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 환생 AU




오베론은 불편한 꿈을 꾸고 깨어났다. 꾸는 동안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길고 깊은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해괴한 흰색 원피스 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오베론도 만만치 않게 기괴한 모양새이긴 했지만-발이 사람 발이 아니었다-, 그와는 상관없이 행복해 보였다. 제 얼굴을 들여다볼 일이 많지 않아도 자신이 구김살 없이 웃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오베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 순간 자신은 벅차오를 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베론의 발은 흉측한 모양이 아니고, 오렌지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본 적도 없다. 그리운 느낌이 든다거나 애절한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꿈을 꿀 때는 꿈이라는 자각이 없으니 상관없었지만, 깨고 나니 대체 무슨 헛꿈인가 싶어 황당해졌을 뿐이다.

 

X

 !! 당신의 운명의 사랑을 찾으세요 !!


어이없는 문구를 보았을 때 황당함은 극에 달했다. 오베론은 제가 아직 잠이 덜 깨 환상을 보나 싶었지만, 반투명한 문장 너머로 비치는 익숙한 방 풍경이 꿈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다.

오베론은 상체를 일으켜 팔을 휘저었다. 문구는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반투명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오베론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이름을 더듬거리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팝업창.

친절하게 X 버튼도 있었다. 손가락이 팝업창 오른쪽 위, X 버튼에 닿자 반투명한 글씨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상한 꿈을 꾼 탓에 그러잖아도 언짢은데 별 희한한 광고까지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오베론은 팝업창의 흔적이 없는지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둘러보고 부재를 확인한 뒤 안심하고 다시 누웠다.

 

***


길거리 불법 광고는 구청에 신고라도 하는데, 허공에 나타나는 불법 광고는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오베론 보티건은 약 보름 동안 아침마다 나타나는 악성 팝업창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는커녕 영문도 모를 운명의 사랑 운운하며 반짝거리는 광고창을 봐야 했다. X 버튼 하나 누르면 없어지긴 했지만, 2주가 넘게 같은 문구만 보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쇼핑몰 팝업창도 1주일간 다시 보지 않기 정도의 배려가 있는데.

오늘도 X 버튼을 누르며 오베론은 불쾌한 아침을 시작했다. 문제는 이 반투명한 팝업창이 제가 보는 환상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갑자기 눈앞에 글자가 떠오르다니, 제가 미쳤거나 판타지 세계 주인공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도쿄는 오늘도 평온했고 하늘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괴물들이 쏟아지거나, 돌연 전 세계 사람들이 불타버리거나, 아니면 지구 전체가 새하얗게 표백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시가 왠지 자세한데. 오베론은 제 머릿속이 꽤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래도 하루 한 번 일어날 때만 보이니 집을 나서면 팝업창에 관한 생각도 흐릿해졌다. 오베론은 교문을 넘자마자 동관으로 향했다. 학교 한중간에 떡하니 자리한 중앙 도서관은 이름답게 장서 수도 압도적이고 자리도 많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심했다. 어차피 책을 읽으려고 드나드는 건 아니니 상대적으로 허름한 동관 도서관이 한산하니 좋았다.

예상대로 도서관은 한산했고, 오베론은 자리를 등록해 두고 밖으로 나왔다. 1층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돌아가려는데, 무언가가 툭 부딪히는 느낌과 동시에 차갑고 끈적한 액체가 어깨에 끼얹어졌다.


“죄, 죄송해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른 여자가 가방을 뒤지는지 허겁지겁 부스럭대는 소리를 냈다. 오베론은 치밀어 오른 짜증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에코백에서 물티슈와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아내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추수를 앞둔 밀밭처럼 노랗게 물든 눈동자가 당혹감과 미안함을 담고 물결쳤다. 어깨에 살짝 닿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오베론은 이 여자를 본 적이 있다. 악성 광고가 제 삶에 끼어들어 온 날, 그 길고 긴 꿈속에서…….


“다, 닦아드릴게요.”

“괜찮아요.”


바닥에 엎어진 음료의 내용물로 가늠하건대 여자가 쏟은 건 스무디였다. 옷감을 적시고 맨살까지 침투해 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몹시 불쾌했으나, 오베론은 무엇보다 제일 먼저 이 여자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서 팝업창 문구가 점멸했다. 당신의 운명의 사랑을 찾으세요! 미친 소리지.


