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창은 소장용입니다.



 

-본편과 관계없는 스핀오프 회차 입니다.



어느덧 4월의 넷째 주였다. 제노는 물끄러미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23일' 그 숫자만 바라보다가 덤덤히 고개를 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벌써 중간고사라니, 시간 참 빠르다. 단지 그 생각 뿐이었다. 며칠 전 시험공부 때문에 두 눈에 다크서클을 가득 단 황인준이 좀비처럼 걸어가 시험 끝나는 날이라며 빨간 색연필을 가져다가 동그라미를 크게 쳤었지. 4월 23일, 분명히 법적인 제 생일이 맞는데도 이제노는 무감각했다. 제노는 딱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안경과 거실 테이블에 늘어져 자고 있는 동혁의 뺨 아래 깔린 제 필기 노트를 빼갔다.



4월 23일, 지금까지 이제노에게 그 날은 정말 그저 그런, 정말 평범한 날에 불과했다.




즐거운 나의 집

; Happy birthday Jeno!





4/23, 5월의 어느 날- 갓난아기였던 이제노가 보육원 앞에 버려졌을 때 아기 포대기에 숨겨져 있던 작은 쪽지에 적힌 숫자였다.


딱 거기까지가 이제노의 친모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지만 생일만큼은 알려주고 싶었던걸까. 이제노는 그 사실조차도 조금 회의감이 느껴져 모두가 당연하게 여겨온 0423이라는 숫자에 대해 정을 주지 않았다. 혹시 모르잖아, 그냥 낙서를 적어서 버려둔 쪽지에 괜한 의미부여를 한걸지도. 

어린 아이가 제 생일을 외면할 수 있던 것은 환경 덕분이 컸다. 보육원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의 생일을 다 챙겨줄 수 없어 4월 1일에 4월 생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몰아서 했고, 그게 당연했다.

보육원을 나와서 처음 그 집에 들어가게 됐을 때는 그와는 조금 달랐다.

새어머니는 부러 따뜻한 목소리를 내며 제노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집에서는 오늘이 제노 생일이야. 우리 집에 온 첫날, 7월 10일이 제노의 생일인 거야."

"제노의 새로운 삶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엄마랑 아빠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노는 어떠니?"



저들끼리 이미 그렇게 정했고, 저를 응원하는 좋은 의미에서라는데, 이제노는 딱히 뭐라 더 남길 말도 없어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도 부부는 그 해 7월 10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상을 차려줬고, 두둑이 용돈도 줬었다. 이제노로선 처음이었을 온전한 저를 위한 생일 파티였다. 제노는 그래서 7월 10일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생일을 묻는다면 4월 23일이 아니라 7월 10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마저도 몇 개월 뒤 내막을 알게 되어 그만뒀지만.



[이제호 XX. 07. 10 ~ XX. 11. 19]



정말 징글맞기도 했다. 그들은 정말 이제노가 죽은 아들의 대신이었다는 걸 온 사방에 티 내려는지, 입양 일자까지 그 애의 생일에 맞춘 다음, 처음 이 집에 온 날이 생일이다, 뭐다 괜히 저를 위한다는 것처럼 행동을 했던 거였다. 이제노는 그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그 따스한 축하와 미역국, 진심이 가득 담긴 선물은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 이제노는 그냥 인형마냥 그 대신이 되었던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아니라 남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네."



그 생각에 제노는 매년 7월 제 생일 파티랍시고 친구들을 데려오라는 제 양부모님의 말에 고개를 저었더랬다.



-


 

생일 ; 세상에 태어난 날



그러니까, 이제노에게 생일은 딱 그 정도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날.

이유는 간단했다. 제 탄생을 축하할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기도 했고, 그리 축하받을 탄생도 아니었으니까. 

그게 이제노가 제 생일에 무감각하게 된 이유의 다 였다.



-



4월 23일, 모두가 기다리던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제노는 평범하게 필기 노트를 주르륵 읽어내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영어랑 한국사 두 과목이었지.

