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나 뭐 봐요?”


“어, 이거.”



지성은 예상했던 대로 여주보다 다섯살쯤 어렸다. 그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놓으라 제안했고, 여주도 신의 사도인 지성이 믿음직스러워서 냉큼 말을 놓았다. 쟤는 심지어 어디서 구해왔는지 핸드폰도 바로 쥐여주었다. 진짜로 신이 보내준 천사인 게 틀림없다.



“여기서 알바 구한대. 나 이거 해보려고.”


“엥? 누나 가이드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다. 그런데 각성자 관리 센터가 일을 안 줄 것 같으니까 이러고 있지. 가뜩이나 가이드가 더 많은데 또 일 구하러 가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다. 아까는 선택지가 없으니 가려고 했던 거지만, 지금은 옆에 지성이 있다. 천군만마를 얻어도 이것보다 든든할 순 없을 것이다. 여주는 지성이 사준 짜장면을 삼키며 앱 스크롤을 내렸다.



“나 이거 할까? 고깃집 마감?”



시급 많이 쳐준대. 지성이 핸드폰을 보고 미간을 지그시 좁혔다.



“맘에 안 들어?”


“누나. 저랑 같이 각성자 관리 센터 가요. 한 소리 해야겠어요.”


“엉?”



지성은 정신 못 차리는 여주에게 제 후리스를 입혔다. 그리고 자기도 눈 깜박할 새에 자켓을 걸쳤다. 누가 센티넬 아니랄까 봐 빠르다. 여주가 얼 탄 사이 지성이 여주를 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어? 나 알바해도 괜찮은데?”


“누나. 이런 건 따져야 일을 줘요.”



지성은 D급 센티넬인 자신도 별다를 게 없다고 말해줬다. 발현 등급은 A급부터 E급으로 나뉘는데, 그중 80%가 D급 센티넬이다. 흔하고 능력치도 대단치 않은 D급은 당연히 대우가 안 좋고, 일도 잘 배정해주지 않았다. 관리 센터를 쥐고 탈탈 흔들어야 일을 준다는 모양이다. 센티넬이면 돈을 다들 잘 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헌터는 시급 아니고 괴물 개수로 수당을 받거든요. 그러면 D급은 최저도 안 나와요.”



여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지성이 그래도 E급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러나 여주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진 않았다. 안 그래도 돈 없는 애한테 빌 붙은 군식구가 된 격이다.



“너 진짜 나 데리고 살아도 괜찮은 거야?”


“에이, 저금한 거 있어서 괜찮아요.”



지성이 티 없이 웃는다. 그런다고 내가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서 월세를 같이 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졌다.

버스를 타고 오니 각성자 관리 센터는 금방이었다. 여주는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지성은 이미 저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누나! 얼른 와요!“



지성이는 여주 마음도 모르고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들어가서 또 일을 달라고 해야 하나? 욕만 먹을 것 같은데. 여주는 우물쭈물하다 끝내 지성이를 향해 뛰어갔다. 어쨌든 여기까지 같이 와 준 지성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



“진짜 일을 줄까…?”


“누나, 나만 믿어요. 저 이런 거 많이 해봤어요.”



지성이 여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주는 지성의 순하디순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디 가서 환불 잘하고 올 상은 아니다. 반대로 페이스에 말려 안 내도 될 돈을 더 내고 올 것 같은데…. 지성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했다.


한참 만에 창구에서 지성의 번호가 불렸다. 걱정하는 여주와 달리 지성은 표를 들고 척척 걸어갔다. 창구의 직원이 그를 안광 없이 응대했다. 점심시간 후 직장인의 초상이다.


그들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눴다. 하도 시끄러워서 내용이 들리진 않았다. 직원은 지성이 뭘 하든 계속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지성의 표정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안 보인다. 아무튼 이야기가 잘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여주가 끝내 일어났다. 그냥 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때 지성이 몸을 바짝 숙여 직원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직원의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동태는 생태로 갈아 끼우고 허리도 곧게 세웠다. 곧 그가 전화를 들어 뭐라고 말을 했다. 거기까지 한 후 지성이 이쪽으로 몸을 돌려 뛰어왔다.



“누나! 일 구했어요.”



여주는 마냥 밝아 보이는 지성에 입을 벌렸다. 어떻게?



