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휘야...대휘야...

저를 부르던 민현의 목소리가 꿈같았다.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소중하게 안아주던 민현. 분명 민현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대휘는 민현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익숙한 제 방, 침대 위였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 듯 욱씬거려 고개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없다. 민현은.

 

학원 옥상에서 김태호한테 맞은 것도 우진과 민현이 와준 것도 다 꿈 인건가...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대휘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났다. 꿈 꾼 것만으로 이렇게 아플 일인가. 그러나 손을 들어본 대휘는 여기저기 멍든 팔을 보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저절로 억 소리가 나면서 힘들게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려놓으니 다리 여기저기도 멍투성인데, 거울을 보니 한쪽 눈은 멍들고, 입술은 깨지고 얼굴은 부은 채였다. 시간도 모르겠고 우진도 보이지 않았다.

 

에구구구 소리를 내며 방밖으로 나가보니 어디선가 민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아직도 잠에서 깨지않았나 싶은데 아래층 가까이 갈수록 목소리는 선명했다. 민현이 맞았다. 내려가려던 대휘는 우뚝 멈춰섰다. 민현이 아버지, 새엄마와 마주 하고 있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선생님께서 대휘 옆에 있으면 대휘도 우리도 곤란해진다고.”

“저 대휘 많이 좋아합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까울정도로 행복하고 살아있다는 게 고마울 정도로요. 대휘는...과거의 얽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저를 살아갈 수 있게 힘을 준 사람이 대휘입니다. 대휘를 만나고서야 대휘와 함께 할 내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휘의 할머니 임종을 지킬 때 말씀해주셨어요. 대휘는 어릴 때부터 많이 힘들고 외로움도 많이 타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고. 어른들이 잘못한 걸 대휘가 짊어지고 있어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자랐다고. 울 때도 남들 볼 땐 절대 안 운다고. 저, 어르신하고도 약속했습니다. 대휘, 절대 혼자 울게 하지 않겠다고. 대휘가 저에게 준 기쁨만큼 저도 대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허락을 안 하면 몰래라도 만날 생각이었소?”

“대휘는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대휘에게 아버지를 잃는 같은 슬픔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제가 진심이었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대휘...많이 관심갖고 보살펴주세요. 대휘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아이입니다. 저도 대휘도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잠시 동안 거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계단참에 서서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민현의 이야기를 듣던 대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남들이 있는 곳에서는 잘 울지 않는데 이번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애기처럼 엄마 아빠한테 조르면 안되는데, 조른다고 될 일도 아닌데, 조를 수 있는 관계도, 조를 만큼 가까운 아닌데 대휘는 자꾸 눈물이 났다.

 

“아빠, 엄마...제발...한번만 허락해주세요.”

“대휘야...”

 

조금 전까지 에구구구 하며 걷는 것도 힘들었던 몸이 거짓말처럼 아픈 줄도 모르고 대휘는 아버지와 새엄마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저를 키워준 외할머니 앞에서도 떼써본 적 없는 저인데 한 번도 아버지나 새엄마에게 이런 말을 할 줄 대휘 저도 몰랐다. 제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어른스럽고 야무지게 제 몫을 해내던 열 여덟 살이 아니라 사탕을 처음 맛본 네 살 어린애가 떼를 쓰듯.

 

“그냥 쌤이랑 만나면 안돼요? 저...정말 쌤 좋아해요. 우리 정말 잘 할게요.”

 

눈물이 멈추지 않아 대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엉엉 울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휘의 우는 모습에 아버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당장이라도 대휘를 붙들고 울 것만 같았다. 마치 18년의 시간을 거슬러 갓 태어난 애기 대휘를 보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는 순간 엄마를 잃고 할머니 손에 크면서 잘 울지도 않았다는 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는 뜻 일 게다. 아이가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축복이 아닌 슬픔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 말을 못하고 갖고 싶어도 갖고 싶다 말 못하고 살아왔을 대휘의 지난 시간들이 지금 대휘의 우는 모습으로 다 느껴졌다. 떼를 쓰는 대휘와 자책하는 표정으로 굳어버린 아버지를 번갈아보다 민현이 손수건을 꺼내 대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행인지 민현이 대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까지는 아버지는 아무 말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민현도 처음 보는 대휘의 모습이었지만 소리 내어 우는 대휘의 모습에 제 마음까지 후련해지는 것 같아 울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치 그동안 울지 못했던 저를 대신해서 대휘가 울어주는 것 같았다.

