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닌니












런쥔은 마당으로 나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뺐다. 계단에 거리를 두고 앉은 너른 어깨 둘을 보고 금세 눈을 돌렸다. 그가 찾는 사람은 누구 하나 날릴 기세의 어깨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해변가로 목을 더 빼자 저 멀리 이쪽으로 달려오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 중 한 명이 여주라는 걸 확신한 런쥔은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냉동실에 넣어 둔 물은 적당히 살얼음이 껴있었다. 힘겹게 달리고 왔으니 이 정도는 겨울이라도 시원하게 느낄 것이다. 혹시 몰라 땀 닦을 수건 하나와 물, 천러가 마트에서 집어 온과자 하나를 챙겼다. 군것질은 잘 안 하는 천러지만 지성이가 과자를 좋아해 종종 그의 취향대로 집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런쥔은 그 중에서 초코과자를 하나 쥐었다. 영호가 말해 준 바에 의하면, 여주는 달달한 과자를 좋아했다. 그것도 초콜렛이 발린 걸 특히나 찾아댔다고 한다. 어릴 적엔 이 썩는다고 부모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을 정도로. 어쩌다 여주의 어릴 적 사진을 보았던 걸 떠올렸다. 그건 영호의 지갑에 부적처럼 존재했고, 런쥔은 앞니 위아래 하나씩 없으면서 시원하게 웃던 여주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어디 가?“

“잠깐 밖에.“

“여주 보러? 갈 거면 나도 가.“

“여주가 싫다고 했잖아. 쟈니 형한테 이것만 전해주고 올 거야.“




마크가 따라 나서려는 걸 런쥔이 막았다. 여주 이름은 꽤 잘 먹혔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영호에게 여주 이야기를 많이 들어 호감을 가진 상태이기도 했지만, 여주를 만난 후부터 꼭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그에게 빠져들었다. 런쥔이나 마크 뿐만이 아니라 팀원 전부가 그랬다. 영호의 동생이라 좀 더 우호적인 감정이 생겼을수도 있는데, 그 밖에도 매력적인 사람인 건 틀림 없었다.


간혹 보이는 그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천러의 말대로 자고 일어났을 적의 온기, 맹한 얼굴, 고집 있는 말투와 호탕한 웃음 소리 등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영호가 우려하는 이성적인 호감 같은 것보다 더욱 산뜻하고 농도 짙은 마음이었다. 빈즈를 만났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형.“




런쥔은 마당으로 나오고서도 한참 쭈뼛댔다. 물과 수건, 과자를 가지러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거리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주라면 좀 더 빨리 도착할 줄 알았는데. 런쥔은 영호와 같은 이유로 미간을 좁혔다. 그가 늦는 이유가 옆에 딸린 짐덩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왔어?“

“여주 돌아오면 목 마를 거 같아서요.“




마크에게 말한 것과 달리 런쥔은 여주가 보고 싶었다. 일부러 여주 돌아 올 쯤에 맞춰 나온 건데, 누구 때문에 계속 멈춰서길 반복 중이다. 세걸음 내딛으면 멈추고, 두걸음 보폭을 넓히면 멈추고. 여주가 손목을 잡고 끌어주는데도 저 모양이라는게 런쥔은 화가 났다. 왜 여주가 그를 도와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쟤 때문에 가이드에겐 취조실이나 다름 없는 곳에 들어가야 했던 여주를 떠올리면 짜증이 치밀었다.




“여주는 진짜,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네요.“




그가 주연을 동정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동정 받고 도움 받고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도 남을 위하는게 런쥔을 꼬이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랑하고 위하는 아이가 왜 저런 애 때문에 휴식이 늦춰지고 있는지, 열이 뻗쳤다.




“형, 여주 데려와도 돼요?“

“그럴래?“

“아직 훈련 덜 끝난 거 같은데요. 여주는 도중에 끊는 거 싫어해요.“




멈춰 서느라 신발 밑창에 밀린 모래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영호가 그를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동혁이 재현의 뒤로 섰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우리가 제일 잘 알아요. 기억을 잃었어도 이건 그대로일 걸요.“




N팀과의 훈련 후로 이겼는지 졌는지 결과를 묻던 여주가 동혁의 말을 뒷받침하듯 떠오른다. 훈련이 도중에 끊겼다는 걸 생각조차 못하듯이 말이다. 그래도 네가 다쳐 훈련이 중단 됐다고 했을 때 별 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주는 전의 여주와 다른 사람인데. 런쥔이 잠시 숙소를 돌아봤다. 안에선 지성과 천러가 공부랍시고 해리성 장애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선 인물의 성격이 누가봐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라지던데, 여주는 영호조차 의사 소견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인격이니 다르게 봐야 할까.




“데리러 가. 여주가 내 말은 안 듣잖아.“




형 말도 안 듣는데 내 말은 듣겠냐고 묻고 싶었으나 영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저 멀리서 넘어진 홍주연 팔을 잡아 일으키는 여주가 보였다. 그 때문인지 여주 무릎도 손도 흙투성이다. 진상도 저런 진상이 따로 없다.




“야, 부르지 마.“




동혁이 런쥔을 뒤따라왔다. 재현이 너도 가서 주연을 데려오라고 말한 덕이었다. 그래, 덕. 재현이 아니었더라면 영호 눈치 본다고 꼼짝도 못했을 동생을 위해 재현이 나름 등을 밀어준거다. 그렇다고 싸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주연만 데려오라는 뜻이었다.




