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백장미, 붉은 장미, 흑장미, 황장미.

 

일렬로 서서 광장의 군중들을 바라보는 그 얼굴들 가운데 밝은 표정을 한 이는 없었다. 지난 인생이 겨루기였다는 것을 깨닫고도 심정적인 잔상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전히 승부를 짐작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이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장미는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군중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발치만 겨우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세 장미들이 결연한 눈빛으로 정면을 직시하는 것과는 대조됐다.

 

겨루기의 승자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정해진다. 각자 받은 장미의 수는 겨루기 내내 계속 공개되며 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것까지 마무리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혹시 모를 오차를 없애기 위해 재검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군중들의 열기가 잔뜩 달아올라있는 이유였다. 곧, 승자의 발표가 있을 테니까. 공명정대를 위해 장미의 수는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이내 재검까지 완료되었다는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많은 군중이 뜨겁게 환호했다. 심사관이 엄중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겨루기 규칙부터 차례대로 읊어내려갔다.

 

「1.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자가 이긴다.

2. 서로 사랑을 주지 않은 경우, 그와 상관없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자가 이긴다.

3. 서로 사랑을 나눈 경우, 조금이라도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자가 이긴다.

4.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은 자여도,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소유한 사랑이 그에게 귀속된다.

5. 부여된 기간이 종료되었을 때의 상태로 승부를 판가름한다.

6. 우승자가 백 년의 영예를 차지한다.」

 

세부 조항은 뺀 기본 규칙을 읊은 후, 황장미의 결과부터 발표했다.

 

「붉은 장미에게 준 황장미의 수 = 70만 송이

황장미에게 준 붉은 장미의 수 = 70만 송이

흑장미에게 준 황장미의 수 = 60만 송이

황장미에게 준 흑장미의 수 = 60만 송이

 

황장미는 장미를 덜 주거나 더 주지 않았으므로 황장미가 가진 장미의 소유권은 황장미에게 오롯이 부여됨. 따라서 황장미가 갖는 장미의 총계는 130만 송이.」

 

가장 먼저 나온 결과지를 보고 군중들은 제각기 와글거렸다. 황장미부터 까는 걸 보니 황장미가 제일 후순위인 것 같다, 그게 아니라 더도 덜도 안 줘서 판단이 제일 쉬워서 먼저 발표한 것이라는 둥이었다. 다른 장미에게서 장미를 더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소유권은 지켰다는 데서 황장미답게 겨루기를 치렀다는 평이 어쨌거나 가장 많았다.

 

결과를 확인한 황장미는 초연한 기색이었다. 욕심도 긴장감도 없어 보였다.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며 결과를 받아들이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화두는 백장미에게로 건너가 있었다. 겨루기에서 가장 많이 뿌려진 장미는 백장미였기에 백장미를 하나도 갖지 못한 황장미가 이길 거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백장미를 두고 겨루기 내내 붉은 장미와 흑장미가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양새였으니 결국 누가 백장미를 가졌는지에 대해 군중들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심사관이 이어 발표했다.

 

「붉은 장미에게 준 백장미의 수 = 90만 송이

백장미에게 준 붉은 장미의 수 = 80만 송이에서 한 송이가 모자람.

흑장미에게 준 백장미의 수 = 100만 송이

백장미에게 준 흑장미의 수 = 100만 송이에서 한 송이가 모자람.


인간들에게 받은 꽃을 장미로 환산하지 않아도, 장미들에게 받은 장미만 근 180만 송이로 백장미가 장미들 중 가장 많은 장미를 받음. 그러나 상대에게 받은 장미의 수보다 자신의 장미를 더 주었으므로 자기가 가진 장미에 대한 소유권이 다른 장미에게 귀속됨. 붉은 장미와 흑장미에게 장미를 더 주었으므로 둘 중 어느 장미에게 소유권이 발생하는지 따져보아야 함.」

 

군중들은 술렁였고 공주와 흑장미는 표정이 굳었다. 심사관은 침착하게 관련 규칙을 마저 읽었다.

 

「4-1. 한 장미의 소유권은 오로지 한 장미만이 갖는다.

4-2. 한 장미가 더 사랑해준 장미가 둘 이상이 될 때에, 다음 개수의 총합을 비교하여 더 많은 자가 소유권을 가져간다.

[1]그 장미에게서 받은 장미의 총 개수.