 

 

울다 지쳐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든 대휘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대휘의 동그란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올려 쓰다듬었다.

 

“여기 있었어요?”

 

우진의 엄마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휘가 깰까 봐 아버지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대휘 방에 들어와 보는 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대휘를 바라보는 것도, 대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는 것도 처음이야. 나한테 대휘는...친아들인데도 우진이보다 어려웠거든. 그런데...아까 대휘가 우는데...이상하게 비로소 내 아들 같았어. 지딴엔 아빠엄마라고 울며 떼쓰는 거겠지.”

 

늘 목소리가 크고 씩씩한데다 남자답게 유쾌한 우진은 새아버지가 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싹싹하게 아버지라 부르며 친아들인 대휘보다도 저와 더 가까웠다.

 

“나, 대휘엄마 두고 떠날 때 그 사람, 우리 아버지한테 울면서 매달렸거든. 그냥 우리 사랑하면 안되냐고. 진짜 사랑한다고. 정말 잘 살겠다고. 우리 아버지 고집 대단하셨어. 그 사람이랑 차라리 죽으라고, 둘이 같이 사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날 죽이겠다고 그 사람 앞에서 우리 아버지가 날 닥치는대로 때리니까 그 사람 그랬어. 차라리 자기한테 화내라고. 헤어질테니 그만 때리라고. 그러다가 죽겠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다. 우진의 엄마가 가만히 손을 잡아 대휘 아버지를 위로하며 한편으론 죽은 대휘의 엄마가 부러웠다. 그녀의 남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돈을 원했고 원한만큼 우진의 외할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으면 짠 듯이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저주하고 그녀가 가꾼 집안을 다 망가뜨리고 마음에 상처를 준 후 떠나갔다. 그녀는 고작 어린 우진이 다칠까 봐 우진을 제 품에 안고 귀를 막고 같이 울 뿐이었다.

 

“과거에 발목 잡힌 건 어쩌면 나였던 건지도 몰라. 당신이 뭘 불안해하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이랑 우진이, 대휘 책임질게. 당신은 실패뿐이었던 내 인생을 구원한 마지막 사람이야. 그러니 절대 우린 안 헤어져.”

“여보...”

 

우진의 엄마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십이 넘은 나이였고 세 번의 결혼실패로 남자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다만 대휘의 아버지가 이전 남편들에 비해 덜 탐욕적이었고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이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한번 더 속는 셈치고 친정아버지에게 투자를 부탁했는데 이번 계약이 무산돼 이전 세 명의 전남편들처럼 대휘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저주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상처받을까 봐 그녀는 무서워 은숙의 비위를 맞추고 대휘에게 희생을 강요한 거였다.

 

“그러니까...이번 일은 우리가 양보합시다. 이제 우리도 과거에서 풀려날 때도 된 것 같아.”

 

대휘의 아버지는 우진 엄마의 손을 꼭 쥐었다. 깊은 눈빛으로 전하는 고백은 그 어떤 사랑의 고백보다 더 달콤하고 황홀했다. 대휘 아버지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우진의 엄마는 대휘 아버지에게 잡힌 손을 더 꼭 쥐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대휘의 방을 나섰다.

 

 

민현이 대휘의 아버지에게 사정을 했대도 대휘가 울며불며 떼를 썼대도 달라지는 건 하나 없었다. 경민의 제보로 루머의 유포자가 김태호라는 게 밝혀지면서 다시 임시운영위원회가 열렸다. 멍들고 한쪽 입술이 찢어진 얼굴로 대휘가 뒤쪽에 앉았다. 교장과 운영위원회 학부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태호는 억울하다는 듯 거칠게 말했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황민현쌤하고 이대휘가 만난 게 진짜라니까.”

 

뒷모습만 나온 사진 속 대휘와 맞은 편에 앉은 대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교사랑 학생이랑 사귀는 건 문제없고 사실대로 말한 나만 잘못이예요?”