“주의 주는 거잖아. 여주가 싫어할 짓 하지 말라고.“

“네가 뭔데?“

“허?“

“그렇게 잘 알면 울리지 말던가.“




런쥔은 제 생각을 창처럼 내꽂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입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가차없다. 동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무어라 변명하고 싶은데 나오는 말이 없다. 여주가 훈련중 혼절하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낀 탓이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네 일 아니야. 신경 꺼.“

“난 너 같은 놈들이 제일 싫어. 말 섞을 수록 빡치니까 말 걸지 마.“




동혁이 할 수 있는 말은 거기가 한계였다. 네 일이 아니라는 것. 제 잘못을 듣기 싫어 하는 소리라는 걸 안 런쥔은 그를 경멸하듯 바라보았고, 동혁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싶진 않았는데 비난도 받기 싫었다.


런쥔 또한 동혁처럼 꿍한 마음을 가졌다. 그를 힐난하면서도 정말 그의 말마따나 여주가 여기에 온 자신을 싫어할까 봐 해변가에 발 올린 걸 후회하고 있다. 여주가 나오지 말랬는데 여기 있다는 걸 알면 화내지 않을까.




“런쥔아!“




날 선 눈과 먹구름 끼던 마음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동그래진 눈을 한 그가 앞을 바라보면 언제 홍주연을 신경 쓰고 있었냐는 듯 여주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여주는 저렇게 뛸 줄 아는 아이인데. 칙칙한 구름에 볕이 틈을 벌리듯 환한 웃음을 지은 여주가 양 팔을 벌리며 달려오고 있다. 힘이 빠졌는지 푹푹 꺼지는 발이 불안해 당황한 런쥔이 다리를 뻗었다.




“그러다 넘어진다니까!“




런쥔의 걱정은 들은 체도 않고 달린 여주가 그의 품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격하게 달려왔는지 부딪힌 몸이 밀려나고, 간신히 중심을 잡은 런쥔이 여주의 등을 안았다. 펄떡이는 심장소리와 더운 숨이 런쥔의 목덜미를 덥힌다.




“네가 받아줬네. 안 넘어졌지?“

“……….“

“이건 내꺼야?“

“어? 응. 보리차…. 너 맹물은 싫어한다며.“

“잘 아네. 이것도 영호?“

“응.“

“와, 살 것 같아. 너 진짜 다정하다.“




입 안에 씹히는 살얼음이 차가운만큼 런쥔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편의점 같은 곳에서 사온 얼음이 아니라 런쥔이 여주를 생각해 미리 얼려뒀다는 걸 알 수 있게 했으니까. 내밀어진 수건을 보던 여주가 턱을 들었다. 팔 들 힘도 없다는 말에 런쥔은 웃으며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조심스레 두드린다.




“화 안 내?“

“내가? 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 음. 아까였다면 화났을 텐데 영호 덕에 괜찮아졌어. 넌?“

“나? 난 화 안 났는데.“

“진짜? 화 덜 풀린 줄 알았어.“

“…내가 좀 모나서 그래. 화난 거 아냐. 걱정한 거지.“

“걱정하니까 화내는 거지. 그게 왜 모난 거야.”




이제 됐다며 고개를 뺀 여주가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기분 좋게 웃는 여주가 먼 지평선 끝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을 맞았다. 지금 들어가서 씻으면 딱 좋을 것 같다며 바람보다 더 시원하게 웃는다. 뛰기 전엔 주연만 죽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더 죽을 맛이었다. 달려야 하는 다리와 중심을 잡아야 할 발, 몇번이나 일으켜 세운다고 바짝 선 승모근과 삼두근이 얼른 따끈한 물에 풀어달라 아우성이었다.




“넌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알아. 그래서 피곤해 죽겠어.”

“…나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닌데.”

“나도 농담 아니야. 인성 바르고, 운동 신경도 좋은데, 남들하고 잘 어울리기까지 하고, 일도 잘해. 굳이 단점을 꼽으라면 단점이 없다는게 단점이지.”




런쥔이 얼 빠진 얼굴을 하자 여주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넣었다. 얽힌 팔 아래로 떨어진 손을 잡고 이끄는 그에게 홀린 것처럼 런쥔이 걸음을 뗀다. 언젠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일상적이던 어느 날, 영호가 런쥔이 마음에만 담고 있던 이젤을 사줬던 때에 느꼈던 빛을 여주에게서 똑같이 느꼈다.




“런쥔아.”

“네?”

“떨어져.”




정신 차려보니 영호가 앉아있던 계단 앞이다. 고개를 들자 흉흉한 미소를 걸친 영호와 맞닥뜨렸다. 놀란 런쥔이 한걸음 물러나려 하자 여주가 런쥔의 팔을 품에 안는다.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에 영호는 퍽 억울한 얼굴을 했다.


영호는 멍하니 여주를 보던 런쥔의 눈에 싹이 트는 걸 봤다. 어떤 꽃이 필지는 몰라도 자신이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게 경고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을 뿐인데 되려 눈총만 받았다.




“여주야, 잘 들어. 넌 내 동생이야, 그렇지?”

“당연하지.”

“런쥔이도 내 동생이고.”

“그런데?”

