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오지 마!! 확 그어버린다!!!

 

막다른 골목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우진의 갸름한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한방이다. 한방에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는 위험하다.

 

용의자의 한마디에 통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몰려든 기자들과 많은 시민들이 숨죽이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의자의 우왁스런 손아귀에 붙들린 아이는 너무 작았고, 무서운 나머지 울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손에 든 아이스크림은 벌개진 아이의 체온에 녹아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날카로운 칼날은 아이의 목에 금방이라도 닿아 상처를 낼 것만 같았다.

 

- 아이는 죄가 없잖아. 풀어줘. 우리 말로 하자구!

 

윤반장이 차분하게 용의자를 진정시키는 동안, 용의자에게 겨누었던 총들은 윤반장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흥분한 용의자는 어린 여자 아이를 풀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발포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용의자에게 완전히 잡혀있었고 발포를 하면 아이가 맞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용의자 막다른 선택으로 아이를 해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불필요하게 용의자를 자극시키지않기 위해, 용의자가 정면으로만 주위를 돌리기 위해 윤반장이 애쓰는 동안, 우진은 빠르게 몸을 날려 그대로 용의자의 머리를 날라 차기로 가격했다. 순식간에 휘청하며 칼을 놓친 용의자의 턱을 다시 한번 긴 다리를 뻗어 가격해 용의자가 쓰러뜨리고 그대로 칼을 멀리 쳐냈다. 동시에 지켜보던 은상이 용의자에게 총을 겨눈 채 재빨리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서야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진은 쓰러진 용의자를 일으켜 세워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랬다!!”

 

용의자의 얼굴은 이미 피떡이 되도록 깨졌고,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우진이 쓰러진 용의자에게 마구잡이로 발길질을 하려는 순간,

 

- 박형사 미쳤어!!

 

윤반장이 소리치며 우진을 말렸다. 윤반장과 동료 형사들이 우진의 팔을 붙들고서야 우진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놓으라 소리지르다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려보니 기자들의 카메라와 폴리스라인밖의 사람들의 휴대폰이 이 모든 과정을 여과없이 동영상으로 담고 있는 게 그제서야 보였다.

 

 

- 본동 어린이 유괴살해사건의 용의자 검거과정에서 담당형사의 과잉대응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론에 부담을 느낀 경찰청 측에서 철저한 조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모든 장면이 얼굴만 모자이크 된 채 TV뉴스에 기자의 리포트와 함께 나오는 화면을 강력계 형사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을때였다.

 

- 꺼!! 뭐 자랑이라고 틀었어!!

 

과장실에 불려갔다 온 윤반장이 소리치자 은상이 얼른 TV를 끄고 윤반장과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 박우진! 너 이번이 몇 번째야? 한번만 더 사고 치면 너도 나도 다 옷 벗어야 된다고!! 죽을래? 형사 때려 칠래?

 

우진은 책상 앞에 앉아 빙글빙글 의자만 돌리다 씨발, 낮게 욕을 하며 일어섰다.

 

- 드럽고 치사해서 옷 벗는다! 벗어!

- 새꺄! 총도 놓고 가!!

 

우진이 보란 듯이 총과 형사증을 윤반장 책상위에 소리나게 올려놨다. 윤반장은 총과 형사증을 얼른 서랍에 넣었다.

 

- 지금 서장실에 지검 담당 검사까지 와 있어. 너 하나 짤리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팀은? 너 하나 때문에 우리 팀까지 다 나가리되게 생겼어!

- 씨발, 애를 붙잡고 있잖아!! 경찰이라는 놈들이 범인한테 사정하라고? 누가 알면 연애하는 줄. 그러다 애 다치면 반장님이 책임질 꺼예요?

- 그래서 좀 더 이성적으로 대응했어야 된다는 겁니다. 박우진형사님!

 

가늘고 높은 목소리였다. 우진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자 윤반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소리만큼이나 가늘고 마른 몸을 가진 남자가 몸에 맞는 수트에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사무실 가운데에 들어섰다. 동그랗고 작은 머리에 앳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우진은 넌 또 뭐냐는 표정으로 남자를 봤다.