 

그 말에 회의참석자 모두 말문이 막혔다.

 

“씨발, 둘이 잤을 게 뭐예요. 봐요. 민현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데.”

“야! 김태호!!”

“김태호학생. 어른들 앞에서 언어선택을 조심해주세요.”

 

우진엄마의 등에서 식은 땀이 주욱 흐르고 담임이 교장과 학부모들 앞에서 당황해 얼른 김태호의 말을 막는 순간,

 

“민현쌤과 만난 사람은 나예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다급하게 들어온 것 치고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우진아!”

 

우진의 엄마를 비롯해 교장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우진을 바라봤다.

 

“왜 뒷모습만 보고 이대휘일거라고 생각하세요? 소문만 가지고 왜 이대휘래요? 나 맞아요.”

“우진아.”

“네가 이대휘랑 친한 건 알지만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얼른 교실로 가.”

“친구문제로 선생님하고 상담했어요.”

 

너무 원론적인 핑계를 대는 우진에 담임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벙찌고 말았다. 사진 속 마르고 각진 어깨에 동그란 뒤통수가 도저히 우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대휘라는 증거도 없었다.

 

“이러면 황선생님한테도 대휘한테도 도움이 안 돼.”

“왜요? 부담임인데 민현쌤이랑 만나면 안 되나요?”

“민현쌤과 만난 사람은 나예요.”

 

이번에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교장실이 놀라고 말았다. 전교 1등인 찬원이었다. 찬원이가 등판했다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수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선생님하고 상담했어요. 부모님과 제가 원하는 대학이 달라서요.”

“너희들...”

“찬원아. 어머니도 계신데...얼른 교실로 들어가.”

“학생이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도 징계사유가 되나요? 저는 선생님과 상담하면 안되는 거예요? 아니면 카페에서 상담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때였다.

 

“민현쌤과 만난 사람은 나예요.”

 

이번엔 누가 봐도 사진 속 학생의 두 배라 절대 사진 속 인물 같지 않은 덩치를 가진 대웅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며 들어왔다. 야. 김대웅. 아무래도 넌 아니지. 그리고 다른 학생들까지 들어왔다. 민현쌤과 만난 사람은 나예요. 나도 만났어요. 바로 얼마 전까지 대휘 때문에 민현이 사직했다고 뒤에서 수군대던 애들 사이에서 그래도 자신의 편이 되어준 찬원이와 친구들이 고마웠다.

 

“민현쌤은 이야기 끝까지 잘 들어주시거든요. 밥도 잘 사주시고.”

“씨발, 단체로 미쳤구나.”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쥐처럼 김태호가 비아냥거리며 발악하듯 소리치더니 순식간에 몸을 날려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자 혹시라도 그대로 도주하는 걸까 봐 대휘와 우진, 찬원을 비롯한 담임까지 김태호의 뒤를 쫓아갔다.

 

 

은숙이 경찰서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대휘의 아버지가 사무실에 와 있을 때였다. 은숙은 대휘네 회사에게 있어 자기 회사와의 거래가 얼마나 큰 거래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자기 회사와의 계약에 대휘네 회사가 사활을 걸고 있으며 사실은 자신들이 원하는 물품을 납품해줄 가장 적합한 거래처가 대휘네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대휘네와 계악을 하는 게 자신의 회사에도 큰 이익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계획대로라면 이미 계약이 끝났어야 했다.

 

그럼에도 은숙은 대휘가 계약사 대표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순간 아무 설명없이 계약을 홀드해 버렸다. 지난 4월 딸 나은의 기일에 K에 내려갔을 때 우연히 제 차에 태웠던 대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년이었다. 나은이 뺑소니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사는 게 지옥같았던 은숙은 자기를 낳고 세상을 떠난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보러 왔다는 대휘의 말에 제 심장이 녹아버리는 것 같은데 오히려 대휘는 빙긋 웃으며 말했었다.

