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영원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재가 되어버린 마물의 흔적이 보였다. 그러다 다시 눈을 들어 코앞까지 다가온 리온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건 평소 보던 진지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드물게 화가 나 있었다.

“제대로 검을 쓸 줄도 모르는 채로 마물과 맞닥뜨리는 건 자살행위다. 게다가 퇴마의 검은 마왕이 어떻게든 빼앗으려 안달이 난 무기지. 그런데 그걸 들고 멍청하게…….”

말을 잇다 만 리온이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뺐다. 구겨진 옷자락이 손을 탈출해 스르르 빠져나왔다. 그는 영원의 코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숨을 크게 내쉬더니 이내 뒤로 한 발 물러서 손등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보였다. 영원은 그 모습을 보곤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짧은 사과엔 설명이 부족했다. 영원은 손에 쥔 검을 집어넣는 것도 잊은 채 우물쭈물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냥 널 도와주려고… 아니, 도와주긴커녕 방해만 한 것 같긴 하지만….”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물을 눈앞에서 맞닥뜨린 순간, 영원은 직감했다. 자신에겐 손에 쥔 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걸. 

지금의 영원에게 퇴마의 검은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마물을 눈앞에 두고도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그러니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는 리온의 말엔 조금도 틀린 점이 없었다. 게다가 마왕이 어떻게든 빼앗으려 안달이 났다는 무기를 뻔히 들이민 채였으니… 리온이 화가 난 것도 이해는 됐다. 

“…….”

그러나 이해와 반응은 다른 문제였다. 영원은 아주 조금, 억울했다.

“새벽부터 두 분, 뭐 하시는 거예요?”

어정쩡하게 마주 선 두 사람의 침묵을 깨 준 것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클레르의 목소리였다. 영원은 로브를 챙겨입고 다가오는 클레르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었다. 긴장한 탓인지 아직 손이 축축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클레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온은 짧게 대답했다.

“별일 없었다.”

찜찜한 대답에 클레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온과 영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별일 없긴, 엄청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녀는 생각했지만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자길 지나쳐 걸어가는 리온의 분위기가 새삼 차갑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녀는 그래서 혼자 남겨진 영원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영원은 잔뜩 풀이 죽어선 대답했다.

“마물이… 나타났었어.”

“마물이요?”

“지금은 사라졌어. 리온이 물리쳤거든.”

“어쩐지 소란스럽더라니….”

푹 한숨을 내쉰 영원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이토록 기가 죽은 표정은 처음이었기에 클레르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댔다. 

“마물을 물리친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한숨을 쉬는 거예요?”

“내가 망쳤거든.”

“뭘 망쳤다는 거예요?”

“리온을 방해했어.”

“방해라뇨… 어찌 됐든 마물은 사라졌잖아요.”

“퇴마의 검을 들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난 방해만 됐을 뿐이라고.”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리는 영원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져 클레르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지금은 다 끝났잖아요?”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영원을 위로하려 애썼지만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괜찮아요, 영원님. 처음엔 다 긴장하는 거라구요. 그래요, 훈련. 어제 훈련도 했잖아요? 앞으로 하다 보면 나아지겠죠, 뭐….”

어째서 자신이 새벽부터 일어나 다 큰 성인 남성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는 건지, 클레르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기껏 마물을 물리쳐놓고도 벌컥 화를 낸 리온의 입장도, 그 화를 조금 받아냈다고 필요 이상으로 기가 죽은 영원의 입장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이미 요르한의 부탁은 받아들이고도 한참 지나버렸는데. 클레르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 클레르.”입꼬리를 당겨 웃은 영원이 클레르의 허리춤에서 빈 물통을 빼냈다. 물, 채워올게. 그는 거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클레르의 물통을 쥐고 개울가로 걸어갔다.





‘한심하다.’

내딛는 걸음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영원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누가 봐도 엄청난 실패를 겪은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다다른 개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멀리 보이는 언덕 너머로 해가 비치며 이제 막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짜 한심해.’

이른 새벽부터 온몸을 괴롭히던 근육통은 그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리온을 따라간 풀숲에서 마물을 발견한 순간부터 근육통 따윈 의식을 파고들 틈도 없었다. 그는 두려웠고, 주저했고, 실패했다. 그 좌절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그리고 잇따른 리온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걸 들고 멍청하게, 라고.

영원은 쓴맛이 나는 리온의 말을 곱씹으며 차가운 개울에 빈 물통을 담갔다. 꼴꼴 소리를 내며 물통이 채워졌다. 마음 같아선 조금쯤은 울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괴감이 두 배로 부풀 것 같아 포기했다. 왜 내가 퇴마의 검의 주인이 된 걸까? 주인이라면 리온 쪽이 훨씬 나았을 텐데. 영원은 대신 그런 울적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아…….”

영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 양손으로 물을 떠 한 모금 삼킨 뒤 다시 물에 손을 담갔다. 땀이 밴 팔뚝을 씻어내고 얼굴에도 물을 끼얹었다. 같은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자 다행히 물에 씻겨가듯 마음이 차분해졌다. 하이옌의 설산에서 출발한 물줄기는 아래를 향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영원은 자리에 앉아 한참이나 그 풍경을 감상했다.

