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을 제외한 모든 기업명, 인명은 모두 허구입니다. 해당 도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문화 등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 미드 '다이너스티'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By. 꾹꾹님


#1.


"젠장할. 내 말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었어요?"


지민은 잔뜩 성난 표정으로 누군가를 향해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이 다양했다. 유명 셰프부터 파티 플래너까지. 다같이 모여 약혼식에 대한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잘 진행되다가도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바로 욱해버려서 온갖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안을 가져왔던 셰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민은 아차 싶었는지 바로 미안하다고 했지만 셰프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시카고에서 제일 가는 유명 셰프인데 이런 취급을 당하다니...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라 변명할 수는 없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지민에 비하면 발끝에도 닿지 못하니까.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세상은 돈이 전부다. 셰프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분노를 꿀꺽 삼키고 다시 씩 웃었다.


"지민. 걱정마세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케이크로 만들어볼게요."

"정말이죠? 믿을게요. 내일까지 부탁해요."

"물론이죠."


지민은 자신이 여는 약혼 파티라 그런지 세심하게 하나하나 챙겼다. 파티플래너와 전반적인 분위기부터 어떤 꽃을 쓸 것인지,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연주를 할 것인지까지. 지민은 시카고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였고 그만큼 대단한 파티를 열기로도 유명했다. 그가 파티를 연다고 하면 관련 업체들에서는 어떻게든 지민에게 픽 당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겨우겨우 선발된 업체에서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지민의 눈에 늘 만족은 없었다. 

특히 이번 파티는 자신의 첫 약혼파티이자, 대부호인 아버지의 약혼파티를 이겨야만 했다. 필립은 본인의 저택에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고, 지민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시카고 시내에서 파티를 진행 할 예정이었다. 물론 필립의 인맥이 더 엄청나긴 했지만 그 인맥을 뺏어오기 위해 몇가지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거야.


지잉 -


단 한번의 진동 만에 지민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형. 무슨일이야?"

[바로 받네?]

"응. 회의중이었어."

[약혼파티?]

"응. 당사자가 여기 와야하는거 아냐? 내가 다 해야해?"

[봐줘. 나도 회사 일로 바쁜거 알잖아.]

"그래서. 무슨 일인데?"

[오늘 저녁 시간 비워놔. 저녁 먹게.]

"오. 본격적인 데이트인가? 그런데 나 오늘 저택에서 저녁 먹어야 해."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그럼 내일 저녁에 봐. 약혼식 이후의 일에 대해 변호사 통해서 계약서 작성했어. 너와 논의가 필요하니까 말야.]

"허... 대단하신 분이네. 알겠어. 몇시 어디인지 보내둬."

[응.]


지민의 전화가 끝나고 고용된 업체의 사람들은 모두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충 내용을 듣자하니 사랑해서 약혼하는게 아닌 것이 보였다. 비즈니스 관계인건가. 그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휴대폰만 바라보는 것 같던 지민이 조용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깨고 한마디 했다.


"아, 이미 알겠지만 저와 일하면서 듣고 보는건 모두 기밀이에요. 어기면 알죠?"


모두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냥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엄청난 돈에 쌓여서 살아온 지민은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눈치가 매우 빠르고, 상황 판단도 빨랐다.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이지만 손해볼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약혼 파티를 위해 파견되어 온 업체 직원들도 언뜻 어려보이는 지민을 얕잡아 보았을 수도 있었다. 그냥 돈만 많은 어린애. 그러나 방금 한마디로 지민은 모두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지민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얼어있는 그들을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다들 일 잘 하시리라 믿어요."

"네."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지민은 어느정도 본인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 했고, 그들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민을 위해 싹 비워진 레스토랑을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나가버리자 업체 직원들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면서 얘기를 하는데 모두의 휴대폰에 띠링- 알림이 울렸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부탁해요. - 지민'


모두 질린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이 지시한 모든 사항을 만족시키려면 직접 나서서 확인하고 진행해야했다. Shit! 파티플래너는 저급한 욕을 입에 담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에 바빴다.



#2.



"안녕."


지민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택에서 필립, 헨리와 함께 나름 가족 식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그녀가 있었다. 지민은 이번에도 가장 막내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치고는 과하게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제인이 상석 바로 옆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 마저도 꼴보기가 싫었다. 언제 날 알았다고 인사야? 인사를 무시하고 자리에 앉자 그녀의 표정도 볼 만 해졌다. 지민은 그녀를 노려보며 한국어로 살짝 말했다.


