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괜찮아.”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저 금색 눈이 싫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어느 순간부터 저 눈을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 제 마음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괜찮다’가 싫었다. 아무것도 괜찮은 건 없는데. 아카아시가 힘껏 그의 팔을 뿌리쳤다. 얼굴에 닿았던 온기가 떨어지다. 아쉬움이 불쑥 솟아나는 제 가슴을 지독히도 원망하며 다시 다가오려는 그의 뺨을 저도 모르게 후려쳐버렸다.
짜악. 아카아시가 황급히 손을 감싸 쥐었다. 오만가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보쿠토 씨의 얼굴을 쳤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놀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정리했다. 독해 보이고 싶었다. 전 이만큼 화가 났습니다. 아시겠죠? 제가 얼마나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지요. 보쿠토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남은 흰 뺨에 아카아시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보다. 역시, 자신은 바보다.

“속이, 좀 풀려?”

아카아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망치듯 달려 택시를 잡았다. 집 주소를 말 하고 문을 닫았다. 손바닥을 감싸 쥔다. 아직도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차창 너머로, 혼자 남은 보쿠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 움직인다. 그가 점점 작아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별빛을 삼킨 가로등이 도로에서 흔들렸다. 운전은 정중했건만 아카아시는 내내 속이 좋지 않았다. 술기운이 어른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택시가 멈췄다. 값을 계산한 다음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근처 화단에서 한참동안 구역질을 해댔다. 끈적끈적한 침만 몇 번이고 목구멍에서 기어 나올 뿐 정작 술은 한모금도 뱉어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얼굴이 잿빛이었다.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보쿠토의 얼굴이 생각났다. 와르르 쏟아진 감정은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지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숨을 뱉는다.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집에 돌아가 변기를 붙잡으니 드디어 전부 게워낼 수 있었다. 물을 내리고 한참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옷가지를 벗어 내팽개치고 욕조에 들어가 앉아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아카아시는 웃었다. 그러다 악을 지르기도 했고 또 다시 웃었다. 목이 칼칼하게 아팠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울음 또한 멈추지 않았다. 웃겼다. 물도 끼얹고 뺨도 쳤다. 그러데 왜 그는 웃었을까. 그런 모욕적인 행동은 참지 못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래서, 후배의 고백에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만나고 싶었고 그를 생각했다. 이율배반적인 모순으로 넘쳐나는 자신이 버거웠다.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터벅, 터벅. 뿌연 김이 서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너무도 지치고 피곤해보였다.
싸늘하게 식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를 만난 것조차 전부 악몽이라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목이 말랐다. 술을 마시고 토한 탓에 수분이 모자란 모양이다. 아카아시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몸 안을 전부 물로 채우려는 반쯤 남아있던 물을 전부 마시고 막혔던 호흡을 후, 내뱉었다. 지잉, 지잉. 어디서 휴대폰이 울린다.

“….”

바지 주머니다. 휴대폰을 넣어 두고 그대로 벗었나보다. 아카아시는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빼냈다. 램프가 녹색으로 깜박였다. 라인메시지가 왔다. 확인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손에 꽉 쥐고 침대로 다시 돌아갔다. 털썩. 매트리스가 흔들린다.

[잘 들어갔어?]

아카아시는 답장 하지 않았다. 누가 보냈는지 뻔하다. 읽음 표시가 떴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아예 씹어버릴 참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어린 시절엔 이걸 참으로 무서워했었다. 이불 속에서 괴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보다 더 안락한 곳이 없다. 이대로 녹아 침대에 스며들어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내 울고, 화를 냈다. 5년의 세월을 압축하기로 한 듯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의 연속이 죽음만큼 무거운 피로를 몰고 왔다. 아카아시는 무거운 눈꺼풀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잠이 쏟아졌다. 차라리, 이대로 영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아카아시.

지직,지직. 회색으로 일그러진 선배가 눈앞에 있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것이 또 다른 지독한 꿈임을 알았다. 아카아시. 기괴하게 뒤틀린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마치, 상처를 잊지 말라는 듯. 네 마음이 겪어야 했던 지독한 고통을 잊지 말라고 말 하듯 ‘상처’가 제 눈앞에 그의 모습을 하고 다시 나타났다. 아카아시. 그가 이름을 불렀다. 깨어나야 한다. 이 꿈을 안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답답하다.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가 다가온다. 보쿠토의 모습을 한 괴로움이 다가온다. 아카아시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트라우마였다.

-아카아시.

아. 눈 깜짝 할 사이에 장면이 바뀌었다. 그 장면이다. 흩어지던 꽃잎. 그 앞에 서 있던 그 사람. 아니 그 사람의 모습을 한 고통. 시각화된 상처. 걸어 다니는 아픔. 아카아시. 아카아시.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고장 난 TV처럼 깨지고 일그러진 보쿠토가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또렷한 금색을 하고 저를 쳐다봤다.