“어떡하지……. 저, 세탁비 물어드릴게요.”

“괜찮아요.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실은 방금 집에서 나온 참이었지만, 오베론은 급격히 피곤해져 정말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여자는 꿈속에서 생글생글 웃던 얼굴과는 전혀 다르게 걱정이 그득한 표정으로 불안하게 종종거리다, 제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 바쁘게 글씨를 적었다.


“이거 제 연락처거든요? 여기로 연락 주세요. 세탁비 드릴게요.”

“정말 괜찮…….”

“이 옷 비싸 보여요!”


싸진 않지만 스무디를 엎었다고 갖다버려야 할 만큼 쓸데없이 고급도 아니다. 그러나 오베론은 제가 앞으로 이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거라 단정지었다. 그건 스무디를 엎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딘가 바삐 갈 일이 있었는지 여자는 온몸으로 미안해하면서도 반강제로 오베론에게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쥐여 주었다. 오베론은 말없이 종이를 말아쥐고, 어안이 벙벙해 하는 직원을 향해 눈인사를 건넨 뒤 건물을 빠져나왔다.

제법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꿈속에서 만난 여자가 제 등짝에 음료를 엎고 연락처를 주고 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꿈속에서 만난 여자가 사실은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을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운명적이고 우연적이다. 수많은 로맨틱한 이야기는 대개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 갑자기, 운명의 이끌림처럼.

안타깝게도 로맨틱 소설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는 오베론은 쪽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반드시 환생물 로맨틱 코미디가 되는 세계

 

 


자기 인생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다. 장르는 다양하다. 확실한 건 오베론 보티건은 제 인생의 장르를 철 지난 로맨스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문 언덕 밑 단골 카페에서 멜론 소다를 주문했을 때, 문제의 여자가 밝게 웃으며 아는 체를 해 왔을 때는 천하의 오베론도 눈동자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 또 보네요!”

“그…렇군요. 멜론 소다 한 잔에 아이스크림 추가.”

“아이스크림 더 드릴게요.”


여자가 순진하게 웃으며 팔뚝에 힘을 주고 스쿱 가득 아이스크림을 떠서 두 덩이 올렸다. 오베론은 언제나 멜론 소다에 아이스크림을 두 덩이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었고, 도저히 매력적인 서비스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왜 가는 데마다 있는 거지. 고작 두 번 만났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연락 안 했어요? 옷, 비싸 보였는데.”

“별로 안 비싸요. 실수 하나에 무슨.”

“여기 학생이에요?”


얌전히 멜론 소다만 받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여자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붙였다. 본래 붙임성이 좋은지 두 번째 본 남자에게도 태도가 살가웠다. 카페는 그의 단골 가게였고, 여자는 오늘 처음 봤지만 가게 주인은 일 년 넘게 본 사람이었다. 대외적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은 오베론은 별수 없이 평소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2학년.”

“후지마루, 너랑 동갑이야.”

“와, 사장님. 저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후지마루라고 불린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설거지를 마친 사장이 수건에 손을 닦고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저번 주에 새로 고용한 알바생.”

“아…….”

“후지마루 리츠카예요.”

“…… 오베론 보티건입니다.”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하지? 강의도 같이 들을지도 모르잖아?”


값싸고 양 많은데 맛까지 좋은, 꽤 가파른 후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할 가치가 있는 카페의 최대 단점은 사장이 놀랄 만큼 외향적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장은 가게에 자주 드나드는 학생들의 이름이나 나이를 거의 외우고 있었고, 금방 말을 붙이고 친해지곤 했다. 그가 학교 졸업생이라 오래된 교수들의 강의 특징이나 습관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학생들과 친해지기 쉬운 요소 중 하나였다.

오베론은 외향적인 상대에게 적당히 맞춰주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 도가 텄지만, 설마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와 통성명에 이어 말까지 트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오베론 보티건을 사교적이고 잘생긴 대학생으로 알고 있는 사장 앞에서 매정하게 굴 수도 없었다.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쌓아둔 이미지가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오베론은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을 삼키며 빙긋 웃었다.

근방에 멜론 소다를 파는 가게는 그 카페 한 곳뿐이었지만, 오베론은 멜론 소다를 포기했다. 카페에 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 만나기 싫으면 이쪽에서 차단하면 될 일이다. 오베론은 이틀에 한 번씩 찾던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찾아오는 악성 광고는 그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어, 오베론.”