"거긴 우리 엄마 자리야."

"응?"


제대로 듣지 못한 헨리가 지민을 향해 되물었지만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묘한 분위기를 뚫고 집사 리처드가 들어와 요리들을 세팅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지민은 자리에 앉아서도 태블릿을 통해 약혼 파티에 대한 얘기를 플래너와 계속 나누고 있었다. 주인공이 등장하듯 필립이 다가오자 제인은 왜 이제 왔냐고 온갖 앙탈을 부렸다. 헨리도 그 모습이 거북했는지 지민을 쳐다봤고 지민은 우웩- 하는 액션을 취했다. 필립이 상석에 앉자 제인도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둘은 밥을 먹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스테이크를 잘라서 먹여주질 않나. 아들들 앉혀놓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지민은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재빨리 먹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다 먹은거냐?"

"네. 올라가볼게요. 바쁜 일이 있어서."

"기다려라."

"왜요?"

"곧 내 약혼식인거 너희들도 알고 있지? 꼭 참가해주리라 믿는다."


지민은 웃었다. 지민이 웃자 필립은 조금 의아한 표정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거의 웃지도 않던 애가 왜 저러나. 지민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미소만 짓다가 이내 폭소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옆에 앉아있던 헨리가 먼저 물었다.


"테이블 매너라도 까먹은거 아냐?"

"아냐. 헨리. 아버지? 제가 중대발표 할게 있어요. 전 그날 참석 못합니다."


필립도 제인도 지민을 빤히 바라봤다. 가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약혼 파티에 아들이 참석을 못한다니 무슨 말이지?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이 약혼파티를 위해 아들들을 집에 소집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났다.


"뭐 하는 짓이냐 지민?"

"아버지. 저도 약혼해요."

"뭐?"

"아버지 약혼파티 날. 저도 약혼 파티 열어요."


필립은 방금 들은 말이 제대로 된 말인지 대체 무슨 의미인지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지민은 그 모습마저 웃겨서 피식 소리를 내고 웃었다. 필립의 얼굴이 빨갛게 되어버렸다.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내가 COO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식으로 복수하는거냐? 아버지의 날 선 분노가 식당에 울려퍼졌다. 지민은 필립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왜 그래요? 걱정 되시나요? 아버지보다 제가 더 주목받을까봐?"


지민의 이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허세도 아니었다. 필립보다 지민이 여는 파티가 더욱 성대하고, 손님이 많은 것은 팩트였으니까. 필립은 물론 제인 역시도 모욕감을 느꼈는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필립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하나뿐인 막내 아들에게 물었다.


"상대는?"

"아, 아버지도 아는 사람이에요.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지고 말았죠."

"누군데?"

"태형이요."

"태형?"

"네. 잘 아실텐데? 영어 이름이 뭔진 모르겠지만... 아웃스탠드 CEO죠."

"F...."


필립의 입에서 F워드가 나올 뻔 했다. F워드 뒤에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뻔했다. 감히 현 세레니테의 라이벌 기업인 아웃스탠드와 결합이라고? 필립이 한가지 실수를 한게 있다면 가십지를 읽지 않은 것이었다. 제인에게 푹 빠져 매일 같이 체크하던 일명 찌라시. 가십지의 기사를 며칠 멀리 했던 것이 그의 패인이었다. 지민과 태형의 약혼 사실은 엄청난 속도로 퍼졌는데도 필립은 알지도 못했고, 막지도 못했다. 필립은 태형을 죽도록 미워했다. 시카고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동양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필립보다 훨씬 어린 태형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서는 세레니테를 위협하고 있으니. 필립은 본능적으로 그가 싫었고, 극도로 혐오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상하게 태형의 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을 집어 삼킬 독사의 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제인 역시 필립의 옆에서 그런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민이 던진 한마디가 전쟁 선포라도 되는 것 같았다. 


"미친 게 분명하구나!"

"하, 여자에 미쳐서 아들들을 홀대하는 아버지가 더 미친거죠?"

"홀대? 내가 언제?"