“여긴 따져야 일을 준다니까요.” 



너 생각보다 대단한 햄스터였구나.




#11


직원은 여주를 어제처럼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어디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여주를 직접 데리러 왔다. 노숙인 3일 차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접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여기 들어가시면 헌터 있을 건데, 간단하게 손만 잡고 있으면 되세요.”


“손만요?”


”누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금방 끝나요.“



너무 기본적인 걸 물어봤나보다. 대답 없는 직원 대신 지성이 따뜻하게 얘기해주었다. 여주는 다시금 이 세계의 신에 대한 믿음을 굳게 다졌다. 내가 우리 지성이 없으면 어떻게 사나.



“여기 있는 헌터가 뭐 하는 헌터예요?“



무슨 능력을 쓰는 센티넬인지 알아는 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직원이 아, 하는 소리를 낸다. 저거 일 까먹었을 때나 내는 소리 아닌가. 여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직원을 노려보았다. 각성자 관리 센터에 대한 믿음이 저 지하로 곤두박질친다.



”이동혁 헌터요.“


”네…? 이, 이, 이동…. 서울시 안전구 행복동 복지로 7 606호 사는 이동혁이요?”



그 주소에 옆에 적힌 이름이다. 여주는 입을 떡 벌리고 닫힌 문을 보았다. 그 싸가지?



“이분이 저한테 어제 꺼지라고 그러셨는데요…!”


“어제 이동혁 헌터 배정받으셨어요?”


“네네….”


“그냥 좋게 좋게 이해하고 넘어가세요. 헌터들 토벌 갔다 오면 성격 더러워지는 게 하루 이틀인가….“



가이드면 그 정도는 감안하셔야죠. 직원이 싸가지 없게 중얼거렸다. 안에 이동혁이 있다는 것보다 저 직원의 말이 더 충격이다. 대충 이 정도는 이해하고 산다니…? 여주는 문에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누나….”



가운데에서 지성만 안절부절못했다. 직원은 그제야 뭐가 문제냐는 듯 팔짱을 끼었다. 더 기가 막혔다.



“지성아 나 여기 못 들어가. 절대 안 돼.”



싫은 게 아니다. 무서운 거다. 아직 초능력자니 센티넬이니 하는 게 현실에 존재하는 것도 신기한데 냅다 저런 놈을 가이딩하라고? 절대 못 한다. 차라리 내 배를 째라.



“김여주 씨. 그분 가이딩 안 하면 그 쪽한테 가이딩 일감 떨어질 일 없을 거예요.”


“… 예?”


“새로 발현한 가이드는 가이딩 적응 문제를 겪는 센티넬과 반드시 파장을 매칭해봐야 한다, 이 수칙 몰라요?“



사정사정해서 일 잡아줬더니 참…. 직원이 툴툴댔다. 시발 당연히 모르죠. 지금 처음 들었으니까. 여주는 직원 말고 지성을 쳐다보았다. 이쪽이 더 알아듣게 설명해줄 것 같았다.



”누나, 저분이 파장이 조금 지, 아니, 이상하셔서 가이드랑 잘 매칭이 안 돼서 그래요. 저분이랑 파장 체크만 하고 금방 나오면 돼요.“


”나 무서운데 지성아….”


“누나, 센터에서 누굴 공격하는 미친놈은 없어요. 여기 헌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제가 바로 들어가서 막을게요.“



지성이 쩔쩔매며 여주를 달랬다. 그래도 그럭저럭 신뢰는 갔다. 지성 본인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도와주겠다고 외쳐줬다. 저렇게까지 말해주면 한번….



”어… 잠깐만요. 이동혁 씨는 몇 급인데요?“


”A급이요. 어디 인터넷 안 나오는 오지에서 살았어요?“



누가 누구를 막는다고? 우리 D급 지성이가 A를 막는다고? 여주는 직원을 홱 돌아보았다. 참 태평해 보인다.



”제가 누나랑 같이 들어가면 안될까요? 그럼 좀 나을 것 같은데요….”