 

- 지금 18년 만에 처음 보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저를 낳고 돌아가신 엄마한테 인사하러 가는 거예요. 저를 낳고 우리 엄마 내 걱정으로 눈도 제대로 못 감았을 거예요. 엄마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나 잘 자랐으니까 우리 엄마 이제 걱정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라고. 전요, 정말 괜찮은,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 날 힘들고 주저앉게 해도 난 어떻게든 나만의 세상에 뿌리 내릴 거예요.

 

한쪽만 쌍꺼풀진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조곤조곤 말하던 대휘의 동그란 얼굴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생의 강한 의지로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슬픈 이야기를 해맑게 웃으며 말해서 대휘 대신 은숙이 울 뻔했다. 황망하게 나은을 잃고 5년이 흘렀다. 아직도 은숙은 왜 나은이 죽었는지 이유를 모르겠고 아직도 자신은 5년 전 그날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대휘처럼 예쁘고 늘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여서 사랑에도 당당했었다. 자신이 선택한 민현에게 망설임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아이. 은숙은 대휘를 보며 나은을 떠올렸었다.

 

그래서 그럼에도 가 민현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대휘가 아닌 민현에 화가 났다. 두 사람이 같이 사랑했는데, 나은은 죽어서 더 이상 없는데 여전히 살아서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 사람 특유의 설레임과 기대가 느껴졌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대휘와 마주했을 때 알았다. 민현을 설레임과 기대는 대휘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이 가지는 빛은 숨길래도 숨길 수 없다는 걸.

 

계약을 미루는 은숙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우진의 엄마가 찾아왔다. 큰 계약을 따내기위해 상대회사의 정보를 모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 과정에서 민현의 존재를 알고 은숙이 계약을 미루는 게 민현과 대휘때문이라고 생각한 우진의 엄마는 민현과 대휘를 못 만나게 할테니 꼭 자신들과 계약해달라고 먼저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은숙은 우진엄마의 제안에 가타부타 말없이 캐파가 늘어나 견적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말로 에둘러 우진엄마의 제안을 묵인해왔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진의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약속대로 민현은 학교를 사직했다.

 

그리고 지금 약속대로 계약을 하자는 듯 대휘의 아버지가 온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들의 가슴에 상처를 줘도 상관없다는 대휘의 부모와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민현을 원망하는 저나 별반 다르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국내에서는 이사장네 회사만큼 질적으로나 물량으로나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업체는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었을 테니 은숙의 입장에서는 손해는 커녕 일석이조의 상황이었다.

 

“저희가 준비한 계약서를 살펴보시죠.”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휘의 아버지는 계약서 파일을 들춰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늘 찾아온 목적은 저희는 임사장님네와 계약할 의사가 없다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대휘 아버지의 말에 은숙은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얼척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은숙이 그러거나 말거나 대휘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임사장님과 거래를 한다면 분명 큰 이익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도 애비인지라 제 아이 마음까지 다치게 하면서 이 계약에 올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사장님이 오해하시는 모양인데...그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

 

급전개에 은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휘의 아버지는 아마도 은숙 자신이 먼저 우진의 엄마에게 민현에게 복수해줄 것을 제의한 줄 아나보다. 그래서 은숙은 우진엄마인 정사장이 먼저 제안할 때까지 팽팽하게 줄을 당겨왔는지도 모른다. 대휘를 두고 그런 비겁한 제안을 한 게 은숙 자신이 아니라 아내인 정사장이였다는 걸 알면 이사장은 어떤 기분일까. 이사장은 아들 대휘를 선택할까, 아내인 정사장을 선택할까...그것도 남편을 위해 남편의 핏줄인 아들을 버린 비정한 아들의 새엄마를...

 

“압니다. 제 아내가 의욕이 앞섰다는 걸요. 그래서 없었던 걸로 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임사장님과 계약하지 않는다면 임사장님네 납품에 맞춰 설비를 한 우리에겐 큰 타격입니다만 그건 아들을 지킨 대가로 부모인 우리가 감당하겠습니다. 대신, 더 이상 우리 대휘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저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이사장님!!”

“그리고!!”

