐으니까 비켜요. 바쁘니까.”

“어?”

“청소에 방해된다고요.”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야, 너 그래도 내가 대령인데 좀 너무한 거 아냐? 상사를 존경해야지, 인마! 군대는 상명하복이 상식인 거 몰라?”

“네.”

“어어, 대놓고 그러네. 너 말이야. 대령이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거든? 잘 보이면 과자라도 한 개 쥐어줄지 누가 알아?”


웬만하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 말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다섯 살 어린애라면 모를까 열다섯 살을 앞에 두고 과자 타령이라니. 정신연령이 별로 높은 편이 아니라는 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정도가 심하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 덩치가 좀 작은 편이긴 했지만 과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꼬마로 보일 정도는 아니건만. 어린애 취급에 더 골이 나서 이번에는 아예 그의 하얀 신발 위로 대걸레를 밀어버렸다. 그가 악 소리를 내며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그러니까 작작 좀 하지.

졸병의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정해진 일정에 맞춰 사격이나 격투술 따위를 배우고, 나 같은 특이 케이스―그러니까 능력자―들은 능력에 맞는 것을 따로 배운다. 내 경우에는 의학이다. 주마다 한두 번 정도는 사상 교육을 듣고, 비는 시간에는 다른 해병들의 잔심부름을 하거나 청소나 빨래 같은 잡일을 한다. 말이 좋아 신병이지 실상은 잡일꾼이고, 이러다 특출난 재능을 선보이거나 운이 좋아 상사의 눈에 들면 좀 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운과 실력, 그리고 약간의 연줄이다.

기왕 연줄을 잡아야 한다면 좀 더 실력이 좋은 인간이 좋았을 텐데. 로시난테의 실력은 나쁘다곤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군에서 돋보일 만큼 뛰어나다고 하기는 미묘했다. 애초에 먹은 열매의 능력도 직접 전투보다는 첩보 활동에나 어울릴 능력이니. 해군이 아니라 CP에 들어갔다면 더 나았을 텐데. 내가 얼굴을 볼 일도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적당히 청소를 마치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찾아서 한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굳이 남의 빨래를 대신 해 주고 하릴없이 바닥만 연신 닦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보다 좀 더 쓸모 있는 일들이 있을 터다. ‘스파이’가 할 만한.

도플라밍고는 어릴 적부터 해군에 들어가 있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대해적 시대의 초창기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나이 먹고 해군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어릴 적에 들어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돈키호테 패밀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해적과 거리가 먼 삶이었으나, 그의 말이 논리적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기야 해군 입장에서도 다 커서 다루기 어려운 성인보다는 사상 교육도 쉽고 부려먹기도 좋은 어린애를 선호하겠지. 게다가 희귀한 열매까지 주워 먹은 나는 해군에서 반드시 확보하고 싶어 할 인재일 터다. 해군에 단단한 못 하나를 박아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처분을 마음 깊이 납득하느냐는 별개지만.

벌써 반년을 머물러 있었지만 해군은 여전히 정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정부의 끄나풀 집단이니 정이 갈 수 있는 집단이 아니기는 하지만. 대걸레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눈치를 보다 은근슬쩍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수상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듣기는 했지만 불쾌한 장소에 있으니 마음이 급했다. 아래서부터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계획대로라면 십 년 이상의 장기 임무가 될 텐데, 그 동안 충실한 해군의 개로 사는 건 배알이 꼴렸다. 시키는 일만 하는 건 무능한 거야. 부가 수입을 얻는 게 뭐가 나쁜가.

자신만만하게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년이나 일을 했으면 대강의 지리는 외우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괜히 높은 사람들 집무실 근처를 얼쩡거렸다가는 의심을 살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경비도 있으니 얼굴을 들이밀어봤자 쫓겨날 따름이다. 조금 낮은 녀석이라도 괜찮을까. 아무튼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도플라밍고의 정보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마린포드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이고 필요한 부하인지 증명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생각도 희미해지지 않던가. 나는 잊히고 싶지 않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경비의 눈을 피해 복도를 돌아다니다 로시난테의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본부 대령부터 개인실이 지급된다고 했던가. 진갈색의 문 앞에 붙은 은색 명패를 바라보며 입속말로 글자를 읊조렸다. 돈키호테 로시난테. 반은 익숙하고 반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플라밍고의 얼굴을 옆에 놓아두었다. 닮긴 했지만 외모뿐이다. 성격도 재능도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딴 게 정말 도플라밍고의 친동생이긴 한 건지 의문이 통 가시지 않았다. 그 나이에 본부 대령이면 직급도 높은 편이고 나름대로 실력도 괜찮은 것 같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한심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보같이 실실 웃기나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지고, 능력도 첩보로는 어떨지 몰라도 전투로는 솔직히 한심한 능력이다. 도플라밍고의 능력이 더 대단하고 강하다. 황당할 정도로 차이 나는 실력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로시난테는 해군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죽을 만큼 싫었다.


“어, 무슨 일이야?”


멍청하게 서 있는데 돌연 문이 벌컥 열렸다. 한참 높은 곳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고장 난 것처럼 움찔거렸다. 당연히 밖에 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계급도 없는 잡병이 대령을 찾아올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그럴듯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얄팍한 선택지 사이에서 굴러 나온 건 우스운 변명이었다. 태연자약한 척하려 애쓰면서 빠르게 대꾸했다.