"제인. 저 여자는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죠? 회사에 얼마나 기여를 했길래? 알아보니 눈에 띄는 이력도 없던 걸요? 이 나라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대학 나와서... 그냥 젊고 예쁜거 빼면 잘난게 뭐가 있죠? 그런 사람에 비해 내가 뭐가 부족해서 COO가 되지 못하냔 말이죠. 뭐,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난 태형과 사랑에 빠졌어요. 그러니 약혼 할거에요. 이건 말리지 마요."


필립은 분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제인이 열심히 필립!을 외쳤지만 소용 없었다. 그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상황에 벙찐 헨리는 지민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너 진짜 미쳤구나?"

"형. 이제 알았어?"

"하긴. 어릴 때부터 넌 그랬지. 가지지 못하면 어떤 수단을 써서든 가졌지. 대단하다 너도. 아버지한테 굳이 거역해야했어?"

"하, 헨리. 가장 먼저 아버지한테 거역한게 누군데 그래?"

"...나지."

"거봐. 형. 우리 아버지의 그늘에서 독립할 때도 됐어. 솔직히 우리가 나가서 회사 하나 차려도 금방 클 거 알잖아. 그동안 배운게 그런거니까. 뭐, 어차피 이 약혼도 그냥 쇼야. 태형은 내 장기말에 불과해. 지켜봐. COO는 물론 세레니테를 아예 내걸로 만들거니까."

"...그때 되면 나도 한 자리 주는거냐?"


헨리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지민은 피식 웃으며 형의 어깨를 툭 쳤다. 그날 밤. 저택에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렸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제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엉엉 우는 소리 까지 들었다. 지민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기분은 상쾌 그 자체였다.




#3. 


아침 10시부터 시카고 시내 한 레스토랑은 분주했다. 어제 지민의 불호령을 들은 업체 직원들은 부랴부랴 무언가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싹 비워진 레스토랑 내부엔 몇개의 테이블과 화려한 장식들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 위로 화려한 꽃 장식으로 된 센터피스가 놓여졌고 그 바로 앞에 모형으로 된 3단 케이크가 올라왔다. 다른 테이블에는 깔끔하게 접은 냅킨을 비롯한 손님용 세팅이 되어 있었다.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천을 들어 자국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잔과 실버웨어들을 닦고 있었다. 파티플래너는 열심히 샤넬 쇼핑백을 들고 날랐다. 그렇게 오전 10시 5분쯤 되었을 때 레스토랑 앞에 차 한 대가 스윽 다가와 멈췄다. 빨간색의 페라리 카브리올레였다. 안에서 내린 남자는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는 지민이었다. 지민은 앞에 대기하던 남자에게 차키를 맡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분주하던 직원들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지민을 향해 인사했다. 다들 긴장감이 얼굴에 서려있었다. 지민은 앞에 마련된 세개의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러자 그 테이블을 맡은 사람들이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케이크는 말씀하신 디자인대로 3단으로 준비했습니다. 하얀색의 슈가 크래프트를 사용했고, 레드와 핑크 계열의 크림으로 장식이 들어갑니다. 하얀색의 크래프트 위에는 식용 금이 올라갈겁니다. 여기, 그리고 여기 위주로요."

"네. 좋네요. 역시 잘하네요. 제가 원한게 이런 느낌이었어요. 혹시 여기에 더 화려하게 추가할 장식이 있으면 알려줘요."

"식용 진주는 어떨까요. 페이크 진주인데 설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얀 배경이니 은은하게 빛날겁니다."

"좋네요."


지민이 모형 케이크를 꼼꼼하게 살펴보자 셰프는 호다닥 뒤로 가서는 케이크 한조각을 가져와 내밀었다. 이건 샘플 케이크 입니다. 맛은 깔끔하게 화이트 스폰지에 생크림입니다. 지민은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베어냈고 곧장 입에 물었다. 음. 맛있네요. 이렇게 해주세요. 지민의 말에 셰프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곧이어 전체적인 테이블 세팅을 맡은 직원이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센터피스나 장식으로 쓰일 꽃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뷔페로 준비 될 간단한 핑거푸드까지 시식을 마쳤다. 준비 될 와인이나 샴페인도 시음을 마쳤고 지민은 꽤나 만족한 표정이었다.


"여러분. 정말 잘해줬어요. 이게 제가 원하던 겁니다. 완벽해요. 당일에도 잘 부탁해요. 당일엔 제가 잘 챙기지 못하니까요. 아, 마지막으로 저게 게스트 기프트인가요?"