누나는 시험 보는 날엔 콩나물국을 끓여줬다. 그냥, 본인이 느끼기에 이게 가장 속이 편하다나. 3일 간의 시험 일정 동안 아침으로 내내 콩나물국만 먹어와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밥을 만 맑은 콩나물국에 속이 편안했다. 정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평소에 공부에 별 관심 없던 이동혁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밤을 새웠는지 퀭한 눈으로 밍기적거리며 걸어 나왔고, 밤새 정리한 게 분명한 영단어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양치까지 기분 좋게 마친 뒤에, 막 일어서려는 현관 바로 앞에서 누나는 늘 그랬듯이 냉장고에서 동그란 초콜릿을 서너개 담아둔 봉투를 꺼내 하나씩 내밀었다. 



"오늘은 뭐 든 거야?"

"라즈베리 잼."



누나는 시험 볼 때는 꼭 직접 만든 봉봉 초콜릿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시험 보면서 하나씩 까먹으라면서, 속에 든 필링도 맨날 달랐다. 첫날은 피스타치오, 둘째날은 모카, 셋째날인 오늘은 라즈베리잼. 누나의 그 작은 관심은 어느새 네 아이들에겐 기쁨이 되었더랬다.



"시험 잘 보고 와."

"누나 성적표 볼 거야…?"

"그럼 안 보니?"

"치이…."



돌아서는 와중에도 처연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묻는 동혁에도 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누나는 당연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되는대로 봐. 너 성적 어차피 기대 안 해."

"그건 그거대로 조금 서러운데."

"우리는 예체능이니까 괜찮아."



인준이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준의 손 위에는 한국사 책이 올라 앉아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산 짬바가 있는 자신들과 다르게 아예 타국의 역사를 처음부터 배우는 인준은 한국사에 쥐약이었다.



"난 진짜 삼국시대가 제일 헷갈려, 신라가 어쩌다가 제일 처음으로 건국했지? 고구려 아닌가?"

"인준아, 어쩌다라니 역사적 사실이 그런데…."

"헐, 뭐야. 고구려가 제일 먼저 건국한 거 아니야? 고백신 아니었어?"

"신라가 제일 먼저했대. 기원전 57년, 고구려는 37년."

"아, 그게 학자들 의견은 갈리는데, 우선 시험이나 교과서에서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해서…."



교과서 하나를 보고 뺑 둘러싼 넷을 보고, 누나는 작게 웃더니 곧 손을 흔들며 외쳤다.



"시험 잘 보고."

"응-"

"아, 끝나면 니네끼리 좀 놀다 와. 시험 끝났잖아. 계좌에 용돈 넣어놨어."

"엥, 우린 빨리 달려와서 누나랑 놀 생각이었는뎅!"

"나 바쁘거든? 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잔말 말고 늦게 들어와."



-



"야, 이제노 너 시험 잘 봤냐?"

"음, 글쎄. 우선 모르는 문제는 없었는데."

"아, 누가 수석 아니랄까 봐. 재수 없어."

"너 제노 공부하는 거 보면 그런 말 못해, 책에서 눈을 안 떼."



제노는 재민의 말에 멋쩍게 눈웃음을 지었다.



"이제노! 그 한국사 서술형 마지막 문제 답이 뭐야?"

"아, 그거 발해의…."

"아아아! 됐어, 시험 끝났으니까 시험 얘기하지 마! 지금 우리 뭐할지나 고민해!"



시험지를 주섬주섬 가방에서 꺼내 제노에게 다가서는 인준의 목덜미를 잡아챈 동혁이 인상을 팍 쓰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AK몰에 햄버거 가게 생겼던데."

"롯데리아?"

"아, 롯데리아 취급 안 해요- 난 버거킹이 좋아."

"왜, 난 롯데리아 새우버거 좋아해."

"야, 그거 새우버거 아니야. 명태버거야. 새우는 향만 입히고 명태살 들어간댔어."

"어, 정말…?"

"응, 새우 알러지 있는 사람이 먹어도 알러지 안 올라온대."

"그거 아냐, 이젠 진짜 새우 넣는대. 이제 그러면 죽어."



이젠 익숙한 의식의 흐름에 맡긴 대화에, 재민은 태연히 말을 바로 잡았다.



"롯데리아 아니고 수제버거, 우리 반 애가 진짜 맛있다고 가보라던데."

"아, 맞아. 아보카도 버거가 진짜랬어."

"그럼 거기 가서 밥 먹고 쇼핑이나 하고 들어갈까? 나 옷 사야 하는데."

"아, 나는 신발 봐둔 거 있어."

"나도 살 거 있어, 문구점 들러야 해."

"나도, 서점 가야 하는데."

