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정국도 감히 영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석진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만, 모든 것이 안정되어 너무 크게 아파하지 않을 순간까지만 유지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빨랐다. 석진이 안정되지도 않았고 받아들을 준비는 더더욱 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 나빠질 것은 없다 여겼는데도 상황은 더더욱 나빠졌다.

정국은 잠이 든 석진의 침상 옆에 앉아서 그 파리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정사를 돌보다가 달려온 제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가까스로 안정되었지만 당장 잘못 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충격을 크게 받으셨습니다. 당분간은 절대로 안정해야한다고 몇 번이나 거듭하여 당부하는 태의에 정국은 그저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으니, 나가 보시게.”


태의를 내보낸 것도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준이었다. 태의는 탕약을 지어 올리겠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태의까지 나가고 나자 석진과 정국, 남준만이 남은 침전은 고요했다. 정국은 쥐고 있던 석진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주면서 숨을 내쉬었다. 석진과 아이를 위해서 정국이 숨기려고 했던 일은 이렇게 순식간에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졌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으나 결국 허무하게도 이렇게 실패한 것이었다.


“모두 소신의 잘못이옵니다.”

“아닙니다.”


남준은 자신의 잘못이라 청했지만 결코 아니었다. 남석의 죽음을 책임져야하는 이들의 잘못이었고 그것을 무례하게 석진에게 책망한 조 빈에게 있었다. 또 석진과 아이를 위한답시고 은폐하려했던 저에게도 책임이 있겠지. 쓴 탕약을 먹은 것처럼 입 안이 온통 썼다.

사실 저도 알고 있었다. 아이를 지킨다는, 석진을 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모두가 정국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부와 명예도 모두 필요 없다고 가족들만큼은 지켜달라고 그리도 청했었던 석진이었다. 간절했던 청을 모두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자괴감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석진이 제게 실망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제가 다시 말을 올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제가 이 모든 멍에를 지고 가겠다고 청하는 남준에 정국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아프지 않은 쪽으로, 고통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소원할 뿐이었다.

석진의 자는 모습을 더 지켜보다가 정국은 정전으로 돌아왔다. 처리해야할 정무가 많았다. 정국은 산더미 같은 정무를 쳐다보다가 숨을 내쉬었다. 일단 급한 것만 처리하고 다시 석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일을 좀 챙겨가 옆에서 봐도 좋을 것이었다. 정국은 그러면서 차를 올리는 임 총관에게 입을 열었다.


“경인 궁을 유폐시킬 것이다. 엄중히 지켜 들고나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황후가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의논해 폐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 빈을 당장 폐하여 궁에서 쫓아내고 싶었다. 어찌 석진에게 그렇게 무례한 태도 책망한단 말인가. 게다가 남석이 죽었다는 사실은 관계자 몇 명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걸 알고 있다는 자체가 그 오라비가 범인이라는 사실과 직결되었다. 그걸 알기에 조 대신도, 그 오라비도 좌천 이유에 대하여 함부로 떠들지 못하였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기고만장하게 자란 그 딸이 아무렇게나 떠들어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그 동안은 석진이 알까봐 쉬쉬하여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여 일의 진척이 느렸다. 하지만 이제는 거릴 낄 것이 없었다. 정국은 제대로 수사하여 일벌백계할 생각이었다. 최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 정국은 제 뜻을 전했다. 이렇게 저를 능멸하려하고 석진의 안정을 위태롭게 한 자들을 정국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석진은 반나절 끝에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도 개운하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혼탁했다. 뿌옇게 흐리는 시야는 눈 속에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침전 밖의 궁은 온통 봄이 흐트러지는 계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혼탁함의 끝에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마지막에 배가 아팠던 것이 생각났다. 태아는, 짧게 세 음절로 묻자 곁에 있던 설아가 아기씨는 무사하다며 울먹였다.

돌아가신 형님에게 죄송하게도 석진은 태아가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했다. 소중한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면서 천장을 응시하다가 저를 좀 일으켜 달라고 설아에게 손짓했다. 몸이 불편해 제가 거동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준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을 생각이었다.