“…사과, 제대로 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위험을 자초한 건 고의가 아니었으니까. 화를 내는 리온을 잠시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되짚어본 결과, 영원은 거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었다고 판단했다. 리온은 마물을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말했고, 먼저 사라졌고, 그 뒤를 어정쩡하게 따라가다 위험에 처한 건 나였고…….

영원은 아까의 상황을 다시금 곱씹으며 뒤를 돌았다. 그러다 깜짝 놀라 멈춰섰다. 그 자리엔 리온이 있었다.

“물을 뜨러 간 것 치곤 늦어서… 와봤다.”

리온이 어색한 투로 말했다. 아까 화를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 보던 그 모습으로. 영원은 용기를 냈다.

“아까 일 말인데,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생각해보니까 내가 정말 멍청한 짓을 한 게 맞다 싶더라고. 근데 난 정말… 널 도와주려고 그랬던 것뿐이야. 결과적으론 한심하게 방해만 해버렸지만 말야.”

막상 줄줄 뱉고 나니 아까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영원은 후련한 기분으로 이어질 리온의 용서를 기다렸다.

“나야말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서 미안하다.”

예상과 다른 답변에 영원의 눈이 커졌다. 웬 사과. 

“말을 험하게 한 것도… 사과하지.”

이어진 리온의 사과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시선이 서로의 눈이 아닌 코와 턱 언저리를 훑었다. 영원은 어색한 분위기라면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뭘 사과까지 해. 내가 멍청하게 군 건 사실인데. 나도 인정해.”

멍청하게, 라는 대목에서 리온의 시선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고상한 왕자님에겐 고작 그 정도 단어가 험한 표현에 속하는 듯했다. 영원은 덕분에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는 풋, 하고 새어 나온 영원의 웃음소리에 깨끗이 사라졌다.

“훈련, 열심히 할게.”

영원이 말했다. 리온은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굳이 고난도의 훈련까지 할 생각은 없다. 단지 검에 익숙해지도록 매일 하는 편이 좋을 테니….”

“매일은 좀 힘들지 않을까?”

“적응되면 할만할 거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야?”

“뭐, 그런 셈이지.”

과연 리온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온 걸까? 유치원부터 출발해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집에선 대부분 게임에 빠져있던 생활을 누려온 영원으로선 쉽사리 그의 유년 시절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검술 훈련만큼은 손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해왔을 것이 분명했다. 영원은 불과 몇 시간 전 입을 틀어막던 손바닥의 거친 감각을 기억했다.

“정말, 다들 뭘 하다 이제야 오시는 거예요?”

두 사람이 다시 클레르에게로 돌아왔을 때, 자리는 모두 정리된 후였다. 클레르는 특유의 꼼꼼한 손놀림으로 리온과 영원의 짐을 모두 챙겨 배낭의 끈까지 묶어둔 채 빵에 치즈 조각을 올리고 있었다.

“제 물은 무사히 가져오셨겠죠?”

클레르가 매섭게 눈을 뜨며 물었다. 영원은 웃으며 그녀에게 신선한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을 건넸다.

“두 분 다 한참을 지나도 안 오시길래 엄청 걱정했다구요.”

“미안, 클레르. 좀 늦었네.”

“이대로 요르한님께 돌아가 버릴까 고민도 좀 했어요.”

“무슨 소리야? 우릴 요정의 숲에 데려다주기로 했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입을 비죽인 클레르가 영원을 향해 치즈 조각이 올라간 빵을 한 조각 내밀었다. 그새 준비한 아침 식사였다. 영원은 고마워, 하고 덧붙이며 클레르의 빵을 받아들었다. 다음 차례는 리온이었고, 세 사람은 그렇게 자리에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냈다.

“화해는 잘하셨겠죠?”

“화해라니?”

“두 분 싸우셨잖아요.”

클레르의 말에 리온이 시선을 피하며 물을 마셨다. 덕분에 대답은 영원의 몫이 됐다.

“싸운 거 아냐.”

“그럼요?”

“그냥…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거지.”

“그럼 그 충돌은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됐나요?”

“아마도?”

영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잔뜩 기가 죽어있던 아까의 모습과는 영 딴판인 모습에 클레르 역시 마음을 놓았다. 속 시원히 대답을 들려주진 않았지만 리온 역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걸로 보아 의견 충돌은 잘 마무리된 듯 보였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클레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가면 요정의 숲이 나올 거예요.”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럼요. 이대로라면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도착할걸요?”

품에서 작은 나침반을 꺼내든 클레르가 바늘을 유심히 살폈다. 그건 마법 협회에서 지급하는 나침반으로, 빨간 바늘은 하이옌의 설산을, 파란 바늘은 마르딘의 숲을, 초록 바늘은 수도인 케른을 가리켰고 목표한 지점에 다가갈수록 바늘이 환하게 빛났다. 지금 일행이 멈춰 선 곳은 세 군데에서 모두 멀어진 요정의 숲 근처. 숲을 가로지른다는 건 남부 도시인 마르딘에 근접한다는 뜻으로, 나침반의 파란 바늘은 은근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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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르지만 메리크리스마스! 

즐겁고 행복한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

1차 BL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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