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님 실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온 바가 있습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사수라면서요.”

 

옆 테이블 쪽에서 귀에 거슬릴 정도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시작인가. 와인잔을 쥐고 있던 진청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명예추기경님께서 보잘것없는 활잡이일 뿐인 제 이름을 다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보잘것없는 활잡이시라뇨. 겸손이 지나치셔요. 국경은 달라도 보리스님의 명성은 작지 않답니다.”

 

역한 기분이 들어 무시하고 싶어도 바로 옆이다 보니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다리를 반대로 꼰 진청은 이기영의 맞은편, 자신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있는 보리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과거 교국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공화국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예추기경을 흠모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대륙민들의 눈에 명예추기경은 살아있는 신이요, 대륙을 구해낸 구원자였으니까. 명예추기경이 공화국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쫄래쫄래 따라 나온 녀석들이 대부분 그쪽에 속했다.


고작 이름 하나 기억하고 있다고 저렇게 좋아 죽으려고 하는 건 멍청해 보이지만.

 

“악마 추종자들을 생포하기 위해 급소가 아닌 부분만 맞추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전설 속에 나올법한 일화 하나를 들은 기분이었다니까요.”

 

언제 들어도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내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이기영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보리스의 표정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저런 상태로는 언제 한번 교국에 방문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고귀하신 명예추기경님의 초대라며 갖은 요란법석을 떨고 공화국을 뛰쳐나갈 미래가 훤히 보였다.

 

저 보리스라는 놈 분명 무뚝뚝하며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군인 같은 성격으로 알고 있었는데. 진청은 이기영 앞에서 처참히 망가지는 제 아랫사람의 추태에 혀를 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

 

허구한 날 남의 얼굴에 대뜸 진흙을 뿌려대며 뭉개버리기 일쑤인 녀석이 뭣도 없는 놈에게는 금칠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명예추기경의 칭호를 달고 활동하는 이기영과 같은 장소에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봐온 장면이건만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번은 이기영에게 대놓고 왜 그런 같잖은 수작질을 하느냐고 가시 돋친 말투로 묻기도 했다.

 

「뭘 그런 새삼스러운 걸 물어보세요. 저희 만년 인력 부족인 거 모르시는 분도 아니면서. 언젠가 네임드가 될 만한 인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친분을 쌓는 게 뭐가 나빠요?」

 

퉁명스러운 이기영의 대답에 진청은 바로 반박하진 못했다. 진청 자신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이기영은 그보다 더 많으면 많지 적을 리가 없었다. 그는 대륙에서 가장 바쁜 존재였다.

 

그 뒤로도 이기영은 쓸만한 인재가 나타날 만한 자리에는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오늘 레이더망에 걸린 사냥감이 공화국의 보리스였다. 하나라도 더 쓸만한 노예를 구하러 다니는 놈의 관점에서 저렇게 쉬운 먹잇감이 어디 있을까. 명예추기경을 흠모하는 티를 팍팍 풍기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기영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대의 손등을 손끝으로 톡 건드린다. 투박한 활잡이의 손은 그 작은 접촉에 파드득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진청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제가 보리스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천천히 벌어지는 작은 입술을 보다 못한 진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하고 의자 끄는 소리가 장내를 시끄럽게 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소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공화국 군사에게로 향했다.

 

진 군사님께서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모두가 물음표를 띄운 채 홀로 일어난 진청을 바라보았다. 보잘것없는 활잡이를 한창 꼬시고 있던 명예추기경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알아서 정리하시죠.”

 

“어? 군사님? 잠시만…!”

 

다소 거친 손길로 옆에 있던 이기영을 잡아 일으켜 세운 진청은 그대로 회의장을 나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이기영이 반대편으로 몸의 중심을 틀어도 둘 사이에 힘의 차이가 명확했던 터라 작은 실랑이조차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쾅 하고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에 겹쳐 사라졌다. 회의장에 남은 이들에겐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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