엎질러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다지만 석진은 큰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소상히 알아야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을 듯 했다. 조 빈의 악다구니처럼 폐하께서 그리하셨을 리는 없지. 격양된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정상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폐하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었다. 제게 그렇듯 약조하고, 약조한 것을 지키시려 애쓰셨는데. 형님의 죽음은 사고였겠지. 석진은 그리 생각하면서 저를 일으켜준 설아에게 남준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통정사(通政司)께선 밖에서 내내 마마께서 깨어나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설아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석진이 침상에 편히 등을 기대도록 부축했다. 이어서 남준을 불러오겠다면서 침전을 나섰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목도 유리조각을 삼켜낸 것처럼 칼칼했다. 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는데 막 문이 열리고 남준이 들어왔다. 막 예를 취한 남준이 우두커니 자리에 서있자 석진은 설아에 부탁해 차를 내달라고 했다. 의자도 가져와 달라고 했는데, 남준이 바닥에 무릎을 대로 꿇어앉았다.


“형님.”


놀란 석진이 불렀을 때, 꿇어앉은 남준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고 해야 할 이야기임을 알았기에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막힘이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누군가의 사주로 인해 형님이 옥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모두가 방심한 사이 일어난 일입니다. 폐하께서도 많이 당황스러워하시고 소신도 그랬습니다.”

“………”

“그때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직후라 절대적으로 안정하셔야했지요. 소신이 먼저 폐하께 마마께는 나중에 말씀 올리자 청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러셨단 말입니까! 제게는 말씀하셨어야죠.”

“마마.”

“친(親)형제지간이 아닙니까. 마땅히 알아야지요.”

“마마께는 안정이 필요하셨습니다.”

“그게 변명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석진이 남준을 원망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가 큰 형님의 죽음을 이렇게 늦게 아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저희는 친 형제지간이었다. 우애도 깊었다. 아무리 큰 충격이 된다 해도 석진도 그 때 알아서 형님을 애도할 수 있어야했다. 매장하기 전 한 번 손이라도 붙들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석진은 마른 침을 삼켜냈다.

형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황후가 된다고 들떠 있었으니 남들이 보기엔 그런 철면피가 없었을 것이었다. 조 빈이 그리 야박하다고 저에게 악다구니한 것이 이해가 갔다. 석진은 제 원망에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남준에 물었다.


“……형님의 시신은,”

“선산에 묻었습니다.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묻었습니다. 후에 조촐한 비석 하나 세워드릴 것입니다.”


그 흔한 비석 하나, 봉분도 없이 땅에 누워있을 형님을 생각하니 석진은 순간 울음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김 가의 장남으로, 또 전 황제의 배동으로, 젊은 나이에 오른 상서로 부귀영화를 누린 형님이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하다니. 언제나 당당했던 형님을 떠올리면서 석진은 제 얼굴을 감쌌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이것이 이생의 마지막 만남이라 하던 형님이 떠올랐다.

형님은 그때 이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었을까. 저에게 재산을 넘기면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너무 쓸쓸한 일이었다. 저는 형님에게 무엇도 해준 것이 없는데. 그래서 목숨만은 구명하고자 했는데, 아비와의 마지막 약조만은 지키고자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석진이 울음을 터트리자 남준이 안절부절 못했다. 태의가 절대적으로 안정해야한다고 한 것을 남준도 들었다. 이런 감정의 변화마저도 석진에게는 지금 독이었다.


“마마, 아기씨에 해로우십니다. 너무 비통해 마십시오. 형님도 그걸 원하실 것입니다.”


남준에게 석진은 사사로이 동생이나 이제는 존귀한 신분이었다. 함부로 다가가 등을 다독여줄 수도 없는 존재. 남준이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정국이 왔다. 황제 폐하가 납시었다는 소리에 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진이 깨어났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온 정국이었다. 그토록 가까운 거리가 백리라도 되는 줄 알았다. 정국을 올려다보는 석진의 얼굴에는 또 다시 물기가 가득했다. 이제는 이런 얼굴 보고 싶지가 않았는데. 석진이 울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는데 어쩐지 제자리였다. 정국은 침상에 걸터앉아서 옷깃으로 석진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폐하.”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정국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이었다. 저에 대한 원망을 해도 좋고 돌아가신 형님에 대하여 그리움을 성토해도 좋았다.