“과자 준다면서요?”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으며 허리를 굽혀 내 어깨를 툭 쳤다. 앞에서는 툴툴거려놓고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남을 애 취급하는 데에 도가 튼, 불유쾌한 어른들의 전유물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방은 성질에 걸맞지 않게 차분하고 깨끗했다. 일하는 데 필요한 물건 외에는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개인 물품으로 볼 만한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루 중 꽤나 시간을 보내는 장소일 텐데도 냄새 하나 나지 않아 사람이 있다는 느낌조차 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방이다. 이후에도 그의 방을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그 생각을 했다.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너머로 햇살이 비스듬하게 마룻바닥 위를 비췄다. 나는 햇살 끄트머리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주위를 두리번대며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의자 하나를 꺼내 주더니 동그란 테이블 위에 납작하고 둥근 알루미늄 깡통 하나를 올려놓았다. 문화유산 따위로 지정됐을 하얀 성이 인쇄된 깡통을 열자 정갈하게 담긴 쿠키가 나왔다. 어릴 적 아버지나 어머니가 답례품으로 받아 오셨을 만한 물건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싸르르해졌다.

버터 맛이 물씬 풍기는 과자를 아작거리는 동안 그는 이런저런 일들을 물었다. 해군 일은 할 만 하니?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능력은 좀 쓸 수 있게 됐어? 마치 상냥한 선생님 같은 투였지만 내겐 통 곱게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고개 끄덕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기계처럼 머리만 아래위로 주억거리는데, 그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내 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 노스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맞아요.”

“어디인데?”

“미니온요.”


잘 읽지도 못하는 해도를 들여다보면서 주워들은 섬 이름이었다. 그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왼쪽으로 눈을 돌릴 때는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거라고 했다. 그는 왼쪽 위로 시선을 옮기고 가만히 입술을 꿈지럭거렸다. 그 섬에 얽힌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말을 많이 해서 좋을 게 없는 입장이었다. 사소한 궁금증을 배 밑으로 밀어내고 쿠키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견과류 냄새가 났다.


“노스 출신이면 잘 알겠네.”

“뭘요?”

“돈키호테 패밀리.”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손끝까지 전류가 밀려오는 것처럼 가볍게 손가락이 경련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들었을 때의 충격보다, 그 떨림을 그가 알아챘을지 어떨지에 대한 불안이 더 컸다. 불길한 예감은 거대한 파도처럼 온몸을 집어삼켰다. 어두운 방 안에 닳은 양초를 들고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불안이 가슴 안쪽을 거칠게 좀먹어 갔다. 기껏 세운 계획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공포가 기분 나쁘게 엉켜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나는 길게 침을 삼키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노스 블루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해적에 대한 공포심으로 보이기를 기대하면서.


“알지?”

“노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이건 내가 도플라밍고를 좋아하고 말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이제 노스라는 작은 바다에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덩치가 커져 있었고, 해군 본부도 그를 주목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덩치를 키우기 전에도 이미 노스 블루 안에서는 유명했다. 어른들은 두려워하고, 어린애들은 동경했다. 나는 당연히 후자였다. 그는 박연병이 전염병도 불치병도 아닌 단순한 질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내 생명을 살려준 사람이었고, 동경할 만한 카리스마와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노스 블루에 발 붙이고 살면서 그를 모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 바다의 모든 아이들이 ‘거짓말쟁이 노랜드’를 듣고 자란 것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로시난테는 내 대답을 가만히 듣더니 가만히 시선을 위로 돌렸다. 이번에도 왼쪽이었다. 형과의 희미한 추억이라도 되새기고 있는 건지, 어딘가 멍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있더니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짤막하게 돈키호테 패밀리에 대해 설명했다. 이제는 그랜드 라인을 넘어 위대한 항로, 더 나아가 신세계까지 접근하고 있는 거대 규모의 해적단. 아무렇지 않게 천상금을 터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집단들이자, 전통적인 해적이라기보다는 육지 마피아에 가까운, 육지와 바다의 결합이라고 할 만한 존재들. 그는 그들이 좀 기이한 존재라고 설명하고는, 너만한 어린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써먹는 극악무도한 인간들이라고 덧붙였다.


“노스에선 아이들도 많이 들어가는 모양이야.”


한탄하듯 뱉어져 나온 말에 이른바 ‘버튼’이 눌렸다.


“그렇겠죠.”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대꾸에 나도 놀랐지만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내 마린포드에 머무른 해군 도련님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내가 살아온 노스 블루는 지옥의 한 단면이었다. 정부에 기대다 배신당하고 죽어갈 바에야 차라리 칼을 들이대다 물고기 밥이 되는 게 더 나은 땅. 거긴 그런 바다였다.

대강 보기에도 그다지 눈치가 없는 그도 내 대답에 날이 서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조금 당황한 낯이었다. 그는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그렇지 뭐.” 했다. 해적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실상을 겉핥기로나마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래도 아예 책상물림은 아닌가보지. 대답하지 않고 들으라는 표시로 과자를 큰 소리로 우적거렸다. 그는 시선을 불안하게 돌리며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어영부영 말을 마무리지었다.


“어, 어쨌든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적은 해적이지. 너도 운이 나빴으면 거기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겠네. …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정확히 그 반대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과자통의 뚜껑을 닫았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였다. 그는 그 표시를 인지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시선을 피하는 나를 눈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좋은 스파이라면 여기서 확신이 듬뿍 들어찬 눈으로 활짝 웃으며 긍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차올라서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그는 두 번 묻지 않았고, 나는 그가 쥐어주는 과자통을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방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텅 빈 복도에 혼자 남았다. 나는 멍하니 서서 품 안에 들어 있는 과자통 겉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체온을 받아 어느 새 조금 미지근해진 알루미늄의 매끄러운 촉감이 기묘할 정도로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깡통을 껴안고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어린애가 잘못 적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십자말풀이처럼, 어딘가 꽉 맞물리지 않는 듯한 불온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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