"그럼 살 거 다 사고 노래방도 들리고 피씨방도 가자! 와, 짱 재밌겠다!"



곧바로 착착 정해진 일정에 제노는 느긋하게 눈만 껌벅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



제노와 재민의 반 친구가 계속 말했던 아보카도 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가게 주인의 헤드 쉐프 10년 경력이 담겨있다던 소스에 동혁과 인준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야, 이거 진짜다."

"와, 존맛…. 난 이걸 먹기 위해 한국에 왔을지도 몰라."

"진짜 맛있긴한데, 나는 진짜 수제버거는 어떻게 먹어야할지 모르겠어."



재민은 빵, 야채, 패티가 모두 분리된 제 그릇을 보고 떨떠름하게 말했다.



"야 수제버거가 다 그렇지 뭐, 근데 진짜 맛있다."



계속 우걱우걱 버거를 입으로 욱여넣으며 콜라를 쭉쭉 빠는 제 친구들을 멀뚱히 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제노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너 왜 웃어? 우리가 웃겨?"

"그럼 이게 안 웃기니? 확실히 먹는 게 좀 추하긴 했지."



인준은 그제야 냅킨 몇장을 빼 들고 소스가 잔뜩 묻은 제 입가를 얌전히 톡톡 두들겼다.



"그런 거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계속 주춤하던 제노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사실 나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 처음이거든, 그냥 새삼…."

"……."

"……."



잠시 흐른 정적 속에 인준이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덩달아 말을 내뱉었다.



"그건 나도, 내가 무슨 친구가 있었어야지…."

"우리 무슨 다들 사연이 이렇게 기구하냐…."

"지금 우리가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앞으로 하나 하나 같이 하면 되니까 괜찮아."

"그래, 그래! 이제노랑 황인준 뭐 해보고 싶은 건 더 없어?"

"음, 놀이공원?"

"여름에 바다도 가고 싶다."

"콜! 우리 기말고사 끝나면 놀이공원 가자, 방학엔 바다도 가고. 응?"



동혁과 재민이 인준과 제노의 등을 얼렀다. 



"좋아, 배신하면 죽음 뿐이야."



조금 무거워진 듯한 분위기에 인준이 괜히 장난스레 대꾸했다.



-



"야 이제노, 뭐가 더 나아?"



옷을 산다길래 분명 자주 가던 스포츠 용품 매장에 갈 줄 알았더니 동혁이 멈춰선 곳은 어느 편집샵의 가디건 두 개가 걸린 곳이었다. 

이동혁이 웬일로 가디건이래, 잘 입지도 않으면서. 맨날 후드티에 맨투맨만 걸치고 다니더니 다른 옷이 갖고 싶었나. 그저 그런 생각만 하던 제노는 갑자기 물어온 동혁의 질문에 가디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같은 디자인이긴 했지만 색깔이 달랐다. 연갈색과 붉은색, 이동혁은 계속 고민하다가 급기야는 이제노에게 슬쩍 대보기까지 했다.



"너 얼굴에는 빨간 색이 더 잘 받을 것 같은데."



제노가 고심 끝에 건넨 말 한마디에 동혁은 활짝 웃는 낯으로 갈색 가디건을 집어 들었다.



"그거 사게?"

"응."

"그럼 왜 물어봤어…?"

"너 의견 반대로 하려고."



유유히 갈색 가디건을 들고 계산대로 간 이동혁은 야무지게 결제까지 바로 하고선 멀뚱히 서 있는 제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뭐해 가자."



-



"제노야, 뭐가 더 예뻐?"



이번에는 재민이었다. 재민은 검은색과 파란색 스니커즈를 번갈아 보며 깊은 고민에 잠긴 듯 했다.



"으음, 글쎄. 나는 신발 잘 몰라서, 그냥 아무거나 사."

"그래도, 너 눈에 더 예뻐 보이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재민은 눈을 반짝이며 신발 두켤레를 들고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제노는 퍽 난감했지만, 또 성심성의껏 신발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이 제일 무난하고 낫지 않아? 파란색도 예쁜데, 옷이랑 같이 보면 튈까 봐. 근데 너 검은색 비슷한 신발 있지 않아? 그럼 파란색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너라면 검은색 산다는 거지?"

"응, 근데 너는…."

"검은색 살래."



재민은 제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검은 쪽을 들었다.