 

- 이성? 놈이 감정적으로 애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 애 죽고도 이성 찾을래? 넌?

- 야. 박우진!!

 

우진의 날카로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앳된 남자는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갈 것 같은 우진 앞에 겁도 없이 한발자국 다가섰다.

 

- 검사님...

 

윤반장이 우진의 무례에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며 앳된 남자의 앞에서 상관의 예를 갖춰 서자, 은상을 비롯해서 강력3반 4명도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우진만이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였다.

 

- 관할 지검 강력부 이대휘검사님이셔!

 

윤반장의 소개에도 우진은 여전히 눈을 풀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대휘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았고 방금 소개 받은 대휘 역시 우진에게서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투명하고 맑은 눈빛이 어울리지 않게 강단있어 보였다.

 

“검거과정에서의 경찰의 과잉대응은 여러 차례 문제가 돼 왔고 인권위원회의 시정권고를 받아 검경측에서도 체포,조사 과정에서의 잔혹행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울러 검거 과정에서의 경찰 과잉대응은 엄연한 징계사유인 거 모르셨습니까?”

“무신 놈의 국가인권위원회는 범죄자의 인권만 보장합니까? 인질로 잡힌 죄 없는 아는요?”

“아이의 안전이 걸려있으니 더 검거매뉴얼대로 움직였어야 됐다는 겁니다. 용의자의 행위가 아니라 경찰의 실수로 아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요?”

“안 다쳤잖아!!”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고요. ‘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대신 해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한다.‘ 기본 아닙니까?”

 

검사라더니 더럽게 말도 잘한다 싶은 우진이 대휘를 노려만 봤다. 웬만한 흉악범들이래도 우진의 길쭉한 눈매가 날카로워지면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윤반장도 우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면 아, 몰라몰라 하며 꼬리를 내리는데 생긴 건 기집애처럼 생긴 초짜 검사가 한쪽만 쌍꺼풀 진 까만 눈으로 눈 한번 깜짝 하지 않은 채 우진의 눈빛을 피하지 않다니 곱상하고 앳된 외모와는 달리 깡다구 하나는 두둑한 것 같았다.

 

우진과 대휘, 이검사와 박형사의 팽팽한 기싸움에 사무실 분위기까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재수 없는 검사 새끼. 니들이 현장에서 직접 뺑이 쳐봐. 그런 말이 나오나...근데, 왜 이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 봐? 그럼 뭐? 내가 쫄까봐? 떨까봐? 설렐까봐?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내를 알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빛에 한없이 빨려들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분노와 흥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미 진 싸움이었다. 팽팽했던 기싸움에서 우진이 먼저 눈을 피했다. 더 이상 버텼다간 까맣고 말간 눈빛에 흔들린 저를 들킬 것 같았다. 어려도 명색이 상관이다.

 

- 검사님. 이렇게 오셨는데 저녁이라도...닭발 잘 하는 곳이 있는데요.

 

윤반장은 썰렁했던 분위기를 바꿀 겸 우진이 범한 결례를 상쇄할 겸 대휘에게 제안했다. 씨발, 그냥 가라. 나 닭발 완전 좋아한다....우진이 낮게 중얼거렸는데...

 

- 좋습니다. 저 닭발 완전 좋아합니다.

 

방금까지도 조곤조곤 우진을 엿먹이던 대휘는 살풋 웃기까지 했다. 깔끔하게 잘 빠진 수트차림에 입맛까지 서민적인 건 반칙이지 않나...미친....우진은 혼자 중얼거렸댔다.

 

 

강력3반과 대휘까지 7명이 이모네 돼지껍데기집에 모여 앉았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윤반장 옆에 앉은 대휘는 우진과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 근데, 검사님 수달 닮았다는 말 많이 들으셨죠? 귀여운 수달.

 

평소 낯가림 심한 은상이 어찌된 영문인지 대휘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아 마시더니 스스럼없이 먼저 말까지 걸었다. 은상의 질문에 대휘는 살풋 입가에 미소까지 띄며 대답했다. 은상의 질문에 답하는 데 우진은 대휘가 자신을 향해 하는 말로 들렸다.

