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손자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구나.”

  “바빴으니까요.”

  “그 바쁜 와중에 서울은 매주 올라왔다던데?”

  “올라와선 쉬느라 바빠서.”



 이민형은 할머니가 빈정거리는 까닭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이거 맛있네. 눈치 없는 척 할머니의 앞접시에 뜨끈한 전복 하나를 올려드리는 걸로 완벽히 대화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리조트에서 일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사회화가 되긴 했는지 대화를 끊는 스킬이 좀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참 나… 말문 막힌 할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내곤 가벼운 한숨을 푹. 기막힌 할머니와 예의 없는 손자 사이에서 어색함을 숨기는 일에 제법 익숙해진 나는 묵묵히 밥만 떠 먹었다.


 강원도 생활을 전부 정리한 이민형이 완전히 서울로 올라왔고, 한 달 쉰 뒤부턴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헤어질 걱정이 없어져서 좋다던 이민형은 며칠 뒤 내가 회사에서 합격 통지를 받는 순간 티 나게 뚱해져버렸다. 축하는 해줬지만 아주 마음에 들진 않는 듯 미지근한 태도. 이유야 말 안 해도 뻔했다. 몇날 며칠이고 나랑 한가하게 빈둥대려던 계획이 전부 어긋나서. 게다가 지난 번에 말 나온 김에 여행 다녀오자며 제주도로 비행기에 호텔 예약까지 다 해뒀는데 하필 일정이 딱, 겹쳐버리기까지 했다. 나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가자고 살살 달래서 취소시키긴 했지만 이민형 얼굴엔 아직도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주 첫 출근은 언제라고?”

  “다음주 월요일부터 나가기로 했어요.”

  “그래 고생했다. 다행이야. 계속 안 되면 어떻게 자리라도 하나 마련해줘야 되나 생각 중이었는데.”


 

 할머니는 이젠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이민형의 사이를 갈라놓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고 받아들이셨다. 완강한 반대파였던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나선 더더욱 반대할 의지를 잃으셨다. 괜히 건드렸다 무슨 볼썽사나운 꼴을 볼 지 두렵다고 하시며 더는 다른 여자들과 이민형의 결혼을 주선하지도 않고, 신경도 꺼버리셨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그저… 평화. 덜컥 심장 떨어질 만한 아찔한 소식 없이 잔잔하게 살다 때 되면 조용히 떠나고 싶다던 할머니의 말씀에 이민형은 킥킥 웃으며 그것 정도는 이뤄드리겠다고 얄밉게 대답했었다. 



  “이민형. 너도 제발 철 좀 들어. 나이가 몇이야? 서울 와서도 또 손님 패고 경찰서 들락날락거려 봐. 그땐 아주 호적에서 파버릴 거니까.”

  “...무슨. 내가 뭘… 언제.”

  “왜. 꼴에 여주 앞이라고 창피해? 이미 내가 다 말해줬어.”

  


 불쑥 화살이 이민형에게 향하고, 경찰서 갔던 일을 내가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하던 이민형이 움찔거리며 나를 곁눈질했다. 별 반응 없이 덤덤한 나를 보며 이민형의 귀끝이 붉어졌다. 



  “그땐… 그 새끼가 미친 새끼였던 걸 어쩌라고요. 이젠, 안 그래요.”

  “퍽이나. 망나니 같은 놈이…”



 당황해 더듬거리는 이민형의 말에 할머니가 기가 찬 헛웃음을 터뜨리시고, 나도 참지 못하고 같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처신 똑바로 해. 나중에 재현이 돌아오면 확 그냥, 걔한테 다 줘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나름 평온하게 흘러가던 식사 자리가 살얼음판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재현. 재현 오빠. 그 이름에 가벼웠던 분위기 위로 묘한 정적이 무겁게 덮였다. 덜컥 놀라 쥐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한 내게 곧바로 이민형의 시선이 꽂혔다. 우리 둘 사이에선 금기였던 이름이었다. 


