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으으, 진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리오 발렌타인…!”

지팡이를 빼앗겨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엘리제가 수치심에 온몸을 떨며 지하실 바닥에 엎드렸다. 이것도 짜증 나고 저것도 짜증 나는데, 마침 자기를 이 꼴 만든 녀석이 리오 발렌타인인 게 너무나도 짜증 나서 아저씨들이 넣어 준 공주님 동화책을 전부 불태워 버릴 지경이다.

“뭐가 동화책이고 뭐가 공주야, 이놈의 아저씨들은 아주 내가 애인 줄 알아!!!!”

경비병과 그녀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애라는 표현이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엘리제는 입에서 불을 뿜듯 분노하며 예쁜 공주가 그려진 동화책의 탑을 밀쳐 우르르 무너뜨렸다.

“근신인 줄은 알았는데 장소가 이런 곳인 줄은 몰랐네요.”

함께 딸려 온 리오가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경범죄답게 대단히 을씨년스러운 장소까지는 아니었고, 평소에는 창고로 쓰는지 밀가루 포대나 장작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싫어하실 줄은 몰랐는데.”

“뒤늦게 사과해 봤자야. 이제 속이 시원하니!?”

한참을 부들거리던 엘리제가 고개를 홱 들더니 리오가 앉은 구석의 정확히 정 반대 방향 구석으로 파고들 듯 몸을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당한다더니, 이제 내일 나가면 선도부원이 잡혀갔냐며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고 엘리제에게 그간 당하고만 살았던 녀석들은 그녀의 체포 소식에 오늘 밤을 수놓는 화려한 파티를 벌일 게 분명하다.

“진짜 질린다…넌 어떻게 된 애가 포기란 걸 모르니? 대체 이런 데 밀고 들어오려는 이유가 뭐야? 에녹 포스터에게 반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음…그건 제가 지금부터 알아서 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고요, 그보다는 선도부원 자격으로 꼭 열람해야 할 자료들이 있어서.”

“뭐? 야, 너 설마 그거…그 뭐니, 너 납치당했을 때 기록이라든가 그거니? 저기, 그때 일은 너랑 잘 협의해서 다 묻었다고 에녹 포스터가…”

엘리제는 말하다 숨을 삼키며 자기 입을 가렸다. 납치당한 리오 발렌타인이 선도부로 밀고 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인데, 사건을 묻었으니 이제는 안 그럴 거라는 이야기를 에녹 포스터에게서 들었건만 그게 아니었나?

한편 맞은편에 앉은 리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엘리제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의 납치사건 기록은 자신이 납치당한 당사자이니 기록이고 뭐고 볼 것도 없이 가장 잘 아는 본인이고, 이미 묻기로 한 것이었다. 리오는 그제야 자신과 선도부 사이에 이상한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건은 제가 집에 편지를 썼으니까 됐고 저도 더 언급할 마음이 없는데…뭐라고요? 제가 보고 싶은 기록이 그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야 그것 말고는 없잖아. 뭐야, 너, 그럼 대체 뭐를 위해서…?”

“제 형이 여기 학생이어서, 그 사람 이름으로 된 선도부 기록을 찾아보려고 했는데요.”

“너희 형? 아, 그…?”

뜻밖의 이유를 알게 되자 엘리제의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꽃 같은 분노도 사그라들었다. 엘리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 애는 얼마 전에 집안사람 둘이나 변고를 당했다던데, 그 둘 중 하나가 이 학교 학생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브라함 발렌타인이라고 합니다. 혹시 아세요?”

“미안. 나 때는 없었던 사람이라 모르네. 나 겨우 작년에 들어왔으니까. 그래, 혹시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이 있나 그게 궁금했던 거라고?”

“네.”

“아니 잠깐만, 그 사람, 졸업한 시점이랑 사고당한 시점이랑 지금 엄청나게 차이나잖아. 혹시 학교에서부터 본인이 그렇게 될 걸 알아서 여기다 유서라도 맡겼다든지…아니, 내가 알지도 못하는데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미안. 저기, 어쨌든 말이야.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망자가 되는 순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것이 사바세계의 작은 예의 중 하나라, 엘리제는 허둥지둥 자신의 말을 끊고 다른 질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죽었다는 사람이 리오 발렌타인처럼 얌전한 척하는 작자였든 악인이었든 망자의 가족에게 죽은 자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입을 조심하고 아주 많은 눈치 보기가 필요한 법이다.