“약조해주세요, 폐하. 제 형님을 해친 자들을 엄벌해주시겠다고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몸을 떠는 석진을 정국이 꼭 끌어안아주었다. 남준이 황급히 침전에서 물러났고 설아 역시 물러났다. 고요해진 침전, 석진은 정국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면서 울음을 꾹꾹 집어삼켰다. 끅, 끅. 그러다 삼키지 못한 울음이 간헐적으로 새어나왔다.

정국은 석진에게 울음을 모두 토해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안정하라는 태의의 말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그러면서 제 손을 꼭 쥐었다. 석진의 청이 아니었대도 정국은 남석을 죽인 자들을, 저희를 이렇게 또 다시 울음에 처하게 한 자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 치의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정국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정국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무나 이기적이게도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석진이 약조를 지키지 못한 저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 정국을 안정케 했다. 남준이 모든 멍에를 뒤집어 쓴 것이 분명한데도. 이기적이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정국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석진의 존재가 중했으니까.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 등을 돌린대도 석진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니까. 정국은 제 허리를 끌어안는 석진의 팔에 그 품에서 숨을 크게 쉬었다가 내쉬었다. 석진의 품에서 내쉬는 숨에는 석진의 울음이 묻어 있어 그 끝마저도 축축하고 젖어있었다. 정국의 눈이 차분하게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조 가는 풍비박산이 났다. 남석의 죽음에 조 빈의 오라비이자 외아들인 조 각사난중이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석진이 안 이후로 비밀리에 조용히 하던 수사는 급물살을 탔고 모든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조 각사난중은 겨우 극형을 면해 유배형을 갔고, 조 대신도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며 사직했다. 최 장군도 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을 사유로 감봉 당했다.

조 빈 역시 빈에서 강등하여 답응이 되었다. 후궁의 품계 중 가장 아래 단계였다. 정국은 궁에서 쫓아내고자 하였지만 석진은 그래도 정국의 승은을 입었으니 그것은 너무 과하다 했다. 답응으로 강등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여 정국도 그리 처분했다. 하지만 앞으로 정국이 찾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저 궁에서 살다 쓸쓸히 숨을 거두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조 답응이 정전 앞에 와서 폐하를 뵙겠다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신이 제일 귀하게 자랐으니 답응이 된 지금에도 안하무인 태도는 여전했다. 정국은 처음엔 귀찮아서 무시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석진은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사람 마음이 아무리 안정하려고 해도 갑자기 얻은 상실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이 불안했다. 그 날 이후로 침상에서 발 한 번 떼지 못하고 있는 석진이 가여워 정국은 식사 때 꼬박꼬박 걸음 했고 밤에도 너무 늦지 않게 들고는 했다. 태의가 24시간으로 붙어 지켰지만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정국이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임 총관에게 일러 돌아가지 않으면 가문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라 하였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조 답응이 경인 궁으로 돌아갔다는 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정무에 열중했다.

노을이 지는 궁 안. 황궁의 담이 높다 해도 태양의 노을빛만큼은 황궁 안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이 예쁘구나. 석진이 보았으면 좋아했을 텐데. 오늘 상태가 좋다면 창을 활짝 열어놓고 노을을 봐도 좋을 듯싶었다. 정국이 정전을 나와서 붉게 물지는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방심했다. 저쪽에서 빠르게 다가온 조 답응이 제 옷자락을 쥐고 늘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

정국이 놀랐다가 조 답응인 것을 알고는 빠르게 밀어냈다. 내관들이 조 답응을 붙잡았다. 폐하, 폐하. 그 동안 행색이 추레해진 조 답응은 연신 정국을 불러댔다. 정국은 조 답응이 쥔 옷자락이 꼭 더러워진 것만 같아서 털어내며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그래, 이렇게 만났으니 어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정국이 자조적으로 내뱉자 조 답응은 자리에서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폐하, 신첩은 억울하옵니다.”

“무엇이?”

“황후 마마께서 복중 태아를 잃으실 뻔한 것은 소첩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조 답응이 강등된 가장 큰 이유가 황후가 유산할 뻔했다는 것이었다. 무례한 언행으로 황후와 복중 태아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 황명을 받을 때, 조 답응은 그 부분을 듣고는 억울하여 잠이 다 오지 않았다. 가문이 풍파를 맞고 제가 답응이 된 것이 다 황후의 계략인 것만 같았다. 어찌하여 그것이 제 탓이란 말인가?