 할머니의 눈가가 순간 움찔. 아마 아차 싶으셨을 거다. 얽힌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해도 재현 오빠와 내가 두 번이나 같이 도망쳤던 전례 정도는 알고 계셨으니까. 그리고 그 때마다 미쳐버렸던 이민형도 옆에서 전부 보셨을 테니까. 


 한 순간에 퍽퍽해진 이민형의 눈을 마주하곤 심장이 철렁했다. 꼭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재현 오빠를 만났던 이후의 괴로운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스쳤다. 그 기억 속에선 나도 이민형도 아프기만 했다.



  “뭣들 해? 밥…마저 먹자.”



 할머니가 짧았던 정적을 깨고 다시 수저를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겁먹은 것 같은 이민형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이민형의 손을 힘 줘 꽉 잡았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그러니까 너도 아무렇지 않아도 된다고. 손을 놔준 뒤론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보란 듯이 밥 한 술을 크게 입에 밀어넣고 씹었다. 한참이나 내게 머무르던 이민형의 시선이 그제서야 겨우 거둬졌다. 





**





  “아 맞다. 나온 김에 옷 좀 보고 가자. 일할 때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좀 사야될 것 같아.”

  “...”

  “백화점 갈까? 넌 뭐, 살 거 없어?”



 모임이 있다며 일어나신 할머니가 먼저 룸을 떠난 후에도 이민형은 말이 없었고, 얼마 안 가 식당을 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도 내 말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손이 저릴 정도로 꽉 쥔 채 놔주지 않는 손가락 사이사이 온갖 상념이 잔뜩 엉켜있는 게 티가 났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화를 포기하고 머쓱하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엘리베이터 너머로 북적대는 예식장이 보였다. 주말 점심 바글거리는 인파로 사이로 웨딩 사진이 크게 걸린 액자가 눈길을 끌었지만 이민형은 주변 어떤 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붙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제야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저기 봐. 결혼한다.”



 얼떨떨한 이민형의 시선이 내 턱짓을 따라 옮겨졌다. 턱시도 입고 드레스 입은 한 쌍의 웨딩 사진에 나랑 이민형을 대입해보는 낯간지러운 짓을 하다가, 이상한 기분에 부르르 떨었다. 결혼은 여전히 막연한 일이고 당장 아무 계획도 없지만, 만약 내게 닥쳐온다면 그 상대가 이민형일 거라는 지긋지긋한 확신은 있었다. 아닐 수가 없었다. 무슨 변수가 생기더라도 이민형은 기어코 내 이름을 제 이름 옆에 엮어두고 말 거다. 그리고 이민형까지 볼 것도 없이 나부터도 결혼에 반감은 없었다. 가족 하나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놓인 등본은 좀 쓸쓸해서. 누군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고를 건 오직 이민형뿐이어서. 



  “나중에 우리 결혼하면 부를 친구나 있을지 모르겠다. 너나 나나.”



 당연하다는 전제를 깔고 심드렁하게 던진 말에 이민형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맞닥뜨린 설렘 같은 게 드리운 얼굴은 좀, 귀여웠다.



  “결혼… 나랑 할 거야?”



 뜻밖이라는 듯 되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럼 누구랑 해? 만약 다른 남자랑 하면 네가 가만히 두고는 보고?”

  “...”

  “너 일부러 그러지? 나 너랑 결혼할 거라는 소리 듣고 싶어서?”



 이민형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잡아끌었다. 어. 듣고 싶으니까 한번 해 봐. 얼떨떨함을 지워내고 본래의 뻔뻔함을 되찾은 이민형을 보며 몰래 안도했다. 쓸데 없던 머릿속 상념들이 씻겨나간 듯싶었다. 다행이었다.





**





 평화는 어김없이 깨진다.