“너네 둘은 남매야….”




출생의 비밀을 알리듯 영호가 착잡한 얼굴을 했다. 런쥔은 내동생 소리에 쑥스러운 듯 입술을 말다가 남매 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형은 극성 맞을 때가 있다.




“이러면 됐지?”




고민하듯 눈을 굴리던 여주가 런쥔을 끌고 올라왔다. 두칸을 올라 영호 옆에 선 여주가 그의 팔 또한 런쥔에게 했듯 팔을 얽어 손을 잡았다. 이제 문제 없다는 듯 뻔뻔과 당당 사이의 표정을 짓는 여주와 기분 좋게 웃는 런쥔 틈에서 영호도 고집을 꺽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여주의 고집에 져주던 버릇이 이렇듯 다른 동생들에게 적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부르르르, 물 밑으로 잠긴 입으로 공기를 가득 뱉어내자 보글보글 물방울이 터졌다. 런쥔이가 준 입욕제를 풀어 둔 욕조에 몸 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났다. 남자애가 간지럽고 예쁜 구석이 있다곤 생각했으나 입욕제까지 챙겨다닐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근육통에 시달릴 내일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고마운 일이다.


목 뒤로 걸쳐 둔 수건에 머리를 기대어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홍주연에게 글 속에서 라조를 상대했던 컨디션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애가 날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글속에서 우울할 때마다 달린 것처럼 3개월은 빡세게 굴러야 어찌저찌 제 몫을 하는 사람이 될 텐데 지금은 뭣도 아니다.


그래도 나름 주인공이라고 3개월이면 잘 쳐준게 아닌가 싶지만, 지금은 그 3개월마저 없으니 돌아버리겠다. 심지어 같이 하는 팀이 N인데….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머리 아프게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등급이 높다고 국내 에이스팀에 밀어넣었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게 생겼다. 멍청한 센터장 새끼.


하긴, 홍주연만 문제는 아니다. N팀 자체로도 문제가 많아 보인다. 서여주를 잃고 N팀은 이빨 빠진 호랑이로 밖엔 안 보였다. 개개인의 능력치도, 팀워크도 너무나 좋지만 뒷받침 되어야 할 가이딩이 부족해 보였다. 우선 홍주연이 N팀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에 나름의 감사를 가지곤 있으나 뭉칠만한 계기가 사라졌다. 서여주가 살아서 그의 우울이 깊어지지 않았으니까.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서여주를 N팀의 성장용 발판으로 사용한 거잖아. 개같은 작가새끼. 제일 거지같은 부분이 거기 있었다. 읽을 때는 악역을 맡은 서여주에게 별 사감도 없었다. 금방 지나간 악역이었으니까. 나름 비중 있긴 했어도 그거야 직접 등장하지 않고도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역할이라 주인공들이 얼른 서여주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길 바랐다. 독자였던 나도 N팀이랑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더 더럽다. 독자는 언제나 주인공 편에 서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홍주연의 가이딩은 일반적인 접촉으로는 금방 빠져나가니까 각인으로 이어져야 제 역할을 다 할 텐데 지금은 이마저도 기대하기 힘드니 빈즈 쪽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했다. 다행히 글에선 N팀 홀로 해냈던 걸 지금은 빈즈와 함께하고 있고,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세력이 작다는게 나름의 장점이었다.




“여주! 우리 밖에 있을 테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와!”




욕실 문 밖에서 천러 목소리가 들렸다. 바베큐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정말 해 줄 모양이다. 제 할 말만 하고 떠난 듯 문 밖이 고요해졌다. 잡생각을 떨치고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뭉친 근육은 다 풀린 것 같으니 얼른 씻고 나갈 참이다.


어쨌거나 현장에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지. 안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머리쥐어 뜯는다고 당장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생각을 흘려보냈다.




“몸 안 아파?”

“응. 런쥔이 덕에 근육통은 없을 것 같아.”

“누나, 이거 먹어봐요. 쟈니 형이 엄청 맛있게 구웠어요.”

“여주는 콜라? 사이다?”

“소주 없어?”

“논알콜 맥주는 있어.”

“사이다 부탁해.”




씻고 나오자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빈즈와 그 너머의 바다가 보인다. 열린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묘하게 그리운 향이 났다. 꼭 명절에 모인 가족 같은 분위기다. 어른들은 다들 온천 즐기러 나가시고, 다 큰 애들만 남아서 고기 굽는 모습 같달까. 서여주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겠지만.




“머리 다 말리고 와야지.”

“이 머리 다 말리려면 30분은 더 걸릴 걸.”




나름 물기 안 떨어질만큼 말리고 나온 건데도 영호의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머리 짧은 님들은 모르시겠죠. 콧방귀를 뀌며 런쥔이가 싸주는 쌈을 받아 먹었다. 아, 미친. 삼겹살 돌았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방지하고자 입을 막고 두 눈을 땡그랗게 뜨자 런쥔이가 시원하게 웃으며 맛있냐고 물어온다. 말이라고. 아직 다 씹어 삼키지 못해 엄지만 들어보였다.




“안 추워? 옷 줄까?”

“뜨거운 물에 몸 풀었더니 괜찮아.”

“여주 볼이 빨개.”

“뜨거운 물에 있어서 그래.”

“따뜻한 보리차 있는데 드릴까요?”