 

대휘아버지는 은숙의 말을 막았다. 은숙의 얼굴을 보는 내내 자신이 대휘에게 했던 그 비겁한 행동과 말들이 떠올랐다. 18년 만에 만난 아들한테 살갑게 대하진 못할망정 고작 네가 우리 집에 온 다음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저주만 퍼부은 못난 아버지였던 자신이. 우진의 말대로 대휘에게 존경할 만한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니 대휘 엄마에게도 자신은 너무 비겁한 남자였다. 이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황민현선생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임사장님의 고통은 같은 부모로써 공감하지만 황민현선생은...아무 잘못 없었어요. 비록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겠지만.”

 

은숙은 제 뼈까지 때려오는 대휘 아버지의 말에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치졸한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대휘든, 황민현선생이든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있을 겁니다.”

 

벙찐 은숙을 일 깨운 건 비서였다. 대표님...은숙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비서가 다급한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경찰서입니다. 나은양 뺑소니사고범인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휘 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알수 없는 예감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경찰서라는 말에 전화를 받는 은숙과 대휘 아버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경민!!

교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험악한 얼굴의 김태호가 들어오더니 경민의 자리로 성큼성큼 순간이동하듯 쫓아와 그대로 책상 앞에 앉은 경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한방에 경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김태호의 욕지거리와 경민의 억 하는 신음. 아이들의 놀란 함성. 어느 새 달려온 대휘의 비명과 그런 대휘를 챙기는 우진, 그만 두라 소리치는 찬원의 고함으로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휘에게 아무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우진과 찬원, 대웅이등 우진의 무리들이 달려들어 겨우겨우 김태호를 경민에게서 떼어냈지만 경민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씨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지. 니가 꼰질러?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다 말 했어...이젠 네 말 안 들어.”

 

경민의 말은 겁에 질렸는지 말 내용과 달리 발음이 어눌하고 떨려왔다. 경민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대휘지만 그래도 경민 덕에 그날 옥상에서 살아날 수 있었기에 마냥 미워할 수 만은 없어 경민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경민이 입에서 피가 침과 섞여 흘러 대휘가 얼른 물티슈를 꺼내 닦아주었다.

 

“다 말하셨어? 니가 지난 1학기 기말시험 때 수학시험지 훔치려던 것도?”

 

순간, 김태호의 말이 끝나자 대휘를 비롯한 아이들이 모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고3 1학기 중간시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수시를 준비하는 애들은 모두 알았고 법적으로도 시험문제유출은 형사사건이었다. 경민은 차마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김태호에게 일방적으로 맞는 경민을 동정하던 아이들의 침묵이 어느새 경민에게 적대적으로 바뀌어갔다.

 

“이대휘 때문에 니 등급 떨어졌다고 재수없다고 미워했잖아.”

 

경민의 피를 닦아주던 대휘의 손이 멎었다. 등급의 차이는 원서를 쓸 수 있는 학교의 차이였다. 1등급을 받는 학생은 고작 전교 4%의 학생들에 불과했으니까. 대휘와 눈이 마주친 경민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돌리면서 대휘의 손에 들린 물티슈를 건네받았다.

 

“미안해...그땐 마음이 급한 만큼 니가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해서...”

 

조급함과 시기와 미움이 겹쳐 시험지를 훔치려던 경민은 김태호한테 들키자 우진에 보복하려는 김태호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 것이다. 그때는 단순한 루머로 끝날거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기어들어가는 경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웅이와 찬원이에게 붙들렸던 경민이 두 아이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경민에게 발길질을 시작할 때였다.

 

“김태호. 이나은 뺑소니사망사건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교장과 담임을 동반해 형사와 경찰이 교실로 들어왔다. 김태호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경찰서에 도착한 은숙은 수갑을 찬 채 담당 형사 앞에 앉은 김태호를 보고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뺑소니사고로 나은을 죽게 만든 피의자가 비록 헝클어졌지만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어서 무슨 일인지 믿어지지 않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비로소 저간의 수사내용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난 5년간의 슬픔과 한과 분노가 일순간에 은숙의 몸에서 솟구쳐 자신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번쩍 손을 올려 김태호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개자식!!”

 

마치 새끼를 잃은 어미의 비명에 가까운 오열과 함께 은숙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은숙을 말리자 김태호가 저항하듯 온 몸으로 은숙을 뿌리쳤다.