”파장 섞여서 두 분만 계셔야 해요. 안 하실 거예요? 이동혁 헌터 좀 있으면 토벌 가야 해요.“



차가운 일갈이 떨어졌다. 지성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물러났다. 미안해요 누나… 하는 나직한 사과도 함께였다.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아까 저분이 얘기한 건 그냥… 잊어버려요.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여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현실 세상이라면 기를 쓰고 안 했을 거다. 그러나 여긴 차원 이동한 세계다. 거기서 이런 특이한 이벤트가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어떤 거대한 흐름에 꼭 필요한 요소라는 거겠지. 가이드 형질을 괜히 주진 않았을 거 아니야. 여주는 죽을상을 하고 문 앞에 섰다.



“내가 소리 지르면 꼭 들어와 줘야 돼.”


“문에 달라붙어 있을까요?“



지성은 진짜 그럴 것처럼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덕에 긴장이 가라앉았다. 좋아, 신의 사도가 옆에서 지켜주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여주는 지성의 응원과 직원의 무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가이딩실로 발을 들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꼭 눌렀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을 거야….



“너야?“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저거 기분 엄청 나빠 보이는데. 여주는 차마 그 앞까지 갈 엄두를 못 내고 문에 바짝 붙어 섰다. 내가 진짜 쟤 손을 잡아야 한다고…? 광견한테 손! 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저 놈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다. 여주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괜찮아, 나는 신이 지목해서 차원 이동한 사람이잖아. 죽을 뻔했을 때도 지성이를 보내서 살려줬으니까…. 이 놈한테 설마 죽진 않겠지



“소, 소, 손이요….”



달달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동혁은 불만스러운 듯 보였으나 의외로 순순히 손을 얹어주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다른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팔에서 뭐가 울렁거리며 빠져나왔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팔에 있는 걸 박박 긁어간 무형의 힘이 여주의 팔을 더 타고 올라왔다. 이번엔 어깨였다. 거기에 고여 있던 무언가가 팔을 따라 손까지 쑤욱 내려왔다. 그러나 그건 거기서 더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왔다. 어깨보다 더 중앙에 가까운 곳, 팔과 몸통을 잇는 가슴 위쪽 부근이다. 여주는 일순 이는 두려움에 손을 빼려고 했다.



“야.”


“… 옙?”


“가만 있어.”



어느새 동혁이 여주의 손을 부서져라 쥐고 있었다. 여주는 질겁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동혁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게 가슴을 지나 심장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여주는 손을 빼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게 심장에 고여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게 너무 여실히 느껴졌다. 이젠 정말로 참을 수 없이 무서워진다. 여주는 본능을 따라 있는 힘껏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런다고 A급 센티넬이 손을 풀어줄 리 만무하다.



“아니, 그, 그만! 그만해요!”



순간 맑은 기계음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너머에 직원과 지성 모두 경악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주는 마지막으로 동혁의 손을 뿌리쳤다. 이번엔 그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왜, 뭔데요?“


”….“


“암튼, 측정 다 끝났죠? 저 가도 되죠?”



직원은 말없이 여주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여주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동혁아 귀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데스크에 엎어져 있다. 숨 하나 쉬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등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저 분은 왜 저러시는데요…?”


“그게 말이죠, 두 분 파장 일치율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심드렁하던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지성은 그보다는 침착했다.



“누나랑 저 분이랑 100% 찍었어요.”


“엉… 내가?”



내가 왜…?




#12


“어제는 죄송했어요. 제가 오전에 토벌 갔다 오느라 정신이 예민해졌었거든요. 그래도 가이드님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헤헤. 동혁이 착한 아이처럼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여주는 그 모습을 보고 한 발짝 물러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이 들어오니까 뭐냐는 소리를 내뱉었던 놈이다. 지성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지성도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저분은 체질 상 가이딩이 잘 안 받으세요.“


”그럼 어떻게 살아 있어…?”


“저분이 한 달에 쓰는 진통제만…. 진짜 급할 때 가이딩 좀 받으신다 그랬어요.”



지성이 괜히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어제는 진짜로 예민했던 거였구나. 그러니까 울컥 억울함이 올라온다. 왜 그런 센티넬 집에 나 같은 가이드를 혼자 보내? 여주는 도끼 눈으로 직원을 째렸다. 그러니 그가 슬그머니 눈빛을 피한다. 진짜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이동혁의 가이딩이 그만큼 급한 문제인가 보지.