 발단은 입사하고 맞이한 첫 회식 때문이었다. 신입이 들어온 기념으로 회식이나 하자는 부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입사 일주일 차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회식이 잡혔다는 내 말에 당연히 이민형은 우려대로 절대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건 나로서도 선택권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명분도 아니고 나를 위한 자리라는데. 매일 회식하자는 것도 아니니 한번쯤은 거쳐야할 자리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나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회 생활에 스며들고 싶었다. 퇴근하면 데리러 갈 테니 회식이고 뭐고 꼼짝도 말라며 핸드폰을 터뜨릴 듯 연락을 퍼붓는 이민형을 모르는 척 놔두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걸었다. 살살 달래도 꿈쩍 않길래 너도 사회생활 해보지 않았냐 하면, 이민형은 자긴 회식 따위 한번도 안 갔지만 잘만 살았다는 갑갑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리조트 직원들이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분… 하고 진절머리 내는 성격 개차반의 낙하산인 이민형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지, 일개 면접 보고 들어온 평범한 신입사원인 나에겐 적용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애초에 동료들이 먼저 이민형을 피했을 거다.


 일만 잘 하면 되지 뭣하러 회식 따위를 하냐고. 거기 가봐야 술 먹이고 어린 여자한테 헛짓거리 하려는 새끼들 밖에 없다고. 잔뜩 화난 목소리로 과한 상상을 떠드는 이민형의 목소리에 아주 오랜만에 지겨운 기분을 느꼈다. 제발. 민형아… 지친 목소리에 온갖 감정을 압축했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힘들어. 안 그러기로 했잖아. 말로 하지 않아도 분명 닿았을 뜻에 이민형은 한동안 말없이 잠잠하다가도 결국 또 안 된다는 원점으로 회귀해 같은 말만 반복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이민형의 목소리를 듣다 못해, 불쑥 전화를 끊어버렸다.


 늦지 않게 들어갈게  <<

 안 취할 거고 적당히만 마실게 연락도 계속 할게  <<

 회사 오지 마 너 오면 나 바로 짐싸서 집 나갈 거야  <<


다시 걸려오는 전화를 전부 거절하고 꿋꿋하게 문자를 써 보냈다. 그리고 조마조마하게 핸드폰을 바라봤지만 이민형은 오후 내내 다시 전화를 걸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잠잠해진 게 무서워서 일하는 중간중간 창문 밖을 내다봐야 했다. 화를 주체 못한 이민형이 언제든 회사에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에. 


>> 끝나면 연락해

>> 데리러는 가도 되잖아


 그러다 퇴근 한 시간 쯤을 앞뒀을 때, 이민형에게 연락이 왔다. 차분히 핸드폰을 두드리기까지의 과정 중에 집의 뭐 하나 깨부수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민형이 변하긴 변했구나 싶었다. 기특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민형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다만 회식이 내 상상과는 달랐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로 어색함을 풀고 잘 해보자 화합 다지는 건전한 술자리를 생각했지만 짓궂은 상사들은 끝없이 술을 권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무시했던 이민형의 걱정에 좀 더 가까운, 그런 술자리. 중간중간 넉살 좋은 사수가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내 바로 위인 사원 직급이라 모든 권유를 끊어내기 역부족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모이는 기대 어린 시선에 하는 수 없이 한 잔 두 잔 받아마시다 보니 주량을 넘겨 취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민형한테 꼬박꼬박 답장하던 연락의 텀이 점점 길어졌고, 나중에는 전화가 오는지 마는지조차 몰랐다. 몸도 못가눌 만큼 취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사수가 잠시 바람을 쐬야겠다며 나를 데리고 밖에 나왔던 차에 이민형에게 또 전화가 걸려왔다. 나 대신 전화를 받은 사수가 이민형이랑 통화를 했던 것도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늦은 새벽, 집이었다. 집에 오게 된 중간 과정이 생각나지 않지만 이민형한테 기억이 안 난다고 바른대로 말했다간 더 화가 날 게 뻔해서 대충 상황으로 유추할 뿐이었다. 사수가 나를 보내줬구나. 이민형이 데리러 왔구나. 그 정도만. 눈 뜰 때부터 따가운 이민형의 시선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옆에 앉아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나보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미지근하게 찬기운이 가신 숙취해소제를 뚜껑 따서 건네는 이민형의 손에 잔뜩 욱여넣고 감추려는 화가 묻어나서 움찔 놀랐다.