“내 몸에서 김 나는 거 안 보이니?”




치타폰부터 천러, 지성이까지 한마디씩 얹으며 걱정하는 걸 쳐냈다.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면서도 얹히는 말들이 귀엽기만 했다.




“형, 옆으로 가 봐.”

“아무데나 앉아.”

“아아—, 가 봐.”

“종천러!”




다음엔 런쥔이가 천러를 성까지 붙여 부르는게 하루 몇 번인지 세아려 봐야겠다. 나와 나란히 앉아있던 런쥔이를 밀어낸 천러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곤 말랑하게 씨익 웃어보이더니 언제나와 같이 답싹 끌어안는다. 볼까지 붙여서 꺄-하고 웃는데, 그의 웃음 소리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형!”

“여주 너무 따끈따끈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보다 더 따끈따끈해.”

“천러, 아.”

“아~.”




입에 고기를 넣어주자 오물오물 씹느라 턱근육 움직이는게 다 느껴진다. 더불어 고기가 씹히는 소리도. 금방 떨어진 천러가 런쥔이가 그랬던 것처럼 쌈을 싸서 내게 먹여주고, 애들끼리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떠들기 바빴다.




“영호야, 먹으면서 해.”

“먹고 있어. 얼른 먹어.”

“나 지금 볼 빵빵한 거 안 보여?”




이번에는 치타폰이 내미는 쌈을 받아 먹었다. 하하 웃던 영호는 순식간에 싸늘해진 얼굴을 하고 팀원들을 둘러봤다.




“너흰 가족이야. 우리 전부 Family. 알지?”

“당연하지.”




오바야….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과보호를 무시하는데 오히려 견제 받던 치타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언제나 가족이었다며 나를 돌아보는데, 솔직히 어이 없다. 저기요, 우리 만난지 한 달도 안 됐거든요?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이거나 먹어.”




피가 안 섞였는데 어떻게 가족이냐는 마크와 그럼에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팀원들 틈으로 영호에게 가서 쌈을 먹였다. 확실히 불 앞이라 그런지 따뜻하긴 했다.




“늠우 커.”

“어어, 많이 먹어.”




주먹만한 쌈을 한 입에 다 받아 먹은 영호가 버거워하는게 보였으나 계획대로다. 쓸데없는 말할 거면 입 다물라는 경고기도 했고. 나는 영호가 구워 둔 버섯과 고기를 식탁 위로 옮겨다두고 함께 굽고 있는 양파를 가리켰다. 영호는 집게를 흔들며 아직 안 된대고, 대신 고기와 김치를 함께 입에 넣어줬다. 으, 뜨. 고기와 김치를 앞니로 물고 있으니 이가 뜨거울 정도다.




“저….”




뜨거워서 파닥거리는 날 보고 웃는 영호에게 주먹을 날리는 틈으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난 듣지 못했는데, 귀 좋은 영호와 다른 팀원들이 잘 웃던 얼굴을 굳혀서 알아차렸다. 바로 뒤에 있었는데 애들 떠드는 소리랑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이제 봤다.




“이거,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김정우는 겁이라도 먹은 건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받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접시를 받아들자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눈이 마주쳤던 것 같은데, 영호 등에 그의 모습이 가로막혀 확실치 않다.




“미안해서 어쩌죠? 우리가 줄 건 없는데.”

“아, 어, 괜찮아요. 저희도 받은 거라.”

“누구한테요?”

“숙소 사장님이요.”




영호가 김정우를 잡든 말든 상관 않고 접시를 가져다 식탁 위로 올렸다. 잡채 먹을 사람~, 하고 부르자 아무대답 없는 틈에 지성이가 손을 들었다. 그의 앞으로 잡채를 가져다 두자 지성이가 방긋 웃으며 내 몫의 잡채까지 덜어줬다. 내가 잡채 좋아하는 거 아는구나? 심지어 길죽길죽하게 썰어 볶은 고기도 함께 줬다.




“누나, 버섯 있으면 저 주세요. 전 버섯 잘 먹어요.”

“그래. 너도 잡채 좋아해?”

“네. 쟈니 형이 몇 번 해줬어요.”

“또 뭐 좋아하는데?”

“어…, 마라탕?”




아, 난 못 먹는 건데. 내게 좋아하냐 묻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독한 한식파라 웬만해선 중식, 일식과 함께 양식도 잘 안 먹는 편이다. 동남아 쪽도 마찬가지고. 서여주도 미국에서 자란 덕에 샌드위치나 좀 먹을 줄 알지, 웬만한 식사는 한식으로 하는 편이었다. 피는 못 속였다. 뼛속까지 한국인다운 취향이다.




“하지만…!”

“여주야, 아~.”

“뭔데?”

“너 내가 준 것만 안 먹었어.”




김정우 목소리가 커지자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아직 안 갔나? 했더니 마크가 불쑥 쌈을 내밀었다. 다른 애들이 준 거 다 받아 먹었는데 자기가 준 것만 안 먹었다면서. 고개는 마크에게, 눈은 여전히 영호 등짝에 붙어있는데 입에 들어왔어야 할 쌈이 아직도 입 주변을 멤돈다. 시선을 마크에게 돌리자 그가 느릿하게 쌈을 뒤로 빼는 중이었다.




“뭐해?”

“신경 쓰지마. 아~.”

“빼지마.”




