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교환

340일간의 유예 설정입니다.

참고해주세요.




베른 세크리티아를 구성하는 건 8할이 데블란이고 2할이 체이스였다. 그렇다고 데블란에게 8할 만큼 감사한 마음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데블란은 어디까지나 「디스트로이」인 베른을 인간처럼 보이도록 교육한 것뿐이고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든 건 2할의 체이스였다.



날붙이에 숨결을 부여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안아 주었다. 남들과 달라도 ‘베른, 너의 어떤 모습도 전부 너란다. 모두 사랑스러우니 두려워하지 말렴.’ 말하며 부수기만 하는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베른은 섧게 웃는 체이스를 보자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두 팔로 체이스를 끌어안았다. 세크리티아의 더운 여름이 읽었던 책의 문구를 떠올리게 했다.



「이게 나의, 내 세계의 시작이구나.」



칼리안은 낯선 천장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놀라 몸을 일으키니 쌀쌀한 공기가 현실을 불렀다. 아, 그렇지. 탄식과 같이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두어 번 마른세수를 반복하곤 어깨를 툭 떨어트렸다. 베른일 때부터 이어진 아침잠은 칼리안이 되어서도 여전했지만, 간혹 새벽에 깰 때가 있었다. 대게 좋지 못한 꿈을 꾸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나섰다. 세크리티아와 다른 카이리스의 공기가 여전히 낯설다. 잊고자 함에도 자꾸만 비교하는 건 괴롭고 슬퍼도 시작이 있어서 그런 걸까. 하얗게 쇤 한숨이 길게 자국을 남겼다. 가을인데 이렇게 추우면, 겨울엔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툴툴대며 난간에 기댔다. 새벽 어스름은 경이롭게 물러섰다.



“뭐해.”



모르던 건 아니다. 모르는 척 했을 뿐. 상대도 구태여 아는 척 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틀렸다. 칼리안은 실금 같이 웃으며 대답 대신 동 트는 아침을 보았다.



“이제 식사는 잘 하십니까.”



칼리안은 답변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러다 소리 내 웃었다. 스스로도.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도 칼리안은 참지 않았다. 참아도 한 번만 참는 짧은 인내심이다. 그런 칼리안이 상대의 답변을 생각지도, 재촉치도 않는다. 언젠가 말하려니 하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이건 옛 칼리안이 준 선물인가, 저주인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서 웃었다.



카이리스는 세크리티아와 마찬가지로 특이했다.



세크리티아의 혈통이 다들 꺼려하는 「디스트로이」가 잘 난다면, 카이리스의 혈통은 다들 사랑하는 「셧」이 잘 났다.

디스트로이는 죽음에 미쳤고 쾌락에 죽었다. 셧은 사랑에 미쳤고 감정에 죽었다.

둘 다 정상이 아닌데 나라를 세웠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나같이 조금씩 미쳤지만 굴러가긴 했다.



참 신기하지. 칼리안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데블란은 곧잘 카이리스의 이야기를 했다. ‘카이리스의 왕자들은 전부 셧이었다. 이번 대에 카이리스는 멸망하겠군.’ 입버릇처럼 말했던 이야기는 사랑에 미친 이들을 맞아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겼다. 칼리안은 솔직하게 웃었고, 베른은 여전히 모르는 얼굴을 했다. 디스트로이들은 감정에 치우쳐 목숨을 내던지는 부나방 같은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계속 베른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칼리안이 되자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감정에 대한 가치도.



칼리안은 칼리안의 기억을 꺼내보지 않았다. 전부 다 꺼내면 어린 칼리안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될까봐 가슴에 품고 지낸다. 불현 듯 일상에 찾아오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정원을 보니 어린 네가 나타난다. 좁은 보폭으로 ‘형, 형님.’ 하며 플란츠의 뒤를 쫓는다. 하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아장아장 따라붙는다.



카이리스의 세 왕자는 전부 다 셧이었다.

그리고 어린 칼리안의 짝은 플란츠였다.



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며 플란츠는 ‘가.’ 퉁명스레 말했다. 실리케가 보면 험하게 대할테니 돌아가란 소리지만 어린 애가 뭘 알겠어. 잘 익은 딸기가 순식간에 물렁물렁 멍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서 웃는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따사롭게 웃으며 ‘다음에 울고 싶으면 꼭 찾아 주세요.’ 말한다.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을 획 밀쳤다. 정말로 울고 싶던 순간이라 그랬을 것이다.