-역겨워. 알지?

숨이 막혔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온 몸이 식은 땀투성이였다. 아카아시는 침대 헤드를 더듬었다. 잠든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태양의 끄트머리도 올라오지 않았을 만큼 깊은 새벽이었다. 아직도 주변은 컴컴하게 가라앉아있다. 머리맡에 제멋대로 팽개쳐둔 휴대폰은 내내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LED가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 3시 20분. 메시지는 4통. 발신인은 모두 보쿠토 코타로였다.

[내일, 속 안 좋을지도 모르니까 자고 일어나면 숙취해소제 먹어.]

12시 쯤 온 메시지. 그 다음 온 메시지에는 약간 텀이 길었다. 새벽 1시 30분에 온 메시지였다. 그도, 혹시 무언가를 망설이기라도 한 걸까.

[만나서 정말 기뻤어. 진심으로.]

아카아시는 머리를 짚었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다. 머리가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그 다음 메시지는 30분 전. 그도 고민이라는 걸 하나. 보쿠토를 만나고 난 이래 혼란이 멈추질 않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또….]
[연락해도…돼?]

마지막 메시지는 고작 10분 전이었다. 아카아시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정신이 둥실둥실 떠있다. 계속 꿈을 꾸는 듯 했다. 깨지 못할 꿈을 말이다. 화를 내는 것도 지치는 일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지독한 감정 변화는 제게 독극물처럼 치명적이었다. 어떤 생각 하나 끄집어내기도 힘들었다. 술이 덜 깨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거였다. 왜지. 내내 고민했지만 답은 전혀 나오지 않고 아픔만 진해졌다. 제가 얼마나 상처투성이였는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만 계속 되풀이해서 확인하게 된다. 확인사살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꺼내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고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절벽을 향해 마구 내달린다. 쿵.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아카아시가 뻐근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금빛 칼날이 되어 제 가슴을 난도질하던 보쿠토의 눈동자가 둥둥 달처럼 떠다닌다. 혹시 자신을 미치게 만들려는 걸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는 의외로 잔인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눈물은 이제 메말랐다 자조하면서도, 눈꺼풀이 뜨거워지며 관자놀이를 타고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 했던 기도를 다시 했다. 눈을 뜨면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가 되길. 그를 만났던 것 모두가 꿈이었길. 하루, 이틀, 아니,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 있기를. 그러다 아카아시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흐느꼈다. 진짜 제 마음은. 정말, 아카아시 케이지가 원하는 건.

고백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데.




* * *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보쿠토가 부스스 눈을 떴다. 쿠로오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희끗희끗 밖이 밝아온 걸 보니 아침인 모양이다. 아니면, 새벽인가. 그가 한심하다는 듯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어라 입을 더 열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쿠로오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대로 발신인은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쿠로오가 전화를 받았다. 정적이 가라앉은 집 안에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마냥 보쿠토가 고개를 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카아시.”
-쿠로오 씨. 정말, 미치셨습니까?
“…일단, 진정 하고.”

아침이잖아. 너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 알고 있는데. 잠은 좀 잔거냐? 다정한 목소리에 화가 누그러든 듯, 쏘아붙이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조금씩 동그래진다. 연을 끊느니 마느니 온갖 소리를 다 해도 결국 아카아시는 그러지 못한다는 걸 쿠로오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이미 넝마조각이다. 제 손에 몇 남지 않은 인연을 내치지도 못하고 손에서 놓지도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단 좀 쉬어라.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 할게. 만나서 대화하자. 너 또 밥도 안 먹고 그러고 있을 거잖아. 시간 되면 내가 너희 집 근처로 갈 테니까. 그러자 아카아시가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텔레비전 진열장 위에 올려놓은 다음, 쿠로오가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와 소주병을 한데 밀어내며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보쿠토가 옅게 숨을 쉬었다. 숨결에서 지독한 술냄새가 난다.

“야.”
“…응?”

정신을 못 차리겠네. 보쿠토가 헛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에 다시 고개를 박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게 너무 오랜만이다. 그 동안은 훈련이니 연습이니 재활이니 정신 하나도 없었는데. 하긴.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것도 어제의 만남을 위해서였지. 하나만 보고 달려왔으니까. 보쿠토가 더듬거리며 맥주 캔을 잡아들었다. 반쯤 남은 걸 입에 마저 털어 넣으려 하자 쿠로오가 거칠게 손에서 캔을 잡아챘다. 몇 방울이 테이블에 튄다. 쿠로오가 인상을 썼다. 또 한 번 더 욕을 해주려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집에 가서 자.”
“…어, 미안해.”