과보호 대왕 영호에 가려 팀원들도 마찬가지란 걸 잠깐 잊었다. 김정우 쪽으로 눈이 돌아가려 할 때마다 다들 날 불러서 이것저것 먹이기 바빴다. 된장찌개 맛도 한 번 보라느니, 쫄면도 먹어보라고 하고, 골고루 먹으라며 각가지 반찬을 내 숟가락에 올려주고 입에 넣기까지 지켜보기도 했다. 심지어 두사람 대화가 안 들리게 끊임없이 떠드는 탓에 귀가 아팠다.




“여주야,”

“됐어.”




배가 꽉 찼는데도 김정우가 버티고 서있다. 아, 참고로 김정우가 오래 있던게 아니라 애들이 끊임없이 먹여서 배가 빨리 찬 거다. 쌈으로 밥 두공기는 먹었을 걸.




“저기요.”




그렇다고 1~2분 지난 것도 아니다. 영호에게 다가가자 머리를 짚고 있던 그가 웃으며 돌아본다. 이런 것도 과보호에 해당하는 거 같은데. 짜증은 어디로 가고 여긴 왜 왔냐며 자리로 돌아가란 소리에 영호 손가락을 쥐었다. 너나 가라고.




“우리가 식사 중이어서요. 할 말 남았으면 나중에 다시 오던가 하죠?”

“…형한텐,”

“그냥 가세요.”




영호는 나를 물려세웠다. 그냥 가라며 김정우 말을 끊고 내쫓는데, 뭔진 몰라도 김정우가 순하게 생겼다보니 영호한테 협박이라도 당한 모양새였다. 티를 안 내려곤 하지만 억울해 보인다. 하긴, 저쪽도 팀장이 까래서 까고 온 걸 텐데. 영호가 곱게 말할 사람도 아니니 저쪽에서 까이고 여기서 또 까이다 돌아가는 것 같다.




“밥 먹고 있지. 왜 왔어.”

“나 배 터질 것 같아. 그러는 넌 하나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얼른 가서 밥 먹어.”

“많이 먹었어?”

“이거 보여?”




티셔츠 아래로 볼록 튀어나온 배에 영호 손을 가져다 대자 그가 빵 터졌다. 이게 뭐야? 하고 둥글게 내 배를 쓰다듬는데, 동그랗게 호선을 그리는 손이 기분 나빠서 치워냈다. 내가 만져보라고 손을 올린 거긴 한데, 너무 크게 웃으니까 기분 나쁘네? 너 지금 비웃냐…?




“왜 비웃어? 복근 있어도 배 나올 수 있거든? 너도 이만큼 먹어 봐!”

“난 여주랑 다르게 많이 먹을 수 있어.”

“돼지.”

“맞아. 나는 돼지띠니까.”




열이 조금씩 오르다가 대놓고 비웃는 얼굴을 보고 화를 가라앉혔다. 화를 내봤자 영호만 좋을 일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쟤 돼지 맞아. 서여주가 봤어. 피자 한 판 다 먹고 아이스크림통 끌어안고 있는 한여름의 서영호를 봤다고.




“너랑 말 안 해.”

“삐졌어?”

“말 걸지마.”

“삐졌구나?”

“말 걸지말라고 했지이익!!”

“또 저러네.”

“그러려니 해요. 형, 잡채 먹을래요?”

“나 먹을래!”




서영호 진짜 짜증나!! 삐졌냐 물어보면 더 빡치는 거 국룰 아니냐고!
















영호가 놀려대는 것만 빼면 즐거운 하루였다. 사실 그것도 즐겁긴 했지만, 아무튼. 애들과 단란하게 저녁도 먹었고, 뜨끈한 물에 근육도 풀어주면서 입욕제 덕에 좋은 향도 풀풀 풍기면서 침실로 향했다. 오늘은 현장 갈 일 없다길래 정말 그런 줄 알았지.


잠들기 전까지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영호가 눈 깜빡하는 사이 사라졌다. 선잠에 들었다 깼으니 자러 갔나 했는데,




“…거짓말쟁이.”




방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다시 잠들까 했는데 늦은 시간에 들리는 목소리 수가 많았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현장이라고 나온 곳에서 이렇게 평화로이 보내도 되는 건가 했다고. 그래도 오늘은 일 없다니까, 서로에게 거짓말은 안 하기로 했으니까 영호를 믿었다.




“여주, 들어가서—,”

“놔. 이러면서 믿으라고?”




방에 데려가려는 손을 피했다. 믿으라더니, 마크도 다를 것 없다. 나를 지키겠다던 지성이나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다.


방 문을 나서자 현장복을 입고 서있는 빈즈가 하나같이 당혹감 서린 안면으로 눈치를 보고 있다. 열린 현관밖에 선 N팀도 마찬가지로 저들끼리 눈을 맞췄다. 저쪽도 이곳과 같은 이유에선지 홍주연은 보이지 않았다. 홍주연도 언질 하나 받지 못 했을까? 그렇다 해도 빡치고, 아니어도 화가 난다.




“훑어만 보고 올 거야.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쪽은 빠져요. 내가 시발 병풍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

“여주 서.”

“뭐! 그렇게 부르면 어쩔 건데!”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안 데려가.”

“……….”

“먼저 나가.”