  “안 취한다며. 적당히 마신다며.”

  “...아… 미안…”



 안 취하겠다 해놓고 잔뜩 취했으니 할 말이 없어 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눈치 살피며 건네준 숙취해소제를 홀짝거리자 이민형이 턱만 한번 까딱거렸다. 다 마시라는 소리다. 그게 꼭 싸우기 전에 단단히 벼르는 사람 같아서 덜컥 무서웠다. 



  “그 새낀 누구야.”

  “...누구?”

  “너 데리고 나온 새끼. 누구냐고.”



 내가…? 순간 되물을 뻔했다. 정신이 없으니 아마 이민형도 못 알아보고 계속 사수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차분하게 취조를 시작한 이민형의 목소리에 점점 술기운이 가시고 난감함만 커졌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로 구박 받은 일이 많아 자기 아래로 누가 들어오면 잘 챙겨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며 알뜰하게 날 챙겨주던 사수. 지금 회식에서 날 구해준 것도, 이민형에게 연락해준 것도 사수였다. 근데… 이민형이 과연 조용했을까. 섬찟해진 건 다음이었다.



  “너… 설마 그 분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지?”

  “...”

  “진짜 좋은 분이야. 일할 때도 나 많이 도와주시고, 회식에서도 나 챙겨주시,”

  “왜. 내가 지랄했을까 봐 걱정 돼?”

  “...”

  “그러시겠지. 다른 새끼한테 안긴 너 지켜보던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고.”

  “......어?”

  “기억도 안 나나보네.”



 이민형이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내 무덤 파는 짓을 하고 있었단 걸 뒤늦게 깨달으며 등이 서늘해졌다. 안겨 있었다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혼자 서 있기 힘들 만큼 취했던 건 맞아서. 아마 날 붙잡아주느라 이민형 눈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 모든 상황이 나한테 불리했다. 



  “그 새끼랑 무슨 사인데.”

  “...무슨 사이는 무슨 사이. 아무 사이도 아냐.”



 솔직히 화날 만은 했다. 안 취하겠다고 해놓고 잔뜩 취해서 연락도 안 받고, 다른 남자한테 거의 안겨있었다면 내가 적반하장으로 나올 상황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근데도 오랜만에 시작되려는 익숙한 레퍼토리에 익숙한 두통이 겹쳐왔다. 



  “이상한 생각 좀 그만해. 안 그런다 싶더니 왜 또 그래…”

  “...”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너 몰래 다른 사람 만날 만큼 대인배 못되는 거. 그럴 생각도 없고. 그래도… 내가 미안해. 이번엔 내가 진짜 잘못했어. 근데, 자꾸 술을 먹여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했잖아. 헛짓거리 할 거라고 했잖아.”

  “너랑 나랑 입장이 같냐... 막 입사했는데 어떻게 안 간다고 해…” 

  “왜 못 해? 요즘 누가 회식 안 온다고 뭐라하는데. 뭐라하면 그 새끼가 미친,”

  “아, 됐고…. 우선, 자면 안 될까. 나 너무 피곤해.”