“리…… 츠카.”


웃는 게 어려워진 건 생전 처음이다. 오베론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관 대강의실에서 진행되는 교양 강의는 수강생이 100명도 넘는 대형 강의였다. 지정좌석제라 출석을 부르지도 않아 같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조별 과제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조에 후지마루 리츠카가 없었다면 오베론은 여자의 존재를 모르고 학기를 마쳤을 것이다.


“어, 다들 반갑고요. 잘해봅시다.”


4학년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조장을 맡은 선배가 판에 박힌 인사를 했다. 당연한 듯 라인 아이디를 교환하며 오베론은 심란해졌다. 정말이지 우연적이고 운명적이다. 꿈속에서 만난 여자, 그것도 자신과 연인처럼 다정해 보였던 여자가 사실 현실에 존재하고, 심지어 같은 학교에 다니는 데다가, 음료를 실수로 엎어 처음 만났고, 알고 보니 단골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었으며, 이제는 같은 교양 강의에서 조별 과제를 함께 하게 되었다니 캠퍼스 로맨스에 걸맞은 지독히도 운명적인 엮임이었다.

그러나 오베론 보티건은 제 인생의 장르를 로맨스로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뭐라고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행동이 뭐냐고.”


뜬금없는 말에 알트리아는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소꿉친구에게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오베론 보티건이라는 남자가 물어볼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행동이라니. 오베론은 그냥 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됐다. 생글생글 잘 웃는 미남은 숨만 쉬어도 당연히 인기가 있었다.


“얼굴, 목소리, 성적 빼고.”


알트리아의 눈빛이 급격히 식었다. 제가 잘생겼다는 걸 아는 남자는 재수가 없다. 사실 오베론은 그냥 재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상냥한 척 친절한 척 온갖 내숭은 다 떨어놓고 안에서는 방만하게 늘어져 이것저것 죄 맘에 안 든다고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있는데 재수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나 그 재수 없음을 참을 만큼 흥미로운 주제였다. 알트리아는 붙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의자를 돌려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요?”

“뭐? 누가 누굴 좋아해? 입 조심해.”

“진짜 좋아하나 보다…….”


정말 판에 박은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누가 누굴 좋아하냐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 애절해지는 건 로맨스의 상식 아닌가. 알트리아는 왠지 닭살이 올라오는 것 같아 괜히 팔을 벅벅 긁었다.


“아닌데? 내가 누구 좋아한다고 했어?”

“와, 진짜 클리셰…….”

“인생이 소설이야?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으니 저번에 F를 맞았지.”

“누, 누가 그런 얘길 해요? 무라마사? 바게코?”


정곡을 찔린 알트리아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냈지만, 오베론은 개의치 않고 질문을 반복했다.


“그래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행동이 뭐야?”


알트리아는 대답해주기는커녕 이 불청객을 당장 쫓아낸 뒤 무라마사든 바게스트건 탈탈 털어서 배신자를 잡아내고 싶었지만, 뭐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귀찮은 남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알트리아는 화를 꾹 참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친절한 남자. 자기를 배려해주는 남자. 존중해주는 남자. 됐죠?”


친절, 배려, 존중. 오베론은 중요한 포인트만 짚었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굴면 됐다.

 


***



리츠카와 만나는 건 바로 다음 날 교양 강의였다. 그날은 지정된 자리가 아니라 조별끼리 모여 앉아 발표 주제와 역할을 정했다. 역할 배분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척 보기에도 발표자를 하고 싶지 않은 티가 났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시 의자에 앉아야 한다.


“발표 제가 할게요.”


리츠카가 손을 들었다. 4학년 조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름을 적었다. 대개 이럴 때는 선배가 등 떠밀리게 될 확률이 높았으니 가장 긴장한 듯싶었다.

오베론은 말갛게 웃는 리츠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교양 교수는 까다로웠지만 점수 체계가 확실했다. 특히 조별 과제에서는 발표자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이건 딱히 숨겨진 비법이 아니라 동기나 선배들에게 이야기만 수집해도 알 수 있는 얘기였다. 오베론은 턱을 괴었다. 즉 후지마루 리츠카는 점수를 따고 싶어 한다.