김도영의 말꼬리를 끊어먹고 화를 표출하자 내가 잠들 때까지만 해도 장난기 많던 사람은 어딜 가고 차분하고 단호한 서영호만 남았다. 그는 빈즈를 밖으로 내보냈다. 안 나가는 건 현장복을 입지 않은 마크 뿐이다. 빈즈는 N팀을 밀고 나가면서 끝까지 내 눈치를 봤다. 미안해 하는게 빤히 보이는데도 무시하고 바닥이나 봤다.




“여주야, 널 여기 데려 온 것도 나한텐 모험이야.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렸던 거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나도 팀원이잖아.”

“네가 할 일은 가이딩이지 현장 참여가 아니야.”

“나도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이야. N팀이랑 같이 작전지에 들어간 적도 많고,”

“서여주,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이 일이 위험하다고.”




영호가 내 어깨를 붙들고 눈높이를 맞췄으나 그와 눈 맞추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말대로 이 일이 위험한 건 여기 있는 사람 중 내가 제일 잘 안다. 라조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러니까 가겠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들이라 입 안만 씹어댔다. 그를 이해 시키고나면 잃을게 너무 많은 탓이다.




“여주야, 난 너에 관해선 공사 구분 못해.”




다정하게 어깨를 쓸어내린 손이 길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내려와 손을 쥔다. 상처 났다가 아물길 반복해서 단단해진 손이 매우 거칠다. 손만 봐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여서 입이 딱 붙어버렸다. 이 손으로 서여주를 키웠을 테니까.




“넌 내 유일한 약점이야. 그런 너를 현장에 어떻게 데려가.”

“나 잘할 수 있어.”

“알지. 넌 내 동생이니까.”

“……….”

“오늘은 둘러보고만 올 거야. 이런 일까지 널 데려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고.”




그럼 더욱 괜찮은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영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장에서 내가 다친다면 그는 또 자신을 탓하며 힘들어할게 뻔하니까.




“그리고 나 거짓말 안 했어.”




영호가 가리킨 시계는 12시 10분이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오늘은 넘겼다 이거야? 말장난 치는 영호가 밉다가도 그의 심경이 이해가 가서 더는 데려가 달란 말도 못했다. 내가 누그러진 걸 알았는지 영호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았다. 금방 올 테니까 마크와 푹 자고 있으라고.




“너는 네 방에서, 마크는 마크 방에서.”

“그럼 여주를 어떻게 지켜.”

“왜 못 지켜. 그 정도 밖에 안 돼? 안 되면 치타폰 부르고.”




부산에 오기 전 회의에서 내가 했던 말을 차용하는 영호를 밀어냈다. 1타 2피를 이렇게 한다고. 짜증을 가득담은 눈초리를 보내자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영호는 절대 한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못 박았다. 이 모습 어디서 봤더라. 아, 하이틴 영화에서 여행 떠나는 딸에게 콘돔 챙겨주던 아빠 같다. 영화로 볼 땐 웃어 넘겼던 것 같은데, 직접 겪으니 수치심이 먼저 치고 올라온다. 왜 저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리 가.”

“절대로,”

“가라고오—!!”




나 데려가라 징징대던 것도 잊고 영호를 현관문으로 질질 끌고 갔다. 끌고 가는데도 마크한테 지켜보고 있다는 듯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과 마크를 번갈아 가리키는데, 팔불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좀 쪽팔렸다. 그래도 나도 서여주도 성인된지 한참인데.


현관문부터 열어젖히자 영호가 웃으며 신발을 신는다. 짜증을 담아 문을 열었더니 좀 세게 열려서 밖에 있던 사람들 이목이 집중 됐으나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또 마크를 보려는 그의 팔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런쥔아.”




대충 신발장에 널부러져 있던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영호를 팀원들에게 던져주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신나게 웃어댔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까지 얄미울 수 있을까. 확 꼬집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채 런쥔이를 불렀다. 지금도 애들만 보내기 싫지만, 이왕 보내는 거 제대로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서여주는 N팀이 현장에 나가기 전에 꼭 가이딩을 했다. 대체로 방사 가이딩을 했는데, 이번만큼은 접촉 가이딩을 하고자 두 팔을 벌렸다. 방사로 하다간 N팀까지 가이딩을 받아갈 것 같아서. 런쥔이가 머쓱한지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눈치 보는게 바다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아서 이번에도 내가 먼저 다가갔다.




“미안해. 금방 다녀올게.”

“다치지 말고 와.”




그의 등을 쓸어주자 런쥔이가 숨을 깊이 들이켰다 뱉으며 몸을 기대어 온다. 가이딩이 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진작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쫓기듯 해주는게 미안할 뿐이다.


런쥔이를 시작으로 팀원들을 안아줬다. 그를 놓아주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러가 덥석 안겨온다. 언제나 내게 먼저 다가오는 천러를 마찬가지로 꽉 안아줬다.




“여주우~.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영호 동생인 탓이지, 뭐.”

“마크 형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일 끝나면 내가 전부 빨리 데려올게.”

“누나.”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 욕심 많은 지성이도, 언제나 한 발 뒤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치타폰까지. 모두 안아주고 나자 끝에 영호가 있었다. 너 뭐. 두 눈에 힘을 주고 쳐다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두 팔을 흔들었다. 얼른 안기라는 거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안아주자 영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짜증나.”

“나도 사랑해~.”