 

“씨발! 나도 다 알아봤거든!! 촉법소년은 형사처벌 안 받는 거!!”

 

반성이나 죄책감은 커녕 당당하다 못해 뻔뻔함한 김태호의 말에 은숙은 비통함과 분노로 일그러졌던 표정이 오히려 담담해졌다. 형사들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며 김태호를 끌고 조사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5년 전 나은이 뺑소니사망사고가 났을 때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사고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사고차량은 몇 시간 전에 도난신고가 된 차량이라 차주의 책임은 없었고 사고차량 안에서 나온 지문과 동일한 지문이나 DNA를 가진 용의자를 찾아낼 수 없었고 국도변 CCTV를 찾았지만 국도변을 달려 도주하는 남자의 희미한 영상을 찾아냈지만 어두워서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의 신원파악은커녕 몽타주도 확보하기 힘들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뺑소니운전자는 찾지 못했고 그렇게 5년 간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대휘군이 폭행과 성추행으로 김태호군을 신고하면서 증거로 제시한 이 휴대폰에서 나온 지문이 5년 전 뺑소니차량에서 나온 지문과 같았습니다. 사고 당시 피의자는 만 14세 미만으로 당연히 지문이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지금 피의자는 만 19세가 넘어 이미 주민증이 나왔어야 하지만 스스로가 만들지 않아 지금껏 체포되지 않을 수 있었죠.”

 

나은의 사고 당시는 만 14세 미만 촉법소년이라 뺑소니인사사고의 처벌은 받을 수 없지만 폭행과 성추행 혐의로 구속되면, 5년 전 뺑소니혐의도 양형선고 때 참고가 된다고 말했다. 고작 만 14세의 중학생이 장난 삼아 키가 꽂힌 채 길가에 주차된 차를 훔쳐 200킬로를 달려오는 동안 검문검색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도 황당했지만 역주행으로 충돌사고를 낸 직후 겁이 나 자수를 하지 않고 현장을 도망친 결과는 철없는 학생의 소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책임하고 죄질이 나빴다.

 

게다가 지난 5년간 반성하지 않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미성년이라고 합의하며 처벌을 받지 않자 영구적으로 책임회피를 위해 만17세면 발급받는 주민증도 발급받지 않은 건 다분히 계획적이라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 한 걸 대휘가 성폭행미수로 신고하면서 대휘의 휴대폰에 남은 지문이 결정적으로 사건 해결을 할 수 있었다는 담당형사의 말이 끝난 후 은숙은 대휘를 돌아봤다. 여기저기 멍들고 깨진 입술의 대휘의 양옆에서 부모가 지켜주고 있었다. 나은이 생각날 만큼 예쁜 아이였지만 민현과 만난다는 이유로 마음으로 거부했던 소년이었다. 대휘가 아니었으면 영영 나은을 죽음으로 몬 가해자를 찾지 못할 뻔했다.

 

“대휘군...”

 

은숙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민현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민현의 용서를 구하는 대휘에게 매 순간 치졸하고 비겁한 모습만 보인 자신이었다. 대휘에게 그 동안 자신의 치졸함과 비겁함을 용서 빌고 싶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

 

말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은숙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홀가분해졌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은을 죽음으로 몬 가해자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분노와 원망만으로 점철됐던 지난 5년의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온전히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휘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나은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영영 못 찾았을 거야.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를 만큼 내가 대휘군에게 너무 못되게 굴었어. 미안해.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가 할 수 있다면 대휘군이 해달라는 걸 다 해주고 싶어.”

 

은숙의 말에 대휘가 제 옆에 있는 부모님을 보곤 조용히 말했다. 대휘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무엇을 포기한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시면...부탁이 있어요.”

 

 

민현은 저를 찾아온 은숙의 표정이 오래전 그 온화하고 다정하게 바뀌어 있음에 잠시 당황했다. 생각해보면 은숙은 혼자 나은을 키우며 사업체를 경영하는 진취적이고 능력있는 CEO였고 나은에겐 다정하고 친구같은 엄마였으며 민현에겐 인생 선배로써 늘 존경했던 어른이었다. 그런 은숙도 나은의 죽음 앞에서는 그저 자식을 잃은 엄마일 뿐이었다.