엥?



"좋은 의견이었어, 고마워, 제노야."



씨익 웃으며 계산대로 향하는 재민의 뒤통수를 멀뚱히 보기만 하다가, 제노는 그냥 피식 웃어보였다.



"아니, 진짜 다들 이럴 거면 왜 묻는 거야-."





덤덤히 아이스크림을 퍼 먹던 재민이 갑자기 뽀르르 휴대폰을 확인하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 가봐야겠다."

"왜?"

"단체가 무더기로 들어왔대. 최대한 빨리 오라네."



늘 제멋대로 문을 열고, 문을 닫고 유유자적하게 쉬던 누나는 근래 나재민 때문에 바빠진 카페 일이 적응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늘 눈을 반쯤 내리깔고, 앞니가 살짝 보일 정도로 입을 열고 한숨만 폭폭 내쉬었지.



"헐, 어떡해. 우리도 가서 좀 도울까?"

"됐어, 너희가 뭐하게-. 나 혼자면 돼. 너희끼리 놀다 와, 나 먼저 간다."

"어어…."



재밌게 놀다 와, 재민이 일어나는 중에 한손으로 제노의 뒷머리를 쓸고 지나쳤다. 제노는 돌아서는 재민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살 게 포장지야?"

"응, 그림을 좀 선물 할까 하고. 그림만 덜렁 주긴 좀 그렇잖아."

"오오, 누구?"

"뭐, 그냥 아는 사람?"



조금 껄끄러워 보이는 인준의 표정을 보고 제노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이거 어때? 리본 금색으로 묶으면 예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이거 두 개로 할까-."



인준은 제노의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제노가 건넸던 검은색 종이 포장지와 금색 리본을 쥐었다.



-



"아, 어쩌지. 얘들아, 미안. 나 지금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어, 어디를?"

"태용형이 부단장님 왔다고 빨리 오라는데…."

"아, 그 태국에서 왔다던? 어쩔 수 없지…."

"미안, 집에서 봐! 저녁 먹기 전까지는 갈게!"



동혁이 급하게 가방과 겉옷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서점 간다고 하지 않았어? 들렀다가 그냥 집에 갈까?"

"응, 우리 둘이 가서 뭐해."



제노가 인준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인준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을 보고 작게 미간을 찡그린 인준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아 실장님. 네, 지금요? 지금은 좀 그런데…. 아, 네 알겠어요."



제노를 슬쩍 보고 전화를 끊은 인준이 대뜸 제노의 한쪽 팔을 붙들고 말을 이었다.



"제노야, 미안해서 어쩌지. 나 재단 사무실 좀 들렀다가 가봐야될 것 같은데."

"왜?"

"여름에 재단 주최 전시회에 그림을 내놓기로 했거든, 그거 땜에 할 얘기가 좀 있나 봐."

"아아,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빨리 가봐."

"제노야, 미안해. 서점 들렀다가 먼저 집 가! 집에서 봐!"



어쩔 수 없지 뭐. 인준이 손 흔들며 멀리 사라지는 걸 가만히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맨날 같이 있다가 혼자 있으려니 좀 허전하네, 어느덧 휑해진 제 옆을 슬쩍 둘러본 제노가 가방을 고쳐 매고 발걸음을 옮겼다.



-



보고 싶던 소설이 서점 바로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이제노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꽤 좋아했다. 처음 히가시노 게이고를 알게 된 건 중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주웠던 책 한 권이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 책 한 권에 이제노는 꽤 위로를 받았더랬다. 물론, 이 작가의 책이 모두 처음 봤던 그 책과 비슷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아, 찾았다."



가득 쌓인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곧바로 계산대로 갔다.



"계산 도와드릴까요?"

"네."

"고객번호 있으세요?"

"네, 여기 번호 누르면 될까요?"

"네, 공일공부터 차례로 입력해주세요."



덤덤하게 키패드에 제 전화번호를 한 자 한 자 눌렀다.



"아, 이제노 고객님 맞으세요?"

"네? 네에."

"아, 생일이시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생일? 오늘이 내 생일이던가?


갑작스러운 점원의 축하인사에 제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슥 바라본 휴대폰 화면 속 4월 23일, 날짜가 콕 박혀 있었다.


아, 오늘 내 생일이었구나.



"저희 생일 축하 다이어리 한부 같이 챙겨드릴게요."