  “그래서 그 새끼 누구냐고. 누군데 돌아오는 차에서도 계속 찾냐고.”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맨정신도 아닌데 더 얘기해봐야 더 꼬일 것 같아서 우선은, 우선은 대화를 멈추고 싶었다. 화난 이민형과 싸우기 싫어서 적당히 모르는 척 하려던 것도 맞다. 옷 갈아입은 기억도 없는데 입혀진 파자마를 보자 취한 날 붙잡고 고생했을 이민형이 눈에 그려졌지만, 등을 돌려 누우며 이불을 잡아 끌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서늘하게 낮아진 이민형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막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내 앞에선 아닌 척하다가 정재현이 떠난 게 몇 번인데. 내가 널 어떻게 믿냐고.”



 억지로 청해보려던 잠이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그간 아무리 온갖 이유로 싸워도 이민형도 나도 재현 오빠에 대한 얘기를 끌어들인 적은 없었는데, 말로 안 해도 당연하게 여기던 둘만의 규칙을 이민형이 처음으로 깼다. 다시 일어나 마주한 이민형의 표정은 근래엔 전혀 볼 수 없던 원망과 적의가 가득했다. 수없이 서로를 괴롭히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 같은, 서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맞잖아.”



 할머니와의 식사가 떠올랐다. 내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던 겁 먹은 이민형도. 아마도 그날 할머니의 언급이 잠잠해진 이민형을 불안을 부추긴 것 같았다. 거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내 회식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거고. 


 그래. 그걸 다 알긴 하는데.



  “아… 넌 아직도 날 그렇게 못 믿어? 그래서 불안한 거야?”

  “어. 못 믿어서 불안해.”



 이민형이 당연하다는 듯 못 믿는다고 말할 때는 허탈하다 못해 화가 났다. 남들보단 더뎌도,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신뢰라는 걸 쌓아갔다고 믿었다. 이민형이 더는 날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처럼 이민형 역시 내 마음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이민형에겐 사랑과 믿음이 다른 개념이었다. 이민형은 여전히 나를 불신했고, 또 내 모든 걸 구속하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 긴 시간동안 나 혼자만 애를 쓰며 달라지고 있다며 멍청하게 좋아했었나 보다. 



  “너 저번에도 할머니가 정재현 얘기 꺼내니까 어쩔 줄을 몰라 하던데.”

  “...”

  “네가 아직도 그러는데, 내가 어떻게 안 불안하냐고.”



 분명한 시비였다. 뜬금없던 재현 오빠의 이름에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일 뿐 미련이나 후회 따위 한 톨도 안 섞여있다는 걸 분명히 느꼈을 거다. 당연했다. 그게 맞았으니까. 그다음 바로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시답잖은 장난을 칠만큼 내가 멀쩡했다는 걸 다 알면서. 억울했다. 야금야금 발을 맞춰 나가다가 한순간에 걸어온 길을 거꾸로 되돌아 뛰어가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서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변한 건 하나도 없다는 허탈함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네가 그러니까 진짜… 허무하다.”

  “말 돌리지 마.”

  “무슨 말을 돌려. 난 계속 진심이었는데 넌 못 믿는다며. 여태 믿는 척만 했단 소린데 그럼 안 허무해?”

  “...”

  “난... 지금 배신당한 느낌이야, 민형아.”



 배신이란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리나. 안 어울려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화 낼 상황이 아니더라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이민형은 믿는 척만 했단 소리니까. 이를 악 문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고, 결국 꽉 쥔 주먹 위로는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내가 우는 건 예상 못했는지 벙쪄버린 이민형을 뒤로하고 협탁 위에 올려둔 지갑을 챙겨들고 막무가내로 집을 뛰쳐나왔다. 도저히 이민형과 같이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





  >> 미국 출장은 어떻게 할래? 아직도 생각 중?

  >> 그냥 공짜로 여행 다녀온다고 생각해.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될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 

  >> 못 가는 사정이 있는 거야?