 

“경찰에서 얘기 다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은숙을 보며 민현이 먼저 말을 꺼내자 은숙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 뒤늦게라도 민현이 찾아가 먼저 사과했더라면 은숙도 민현도 조금은 더 마음이 편했을까. 자신의 비겁함이 나은이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인 은숙과 자신이 서로를 덜 미워하고 덜 미안해했을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너한테는 꼭 사과를 해야겠어. 미안해. 민현아.”

 

민현은 은숙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막히면서 울음이 북받치는 것 같았다.

 

“나은의 죽음이 너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난...널 원망하며 널 몰아붙였어. 그렇다고 나은이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미안해. 민현아. 난 너무 비겁하고 못난 어른이었어.”

 

은숙과 민현 두 사람 모두 나은의 죽음으로 인한 피해자였고 똑같은 고통을 받았다. 서로 미워하는 대신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했어야 했다. 어른답게 먼저 말을 꺼내고 보니 지난 5년간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은숙은 능력있는 CEO답게 제 사과에도 할 말을 잃은 민현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알았다.

 

“처음 대휘군을 태우고 나은이의 바다로 갈 때...나, 5년 만에 처음으로 웃어봤거든. 감정 없이 살다 대휘군을 보니 마치 나은이를 보는 것 같았어. 지금 생각하면...그날 너와 내가 대휘군을 만난 건 운명이 아니었을까...나은이...나한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과거에 얽매인 지옥같은 삶을 더 이상 살지 말라고...대휘를 그 곳으로 보낸 건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어.”

 

대휘의 말이 나오자 민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이런 게 살아있는 거지. 은숙은 그런 생각을 했다. 살아 있기에 사랑의 기쁨과 감정을 숨길 수 없는 거지. 나은의 죽음에 아무 잘못 없는 민현에게 은숙은 마치 고대부족국가의 풍습같은 순장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현은 민현의 인생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 먼저 떠난 사람의 몫만큼 더 행복하게. 이젠 나은이 아닌 대휘를 사랑하는 민현에게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너무 티 나네. 그래도 보기 좋다. 사랑에 빠진 너는.”

“죄송해요.”

 

민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서 우리 나은이가 좋아했나 보다. 너를.”

 

역시 은숙은 나은의 엄마지 민현의 엄마는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나은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보내주자. 나은이를. 너도 나도.”

 

 

경민이 3학년 1학기 중간시험에서 시험지를 훔치려다 김태호한테 들킨 후 김태호의

지시를 받아 소문을 퍼뜨린 사건으로 진상이 밝혀졌고, 시험지 절도 역시 미수로 그쳐 성적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대도 중대한 교칙 위반이라 징계사유에 해당됐지만 고3이고, 자백을 정상참작해 반성문을 쓰는 걸로 마무리됐다. 김태호는 대휘의 성추행과 폭행혐의로 기소됐다. 5년 전 김태호가 일으킨 뺑소니사망사고는 촉법소년이라 처벌받지 않기에 대휘는 고소를 취하할 생각도 합의할 생각도 없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받아야 한다.

 

은숙은 대휘 부모님을 찾아와 진심으로 사과하며 대휘 부모님 회사와 대규모계약을 체결했다. 우진의 엄마한테 들으니 민현의 사직은 반려돼 다시 복직하는 걸로 운영위와 이사회에서 결정됐다고 한다. 그 말에 안도하는 대휘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대휘야. 그땐 미안했다.”

 

대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말했다.

 

“전 괜찮으니까...”

“민현쌤한테도 말씀드렸어. 미안하다고.”

 

대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꾸벅 인가하며 2층 제방으로 올라가려 몸을 돌릴 때였다. 대휘야...아버지가 다시 대휘를 불러 세웠다.

 

“한번만 안아 봐도 되니?”

 

그러나 대휘는 그 말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진 못했다. 갓난아기였을 때도 엄마한테 안겨본 적 없는 대휘인데 아버지라니...괜히 어색해서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그런 대휘에게 아버지가 다가와 그 마르고 가는 어깨를 안아 다독였다.