“그것은 황후께서 복용하신 피임약 때문입니다.”

“………피임약이라니?”

“영친 왕부에 있을 때, 마마께서 피임약을 다년간 복용하셨나이다.”


그 날 황후의 몸종인 설아가 함을 버리는 것을 본 것은 조 답응 본인이었다. 정성스럽게 세공된 함을 버리는 것이 수상하여 제가 가져왔다. 그러자 그 안에는 채 먹다만 탕약이 있었다. 탕약이 무엇인지 궁금해 사람을 시켜보니 알아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피임약이었다. 피임약이라니? 놀랄 노자였다. 그러니 그렇게 금술이 좋아도 애가 안 생겼지. 조 답응은 그러면서 늘 정국을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석진을 가증스럽다 여겼었다.


“조 답응은 살고 싶지 않은가? 감히 황후를 모함하다니,”

“모함이 아니 옵니다, 폐하!”


정국의 말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조 답응을 끌어내 극형에 처할 듯이 음절 음절에 화가 묻어났다. 조 답응은 그것에 고개를 저으면서 품에서 가져온 함을 꺼내 앞에 내놓았다.


“이 함을 폐하께서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황후 마마의 몸종이 비밀리 버리는 것을 제가 주었나이다.”

“…………”

“그 몸짓이 수상하여 소첩이 알아보니 이 안에 든 탕약이 피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마마께서 혼인하신 뒤 다년간 피임약을 복용하셨다합니다.”

“네 어디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거짓이 아니옵니다. 소첩이 그 의원도 알고 있나이다. 그 자를 불러 신문하시면 아실 것이옵니다!!”


의원을 찾는 것은 꽤 어려웠다. 가까스로 찾아낸 의원은 석진의 아비에 은혜를 입은 자로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그런 의원을 협박해 겨우 알아낸 사실이었다. 석진이 혼인 직후 찾아와 피임약을 지은 후 다년간 꾸준히 피임약을 복용하였다고. 몇 년 간 꾸준하였다는 소리에 조 답응은 이 사실을 언제 밝힐지 손에 쥐고 있었다. 마땅한 까닭 없이 피임약을 먹고, 정국에게 비밀로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탕약을 먹은 후 몇 개월 이내 회임을 한다면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하니 더더욱. 그러니 조 답응은 더더욱 억울했다. 황후는 저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탕약을 복용한 후 회임하면 유산을 할 수 있다하였습니다! 황후 마마의 태기가 위태로운 것은 다 그 탕약 때문입니다.”

“……조용히 해라.”

“마마께서는 왕부 시절 언제든 폐하를 떠나기 위해 아이를 가지시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영친왕 시절 정국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는 모두가 알 것이었다. 조 답응마저 그 시절 자신의 곁을 지켜온 석진을 정국이 귀이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석진은 그 옆에서도 정국을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조 답응 생각에 정국은 그런 석진에게 까마득히 속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던 정국이 조 답응에게 물러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폐하! 조 답응이 불렀지만 정국은 대답하지 않고서 다시 정전으로 돌아왔다. 석진에게 가려던 것도 까마득히 잊고 다시 정전으로 돌아와 앉았다. 뒤 따라 들어온 임 총관이 눈치를 보면서 조 답응이 내놓은 함을 어찌 하냐고 물었다.


“……………”


함은 석진의 것이 맞았다. 정국도 보자마자 알았다. 석진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유모가 가지고 다니는 걸 여러 해에 걸쳐 여러 번 보았다. 조심스레 가지고 다니기에 그 안에 무엇이 들었나, 한 번은 궁금해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안에 피임약이 있었다고? 정국은 마음이 답답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늘 죄스러워했던 석진이었다. 예전에 연회에서 아이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이 나왔을 때도 석진은 꼭 가슴에 무엇이 얹힌 것처럼 숨이 턱 막힌 얼굴을 했다. 그래서 정국은 손을 붙잡고 위로했었다. 아이가 생기면 기쁠 것이나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리 둘 만 살아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긴 했지만 언젠가 와주겠지 기대했었다. 석진과 저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한 번쯤 기대하곤 했었으니까.