보쿠토가 마른세수를 했다. 쿠로오 앞에서 얼마나 추태를 부렸는지. 다 알면서 받아준 그가 고맙고 미안했다. 하긴, 애초에. 제가 후회할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문젠데 말이지. 피식, 자학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보쿠토가 쿠로오를 바라봤다. 아까 전화 아카아시야? 다 알면서도 묻는 저에게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이다. 집에 잘 들어갔구나. 혹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새벽에 용기를 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읽음 표시만 뜰 뿐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 각오했다. 어차피 답장을 바란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
쿠로오가 술병을 치운다. 도와주겠다며 일어나지만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헤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자 쿠로오가 혀를 찼다. 넌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렇게 멍청하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응. 나 진짜 멍청해. 나도 알아.

“아는 애가 그러냐. 그래, 멍청한 보쿠토군. 계속 할 거야?”

뭘 말하는 지 안다. 보쿠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울고 있던 아카아시의 얼굴이 눈앞에 흔적처럼 새겨졌다.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그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 어제 얻어맞은 뺨은 멍이 되었고, 입 안은 터져서 피 맛이 감돈다. 태어나 처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물세례를 얻어맞기도 했고, 낯선 술집에 들어가 아카아시를 붙잡기도 했다. 모두 처음 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괜찮다. 지난 5년간, 모든 걸 다 잃어버려도 상관없으니까. 단 한번만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며 울면서 기도하고 빌었던 그 시간들에 비하면. 그 어떤 모진 짓을 당한다 해도 괜찮다. 아카아시가 저에게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을 수 있다.

“그 녀석, 마음 안 변해.”
“…알아.”
“…이 모든 건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 애초에.”
“알고 있어.”

전부 알고 있으니까, 나는 계속 할 거야. 해야만 해. 더 늦기 전에. 보쿠토가 어깨를 문질렀다.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다고 또 코치와 감독에게 혼이 나려나.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다시 망나니짓 하고 있다고 욕을 단단히 먹을 거다. 그래도 괜찮다. 보쿠토가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디 가냐. 가란다고 진짜 가? 그 상태로 네가 집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쿠로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보쿠토는 히히 웃을 뿐이었다. 괜찮아. 너도 쉬어야지. 맘고생 많이 했잖아.

“술, 상대 해 줘서 고마웠다.”

뭐, 나 혼자 마신거지만…. 휘청, 몸이 앞으로 넘어간다. 놀라 붙잡으려는 손길을 만류하며 보쿠토가 신발장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운동화 끈을 풀었다. 아카아시를 만나면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말 많았지만 역시 처음부터 그러기란 쉽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가 그리 저를 쉽게 만나 주지 않을 걸 어차피 알고 있다.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 운동화 끈을 천천히 묶던 보쿠토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귓가에 환청처럼 매미소리가 들렸다. 선배는, 항상 이렇게 끈을 엉망으로 묶으시네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매미소리와 함께 들린다. 그럼 아카아시가 묶어 줘, 나는 이렇게 서투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 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앞에 쪼그려 앉아 끈을 묶어주는 그 동그란 뒤통수가 좋았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제 옆에 가지런히 서는 그 단정함이 좋았다. 아니, 그냥. 아카아시가.

“…갈게.”
“가다가 넘어지지 말고. 무릎이랑 발목 조심해.”
“응, 고마워.”

보쿠토가 일어섰다. 있잖아, 쿠로오. 제 이름이 불리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는 듯, 그가 고개를 갸웃 했다. 왜 인마. 그런 갸륵한 표정 하고 사람 쳐다보고 있어 기분 나쁘게. 악담을 퍼붓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을 모를 리가 없다. 정마 고맙고, 미안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 같은 것도, 친구라고….”
“…알면 됐어.”

그의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휴대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차단했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시 메시지를 보내 볼 용기는 없었다. 보쿠토는 멍청히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아침이다. 출근하려는 사람들, 등교하려는 학생들. 모두 저를 스쳐 지나간다. 보쿠토는 들고 있던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피곤하고 퀭한 몰골이 저절로 그려졌다. 눈을 감아도, 떠도 눈앞에 아카아시가 가득하다.

[보쿠토, 오늘 연습 쉬는 날이지만 너는 나와서 자율 연습 하다 들어가라.]

감독이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자율이면 감독이나 코치는 안 보이는 건가. 다행이네. 술 먹은 거 들키면 단단히 혼이 났을 테니까. 보쿠토는 천천히 몸을 벤치에 기댔다. 날이 맑고 따뜻했다. 눈을 감았다. 어지러움과 함께 당혹과 분노, 그리고 슬픔으로 물든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비슷한 듯 달랐다. 그땐 얼굴에 좀 더 젖살이 있었는데. 지금은 턱이 날렵했다. 키는 그대로였나….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비교를 하던 보쿠토가 이내 피식 웃었다. 제가 무슨 권리로 그런 걸 비교한단 말이지. 술기운이 올라온다. 마른세수를 했다. 보쿠토는 모자를 고쳐 썼다.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이 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그랬다.

언제나 후회는, 소리 없이 조용히 제 옆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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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덧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정의 흐름을 위해 지난 편들과 이어서 읽어주세요. 

항상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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