  >> 그런 거 아니면 웬만하면 여주 씨가 다녀오지…


 팀장님과의 문자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다가, 그냥 차 시트에 퍽 소리나게 기대어버렸다. 미국 출장이라니. 미국이라니. 막막한 기분에 우중충한 차 안에서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미국의 바이어를 만나러 가는 일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 팀의 직무도 아니었다. 근데 하필이면 출장을 가기로 한 옆 부서 사람들이 같이 외근을 다녀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고,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부터 난리가 시작됐다. 온 부서를 들쑤시며 출장 갈 중요한 대체 인력을 구하긴 했지만, 잡심부름을 하며 쫓아다닐 막내 역할이 비어있었다. 원래는 다들 그 자릴 탐냈지만 직급 높고 성격 까다로운 분들이 가게 되었고 그 분들 뒤치다꺼리해야 한다는 소식이 퍼진 이후론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팀장님이 그 자리에 나를 추천했다. 그냥… 만만한 게 나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에둘러 거절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지원자가 없는지 팀장님이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출장에 쫓아가게 된다면 이민형한테 말해야 할 텐데. 아무리 회사일이라지만 이민형에게 미국에 가야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상상을 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지금 같은 사이에는… 정말. 정말 말하기 곤란한 소식이었다.



 이민형을 두고 뛰쳐나갔던 그 날부터, 서먹해졌다. 


 1차적으로는 다른 사람한테 안겼던 기억도 안 날 만큼 취해놓고 대화 회피하던 내가 잘못이었고, 2차적으로는 이민형이 지난 기억을 들쑤시며 선을 넘은 게 잘못이었다. 내가 시작하긴 했지만 잘못의 경중을 따지자면 이민형이 훨씬 심했다는, 유치한 저울질을 하며 나는 내 몫의 사과를 생략해버렸다. 한동안은 작은 방에서 따로 자는 걸 이민형도 군말 없이 내버려뒀다. 서로 자존심을 부리는 중이었다. 그래봐야 둘 다 헤어질 리는 없다는 아주 최소한의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다 길어지는 냉전을 참지 못한 이민형이 결국 먼저 사과했다. 아마도 나랑 같은 저울질을 했는지, 제 잘못이라 생각해 슬슬 초조해지는 모양이었다. 못 믿는다는 말은 절대 진심이 아니었다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는데 내가 설명도 안하고 대화를 피해서 자기도 모르게 욱했다고. 잘못했다며 답지 않게 차분히 말했다. 아니 애원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사수가 이민형을 ‘다정해보이던 여주 씨 남자친구’라는 의외의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어 얼떨떨하게 퇴근했던 날이었다. 예전과 달라졌다 생각하면서도 이민형을 의심하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머쓱해졌었다.


 별 수 없었다. 어차피 이민형과 완벽히 행복할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날 괴롭히는 스스로가 싫어 죽어버리려던 이민형을 기어코 살릴 때는, 앞으로 이따금씩 숨이 막혀도 감당하겠다는 각오까지 했던 거니까. 이민형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나한테 없어선 안 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오늘은 빨리 왔네.”



 그렇게 나까지 덩달아 사과하며 일단락됐지만 화해하고도 여전히 서먹한 여운이 맴돌았다. 이민형은 내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 끌어안을 만큼 지난 다툼을 다 털어낸 것 같았는데, 나는 아니었다. 싸운 후로는 재현 오빠 얘기를 꺼내며 날 의심하던 이민형의 눈빛이 계속 겹쳤다. 여태까지 나름 잘 쌓아왔다고 생각한 이민형과 함께한 시간 전부를 부정 당하는 기분까지 느낄 만큼 강렬했으니 한동안 그 찝찝함은 날 계속 따라다닐 예정이었다. 지금도, 외출 후엔 당연해진 인사치레가 된 포옹이 혹시나 나한테 다른 사람 향수 냄새라도 날까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내 가방을 받아드는 것도 꼭 뒤져보려는 것만 같았고.