[2]그 장미에게서 더 많이 받아낸 차이만큼의 개수. 즉, 그 장미에게서 받은 장미의 총 개수에서 그 장미에게 자기가 준 장미의 개수를 뺀 값을 이른다.

이때, 그 장미보다 사랑을 더 많이 받아냈어도 그 장미의 소유권이 다른 장미에게 넘어간다면 자기가 받은 그 장미들도 소유권을 가져간 장미에게 귀속된다.」

 

규칙은 끝까지 일러졌으나 군중들은 더욱 웅성거렸다. 알지. 저 소유권 규칙 때문에 복잡했잖아. 몇몇들은 눈을 재차 비볐고 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허공에 있는 숫자들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백만 송이하고 한 송이 더인데…… 둘 다 그런 거 아니야? 흑장미는 백만 송이하고 한 송이 더인 거 맞는데 공주님 것도 그런 거 확실해? 왜, 맞지 90만 송이 받긴 했는데 상대한테 자기가 준 것보다 더 받은 것만큼을 또 더해야 되니까 백만 송이하고 하나 더잖아. 아니 그럼 공주님이고 흑장미고 둘 다 똑같이 받았는데 그럼 누가 백장미의 주인이야?

 

군중들뿐 아니라 심사관도 집행관들도 모두 당황하는 눈치였다. 재검에는 분명 오차가 없었다. 장미 겨루기는 공동 우승으로 처리한 전례도 없고 왕이 둘일 수도 없으므로 어떻게든 차이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겨루기를 두 번 한 전적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4-2항에 표기된 순서를 우선순위로 둔다면 흑장미가 받은 백장미 자체가 많으므로 우승해야 하지만 ‘무엇을 우선순위로 둔다’고 명시한 바는 없기에 쉽게 결정 내릴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석했을 때 유리한 쪽이 흑장미가 아니라 공주였다면 어떻게든 그게 우선순위가 맞다고 밀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정해야 할 심사관이나 집행관들조차 실상을 따지자면 붉은 장미들 편에 가까웠으니 일단은 결정을 보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더욱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어쨌든 공주가 흑장미보다 황장미를 10만 송이 더 받아냈다는 점이었다. 백장미의 소유권을 고려하지 않고 받은 장미의 숫자만 셈한다면 흑장미보다 10만 송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군중들도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못하고 술렁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총계로 따지자니 공주가 이겨야 맞고, 그러나 백장미의 소유권을 따져 나누지 않은 것으로 총계를 한 것은 의미가 없다. 백장미의 소유권만 갖는다면 상대가 가진 백장미 80만 송이고 100만 송이고 덤으로 보태질 뿐만 아니라, 백장미가 가진 장미까지 얻게 되므로 그야말로 우승으로 직행하게 된다.

 

아무리 왈가왈부해도 한 장미의 소유권은 정해져야 했다. 그리고 장미다운 것으로 우선순위를 정하자면 그 장미에게서 받은 장미의 수를 더 중요하게 쳐주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렇다면 역시 흑장미가…… 하고 군중들의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는 그때, 누군가가 무어라 외치며 백장미를 가리켰다. 외친 장미를 기점으로 군중들의 이목이 백장미를 향했고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뜻밖에 지목당한 백장미가 당황했는지 더욱 굳는다. 군중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듯 무어라 똑같은 듯 잘 들리지 않는 말들을 말하고 전했고 결국은 그 말이 당사자인 백장미에게까지 전해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품에 장미가 있어요!”

 

장미? 무슨…… 의아해진 백장미가 살펴보듯 팔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런데 군중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겨드랑이 근처에서 무언가 드레스를 스쳐 굴러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발칵 뒤집히는 듯한 군중의 놀라는 소리가 파도처럼 크게 일렁였다. 백장미는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발견하고서 넋이 나간 것처럼 입술이 떨어졌다.

 

희고 흰 장미 한 송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백장미의 품에 남아있던 백장미였으니 주인을 가려야 했다. 백장미 단 한 송이의 차이만으로 왕이 결정될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유례없는 극적인 상황에 모든 장미들이 손을 모아 쥐거나 크게 흥분하며 오로지 백장미만을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 없는 백장미의 귀에 제니, 작게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마주친 건 흑장미였다. 거의 다 왔다고, 우리 정말 고생했지 않냐고, 앞으로 함께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흑장미의 눈동자는 백장미의 순간을 멎게 했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잠기는 것처럼. 그러나 눈을 깜빡여 무심코 저를 보는 다른 눈을 보면, 그 찰나에는 숨이 멎는다.