“제가 할게요, 발표.”


리츠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오베론은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래, 한 번 긴장하고 점수 딸 생각이었는데 아쉽겠지. 발표자가 좀 버벅거리거나 허둥거려도 교수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는 용기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점수를 주는 타입이었다. 달리 말하면 용기만 있다면 성적표에서 남에게 앞서나갈 수 있었다.


“발표 많이 해 보기도 했고요.”

“그, 그럴까?”


조장은 아무래도 귀가 얇은 타입인 듯했다. 그는 잠깐 두 명을 재 보다가 큰 고민 없이 오베론의 편을 들었다. 상대는 과 수석에 얼굴도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았다. 대학생 발표는 내용보다 껍데기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남자가 줄줄이 내용을 읊는 게 무난한 여자애가 자료를 읽는 것보다 나은 건 확실했다.


“그럼 후지마루 씨가 양보하는 걸로?”

“아…… 네! 그럴게요.”


리츠카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 어린 얼떨떨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오베론은 느른한 미소를 띠며 리츠카와 눈을 맞추고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내가 할게. 네가 원하던 자리는 내가 빼앗았다는 신호였다.

운명은 개척해 나가면 그만이다.


행운은 그날 오후에도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짐을 챙겨 나온 오베론은 오로라관으로 향하는 방향에서 웬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리츠카를 발견했다. 사이가 제법 친밀한지 퍽 가까이 붙어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리츠카의 표정이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친절, 배려, 존중. 세 단어를 주문처럼 읊조린 오베론은 두 명 사이에 끼어들어 리츠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 오베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우리 조별 과제 회의하기로 했잖아.”


난데없이 리츠카를 빼앗긴 남자가 당황하는 얼굴이 환히 보여서 오베론은 씩 웃었다. 그는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리츠카를 질질 끌고 온 뒤에야 손을 놓았다.


“회의 없잖아?”


리츠카가 커다란 호박 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이트를 못 본 척 지나가 주는 배려. 사람을 제멋대로 끌고 오지 않는 존중.


“응. 나도 알아.”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친절. 완벽하게 세 가지를 다 어겼다. 오베론은 시원한 기분으로 그녀를 등지고 걸어갔다. 리츠카는 얼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듯했다. 나중에 그 남자와 다시 이야기하더라도 남자는 갑자기 낯선 남자에게 손목이 잡혀 사라진 여자를 의심하겠지. 그렇다면 후지마루 리츠카는 오베론 보티건을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남자라면 치워준 걸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거 아닌가? 오베론은 이유 없이 불쾌해져서 충동적으로 멜론 아이스크림을 봉지 가득 사 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떠오른 악성 광고를 치워버리고 오베론은 오랜만에 카페에 갔다. 리츠카의 속을 뒤집어 놓을 의도였다.


“멜론 소다 한 잔. 아이스크림 추가로.”

“아, 응.”

“서비스도 줘.”


지난번은 리츠카가 오베론의 옷을 더럽혔으니 서비스를 줄 만한 당위성이 있었지만, 어제는 오베론이 멋대로 리츠카의 데이트를 망쳤으니 서비스를 요구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까지도 오베론이 리츠카를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으나, 그녀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아이스크림을 세 덩이나 얹어 주었다.


“특별 서비스.”

“…… 많네?”

“고마워서.”


리츠카가 말갛게 웃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오베론은 패배감을 느끼며 쟁반을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운명적이라더니 만만치 않네. 그는 다음 계획을 고민하며 멜론 소다를 빨아먹었다.

솔직히 세 덩이는 과했다.

 


***



“나랑 같이 조별 과제 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리츠카의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침대 위에 편하게 누워 있던 노크나레아와 알트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노크나레아가 눈을 반짝이며 침대 밑으로 내려와 리츠카와 눈을 맞췄다.


“누구? 네가 저번에 스무디 엎었다는 남자?”

“응.”


리츠카는 오베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각 같은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잿빛 머리카락,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길게 뻗은 손가락은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남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만으로도 고귀한 푸른 피의 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왜? 무슨 일 있었는데?”

“아, 조별 과제 때 역할 분담하잖아. 근데 아무도 발표한다고 안 하길래 그냥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대신 해줬어. 사실 하기 싫었거든.”

“그리고?”