“저는 보고를 좀….”



직원이 냉큼 내뺀다. 저거 끝까지 얄밉네. 여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한 건 저 남자 손밖에 안 잡았는데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별로 안 반가운 얼굴이 마주 앉았다.



“저희 통성명 할까요?”


“아아… 예, 김여주입니다.”


“이동혁입니다.”



여주는 악수를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신체 접촉이 별로 유쾌한 건 아니었던 탓이다. 그 이상한 힘이 심장께까지 손을 뻗는 건 정말 오싹했던 경험이었다.



“언제쯤 발현하셨어요?”


“등록은 어제인가, 그제인가….”



근데 이 새끼 왜 자꾸 나한테 말 걸지. 동혁이 좀 전의 건방짐은 싹 지운 채 웃었다. 눈을 완전히 휘는 게 속도 없는 사람 같다. 여주는 불편한 심기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호떡 뒤집듯 바뀌어도 되냐고.


여주는 옆에 있는 지성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성도 그 손을 감싸쥐어주었다.



“혹시 댁은 어떻게 되세요? 아, 절대 부담드리는 것 아니고요, 제가 가이딩할 때 더 편하신 곳으로 찾아뵐게요.”


“그냥 여기서 만나도 괜찮은데요….”


“여기서 먼 데 사시면 제가 죄송해서 그러죠.”



그러나 동혁은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했다. 여주는 그를 의심하면서도 질문엔 적당히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크게 거슬리는 건 없었다. 지성과 같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가 지성을 한번 훑어내린 것만 빼면.



“곧 저녁인데 식사는 하셨어요? 여기 앞에 맛있는 곳을 제가 알아요.“


“아직….”


”잘 됐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여주는 멍하게 알겠다고 하려다가 혀끝을 깨물었다. 동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꼭 졸린 강아지 같다. 이제야 알겠다. 매끄럽게 굴러가던 말이 왜 내내 꺼림칙했는지.

저 새끼 눈깔 동태인데.




#13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동혁은 여주를 크게 잡지 않았다.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면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무서운 놈.



“지성아, 이동혁이 그렇게 유명해?”


“능력이 좋아요. 불인데, 괴물들 때문에 오염된 땅을 싹 불태우면 한 번에 정화가 된대요.”



여주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고등급에, 괜찮은 외모에, 잘 굴러가는 머리랑 특수한 능력까지. 이게 뭘 가리키겠는가. 저 자식이 주인공이다. 최소 비중 높은 조연이야. 그럼 그런 사람이랑 파장 일치율을 100% 찍어버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세상의 주인공은 되기 싫다. 괴물 있는 세계관 주인공이면 얼마나 많은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되도록 가끔가다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연 정도에 만족하고 싶었다. 엑스트라는 진작에 포기했다. 엑스트라 따위가 차원 이동을 할 수는 없으니.



“지성아 나 괜찮을까….”


“네에? 누나, 걱정하지 마요. 제가 꼭 지켜줄게요!”



지성이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여주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성이 하나에 열 A급 안 부럽다. 얘 없었으면 난 이미 죽었을 거야.




#14


동혁은 최근 들어 각계에서 주목을 받는 이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능력의 특수성과 그 순도 때문에 부르는 곳만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그가 행여나 외국에 유출될까 봐 정계에서도 대놓고 주의를 기울이는 형편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가이딩이었는데, 그게 오늘부로 없어질 판이다. 그래서 직원, 김자유 씨는 정말 오랜만에 센터 건물에서 뛰었다.



“B급밖에 안 되는데 가이딩이 됐어요?”


“무려 100%입니다, 부센터장님. 여기 수치 기록서입니다.”



부센터장은 서류를 빼앗듯이 넘겨받았다. 정말 직원의 말대로 이론 상으로 가능할 법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둘의 곡선은 완벽한 일치율을 그렸다. 누가 조작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믿음이 갈 지경이다. 절로 기가 찼다. 30%만 떠도 감지덕지할 텐데 100%가 떴으면….



“그 가이드 어디 있어요?”


“본인이 원해서 귀가 조치 했습니다만-.”


“이 사람이 참! 가이드 신병부터 확보했어야지!”