 

“미안해. 너한테 무관심하고 상처만 줘서. 진심이 아니었어. 생각해보니...니가 우리 집에 와서...늘 좋은 일만 있었어. 고맙다. 대휘야.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아직은 어색해서 대휘는 부동자세로 자꾸 고개만 숙였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민현이 없는 학교는 텅 빈 것 같았다. 모든 게 해결됐으니 혹시라도 민현에게 전화가 올까 기다렸지만 민현에겐 전화가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전화할까 하다 오늘까지만 기다려보자, 오늘 전화하면 발에 키스하는 정도로 용서해주마 싶은 마음에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언제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대휘가 눈으로는 수능기출문제를 풀면서 휴대폰을 흘끔거릴 때였다. 조례시간에 담임쌤이 웃음을 감춘 얼굴로 들어와 짧은 조회의 끝에 말을 이었다.

 

기쁜 소식이 있다. 그 동안 휴직하셨던 부담임인 황민현쌤이 다시 돌아오셨다. 알지? 오시면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격하게 반겨주는 거.

 

담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어! 하며 창가 자리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민현쌤이다. 어디어디? 창가로 몰려드는 아이들 틈에서 벌떡 일어선 대휘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베이지색 맥코트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민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순간, 오직 한곳만을 올려 보는 민현의 시선과 마주쳤다. 쌤...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대휘가 교실을 뛰쳐나갔다. 역시 창가에 붙어 있다가 교실을 뛰쳐나가는 대휘를 보고 우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이대휘!!

못 말리는 커퀴들...우진이 웅얼거리며 대휘의 뒤를 쫓아 내달리자 자리에 앉으라고 소리치는 담임을 뒤로 하고 아이들 모두가 우르르 교실을 뛰어나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던 민현은 창가에 매달려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대휘가 갑자기 사라지자 걸음을 빨리 해 얼른 교실로 들어가 대휘를 보고 싶었다. 물론 새침한 대휘는 행여 저와 눈이 마주칠까 두 눈 부릅뜨고 수학문제집만 들여다보겠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민현은 행복했다. 건물로 걸음을 옮기는 민현은 건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작고 마른 모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쌔앰!!

대휘야!!

민현은 마음이 급했다. 저에게 달려오는 대휘가 행여 넘어질까 민현도 달리기 시작했다. 쌔앰!! 대휘가 저를 향해 달려오는 민현과 닿는 순간 민현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쌔앰!!

 

아무리 마른 대휘라도 달려오던 반동으로 대휘를 안은 민현의 몸이 휘청했다. 학교운동장 한복판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순간, 빠른 발로 대휘를 따라잡은 우진이 대휘가 민현의 품에 안김과 동시에 대휘의 뒤에서 민현을 안았다. 작고 마른 대휘는 제 몸보다 큰 민현과 우진 사이에 갇혀 보이지 않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우진이 민현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애는 그르타 치고 즉즉 즘 하시죠.”

 

이를 악문 우진의 말과 동시에 달려온 찬원과, 대웅이, 반 아이들이 우진이 민현을 끌어안은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민현과 대휘를 가운데 두고 애워싸듯 안았다. 쌔앰!! 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둘러싸여 이제 대휘를 안은 민현은 보이지 않았다. 대휘를 끌어안은 민현이 소란스런 아이들의 소리를 빌려 대휘만 들을 수 있게 낮게 속삭였다.

 

“미안해. 정말 보고 싶었어.”

“그것 가지곤 안돼요.”

“발에 키스해도...?”

 

대휘가 푸스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로소 다시 만났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사람은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라고.

언젠가 나은이가 말했다. 운명은 갑자기 품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고. 그러니까 피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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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시 만났네요. 모든 분들 덕에 또 한편의 장편을 완결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워너원 시절 민현을 끌어안은 대휘를 뒤에서 끌어안은 우진을 보고 꼭 한번 글에서 인용하고 싶었는데 이 글 시작하면서 마지막 장면으로 생각해두었었어요. 그때 민현과 우진 사이에서 안보이던 대휘가 너무 귀여웠거든요.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눌러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구독해주시는 분들...감사합니다.

 

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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