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평소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8시 30분경, 혼잡한 출근시간 대의 지하철.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팔다리조차 옴짝달싹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 저는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거라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혜성처럼은 아니지만 나름 당찬 포부로 홍대 바닥에 등장했던 인디밴드 ‘FLAC’의 기타리스트 D, 강다니엘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4호선 지옥철에 몸을 맡기고 어느새 의식까지 맡긴 상태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흘려보내는 이어폰 한 가닥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는 상황.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체구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한껏 숙인 다니엘의 입술 높이에 남자의 어깨가 있었고, 이로 인해 자유로운 그의 콧구멍들은 맘껏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있었다. 사실 그게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한숨대신 한껏 숨을 들이마시는데, 희박한 산소와 함께 파고드는 예상외의 황홀한 기분.


‘…이게 뭐지.’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을 때, 다니엘은 그 이현상의 근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


향기였다. 앞에 선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그걸 깨닫자마자 다니엘은 굉장히 곤란해졌다. 향기의 근원이 남자의 머리칼일지 아니면 그 아래로 흘긋 보이는 하얀 뒷목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왜 이러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그의 생각대로 다니엘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남자의 향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향에 가까운 쪽으로 고개가 따라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몸을 의식하자 그는 자신이 파렴치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온갖 번민을 껴안고는 온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렸고, 검게 코팅된 지하철 유리문을 무심결에 바라보았을 때, 다니엘은 모든 걸 잃고 말았다. 귓가를 파고들던 잔잔한 멜로디조차도.


“와…….”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자글거리던 다니엘의 생각이 처음으로 감탄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How long will I love you♩♪


그리고 귓가로는 절묘하게도 어느새 사랑노래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유리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그의 향과 쏙 닮아있었다. 저런 얼굴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가끔 하던 작사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니엘은 마음 안에 흩어져 있던 언어들을 겨우겨우 끌어 모아 남자를 조금이나마 그려낼 수 있었다.


‘향기롭게 생긴 사람.’


분명 흑색 유리창에 비쳤는데도 남자의 얼굴은 꼭 따뜻한 색감의 수채화 같았다. 봄날의 여린 하늘과 그 아래 피어난 물 번진 복숭아꽃들. 커다란 붓으로 배경 전체를 맑게 칠한 후 세밀한 붓으로 꽃들을 피워내듯이 그려낸 그림. 남자는 꼭 그걸 닮아있었다. 번잡한 지하철이 답답한 건지 조금 찌푸려진 눈썹까지도 의도적이고 세밀한 붓놀림에서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역 하나를 지나는 동안 그 환한 빛에 감탄만 하던 다니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단어가 떠올랐다. ‘플러팅.’ 그러나 그에게는 그건 말 그대로 ‘단어’였다. 생각뿐이지 행동으로 이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많은 정도도 아니고 아주 그냥 빽빽한 수준이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이 머리 짧은 남자에게 번호를 물어볼 정도의 깡은, 최종학력 고졸인 다니엘에게는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주위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서도 관심 가는 남자에게 번호를 물어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배운 거라고는 죄다 지금 와서는 쓸데없는 것들뿐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지난 학창시절에 대한 회의까지 불러올 정도로 그 찰나 만에 다니엘을 완벽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보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문 앞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었다. 아마 이번 역에서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것도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환승역에서. 지금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분명, 이 순간이 느리게 흘러가서 누가 봐도 멋진 포즈로 남자를 붙잡고 첫눈에 반했다 고백을 했겠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붙잡으려다가 사람들에게 휘말려서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몰려오는 텁텁한 공기가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는 현실이라고.


그러나 현실 역시 아주 완벽히 삭막한 공간은 아니라서 그 틈새에 뿌리내리고 꽃피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어-”


다니엘은 훗날 그 순간을 돌아보며 ‘운명’이라고 말했다.


하필, 남자의 가방에 다니엘의 이어폰이 걸려있었고.

하필, 그걸 남자가 지하철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에 눈치 챘으며.

하필, 그걸 도로 가져오겠다는 다니엘의 손이 착각하여 남자의 이어폰을 부여잡은 데다,

하필, 또 그 손길에 가방에 들어있던 남자의 핸드폰이 보금자리를 떠나 줄도 없이 번지점프를 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떨어진 남자의 핸드폰을 돌려주기 위해 당황한 손이 그걸 들어 올렸을 때.


처음

FLAC

⎥◀◀      ▶      ▶▶⎥


화면 위에 자신의 밴드, 그러니까 ‘FLAC’의 데뷔 앨범 수록곡이 띄워져 있었다는 것.


“저기요?”

“…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창을 통해서만 뒤에서 바라보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든 생각이 지워지고 온통 제 앞에 있는 사람으로 채워져 갔다. 다리를 구부리고 앉은 다니엘과 마주 앉아, 다니엘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홀린 듯 저도 모르게 거울처럼 그 행동을 따라하는 다니엘. 그러다 그는 발견하고 말았다. 남자의 핸드폰 액정 구석으로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 균열과, 그와 비슷하게 마음을 타고 오르는 간사한 마음을.


“저기요,”

“네?”

“혹시 번호 좀 주시겠어요?”

“…네에?”


놀라 당황해 보이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는 조금 찔리긴 했지만, 다니엘은 모처럼 찾아온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제가 액정 배상해드릴게요.”

“배상이요?”

“네, 꼭이요.”


다니엘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온통 한 단어였다. 제발, 제발….


‘귀엽네.’


한편 남자, 그러니까 지훈은, 애절하게 빛나는 다니엘의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귀에는 스컬문양의 피어싱이 달랑달랑 거리고 몸집은 저보다 훨씬 커다래가지고는 제 폰을 내밀고 꼭 뭐 마려운 사모예드처럼 굴고 있었다. 진짜 귀엽다. 저런 순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요.”


결국 못 이기는 척 개껌 하나를 꺼내줄 수밖에 없겠다고.


“…고맙습니다.”


그것도, 아주 달달한 우유맛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 가운데 두 사람만 낮은 자세로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는 중이었다. 채무자가 오히려 고맙다 말하는 굉장히 이상한 상황에서도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 만에 맡는 신선한 공기가 반갑고, 또 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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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C 기타리스트 녤
대학생 윙


단비 냅두고 바람 폈어요^▽^ 아침에 지하철 타고 가다가 생각난 장면. 혹시 단에서 보신 분이 계실수도 있는데 그거 저예요 하하... 오랜만에 글 되게 편히 쓴 것 같은데ㅎㅎ 뒷내용은 언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올리고 떠납니다 헤헤


+) 학교에서 일코하면서 쓰느라 오타가 많았네요ㅠㅠㅠ 벌써 읽으신 분들 너무 죄송합니다 흑흑 고쳤어요


RPS 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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