 내 앞에선 아닌 척해도 이민형은 또 의심하겠지.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줬다고 생각하는데도 결국 이민형에게 확신을 줄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쭉 빠졌다. 모순되게도 이런 괴리감은 내가 이민형에게 진심을 다 했고, 예전보다 더 사랑한다는 반증이 되는 게 우스웠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먹었어.”

  “벌써? 끝나고 바로 온 거 아냐? 언제 먹었어.”

  “아까 중간에 간식 먹어서, 별로 배 안 고파.”



 이민형도 알고 있었다. 내가 마지못해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여전히 작은 방에서 혼자 자고 싶을 만큼 앙금이 전부 풀리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이민형이 요즘 날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는 것 역시 나도 알고 있었다. 서로 알면서도 우린 지난 다툼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다. 이유 불문하고 최대한 자제할수록 좋은 이름이라 차라리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오빠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꾸만 둘의 일에 재현 오빠를 끌어들이는 일이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난 너 기다리느라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얼른 먹어.”

  “...혼자 먹기 싫어. 앞에 앉아라도 있어.”

  “...”

  “...”

  “알았어. 씻고 올게.”



 피곤하다고 하고 싶었지만, 이게 이민형 나름대로 서먹함을 풀어보려는 방식이라는 걸 알아서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사랑한다는 건 이래서 성가시다. 내 기분이야 어떻든 자꾸만 맞춰주고 싶어져서. 어차피 식탁에 앉아있어 봐야 오가는 대화도 없겠지만, 이러다 보면 또 지나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겨우 고개 끄덕였다. 


 씻고 거실로 나왔을 땐 이민형이 식탁 앞에 선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다가, 이민형이 들고 있는 게 내 핸드폰이란 걸 깨닫고는 심장이 철렁했다. 아까 주차장에서 팀장님한테 받은 문자가 떠올랐다. 



  “뭐야. 핸드폰은 갑자기 왜,”

  “너 미국 가?”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문자를 본 듯 이민형은 미련없이 핸드폰을 넘겨줬다. 팀장님 번호로 부재중이 찍혀있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한 모양이었다. 더할 수 없이 굳어버린 이민형의 표정을 보곤 속으로 깊은 탄식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 하필이면 미국. 이제 재현 오빠의 레퍼토리가 시작되면, 최악이었다. 이민형이 뭐라고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곧바로 고개부터 온힘 다해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나 안 가.”

  “...문자는 뭔데. 팀장이 너 가라잖아.”

  “그냥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이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못 가겠다고 할 거야.”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안 갈 건데 뭐하러 말해? 가는 거면 당연히 말 했지. 근데 안 갈 거니까, 말할 필요 없잖아. 갈까 말까 고민한 것도 아닌데 굳이 뭐하러 말 해. 나 진짜 안 갈 거야. 이미 한번 거절도 했는데 또 물어보시는 거야.”



 당황해서 자꾸만 빨라졌다. 며칠 내내 이민형에게 느릿한 단답으로만 겨우 대답하던 나는 작은 오해도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팀장님에게 출장 관련한 문자를 받기까지의 경위를 뒤죽박죽으로 빠르게 설명했다. 이렇게까지 말이 많았던 적은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처럼 모호한 사이에, 그것도 재현 오빠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일로 싸우면 걷잡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정말 싸우기 싫었다. 다 듣고도 아무 반응 없는 이민형의 표정에 초조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덥썩 붙잡았을 땐,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젖은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수건 떨어지는 소리가 꼭 정신 차리라는 신호음처럼 들렸다. 그제야 내가 과할 정도로 허둥대고 있단 걸 깨닫고 민망해졌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이민형의 표정이 묘했다.


  

  “...”

  “...”



 사랑은 정말, 성가시다. 이민형한테 속상한 주제에 제대로 티도 못 내고 오히려 이민형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니. 우스웠다. 눈을 똑바로 마주보기가 창피해서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민형이 불쑥 몸을 숙여 떨어진 수건을 주워올렸다.