그런데 석진이 저 몰래 그 오랜 기간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국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조 답응이 말했던 것처럼 석진이 저를 떠나려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지난 번 석진과 황후 건으로 싸웠을 때도 느꼈던 벽이 더불어 생각났다. 언제나 석진이 제 손을 놓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듯 물러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했던 그 벽. 그래, 떠날 거면 애가 없는 편이 홀가분하겠지. 그런 생각에 이르자 정국은 가슴 한 구석이 죄어오면서 꽉 막혀왔다.

폐하. 정국이 이를 악물며 손을 꼭 쥐자 앞에 서있던 임 총관이 안절부절 못했다. 태의를 불러오겠나이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던 총관에게 정국이 말을 건넸다. 말을 건네는 정국은 무섭도록 차분했지만, 그 끝이 하염없이 떨리기도 했다.


“사람을 시켜 조 답응이 만나봤던 의원을 데려오너라.”

“폐하. 외람되지만 황후 마마의 말씀을 먼저 들으시는 것이 어떠하실지요.”


임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올렸다. 임 총관은 정국의 내관으로 석진과 정국이 혼인하고 지내오는 동안 늘 곁에서 지켜봐왔다. 그 오랜 기간 지켜본 석진은 결코 정국을 떠나려했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폐하. 임 총관이 다시 한 번 부르자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석진에게 이 모든 것을 묻기 전에 완벽히 모든 것을 알아두고 싶었다. 만약 조 답응이 한 구절이라도 거짓을 고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는 석진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


정국은 손을 꼭 쥐었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조 답응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밤이 꼬박 새어버렸다. 정국은 석진에게 가지 못하고 제 정전에서 한 숨도 자지 못한 채로 밤을 흘려보냈다. 한 밤중에 만난 의원은 조 답응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정국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석진이과 그 모친이 혼인 직후에 찾아와 피임약을 지었고 몇 년 간 꾸준히 복용하였다고 했다. 두 해 전에 지어간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의원은 고했다. 정국이 사실이냐는 말에 어느 안전에 거짓을 고하겠냐고 의원은 고개를 조아렸다.

피임약임이 맞았고 석진이 복용했다는 것도 확실했다. 하지만 정국은 그 마지막까지도 그것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과 곡해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석진을 찾아가기 전에 설아를 불러냈다. 정전으로 불려온 설아에게 정국은 함을 보여주며 석진의 것이 맞냐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설아에 정국은 다시 한 번 물었고 결국 돌아가신 유모님이 제게 잘 간직하라고 했던 석진의 물품이 맞다고 확인받았다. 정국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안 궁까지 거리는 수십 걸음. 늘 멀다고만 생각했던 거리가 이토록 짧았다. 석진은 막 일어난 모양인지 침전에서 궁인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정국이 오자 석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폐하. 그렇게 정국을 부른 석진은 정국의 안색이 좋지 않자 걱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정국이 정사가 많아서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고 과로하지는 않을까 내내 걱정했던 석진이었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

“잠을 충분히 주무셔야 합니다.”


정국에 제 얼굴을 만지려는 석진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리며 곁에 앉았다.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는 것이 지금 석진과 제게 좋을 수도 있었다. 석진이 피임약을 먹었던 것은 과거고 그땐 그럴 수도 있었다, 치부할 수도 있었다. 어찌하였건 석진은 지금 제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은 석진이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아닌가, 마음을 다 잡으려고 해도 정국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품에서 함을 꺼내 석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국이 함을 꺼내자 보고 있던 석진이 깜짝 놀랐다. 사가에서 버리고 왔던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서 설아에게 버리라고 했던 것인데. 이것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석진이 놀라 말을 못하고 있는데 정국이 물었다.


“이 함이 황후 것이 맞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어찌 이것을……….”


놀라는 석진을 보자 이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정국은 숨을 고르려 애썼다. 거칠게 뛰는 제 심박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칠 황자 시절부터, 영친왕 시절까지 그 시절 내내 정국에게는 온통 석진이 뿐이었다. 눈 한 번 돌린 적이 없었다. 힘들었었지만, 고되었지만 그래도 석진이 있어서 단 한 번도 눈부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석진의 그런 행동은 그 시절 지고지순했던 정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정국은 발끝, 손끝으로 몰려오는 허망함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찌하여 이 약을 드셨습니까.”