부센터장은 짜증을 내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강압적으로 나와서 반감을 살 바에 자유롭게 풀어주는 척하며 협조를 얻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서 그렇다. 그는 애꿎은 직원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대신 따로 비서를 호출했다. 곧 가이드의 신상 정보가 전송됐다.



김여주, 여성, B급 가이드.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신상 정보 없음. 인근 국가의 밀입국자로 추정되나, 가이드로 발현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일시적으로 부여함. 현재 주소 파악 안 됨….



밀입국자라면 더없이 만만한 조건이다. 제대로 된 집도, 가족도 없을 것이고, 수중에 돈도 다 떨어져 가겠지. 부센터장은 그제야 인상을 풀었다.



“이동혁 헌터랑 김여주 가이드 이번 주 내로 불러요. 이동혁 헌터도 협조적이죠?”


“그렇습니다. 다만 가이드에게 따로 접촉할 의도가 있어 보여서….”



그건 예상 가능한 범위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부센터장은 비서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기 전, 서류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곡선은 완벽한 일치율을 보이고 있었다. 눈속임도, 그가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곡선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눈이 잠깐 어디에선가 멈추어 섰다. 내려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높게 치솟는 파장. 일반적인 각성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부분이 그의 신경을 사로잡았다.



“한 비서, 이렇게 생긴 파장 하나 더 있지 않았나?”




#15


여주는 지성과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갔다. 잘 곳으로 지성이 하나뿐인 방을 내어주었다. 그래도 집주인 방을 빼앗을 수는 없다며 반대했는데 한사코 지성이 여주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긴 소파에서 자면 된다고. 너무 착해서 눈물이 다 났다. 진짜 천사를 신의 사도로 보내준 것 같다.


여주는 바로 눕는 대신 침대 위에 꿇어앉았다. 옆의 창문은 환하게 열어두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 말고 도시의 빛 공해와 소음에 쩐 밤하늘이 펼쳐졌다. 여주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신? 신님? 그냥 신님이라 부를게요.”



서두는 호칭 정리였다.



“그, 여기가 이세계인 건 좋은데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목적으로 절 데려오신 건가요? 저 괴물들을 다 죽여야 할까요?”



이게 제일 문제다. 남의 세상에 떨어졌는데 목표가 없으니 뭘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여주는 감았던 눈을 찔끔 떴다. 어떤 메시지가 내려올 기색은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동혁이 진짜 주인공인가요…? 차원 이동자로서 걔를 도와야 할까요?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절대 신님한테 불만 표출하는 건 아니고요, 아직 좀 무서워서….”



헤헤. 여주는 눈치를 보며 웃다 정색했다. 어디 신이 웃는다고 뭘 봐줄 성격이겠어? 아니니까 신씩이나 해 먹고 사는 거지.



“그냥 저는 누가 주인공인지, 제 목표는 뭔지 그게 궁금하다 이거죠…. 저는 진짜 간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 일이 끝나면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초능력 같은 걸로 슉 보내주시나?”



신이니까 초능력은 아니고 기적 같은 것일 테다. 여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밤하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별은 하나도 없고, 달만 겨우 빛을 낸다. 그 아래 빌딩의 불빛들이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여주는 거기까지만 기도를 드린 다음 침대에 엎어졌다.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다.




#16


“왔다!”



지성은 아침 댓바람부터 비명을 지르는 여자 목소리에 깼다. 반사적으로 검을 집다 말았다. 그렇지, 어제 불쌍한 가이드 하나를 집에 들였다. 지성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누나 왜 그래요?”


“신님한테 메시지가 왔어!”



여주가 종이 하나를 들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그러다 벼락 맞은 사람처럼 우뚝 굳더니, 창문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앞에 서서 절을 세 번이나 한다. 지성은 그 일련의 행동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까지….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쪽지가 더 급했다. 감사 인사도 다 드렸겠다, 여주는 종이를 펼쳤다.



내 아이야, 너의 목적은 단 하나다.

이동혁을 도와 이 세상의 괴물을 모두 죽여라.

그리고 괴물의 영토를 인간에게 돌려주거라.

모든 일이 끝나거든 자살하거라. 내가 너의 영혼을 너의 세상에 돌려주마.



“죽으면 된대!”


"...." 



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스리슬쩍 방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진짜 이 누나랑 같이 살아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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