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30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에 얼음이 녹으며 커피가 담긴 유리잔 표면에 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렇게나 더우니 모든 이들이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에서 커피 한 잔으로 더위를 식히려고 했지만, 해원맥은 그러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짧은 길이의 차이나카라에 닿아 모습을 감췄다. 이런 날씨에 구태여 목을 가리는 옷을 입은 것은 어젯밤의 흔적 때문이었다.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들키는 날이 바로 어제 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클럽에서 처음 만나는 이와 살을 맞대고 거리로 나서자 마자 남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에게 끌려갔다. 굳이굳이 시간을 따지자면 해원맥과 떨어진 후 30초? 그래도 그동안은 3시간에서 6시간 정도의 텀은 있었던 터였다.

물론 해원맥도 염라가 몰라서 그것을 내버려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은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눈 앞에서 사람이 끌려가는 것은 처음 본 해원맥은 무엇인가 조금 불편한 마음에 축축하고 차가운 유리잔을 잡아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죽었을까?

당연히 죽었을거라 생각하면서도 해원맥은 애써 죄책감을 덜어보고자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괜찮아, 사고 싶은게 있으면 사고, 하고 싶은게 있으면 전부 해. 딱 한 가지. 내 손바닥 밖으로만 벗어나려고 하지만 않으면 넌 얼마든지 자유롭게 있을 수 있어.


보통 그런 걸 자유라고 부르나, 새장 속의 새라고 부르지. 


다소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해원맥의 중얼거림에도 염라는 그저 웃었다. 해원맥은 그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앉아있던 쇼파에 고개를 삐닥하게 기대며 염라에게 물었다.


내가 딴 놈들이랑 자도?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염라의 신경을 거스르기만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해원맥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누구 한 사람만을 위한 누군가가 돼?


그건 해원맥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 상대를 바꿔도 항상 갈증이 있었다. 몸이 하나인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프면 누구 탓하려고, 찜통 속에서 혼자 궁상 떨고 있어?"


고민의 주인공이 상념을 깨고 해원맥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제 목을 그렇게 물고 빨고 해서 자신은 날씨에 어울리지도 않은 카라티를 입게 한 주제에 자신은 목이 훤하게 드러나는 베이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방금 자다 일어나 나온 것 같은 흐트러진 머리에 선한 인상의 이가 손가락 하나로 전혀 모르는 타인의 삶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저씨, 이건 궁상이 아니라 상념에 젖어있다고 하는거야."

"네가 상념에 젖을만 한 일이 뭐가 있는데?"


...그래, 없긴 하지. 아저씨를 빼면. 

해원맥은 가끔, 자기자신보다 저를 더 잘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짜증났다. 찜통이네 어쩌네 한 주제에 염라의 앞에는 뜨거운 커피가 놓여졌다. 보기만 해도 더위 먹을 것같아 해원맥은 테라스 밖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더운데도 사람들은 잘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데 대체 다들 뭐하러 돌아다니는거람."


그러는 본인은 야외에 앉아있으면서 잘도 말하는 해원맥을 가만히 보던 염라가 피식 웃었다.


"우리 아가가 뭐 때문에 그렇게 심통이 났을까."

"아이씨, 그놈의 아가소리 집어치우라 했지. 내 나이가 곧 30인데 무슨 아가야 아가는... 세상의 아가들이 다 죽었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걸까. 둘의 약간 거친 대화를 듣는 이는 하나없었다. 파라솔이 채 가리지 못한 나무 테이블은 햇볕에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었다. 무심코 그 부위에 제 팔을 댔다가 해원맥은 또 거칠게 욕설을 한바탕 내뱉었다.


"적당히 하고 실내로 들어가. 더위 먹었다고 칭얼거려도 안봐줄거니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해원맥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걷기 싫어. 차 하나 보내 줘."


얼음잔을 염라 쪽으로 밀어내며 해원맥이 다리를 꼬았다. 까딱까딱거리는 발에는 얼마 전에 염라에 대한 분풀이로 산 몇 백만원짜리 샌들이 달랑거리며 신겨져있었다.


강림, 오늘 해원맥 옆에 좀 있어.


염라는 해원맥의 제멋대로인 요구에 선뜻 제 오른 팔을 내줬다. 그 말은 오늘은 '그 쪽' 일이 없다는 것이리라. 염라가 자리를 비우고, 해원맥은 강림이 만들어주는 가림막아래에서 발을 까딱거리며 샤베트를 수저로 푹 찍어 짓이겼다.


"어제 그 사람 어떻게 됐어?"

"..."

"진짜 매번 다 막, 죽이고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회장님께 직접 물으시는 편이, 라고 할거지? 

언제나 똑같은 대답에 해원맥이 질렸다는 듯 제 입에 달고 상큼한 그것을 크게 한 입 퍼넣고는 차가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재미있는게 떠올랐다는 듯 미소지었다. 강림은 언제나 해원맥이 거북했지만, 이럴 때만큼 그가 거북할 수가 없었다.

해원맥은 수저로 샤베트를 떠 강림에게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가만히 있자 해원맥이 짜증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먹으라고, 안 더워?"


상사의 애인이 주는 걸 받아먹을 정도로 덥지도 않았고, 덥다고 하더라고 별로 먹을 생각이 없어 고개를 저으려는데 해원맥이 한 층 더 짜증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두 번 말하는거, 그리고 내 말 거절하는거 진짜 싫어하는 거 알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루종일 해원맥의 짜증 섞인 심통을 받아주느니 속셈모를 샤베트를 한 입 받아먹는 편이 덜 피곤했다. 그렇게 생각해 입에 수저를 넣었다 빼는데, 그 수저는 다시 해원맥 입으로 바로 들어갔다. 즐거워보이는 얼굴, 장난끼 가득한 강림이 제일 싫어하는 표정.


"그런데...."


너랑 자면 염라는 널 어떻게 할까?


현생이 방해하지 않을 때, 쓰고싶은 걸 씁니다.

생선(FISH)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