“………”

“정말 나를 떠나기 위함이었습니까, 황후.”


정말 당신은 그렇게 오랜 시간 나를 떠날 생각을 했던 것이냐고. 그런 궁리를 했었던 것이냐고. 정국의 눈이 석진에게 물어왔다. 피로로 충혈 된 눈가가 석진의 눈에 보일 만큼 붉어져있었다. 석진은 정국의 소매를 붙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면요.”

“………폐하.”

“저와 아이를 가지는 것이 그리 싫으셨습니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었다. 석진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함 앞에서, 또 정국의 앞에서 그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태후께서 정국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린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것은 석진이었다. 지나간 일이지 않은가. 아이를 가진 이 마당에 굳이 예전에 전 황후와 전 태후마마의 강권으로 오랫동안 피임약을 강요받았다는 걸 정국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었다. 그걸 안다면 정국이 또 다시 저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게 될 거라 석진은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일이 어그러지고 보니 그 모두가 제 욕심이었던 것 같다.

석진은 모든 일의 전모를 말하려고 말을 고르다가 숨이 가빠졌다. 이렇게 차게 화내는 정국은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니, 그것은 절망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어서 정국의 오해를 풀어야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저도 당신을 닮은 아이를 진작 가지고 싶었다고 석진은 말하고 싶었지만 가빠진 숨에 말이 쉬이 나오지가 않았다.


“황후께서 아이를 가졌을 때, 기뻐하는 저를 보고 얼마나 우스우셨습니까?”


변명조차 하지 않는 석진을 보고서 정국은 처음으로 석진에게 화가 났다. 그것은 정말 어디에서도 숨길 수 없는 화였다. 정국은 그 유구한 세월을 배신당했다. 실연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지고 있었다고 믿은 마음은 실은 한 길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를 사랑하긴 하셨습니까, 황후.”


정국이 석진의 눈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고요한 절망이었다. 하지만 정국이 무너지는 것이 석진의 눈앞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국이 저를 의심하며 무너진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의심하여 무너트린다. 석진은 이제껏 쌓아왔던 저희의 모든 신뢰가 이곳에서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혼인 후 석진은 사랑만을 쫓으며 살아왔다. 정국을 위하고 정국을 보살피고 정국을 사랑하면서 생을 살아왔다. 그리 아껴왔던 가족마저도 정국의 앞에서는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이번에도 남준이 정국에게 자신이 사실을 숨기자고 우겼다하였지만 정국이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것을 석진도 사실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정국을 아프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토록 지켜오고 싶었던 사랑이었다. 세상 끝까지, 제 인생의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사랑. 석진은 정국의 말 한 마디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건 슬프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화끈거리고, 온 몸이 죄어오는 것처럼 마음이 들끓었다. 폐하, 폐하. 석진은 정국을 부르려하였으나 말은 목구멍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고 마음 안으로 삭혀들었다. 정국이 눈가가 순간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지른 정국이 뒤를 돌았다. 그렇게 나가버리려고 하는 정국에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에서 일어난 석진이 어지럼증에 침대를 짚었다가 이를 꾹 물었다. 이대로 정국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정국을 보내면 저는 평생 후회할 거였다. 석진이 그래서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짜내어 정신없이 정국을 쫓아갔다. 눈앞이 노랗게 핑글핑글 돌아도 석진은 정국을 쫓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폐하.”

“………”

“폐하.”


그러다 결국 석진은 정국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정국을 불렀다. 석진의 머릿속에는 정국을 잡아야한다는 일념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저를 돌아본 정국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친 석진은 다시금 숨이 턱 막혔다. 덜덜 떨면서 마주보고 있는데 정국이 먼저 석진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다시금 걸어가 침전을 나가는 정국에 석진은 뒤따라 걸음을 옮기려다가 갑작스레 몰아치는 고통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랬던 눈앞이 하얗게 핑핑 돌았다. 석진은 몰아치는 고통에 바닥을 꽉 쥐었다.

마마! 어디선가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석진이 그렇게도 불렀던 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 당신이 이렇게 나를 버리시나. 치밀어 오르는 울음에도 석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석진이 입고 있던 흰색 침의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보답 받지 못하는 마음을 대변하듯이, 아주 붉게. 

붉게.







우주를 주고 싶은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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