“다쳐서 오기만 해 봐. 소금 뿌릴 거야.”

“너무해.”

“빨리 와. 너 없으면 잠 못자는 거 알잖아.”

“알았어. 마크랑 놀고 있어.”




내 뒷머리를 슥슥 문질러 준 영호가 품에서 떨어진다. 유난히 큰 그에게서 물러서자 가슴팍이 헛헛하다. 아무일 없이 돌아와야 할 텐데. 둘러만 보고 온다는 말만큼은 진짜이길 바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잠깐 N팀과 눈이 마주쳤는데, 알 바임? 마음 같아선 또 엿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거 참고 우리 애들을 향해 고개 돌렸다. 영 못미덥지만 현장에선 날아다니는 인간들이니 믿어 볼 수 밖에. 부디 이번만큼은 우리 애들 발목 잡지 않길 바랐다.




“여주야.”




나를 부르는 마크 곁으로 가 섰다. 한 손은 그의 손을 잡고, 남은 손을 흔들며 팀원들을 배웅하자 천러가 출발을 알리 듯 팀원들 사이에 자리 잡고 섰다.




“마크, 여주랑 아무 것도 하지 마!”

“우리 금방 올게.”

“누나! 졸리면 먼저 자요!”




아, 진짜 보내기 싫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나를 지키고 선 손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잘 다녀와요, 처남.”

“뭐?”

“저 미친,”




…? 누가 욕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적이던 마당이 조용해졌다. 시야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담장 너머 새까만 바다가 시야에 잡힌다. 뻣뻣하게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있는 마크가 있다.




“나 이제 민형이.”

“…미쳤니? 영호 오면 또 난리칠 거 뻔히 알면서 왜 장난쳐.”

“여주가 구해주겠지.”

“안 구해 줄 건데?”

“괜찮아. 하루종일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 돼. 아, 바다 앞이니까 바다에 던질 수도 있고.”

“너…,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데 재주있다.”

“신경 쓰이면 좋아하는 거래.”




이거 완전 또라이네. 어깨에 감긴 팔을 떨쳐내자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 뒤를 졸졸 쫓아오며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반복한다. 영호가 없을 때는 그렇게 불러달래서 그러기로 하긴 했는데, 지금은 영 탐탁치 않다.




“약속했잖아.”

“너도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말을 안 한 거지 거짓말은 아닌데.”

“나 마음 상했는데?”

“다른 애들은 안아줬으면서.”

“그거야 현장 나가는 거니까 가이딩 때문에 그런 거지.”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그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정말 안 할 거냐고 묻 듯 축 처진 어깨와 초롱초롱한 눈이 재수없게 안쓰럽다.




“으휴, 안겨.”




다가오는 마크를 안아주는데 왜 이렇게 속이 허할까. 시끌벅적하던 집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영호는 없고, 또 나 혼자고. 아닌가. 곁에 마크가 있긴 하니까. 나를 마크와 붙여두기 싫어하던 영호가 마크를 남겨뒀다는 건 그만큼 곁에 두기에 믿을만한 사람이라 뜻하는 걸 텐데…. 그럼에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분리불안 같은 걸까.




“민형아.”

“응?”

“나 잠 안 와.”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전히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한 뼘 거리를 더 벌리기 위해 마크의 어깨를 밀어내려는데, 그의 손이 팔꿈치를 쥐고 당긴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 놀라서 몸을 들썩이자 그가 내 등을 안은 채 한걸음 물러섰다. 혹시 라조 쪽 사람일까, 고개를 들고 마크의 얼굴을 확인했다. 긴장한 기색은 없고, 웃고는 있으나 기분이 썩 좋아보이진 않다. 그렇담 답은 하나지. 이 시간에, 센터도 아닌 곳에서 우릴 찾아 올 사람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러 가자.”

“문 안 열어주고?”

“형이 날 남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보호.”

“정답이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얘도 영호만큼 얄밉네. 두 눈을 부릅 뜨고 올려보자 마크가 두 손에 내 볼을 담았다. 퉁퉁, 뒤이어 유리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이쪽으로 올 줄 알고 미리 내 시선이 돌아갈 걸 차단한 듯하다. 고개는 나를 향해 떨구고선 눈만 치켜 떠 창 밖을 보는데, 장난기 한스푼에 화가 세스푼 정도 섞인 표정이다.




“화났어?”




그의 티셔츠 밑단을 쥐자 밖을 보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말 못 해 줄 것도 없다는 듯 코를 찡긋 구기던 그가 조금 그렇다 답했다.




“분명 경고 했는데, 멍청하네.”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이만 들어가자며 나를 방으로 이끈다. 또 한 번 들리는 노크 소리, 무시하고 방으로 가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마크를 보면서 묘한 웃음이 났다.




“민형아.”

“안 돼.”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안 된대.”

“문 열어주자 할 거잖아.”

“아닌데.”




어깨 위로 오른 손을 밀어내고 조금 전과 같이 마주섰다. 그리고 한발짝 다가가니 그가 주춤 물러선다.




“왜 겁 먹어?”

“넌 왜 가까이 오는데…?”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혹시 밖에 있는 거 나재민이야?”

“…응.”




잠깐 뜸을 들인 후 답했다. 대답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고민한 모양이다. 본인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플러팅 해대면서 내가 다가가니 바짝 얼어붙은게 웃기다.