“내가 한다고 입 모양으로 그러더라.”

“우와, 멋있는 척…….”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알트리아가 중얼거렸다.


“멋있는 남자가 하면 척이 아니라 진짜지. 그리고 또?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


노크나레아가 조급하게 물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리츠카는 왠지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에 말했던 과 동기 있잖아.”

“아, 너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군다는 놈?”

“응. 어쩌다 걔한테 붙들려서 난처했는데, 조별 과제 회의해야 한다고 거짓말하고 꺼내줬어.”


노크나레아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리츠카가 그 동기의 뺨을 때리면 제일 좋았겠지만, 천성적으로 다정해서 사이비도 잘 못 떼어내는 친구에게는 과한 요구였다. 알트리아도 이번만큼은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없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나도 안다고 해 놓고 간 거 있지?”

“리츠카가 불편할까 봐 그랬나 봐요.”

“내 생각도 그래. 근데, 다음날 카페에 온 거 있지? 되게 오랜만에 온 건데, 주문하면서 서비스를 달라는 거야.”


마치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베론의 얼굴을 상상하던 리츠카가 어색한지 괜히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그걸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더라.”

“흠, 좀 모자라긴 한데 배려심이 있네.”


노크나레아가 깐깐하게 평가했다. 은근히 도와줬다는 티를 낸 건 좀 한심해 보였지만, 그 정도는 어수룩한 남자의 귀여움으로 봐 줄 수 있었다. 사사건건 생색을 내는 타입이라면 뻥 차버려야겠지만.


“리츠카는 어때요? 맘에 들어요?”

“음…… 사실 잘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그럼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 봐.”

“뭐? 갑자기?”


리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노크나레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빨리 만나보고 아닌 것 같으면 치워야지. 봄은 짧아, 리츠카. 낭비할 시간 없어.”


연애는 많이 해 볼수록 좋다는 게 친구의 지론이었다. 사실 아예 틀린 말 같지도 않았다. 리츠카는 오베론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한 번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이스크림 두 덩이로 끝내기엔 골치 아픈 남자를 떨궈 줘서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데이트라는 게 원래 그런 거겠지. 리츠카는 마음을 다잡고 라인을 보냈다. 얼마 전에 도와줘서 고마우니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소극적인 메시지였다.

 


***



“하? 뭐? 고마워? 진짜 만만찮네, 이 여자.”


오베론은 아무리 머리를 헤집어 봐도 리츠카를 도와준 적이 없었지만, 카페에서 서비스라고 아이스크림을 세 덩이나 얹어 줄 때도 고맙다고 했으니 아마 고맙다는 건 데이트를 방해한 얘기일 것이다. 데이트를 대놓고 방해했는데 고맙다고 밥까지 사겠다니, 제게 복수하려고 아주 칼을 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데이트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생판 남이었나? 오베론은 기억도 희미해진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흔적도 안 남은 걸 보니 별로 안 생긴 게 분명했다. 하기야 후지마루 리츠카는 꽤 귀여운 편이었으니, 눈이 똑바로 달려 있다면 눈코입이 정렬되지 않은 남자랑 연애하진 않을 것이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건 무슨 상관이야.”


오베론은 투덜거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간다고 할까? 상대의 속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데 발을 들여놓자니 애매했다. 오베론은 제 링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쪽이지, 상대가 만든 링으로 걸어 올라가는 쪽이 아니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오베론은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그래, 아예 자리 깔아놓고 그 여자 속을 뒤집어 놓는 것도 괜찮겠지. 메뉴도 내 맘대로 고르고, 카페도 내 맘대로 가고, 진 빠지게 이리저리 끌고 다녀야겠다. 물러나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성미에 맞았다.

옷은 뭘 입지? 구질구질하게 입고 나가면 여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뭘 입고 나갈까. 오베론은 몇 번이나 옷을 대 보며 고심했다. 가서 뭘 할까. 핸드폰으로 약속 장소 주변을 탐색했다. 대학 근처의 그냥저냥 평범한 상점가였다. 왠지 김이 샜다.

리츠카가 툭 던진 약속 날짜까지 고작 사흘 남았다. 오베론은 어떻게 하면 친절도 존중도 배려도 없이 굴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더 이상 그를 골치 아프게 했던 악성 광고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당신의 운명의 사랑을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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