“네. 저희 둘째 형이었는데 사라지고 나서부터 연락이 끊겨서…혹시 학교에 남은 유품이라도 있을까, 아니, 유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급한데…”

리오가 고개를 숙이고 끌어안은 무릎에 머리를 박은 뒤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있는지도 모를 기록 하나라도 건질까 싶어 그 소동을 벌여 대며 여기까지 온 것을 형이 알고는 있으려나. 이미 죽어서 알 수조차 없다면 정말로 억울할 노릇이다. 여태까지는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리오는 이렇게까지 세상이 자기를 안 도와주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의견대로 사실은 형들이 전부 이승을 떠났는데 자기 혼자만 애써 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

저도 모르게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었다. 죽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지금보다는 마음 편할 수 있을 텐데. 가족이 죽는 불행은 리오 말고도 모든 사람이 살면서 한 번씩은 겪는 일인데, 왜 자신만 이렇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다 그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후계자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부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이제 곧 그는 아버지의 힘도 되어 드리지 못하는 불효자가 되는 것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여기저기 찾아봤거든요. 제가 감히 학사행정에 이래라저래라 하면 안 되지만, 억지를 부려서 지금 제가 사는 방도 형이 옛날에 썼다는 방이고, 형 다녔다는 승마부에도 가 봤고, 안다는 사람들을 여럿 수소문해 보기도 했고…”

납치당하느라 바빴던 때를 빼고서라면 어떤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열심히 살며 그를 수소문해 왔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전혀 남지 않았다. 결과가 이렇게 처참한데 노력해 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러네. 그래서 그 며칠간…근데 저기, 돌아가셨…다가 아니라, 사고 같은 거 당하신 거 아니었어? 그분?”

아무리 할 말과 안 할 말까지 전부 쏟아붓고 다니는 그녀였어도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말을 가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엘리제도 왕국에서 살아가며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죽어 본 경험이 아주 많았는지라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어느 시대든, 어느 세상이든 사람을 잃고 고통스럽지 않은 자는 없다. 그래서 그녀는 유가족에 대한 예의랍시고 일단 리오 발렌타인에 대한 분노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이 일은 리오 발렌타인이 없는 곳에서, 에녹 포스터에게도 이야기해 두어서 그의 입도 조심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미안. 내가 괜한 이야기 한 것 같네.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좋을 대로 생각하렴. 괴로운 생각은 떠올리기 싫잖아.”

엘리제는 자기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리오의 굽어진 등을 보면서 쓰게 침을 삼켰다. 저 애, 몇 살이더라? 나이는 묻지 않았지만 존댓말을 저렇게까지 칼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 연하일 게 뻔한데 세 살 이상 차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무심코 자신의 2년 전, 3년 전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리오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무거운 감상에 빠졌다. 저 애는 그래도 정직하고 성실하기라도 하지만, 당시의 그녀는 자신을 살려준 은인의 죽음도 외면하고 그녀를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가짜 신분으로 자신을 숨기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에밀리.’

온 세상이 내버리던 그녀를 아껴 준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를 몇 번이나 죽지 않게 했고, 가족이 되려 했고, 최후에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살려 준 은인의 이름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에밀리는 천국에서 잘살고 있으려나.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엘리제는 에밀리를 버렸다는 죄목만으로도 지옥 가기 충분해서, 지금 당장 거꾸러져 죽는다고 해도 그녀와 다시 마주치지는 못할 것이고 죽은 에밀리도 예뻐해 준 아이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엘리제 펜들턴을 역겹다고 생각할 것이다. 엘리제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도 따라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신에게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죄가 사라지지도 않았다.

“어휴….”

오랜만에 그 일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무거워져서 엘리제는 나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휙 쳐들었다. 그랬더니 아까부터 계속 몸을 말고 있던 리오가 아까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굳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리오 발렌타인은 형들의 죽음에 죄가 없으니 엘리제처럼 죄악감에 괴로워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그에게 가벼운 것은 아니다. 엘리제는 몇 년 전의 자신처럼 끝도 없는 고통의 숲을 지나며 정신이 망가져 가는 리오 발렌타인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두들겨 억지로 그의 머리를 들게 했다.

“너도 나랑 똑같구나….”

엘리제는 아마 그가 지금 지어 보이는 이 표정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던 에밀리가 죽고 그녀 혼자 살아남았을 때, 하루하루 미친 인간처럼 살다가 강에 빠져 죽기 직전 수면에 비치었던 자신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자칫하면 리오를 자신의 거울로 착각할 뻔했다.

이 애는 이대로 놔두면 죽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오래도록 서서 죽음 쪽의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던 자라면 누구라도 엘리제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엘리제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자신의 앞머리를 헝클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질문 하나를 꺼냈다.

“저기, 너 말야…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혹시 네 형님들 돌아가신 거, 아니, 그, 안 좋게 되신 것 말이야. 혹시 이런 거 처음이야?”