 

그 장미가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는 준엄한 눈동자.

 

냉정한 불 같은 그 눈을 목도한 순간, 세 장미들의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졌다. 백장미가 선택을 할 때 휘둘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눈을 가린 것이었다. 눈을 다 가린 세 장미들은 인간이었을 때 백장미가 꿈에서 보던 광경들을 떠올리게 했다. 심사관이 정숙할 것을 고하자 군중들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 많은 장미들 중 백장미를 방해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그렇기에 모두가 백장미를 무자비하게 떠밀고 있었다. 백장미에게 꽂히는 온 장미의 눈총이 백장미를 패닉에 빠지게 내버려둔다. 백장미는 주저앉아 겨우 저의 장미를 쥐어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무슨 장미인지 제대로 알아보았다.

 

왜 하필이면 이 장미일까!

 

백장미를 쥔 가냘픈 손이 심하게 떨렸다. 덜덜거리는 그 손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그 백장미의 주인에게 장미를 바치시오.”

 

심사관의 엄중한 목소리는 귓전에서 반복해서 울렸다.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그 백장미의 주인’에게 바칠 것을 명하는 그 말이. 물론 장미야 사랑의 상징이고, 사랑하는 이가 장미의 주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통용되는 것에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백장미는 의도한 적도 없는데 품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장미며, 경고하듯 이르는 심사관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절대로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장미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피워냈던 구애의 장미.

 

공주님께 바쳤던 저의 첫 장미.

 

어두컴컴한 정원에서 달빛 아래 피어나 저를 쩔쩔매게 했던 그 장미가, 이번에는 수많은 눈이 보는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백장미는 저의 장미가 야속했으며 이해도 되지 않았다. 까닭이라도 알고 싶어서 물기 없이 창백한 흰 꽃잎을 보고 있다 보면 불현듯, 나의 장미가 되어줄래? 묻는 공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 장미가 되어준 네게 나 역시 사랑을 약속해. 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약속을 해주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지했던 처사였다고 해도 이미 한참 전에 이뤄지고 만 일이었다. 뒤늦은 깨달음 앞에서 백장미는 넋이 갈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공주가 직접 심어놓은 징표가 이렇게, 그 약속을 증명해 보이라는 듯 나타났으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니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자기 손으로 두 장미의 생사를 가를 수 없었다. 제 손으로 연인을 꺾을 수도 없었으며 한때 열망했고 지금도 존경하는 공주 역시 감히 꺾을 수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한대도 백장미에게는 생지옥같은 불행이었다. 아아, 나는 왜 겨루기에서 단 한 순간조차 내 연인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단 한 송이의 장미라도 내 연인에게 더 주었다면! 아니, 누구에게 더 주었든 겨루기만으로 결판이 나도록 했다면! 피눈물이라도 흘러야 할 심정이었다.

 

‘장미의 주인’에게 장미를 바치라고 하였으니 수순은 정해져 있었다. 명대로 공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건 저의 연인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버리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저를 대신 죽여달라고 빌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역을 치렀고, 왕의 자리 하나만을 얼마나 갈망해왔는지 잘 알고 있는데. 저 하나만을 믿고 전부를 다해 사랑할 이를 절대 배신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이 순간조차 당연히 자기가 선택받을 것이라 믿고 있을 테고, 승리 이후만을 상상하며 설레고 있을 저의 연인에게 잔인하리만치 불행한 비수를 꽂아야 한다니.

 

그러나 마음대로 저의 연인에게 장미를 바칠 수도 없었다. 가슴 속 깊은 절망으로까지 사랑하는 이이지만, 저의 장미를 평생 넘치도록 안겨줄 수 있는 이이지만 이 장미의 주인은 그이가 아니니까. 거짓된 장미에서 비롯된 왕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또다시 피바람이 불 것이고, 핏빛으로 지는 꽃잎들로 점철되는 끔찍한 백 년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의 연인은 왕으로 즉위하기도 전에 정당성을 잃었다며 끌어내려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이기적인 저의 행동 하나 때문에 백장미 가문까지 몰락할 것이다. 장미 나라에서 순결의 상징인 백장미를 지워버리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마침내 백장미는 탄복했다.

 

그 아이는 원래부터 네 선택에 달린 운명이란다.