  “배고파.”

  “......어?”

  “밥 먹을래.”



 젖은 수건을 식탁 의자에 대충 던져둔 이민형이 나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고,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수저를 들었다. 곧 달그락대는 소음이 덤덤하게 적막을 덮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왠지 께름칙했지만,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이민형의 앞을 지켰다.





**





 이민형과는 괜찮은 듯 서먹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고, 팀장님은 웬만하면 다녀오라고 회사에서 나를 자꾸만 쪼아댔다. 왜 가기 싫냐는 말에 차마 남자친구 때문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팀장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주까지 확정지어야 하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문자는, 어차피 가게 될 테니 이번주 내로 단념하라는 말처럼 읽혔다. 별다른 사정도 없는 거면, 아무래도 막내인 내가 가는 게 그림상 어울리긴 했다.


 그냥 갔다 올까. 이민형도 저번에 별말 안 했잖아.

 …

 아냐… 그래도, 어떻게 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다가 결론 없이 한숨만 쉬었다. 남들 눈에는 한심한 걱정거리로 보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진지한 문제였다. 만약 이민형이랑 싸우고 출장을 다녀온다면, 그 후 이민형이 쏟아낼 불안과 의심을 맨몸으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직전의 다툼으로 이민형의 불신이 여전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더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갑갑한 마음으로 팀장님에게 보낼 답장을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길 반복하기만 했다.

 


  “얼마나 가는 거야?”

  “뭘?”

  “출장.”



 리모컨을 쥔 채 산만하게 채널을 바꿔대던 이민형이 불쑥 TV를 꺼버렸다. 팀장님에게 보내려던 문자를 치는 핸드폰을 본능적으로 숨기며 이민형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옅게 찌푸려진 얼굴과 꽉 쥔 주먹. 바로 옆에 앉아있으면서도 이민형이 어떤 기분일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얼마나 가는 거냐고.”

  “...안, 안 간다니까…?”



 미국 가겠다고 하는 순간 죽여버릴 것 같은 눈빛을 하고 묻는데 순순히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고개 그대로 눈만 내리깐 이민형이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불쑥 뺏어갔다. 도로 가져와야 했지만 몸이 굳어 말을 안 들었다.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며 팀장님과 나눈 대화를 훑었다.


 그리고 정적. 내 핸드폰을 찌그러트릴 기세인 이민형의 손등 위에 흉흉한 핏줄이 돋아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출장 따위 절대 가지 않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방금 못 간다고, 답장하려고 했어.”

  “...”

  “안 가. 진짜 안 갈,”

  “갔다 와.”

  “......어?”

  “회사에서 가라는데 어떻게 해. 가라면 가야지.”



 다급하게 설명하는 내 말을 이민형이 중간에 끊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덧붙이 말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억지로 펴내며, 이민형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믿는 척만 한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나도 너 진짜로 믿어.”

  “...”

  “......그러니까, 갔다 와.”



 전혀 예상도 못한 흐름이라 이민형의 말을 확실히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굳어있는 날 보며 이민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하… 곧이어 터지는 착잡한 탄식을 숨기기엔 부적절한, 휑한 적막 위에 이민형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대신, 갔다 오고 화 풀어.”

  “...”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같이 자고.”



 너 없으니까 잠이 안 와.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이민형이 핸드폰을 퍽 소리나게 소파에 내려놨고. 붙잡을 새도 없이 자릴 박차고 일어나선 방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쫓아가지도, 그렇다고 손 하나 까딱도 못하고 멍하니 입 벌린 바보 같은 표정으로 한동안 굳어있을 뿐이었다. 껌뻑. 또 껌뻑. 내 눈꺼풀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와중에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민형: (개빡치는데 온 힘을 다해 참는 중... 찬물로 샤워 중...)

여주: (멍...)

재현: (영원히 고통 받는 중)



별의 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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