이제노는 그제야 알았다. 아, 벌써 내 생일이구나. 책과 함께 봉투에 든 남색 양장본의 다이어리를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



뭐야, 왜 가게에 불이 꺼져 있지? 아까 분명 바쁘다고 했으면서, 가게는 온통 깜깜하고 인기척조차 없어 조용하고 고요했다.



"누나, 누나! 재민아, 어딨어?"



굳게 닫힌 가게 문 앞에 close 명패가 달려 있었다.



"뭐야, 단체 많댔는데…."



그저 작은 의문을 가진 채로 제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의 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이리 조용해, 원래였으면 멍멍이가 마당 안을 샅샅이 누비며 뽈뽈댔어야하는데.



"집에 있나…?"



터벅터벅, 느리게 계단 위로 올라섰다. 굳게 닫힌 현관문의 도어락을 열자마자,



펑!



"……!"



요란한 폭죽소리가 났다. 알록달록한 종이조각이 천천히 내려오는 가운데, 불을 켜지 않아 햇빛만이 창문 사이를 살짝 내리쬐고 있었다. 제노는 그저 놀란 듯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제노, 생일 축하합니다!"



익숙한 노랫소리 사이로, 17, 숫자초가 꽂힌 커다란 케이크 위에 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Happy Birthday Jeno!"



제노가 멈칫하며 바라만 보고 있자, 아이들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야 뭐해, 숫자초는 빨리 녹는단 말이야."

"빨리 소원 빌고 초 불어."



다들 바쁘다고 먼저 가버릴 땐 언제고 자기만 모르게 모여서는 꼬깔모자까지 쓰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노는 짧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모았다. 짧게 중얼거리고는 곧 후우, 초를 불었다.



"생일 축하해, 제노야."



-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우리가 니 가족인데. 너 생일도 모르겠냐?"



제노는 그저 민망한 마음에 멋쩍은 눈웃음만 지었다.



"아아, 생일 선물 줘야지. 자!"



동혁이가 샀던 갈색 가디건, 재민이가 샀던 까만 스니커즈,모두 제노의 것이었다. 아, 내거라서 다들 물어봤던거구나. 제노는 괜히 머쓱해져 동혁과 재민을 올려다 보았다.



"이거 다 내 꺼 였구나."

"와, 나 너가 눈치챌까봐 얼마나 조바심 냈는지 아냐."

"한치의 의심도 없이 서운해만 하던데."



다음엔 당연한 듯 검은 포장지와 금색 리본으로 둘린 인준의 선물이었다. 뜯기 아까울 만큼 고운 포장 안에는 마치 사진처럼 그려진 제노의 초상화가 있었다. 



"와, 너 진짜 천재 맞긴 하구나."

"그럼, 내가 괜히 재벌한테 후원 받겠냐?"

"와, 이거 이제노 방에 걸면 완전 나르시시즘 대박이겠다."

"괜찮아, 제노는 잘생겼으니까."

"이제노, 지금은 그냥 작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 한 점이지만 먼 훗날에 내가 잘나가는 화백이 되면 몇천만원에 팔릴 거야."

"와, 무슨 재테크네. 고마워, 인준아."



제노의 말에 인준이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 내 선물은 방에 갔다놨어."

"방에?"



누나의 말에 모두 쪼르르 제노의 방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제노의 방, 책상 위로 위풍당당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커다란 모니터와 본체가 올라와 있었다. 피씨방에서 쓰는 것처럼 키보드에선 알록달록한 빛도 났다.



"헐!!"

"헤드셋은 주문을 했는데 아직 안 왔어. 좀만 기다려."

"와, 누나, 나도 컴퓨터…!!"

"저건 제노꺼야, 쓰려면 허락 맡아."



-



"아, 근데 너 아까 기도까지 했잖아. 소원 뭐 빌었어?"

"소원?"

"응, 소원 빌었던 거 아니야?"



제노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그냥 피식, 웃음을 내뱉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뭐!"

"별 거 아니야, 비밀."



에이, 치사해! 한껏 격양된 목소리가 온 사방을 울렸다. 제노는 그냥 계속 웃는 낯으로 물을 들이킬 뿐이었다.




'앞으로도 모두 다 같이 함께였으면 좋겠어요.'




생일 축하해, 제노야.

늘 행복만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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