 

아! 어머니의 말씀은 그런 뜻이었어요. 어머니는 정말로 다 알고 계셨군요. 이미 다 알려주셨는데도 천치처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저였어요. 백장미는 이제야 사무치도록 그 예언의 뜻을 깨달았으나 가장 무자비한 선택만을 앞둔 채였다. 처음 본 절벽에서 그대로 밀어냈어야 했을까, 공주님만을 사랑했어야 했을까, 외롭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을까. 분명 후회하는 지난날은 없는데 결국 맞닥뜨리게 된 건 극단적인 절망이었다.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죽음과 같은 치명상을 반드시 안겨주어야만 하게 되었다.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선택의 가장 예리한 끝날이 기어이 백장미를 겨누었다.

 

백장미는 지금도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눈물 한줄기가 백장미의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찬가지로 파리할 만큼 흰 장미를 손에 꼭 쥐었다.

 

일어서 눈앞의 세 장미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입술을 애타게 바라보는 백장미의 눈은 점점 공허해져갔다. 한발한발 앞으로 내딛는 백장미의 걸음에 수많은 눈총이 뒤따른다. 걷는 걸음마다 드레스가 스치는 소리도 일지 않아 숨 조이는 정적이었다.

 

마침내 백장미는 천천히 무릎 꿇었다.

 

희고 흰 장미를 순종하듯 주인의 발치에 가만히 바쳤다. 공손히 조아리는 긴 머리칼에 백장미의 메마른 얼굴이 가려진다.

 

결정적인 광경 앞에 군중들의 숨이 멎은 것은 아주 잠시였다. 이때껏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한 환호 소리에 눈이 가려져 있던 장미들이 움찔 놀란다. 정확히는, 아직 눈이 가려져 있는 두 장미가 놀란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눈에 매인 천을 풀어내리면, 발치에 놓인 백장미를 집어드는 공주를 목격할 수 있었다.

 

왕관을 대신하여 장미의 잎으로 엮은 임시관이 공주의 머리 위로 올려지고 있었다. 미소 하나 띄우지 않은 채 손에 든 백장미의 향기를 코끝으로 맡아보는 공주의 옆얼굴을, 얼이 빠진 채 바라보는 것은 흑장미였다. 공주와, 공주 앞에 자그맣게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저의 연인을 번갈아 쳐다본다. 군중들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도저히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것처럼. 심한 떨림은 흑장미의 입술을 거쳐 곧이어 몸 전체로 이어졌다.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너울쳤다.

 

흑장미는 백장미에게 비척비척 다가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집행관들에게 가로막힌다. 이미 흑장미의 눈에는 절대 얼굴을 들어주지 않는 백장미밖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간절하게 백장미만을 불렀다. 제니야, 너는 내 장미잖아, 네가 사랑하는 건 나잖아, 네가 이럴 리가 없잖아……. 그러나 백장미는 응답이 없었고 몇몇 군중들은 흑장미에게 야유했다. 오로지 황장미만이 애처로운 흑장미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리며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동정했다.

 

가로막혀 멍하니 멈춰선 흑장미의 눈에는 점점 더 타오르는 증오가 깃들었다. 그건 백장미가 아니라 공주를 향한 격분이었다. 심상치 않아진다 싶긴 했지만 흑장미가 허공에서 검을 뽑아들어 저를 가로막는 집행관들을 베어내고 공주에게 뛰어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상대였다.

 

괴물처럼 거대한 장미덩굴이 흑장미를 옭아매는 것이 더 빨랐다. 그 굵고 무거운 덩굴들이 검을 꺾어내고 흑장미를 묶고 감아 바닥으로 처박는다. 공주의 진노 앞에 자비는 없었다. 가시에 베이고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 드는 흑장미를 기어이 억지로 무릎 꿇린다. 분노로 터질 듯 시뻘게진 흑장미의 눈만이 공주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장미의 방식을 지키지 않은 비겁한 자! 패배가 두려워 술수를 썼느냐!”

 

피를 토하는 듯한 흑장미의 일갈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공주가 마음만 먹으면 즉결처분도 가능했지만, 좋은 날 좋지 않은 말이 나오게 될까 봐 서둘러 떼로 몰려든 집행관들이 흑장미의 입을 막고 눈을 가려 칭칭 결박한 채 끌고 갔다. 군중들은 잠시 술렁였지만 어쨌거나 흑장미가 사라지자 다시 환호하고 드높이 칭송하였다.

 

흑장미가 끌려간 자취만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은 남겨진 백장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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