"네 맞습니다."


지민이 보기 좋게 놓인 샤넬 쇼핑백으로 다가갔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다가온 직원은 샤넬 뿐만 아니라 작게 놓인 루이비통 상자도 보여줬다. 


"여자분들은 이걸로 가고, 남자분들은요?"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색깔이 다른 쇼핑백을 올려두었다. 그러자 지민은 흡족하게 웃었다. 오시는 손님 만큼 수량은 확보되어 있는거죠? 직원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전세계의 수량을 끌어모았는걸요. 부족할 일은 없을겁니다."

"좋아요. 아, 수잔?"

"네."

"초대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여기 시안입니다."


초대장은 심플했다. 화이트 배경에 골드. 지민이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포인트 레드까지. 디자인이 맘에 들었는지 고개를 몇번 끄덕였다. 파티플래너인 수잔이 초대 리스트에 대해 물었고, 지민은 몇명 인원을 체크해보더니 이대로 보내라고 했다. 업체 직원들은 속으로 식겁했다. 게스트 기프트 하나만 해도 대략 7천 달러에 육박하는데... 초대 리스트는 거의 200명 정도가 된다. 대체 금액이 얼마인거야... 그들은 아찔했다. 선물에만 그정도 가격이지. 파티 장소 대여부터, 온갖 음식까지 돈으로 떡칠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만큼 본인들이 벌어가는 금액도 엄청났다. 일하던 인부 하나는 이 돈을 가지고 당장 휴가내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만큼 지민은 파티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수고해주세요. 그럼 토요일에 만나요. 잘 지내세요 여러분. 무슨 문제 있으면 꼭 연락 줘야해요 알죠? 좋은 오후 보내요."


지민은 쿨하게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앞에 주차되어있는  빨간 차에 올라 탄 지민은 곧장 아웃스탠드로 향했다.



#4.


"너무 한거 아니야? ." 

"궁금한게 있는데. 왜 '형' 이라고 말하는거야?"

"엉? 좋아하는거 아니었어? 한국 이름도 쓰고 있잖아."

"그건 네 알바 아니고. 장난 치는거 아니면 그렇게 부르지 마. 이상해."

"네네. 그러죠 뭐.."


태형은 놀랐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의자에 지민이 떡하니 앉아있는게 아닌가. 뭐하는 짓이냐 물어보니 태형을 기다렸다고 했다. 대체 CEO의 사무실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제지 하나 없이 들어올 수가 있는거지. 태형은 그 점이 먼저 거슬렸다. 지민이 앞에 있는데도 태형은 비서를 통해 전 직원 특히 경비 인력에게 일렀다.


"수상한 자는 절대 사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앞으로 더 신경써야 할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민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수상한 자야...? 장난이라는 것은 알지만 저런 울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태형은 아주 잠깐 멈칫했다.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민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지민은 예예~ 비꼬는 말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그냥. 할게 없어서 놀러왔지."

"여기가 놀러오는데야?"

"내 피앙세의 회사인데. 놀러 올 수도 있지?"

"참... 한가하네 너."

"무슨말이야. 방금까지 우리의 완벽한 약혼 파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온 사람이라고. 형. 아, 미안. 이라 하지 말랬지?"


태형은 그에 대답없이 업무를 시작했다. 지민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태형에게 말을 걸었다. 약혼파티 궁금하지 않아? 이런 식의 질문이었다. 태형은 무미건조한 태도로 대답하다 뭔가를 알아챘는지 지민을 빤히 바라봤다. 아, 맞네. 나 지민이 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 태형은 일하는데 있어 돌아가는 머리가 빠른 사람이었다. 꽤나 계산적이기도 했다. 직원들에게는 엄한 보스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연애에는 약했다. 사실 성장하며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나 있을까 싶다. 태형은 굳이 이런 점을 티내지는 않았지만 워낙 연애 경험이 많은 지민에게는 순식간에 들킬 것 같았다. 가장 어려운 상대가 자신에게 빠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건 허들이 높은 도전이었다.