“우리 보고 있어?”

“그런 거 같은데.”

“여기서 뽀뽀하면,”

“거꾸로 매달리는 걸로 안 끝나.”

“영호가 모르면?”

“…진심이야?”




본인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되려 당황한 얼굴이 웃기다. 와이프 어쩌고 할 때나 애정을 갈구할 땐 언제고 눈이 흔들리는게 웃겨서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를 더 좁혔다. 성큼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자 내가 센티넬도 아닌데 도콩도콩 가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민형아.”




뒷걸음질 쳐봐야 그의 허리에 내 팔이 둘러져 있고, 더 나아갈 곳도 없게 벽에 등이 부딪혔다. 도와줄래? 하고 묻는 말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게 다 보였다. 불 꺼진 거실, 아무도 없는 집,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나재민. 이 얼마나 완벽한 무대야. 팔 하나를 풀고 마크의 어깨를 짚어 몸을 지탱했다. 뒷꿈치를 들어 가까이 다가가는 짧은 순간 내 눈과 입술을 훑는 눈에 긴장감이 서리고, 이내 질끈 감겼다.




“그대로 눈 감고 있어.”




코 끝이 닿을랑 말랑 스치고, 멈췄던 숨이 내 말과 동시에 옅게 터져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마크에게 몹쓸 짓을 하고 싶진 않아서 하는 척 고개만 비튼 상태다. 그의 긴장만큼 힘이 들어갔던 눈꺼풀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인상 쓰고 있는 건 그대로라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답지 않게 긴장한 마크를 보니 웃길 수 밖에. 조금 전까지도 플러팅이란 플러팅은 다 날리더니 쑥맥처럼 구는게 꽤 재미있다.


쿵. 굉음에 가까운 소리에 펄쩍 놀랄 뻔한 걸 마크가 잡아줬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볼까 봐 뒷통수를 감싸고, 등을 받친 손이 몸을 밀착 시켰다.




“돌아보지 마.”

“금방 무슨 소리야?”

“열 받았나 봐.”




열 받았다고 날만한 소리가 아니지 않나? 잠깐 그들이 센티넬이란 걸 망각하고 헛생각을 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쿵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고, 유리창을 열려는 건지 문고리가 몇 번이나 당겨지는 소리도 났다. 여기 남의 사유지라 부서지면 안 되는데, 같은 생각을 하기도 잠시. 마크가 나를 불러온다.




“쫓아낼까?”




거리를 벌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가라앉았다. 분위기에 취한 건지, 가이딩에 취한 건지. 뒷통수를 감싼 손이 내려와 뒷덜미를 주무른다. 그의 눈빛이 말에 내포한 뜻을 갈아끼운다. 얘 지금 진짜 하고싶은 모양인데?




“나무에 매달리고 싶어?”

“한 번쯤 해볼만한 경험이라고 생각해.”

“너 지금 헛소리하고 있는 거 알아?”

“그럴리가.”




영호가 왜 마크랑 붙어있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다. 얘 눈 맛 갔어. 반쯤 내리깔린 눈은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어졌다. 어…, 자칫하면 나도 분위기 타겠는데?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잠시 고요해졌던 바깥에서 뭔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집 안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바닷바람. 놀라서 마크를 안고 뒤를 돌아봤다. 이번엔 안 돌아 볼 수가 없었다. 우드득하고 뭔가 뜯겨 나가는 소리가 같이 났으니까.




“열 받게 하려던 거면 성공했어.”




현관문 앞 센서등이 켜졌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한 나재민, 그리고 유리창을 통째로 뜯어 잔디밭에 던져두는 이제노까지. 둘 다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진짜 기분 더럽네.”




머리를 쓸어넘긴 나재민이 기능을 상실한 철문을 벽면으로 치워내며 들어온다. 문제는 저 둘 뿐만 아니라 마크도 조금 화가 난 기색이다.




“진짜 기분 더러워야 하는게 누군데.”




내가 자초한 일이긴 한데…, 손수 무덤까지 파는 일인 줄은 몰랐지.





















💭 안녕하세요 여러분.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좀 더 일찍 가져와야지~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훨씬 안 써져서 이제야 가져오게 됐습니다ㅠ 다들 잘 지내셨나요?


💭 개인적으로 오늘 가장 눈여겨 볼 포인트라 생각하는 건, 런쥔이도 그렇고 빈즈가 점차 여주를 향한 마음을 뚜렷히 하고 있다는 것과 빈즈 속에 잘 섞여들기 시작하고 있는 여주입니다. 또, 언제나 여주를 아끼는 영호도ㅎ 또 사약길 걷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다들 알고도 걷는 길이니 나몰라라...👀


💭 마지막 부분을 몇 번이나 수정했는지 모르겠어요ㅋㅋ 좀처럼 마음에 들게 안 써져서 머리를 쥐어 뜯었답니다. 글 쓸 때 언제나 머리를 뜯는데, 참 다행이게도 아직 땜빵난 곳은 없네요.


💭 오늘은 더 할 말이 있어도 없어야 할 것 같으니 이만 가볼게요ㅋㅋ 최대한 글로 스토리를 전부 설명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편은 금방 가져올게요! 진짜루! 왜냐면 담주에도 연휴가 있으니까!! 너무조와!!!! 안녕!!!!!




━⊱༻ 아래는 16화 예고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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