처음으로 사랑을 안 칼리안도. 반기지 않을 세상의 칼리안도. 프레이야가 죽고 기댈 곳 없던 칼리안도. 제 편이 생긴 칼리안도. 무수한 칼리안들은 사소한 것 하나에 플란츠를 보며 플란츠의 미래가 행복하길 바랐다. 떠날 때까지 생의 미련이 아니라 플란츠를 걱정하며 ‘같은 사랑을 바라지 않아. 그저, 형님이 행복한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만 남겼다.



베른은 왜 칼리안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유가 있다면 아마 칼리안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왜냐고? 그 자애로운 아이는 플란츠가 울지 않길 바라서, 베른에게 감정을 가르쳐 주고 갔으니까. 사랑을 남기고 갔으니까.



덕분에 혼란스러웠어. 칼리안.



턱을 기댄 칼리안은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칼리안이 어린 칼리안의 기억을 펼쳐보지 않는 건 앞에 말했듯 어린 칼리안이 세상에 지워지는 게 싫어서도 있지만 사랑에 미칠 자신이 두려워서도 있었다. 이성과 지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단단히 우리에 가둬야했다. 풀어두면 죽이고 싶으니까.



베른은 잘 배운 디스트로이라 타인에게 함부로 굴지 않았다. 체이스에게 걸림이 될까 들끓는 성욕을 지웠다. 날뛰는 욕구는 전쟁터에서 풀었고 침전한 것들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풀었다.



여긴 그럴 수 없다. 날뛰는 욕구를 풀 전쟁터도 없고, 들끓는 성욕을 잡아 줄 이유도 없었다. 도리어 부추기고 있는 삶은 완두콩이 있어 곤란하기 짝이 없다. 이거 봐, 여기가 어디라고 불쑥 고개 내미는 거. 칼리안은 기댄 몸을 일으켜 발코니를 타고 훌쩍 뛰어내린 플란츠를 잡았다.



“식사 잘 하냐 물어본 답변이 불쑥 찾아오는 건가요?”

“또 짖지.”



새벽공기에 옷깃을 여민 플란츠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칼리안은 어깨를 으쓱 했다. 참 재미없는 배려를 한다. 어린 칼리안에겐 그리 데면데면 굴더니 실리케가 없어서일까? 플란츠가 소파에 앉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열린 문에 얀이 본 건 플란츠라 문고리를 잡고 복도를 보다 방을 보다 한다. 칼리안은 아이처럼 웃었다.



“여기 3층 맞아. 아침 먹자.”

“네.”



간단하게 씻고 나오니 가벼운 아침상이 있었다. 물론 칼리안 기준으로 플란츠는 영 마뜩찮은 얼굴로 식탁을 둘러보다 샐러드를 찾았다. 저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말을 더하려다 그만두고 나이프를 들었다. 요리사가 성심성의껏 차려준 아침인데 입 안이 영 까끌까끌해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형님이 찾아오시니 좋네요.”



그래서 속을 한 번 긁었다. 플란츠는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푹 쉬었다.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가 덜 변덕스럽겠군.



“그래도 최소한 무서움은 가져주세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긁는다.



“알맹이는 디스트로이니까.”



세 번.



“짖지.”



플란츠의 인내심은 칼리안보다 낫다. 세 번이면 많이 참은 거지. 플란츠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자 칼리안은 꽃 같이 웃었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언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다 언제는 남보다 못하게 군다. 의도적으로 밀어낼 때마다 플란츠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셧으로 태어났으나 평생 짝이란 없을 것으로 살았던 플란츠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미친 게 아닌 가 싶었다. 나중에 알맹이가 달라진 걸 알고 한참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기적이게도 내 짝이 생겨서 좋았고, 서운하게 인사 한 번 건네지 않고 떠난 동생이 슬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더운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뺨을 붉게 띄우며 ‘형님’ 하고 부르던 보들보들 녹아내린 목소리. 사랑스러운 얼굴. 끔찍하게 싫었다. 칼리안이 싫었던 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상대방만 바라볼 자신이 있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밀어냈다. 셧이 사랑을 거절당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멀어졌다. 말라가는 칼리안을 보며 우습게도 나도 저렇게 되겠지. 하는 두려움이 발치를 적셨다.



“차를 드릴까요.”