엘리제는 리오가 대답하지 않을 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지만 의외로 리오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는 얼른 죽을 것 같은 기색을 지우고 바른 소년답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 음…. 일단 결론은 둘 다 죽은 것으로 나서, 제가 이제는 후계자 자리에 앉게 되었네요.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 잘 모르겠는데…일단 졸업하고 수도로 돌아가면 어쩔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에드거 형은 돌아가셨으니, 저라도 아버지 곁에서 힘이 되어 드려야죠. 아, 저기, 저는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사실은 제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라도 지금 수도에 붙어서 아버지랑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하는데…”

줄줄 새어 나오는 답을 듣던 엘리제가 그를 잠시 옆눈으로 쏘아보았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기는 무슨, 그는 아직도 어두운 숲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아니, 잠깐. 정신 차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리오가 자신의 앞에 닥친 커다랗고 웅장한 길에서 벌어질 일들에 관해 설명하는 사이, 엘리제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의 팔을 낚아챘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너 왜 이래? 누가 너한테 이랬어? 누가 너보고 예쁜 후계자 되라고 했니?”

“네? 아뇨, 이건 그냥 제가…저도 싫은 마음은 없는데요. 어쩔 수 없으니까.”

“네가 후계자님 되어서 좋냐 싫냐 어쩔 거냐 그거 묻는 게 아니잖아. 내 질문 뭘로 들었어? 솔직히 네가 앞으로 어찌 되든 내가 알 바 있니? 난 너한테 다른 걸 묻고 있는 거잖아. 너네 형들 줄초상 났으니까 혼자남은 네가 앞으로 어떻게 잘할 것인지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비극이 너한테 처음 일어나는 일이냐고 묻는 거잖아.”

“네? 저요…?”

“그래, 너. 이렇게 됐는데, 너는 괜찮냐는 얘기 들은 거 설마 이번이 처음이야?”

엘리제가 손을 놓자 리오는 얼얼해진 팔목을 붙잡으며 고개 숙였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하게 됐다. 이 일이 과연 자신에게 처음 일어나는 것인지,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 자기가 어떤 기분이 되어야 했는지. 돌아보니 그의 기분을 걱정해 준 사람은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리오여서가 아니라, 그가 이제부터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하는 초인 겸 위대하신 후계자님이셔야 해서 혼자 울고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다들 작위계승 건으로 바빠서…아무도 없어서…처음인데요….”

“그럼 넌 지금 뭐라고 구구절절 미래계획 논하고 있니? 왜 안 울어? 집에서 많이 울었어? 장례식에는 한 번이라도 땅 파고 들어가려고 했니? 너 왜 지금 멀쩡한 척해? 형들 죽은 지 1년도 안 지났으면서? 너 내가 보기에는 지금 죽기 직전이라서, 네가 내일 당장 호수에 몸 던져 죽은 채로 발견되어도 난 안 놀랄 자신 있는데, 넌 네가 그렇다는 거 알고는 있니?”

리오가 어떤 마음으로 형들의 죽음을 맞았는지는 엘리제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오며 자기 앞에서 죽었던 사람들, 그녀가 겪어 왔던 수많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매번 괴로워하며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데에만도 수년이 걸렸음은 똑똑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타인의 죽음은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자가 자신의 혈육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런데, 이 애는 어쩜 이렇게 냉정하게 죽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서 자기 미래나 논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답을 알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멀쩡해 보인다면 전부 숨기고 사는 것뿐인데, 이런 것을 숨기는 인간들은 대개 착해 빠져서 주위의 기대에 보답하고 그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남들의 기분을 조금 맞춰 준 대가로 기대를 받되, 자기 자신은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미치거나 망자를 따라 죽는 것이 수순이다.

“그야 저라도 잘해야 하니까…제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공부라도 하려고 여기까지 왔고.”

“거짓말이네. 너는 공부하러 온 게 아니잖아. 아까 네 입으로 말했듯 그 형인가 뭔가의 기록이라도 붙잡아 보려는 게 주목적 아냐? 그러니 넌 의젓하게 유학 온 게 아니야. 수도로부터 도망친 거지. 거기 있으면 도저히 힘들어서 살지를 못하겠으니까, 벗어나려고 한 것 아니냐고. 넌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했는데 다들 너보고 다 잊고 그런 대단한 자리 하라던? 그렇다면 그 사람들 되게 이기적이네. 네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너 그러다가 진짜 죽어.”