이 문제를 인식한 후로 태형은 지민에게 꽤나 다정하게 굴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태형에 지민이 이상함을 느꼈지만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직원들에게 딱딱하게 구는 태형을 봤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이 은근 기분 좋기도 했다. 태형은 지민이 퇴근까지 계속 기다릴 것을 알기에 업무를 멈췄다. 그리고 퇴근시간 보다 빨리 퇴근하기로 했다. 비서를 호출해 외부일정으로 먼저 퇴근하겠다고 알리자 비서는 웃음을 열심히 숨기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자."

"CEO는 좋네~ 마음대로 퇴근하고."

"장난치지말고. 차는?"

"주차장에. 그런데 태형 네 차 타고 갈래."

"그래."


일본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은 비상이 걸렸다. 오후 6시에 예약이 되어 있는 VVIP손님이 당장 지금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형이 미리 레스토랑에 시간이 앞당겨짐을 안내해줬으니 다행이지 자칫하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뻔 했다. 그 유명한 세레니테의 막내 아들 지민과 아웃스탠드의 CEO가 함께 오는 예약인데... 망칠 수는 없었다. 아직 오픈도 하지 않을 시간인 오후 4시. 그들은 두 사람만을 위해 오픈했다.


"고마워요. 무리한 부탁이었을텐데."

"아닙니다. 태형. 당신이 제 레스토랑을 아껴주는 것에 이렇게 보답이라도 해야죠."


태형은 오너를 향해 씨익 웃었다. 오너 역시도 웃어보이더니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급 일식 레스토랑인 이곳은 룸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런 레스토랑은 흔치 않았고, 이 레스토랑은 유명인사들이 프라이빗한 식사를 즐기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태형이 비즈니스 목적으로 워낙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 예약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이미 시카고에는 둘의 약혼 소식이 퍼져있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자기 레스토랑에서 곧 약혼 할 유명인사들이 식사를 했다고 하면 그것만으로 예약률은 치솟았다.


"사람 좋네."

"뭐가?"

"그냥.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서. 이런 서비스가."

"뭐.. 너는 그게 당연한 삶을 살았잖아."

"반성하겠다는 건 아닌데. 뭐 그냥... 마음이 그렇네."

"...아마 코스요리로 나올거야. 사시미를 못 먹는건 아니지?"

"좋아하지."

"잘됐네."


아직 에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태형은 서류를 내밀었다. 솔직히 서로 태블릿으로 주고받아도 될 서류인데 굳이 종이로? 지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 안엔 양식에 맞춰 쓴 진짜 계약서가 있었다. 조건은 많았다. 재산에 대한 이야기. 지민이 태형을 설득하기 위해 했던 세레니테와 아웃스탠드의 합병 관련 이야기. 그리고 섹스에 대한 이야기까지. 와... 이러기야? 그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약혼은 진행하되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태형도 은근 눈치가 있었다. 지민이 약혼을 제안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민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멍청한 애는 아니었네.

돈 많은 사람들끼리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많으니 이정도 조항들은 그러려니 했다. 혹시나 결혼하고 이혼하게 되면 엄청난 법정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민이 열심히 읽어보며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자 태형이 기다렸다는 듯 펜을 내밀었다.

묵직한 펜을 잡아 그대로 싸인하기 직전. 태형이 손을 뻗었다.


"아, 잠시만."

"...왜?"

"줘봐."


지민이 서류를 건네자 태형이 받아들고는 다른 펜을 꺼내 무언가를 수기로 적기 시작했다. 금방 다 쓰고는 종이를 내미는데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지민이 받아들어 수기로 적은 줄을 소리내어 읽었다.


"위 모든 조항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경우 무효로 한다?"

 "응."

"우리가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두고보면 알겠지."


태형이 살짝 눈을 내리깔고 지민을 빤히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지민은 당황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원한다는 것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심장이 크게 뛰어댈 일인가. 솔직히 엄청나게 잘생기긴 했지만... 내가 반할 이유는... 

그의 허세엔 자신감이 묻어있었다. 연애 경험이 많은 지민이었고, 웬만한 사람은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그의 자신감에 순식간에 압도 된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은 오랜만인 것 같아서 괜히 몸 어딘가가 찌릿했다. 지민은 바짝 말라버린 입술에 혀를 내밀어 적셨다.

사랑에 빠지면 가장 불리한 것은 지민이었다. 손해보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지민은 순식간에 태형에게 기선제압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난... 참아낼 수 있을까.


지민은 어느새 앞에 놓여있던 차가운 사케 온더락을 순식간에 원샷해버렸다.



짐른은 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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