플란츠는 고개를 들었다. 레릭이 눈썹을 휘었다. 칼리안은 꿀을 듬뿍 넣은 귤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플란츠는 향이 희미한 딸기차를 받았다. 말린 딸기가 물 위로 동동 떠 다녔다. 칼리안이 얀을 보며 ‘나가 봐.’ 조곤조곤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세요.’ 얀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플란츠는 레릭을 보았고 턱짓했다. 걱정이 스민 얼굴을 뒤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형님.”



대답 대신 칼리안을 바라보았다. 플란츠는 지친 얼굴이었다. 칼리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옆에 선 어린 칼리안을 보았다. 옷깃을 쥐고 멍 든 딸기 같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이젠 정리를 해야 했다. 베른은 없었다. 베른의 세계는 죽음으로 끝을 보았다. 남은 건 칼리안 뿐이다. 칼리안은 선택해야 했다. 변덕은 그만 부려야지. 심술도 그만 부려야지. 그리고 플란츠도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야 우린 살 수 있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했지요.”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을 사랑했던 그 아이는 떠났어요. 알고 있지요.”



‘너 누구야.’ 물어보던 플란츠. 당신은 알까? 그때 당신 표정 엉망이었던 거. 칼리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죠.”



다리 아래 붉은 안네루시아를 뿌렸다. 몰라서 그랬다. 알았다면 네가 떠난 날에 뿌렸을 텐데. 많이, 많이많이.



“그리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죠.”



칼리안의 나긋한 말에 플란츠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래.”



푸릇한 눈은 아픔이 있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칼리안은 한숨을 삼켰다. 어린 칼리안이 갈구하던 플란츠의 사랑은 베른이었던 칼리안을 향했다. 참으로 얄궂어. 칼리안은 어린 칼리안을 보았다. 조금의 원망이라도 남아있다면 그 마음을 거절할 생각으로.



어린 칼리안은 웃었다. 잘 익은 딸기처럼 붉은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마치 베른이었던 칼리안의 감정을 ‘내’ 감정이 아니라 ‘네’ 감정도 된다는 듯 다독이며.

졌다. 졌어. 칼리안은 슬프게 웃었다.



“저는 디스트로이에요.”

“짖지.”

“들어보세요.”



칼리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감정을 배우긴 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어요.”



꼬고 앉은 다리를 풀어 쭉 뻗었다.



“평생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 두 손을 깍지 꼈다.



“세렌티는 그러지 못하게 했지만요.”



어깨를 으쓱한 칼리안은 플란츠를 바라보았다.



“저는 칼리안이에요.”



플란츠는 자신을 소개하는 칼리안을 흔들림 없이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잘 여문 딸기 같은 눈. 여름의 달뜬 뺨. 그 날, 그 순간을 담은 똑같은 얼굴. 다르지 않은 얼굴.



“형님은 플란츠인가요?”



칼리안은 묻고 있었다. 나는 칼리안으로서 당신을 사랑하려 하는데 플란츠, 당신은 정말 날 사랑합니까?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이나, 죄책감 없이 순수하게 날 사랑하나요?



“그래.”



다 내려둔다. 복잡한 상념도, 죄책감도, 두려움도. 다 내려두고 본다. 알맹이만 남은 감정을 드러낸다. 칼리안은 울 듯 웃었다. 팔걸이에 기댄 팔꿈치가 툭 떨어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우리 죽어요.”



커튼에 조각난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대로 있으면 죽어서 없어지고 말 거예요.”



눈이 부셔서 손으로 햇살을 가렸다.



“그래도 살아요.”



아니 눈을 가렸다. 칼리안은 두 눈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사라지는 어린 칼리안을 보았다. 어린 칼리안이 가지고 있던 감정은 너무 슬펐고,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기어이 눈시울이 달아올라서 견딜 수 없었다.



“형님.”



손을 떼고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렸다. 플란츠는 몸을 일으켜 칼리안을 끌어안았다. 칼리안은 문득 떠올랐다. 「이게 나의, 내 세계의 시작이구나.」 라는 문장의 뒤를.



“이게 제 사랑의 시작이에요.”

“칼리안.”

“날 사랑해주세요. 내가 디스트로이가 되지 않도록.”

“칼리안.”



플란츠는 칼리안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떠난 어린 칼리안을 기리듯. 칼리안은 섧게 웃었다. 체이스의 그 웃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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