죽는다고 말했더니 리오의 눈빛이 흔들린 듯했다. 엘리제는 공허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가 이미 반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슬프신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훌륭한 아들 되어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하느라, 자기를 완전히 내던지며 착한 아들로서만 살아가고 있느라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다니 대체 어디까지 모범생인지 감도 안 잡힐 정도다. 하지만 그가 부모님이나 타인을 위해 쌓아 올린 금자탑은 그녀가 보기에 아주 부실해서 발길질 한 번에 쉽게 나가떨어질 정도로 유약하다. 그는 지금 아주 정교한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데, 이렇게 나오는 게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아주 편하겠지만 모든 가면은 결국 벗겨지고 만다.

“너한테는 이번 일이 처음이라고 했지?”

“네.”

“기특하게 잘 버티고 있다고는 칭찬하지 않을 거야. 넌 지금 내가 보기에 모범생인 너 자신에 빠져 있느라 실제로 본인이 어떻게 썩어 가고 있는 줄도 모르는 거로 보이거든. 슬픔은 뱉어내지 않으면 독이 돼. 그러니까 넌 지금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어. 하지만 바보라고 욕하지는 못하겠네. 나도 그랬으니까.”

엘리제는 냉한 시선으로 리오를 내려다보다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에게 인간 대 인간의 예의로써 제공하는 딱 하나의 충고를 했다.

“그래, 난 너 진짜 별로지만 지금은 휴전하고 싸우는 건 내일부터 하자. 그리고 그 형님 기록, 찾아보지 마. 네가 지금 이 난리 쳐 가면서까지 너희 형 붙잡으려는 거…솔직히 너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 제대로 해소하고 털어낸 뒤의 추억 살리는 용도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채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돌아가신 거잖아? 그분. 너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죽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에게 유품이라고 해야 하기엔 성급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알 만하다. 하지만 리오로부터 대답이 없자 엘리제는 하는 수 없이 무릎을 털고 일어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래. 이런 것도 결국에는 네가 결정할 문제니까…근데 그런 기록인 줄 알았더라면 굳이 선도부원 자격 없어도 사람 좋은 에녹 포스터가 바로 보여 줬을 텐데 시간 낭비만 제대로 했네. 일단 갇혔으니까 잘 생각해 봐. 이미 죽었다는 사람 계속 붙잡는 건 내 경험상 좋지 않아서 말했던 내 의견일 뿐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말고. 거기다 넌…베개 뒤집어쓰고 흉하게 징징거리지도 못 해 봤을 텐데.”

엘리제도 리오처럼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종알대다가 쯧 하며 말을 끝냈다.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저런 답답한 녀석에게 이 이상 오지랖 부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동정심은 솟아나서 엘리제는 일부러 그 마음을 깔고 앉아 모르는 척했다.

“엘리제 님.”

“왜? 나 피곤해.”

“…감사합니다.”

“너 어디 아프니?”

엘리제가 리오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쳐내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얘가 진짜 아픈가? 원수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고맙다니, 하다못해 제 어머니도 끌어안고 못 울어 봤을 게 뻔한 효자녀석이 충격 끝에 드디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아뇨…그냥 제 안부나 기분을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다들 우리 집 괜찮냐, 부모님 괜찮으시냐, 제가 잘해서 부모님 위로해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셔서.”

수도에서 리오를 둘러쌌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친절하고 그를 위해 줄 사람들뿐이라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 중 리오에 관해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북쪽까지 온 이곳에서마저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고 자기를 납치만 하기에 얼떨결에 그도 이것을 잊고 있었는데.

죽은 형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어져 나갈 것같이 아프고 속상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처음이냐고 그에 대해 묻는 사람이 하나는 생겼는지라 그것은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힘내라고도 하지 않았고 잘 버티고 있다는 말에는 아예 반대하기까지 했지만, 그 의견은 그에게 아주 큰 힘이 되어서 리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조그맣게 웃어 보였다.

“뭐래, 얘가 아주 친구 다 된 것같이 굴어….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네 주위에 이상한 사람만 있는 거지 내가 특별한 게 아니거든? 정신 차려.”

“네? 아, 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리오가 무릎을 끌어안고 미소하며 그 말에 반만 찬성했다. 아주 완벽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자신은 꽤 건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뜬금없이 잘 부탁은 무슨 부탁이야!”

“그야 저 선도부 붙었으니까….”

“아악, 아아악~!!! 나가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엘리제의 비명이 좁은 지하실에 반사되어 쩌렁쩌렁 울렸다.


다음에 계속


※ 본 게시물은 모바일게임인 판타지 비주얼노벨 조사 어드벤처 <바이너리 프린세스1> 의 원작자가 제공하는 외전격 단편소설입니다. 게임은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왕국 여행자

메이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