 

- 전 잘 모르겠는데 그런 말 종종 들어요. 근데 아세요? 수달, 족제비과의 육식동물로 사나운 거. 한번 물면 안 놓거든요.

 

대휘는 다시 살풋 웃으며 유리잔에 든 사이다를 가늘고 마른 손으로 들어 천천히 입가에 가져가 도톰하고 빨간 입술을 축이듯 한 모금 마시더니 빨간 혀로 살짝 입술에 묻은 음료를 핥듯 닦아냈다. 안주도 없이 연거푸 소주 세 잔을 입에 털어 넣은 우진의 눈에 대휘의 입술이 들어왔다.

기집애같이 생겨서 사이다가 뭐야? 사이다가. 입술은 와 그리 빨갛고 지랄인데.

우진의 시선을 눈치 챈 대휘가 다시 우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할 말 남았어요?”

“수달검사님. 나는 아직도 수달이든 미친개든 미쳐 날뛰는 놈들한텐 몽둥이가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뒤끝 있으시네. 그 미친 개 잘못 패면 죄없는 사람을 물 수도 있다니까. 그럼 문 개가 잘못입니까? 팬 사람이 잘못입니까?”

“그럼 미친 개가 물 때까지 기다려야했단 말입니까?”

“미친 개랑 똑같이 하면 미친 개와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와 인으로써 개새끼들을 교화시키겠다?”

 

우진의 도발에도 대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우진이 픽 웃었다.

기집애처럼 입술은 빨개가지고 그 예쁜 입으로 말은 잘 하네.

 

“검사님은 앞으로도 계속 예와 인으로써 개들을 교화시키시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몽둥이질을 할 테니 우리 서로 터치 하지 마십시다. 네?”

 

- 야 박우진. 그만 하라니까!!

 

얼어붙은 분위기 바꿔보겠다고 윤반장이 나서서 불닭발까지 시켰건만 저 눈치고자 우진이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저 상또라이 개꼴통!!

우진의 말에 대휘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살풋 웃으며 말했다.

 

“터치는 내가 하는 거죠. 박형사님은 받으시는 거고.”

 

아. 미치겠네. 지금 해보자는 거지. 내랑.

우진은 픽 웃으며 그대로 돼지껍데기집을 나와 버렸다. 그런 우진을 보며 대휘가 희미하게 웃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직 3개월...사무실로 돌아온 우진은 제 책상 서랍속에서 파일 몇 개를 꺼냈다. 우진이 꺼낼 때 파일 사이에 끼어있던 사진 한 장이 빠졌다. 어린 여자아이 둘이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사진...우진은 얼른 사진을 <2000.JSP>이라 쓰여진 파일 사이에 끼워 넣고 가족 사진이 든 액자와 함께 챙겨 들었다.

3개월...한숨만 나온다. 어머니한테는 뭐라 말하나, 세운이한테는 뭐라 말하나....

 

 

- 아빠!!

 

우진이 작은 아파트인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늦은 시간인데도 세운은 잠옷 차림으로 우진에게 달려와 우진의 넓은 품에 안겼다. 우진은 방금 전까지 날카로웠던 눈빛은 없어지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의 아들바보가 되어 세운을 바라봤다. 우진은 약하고 어린 것에 한없이 약했다. 지금 아들 세운이처럼.

 

- 으이구. 술 냄새. 또 술 마셨어?

 

우진의 엄마가 못말리겠다는 듯 우진을 바라봤다.

 

- 내 쫌 마셨다.

 

세운을 안고 거실로 들어서자 세운이 우진의 무릎에 앉긴 채 주사기를 내밀었다.

 

- 오늘은 아빠가 나 주사 놔줘.

- 글까? 오늘은 아빠가 주사 꽁 놔주까?

 

우진은 세운의 배에 주사를 놔주었다. 소아당뇨...세운의 병이었다. 하루에 한번씩 정해진 위치에 인슐린주사를 놓치 않으면 안 되는 병. 어릴 때부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맞아왔기에 어린 세운은 이제 울지도 않았다. 같은 곳에 주사를 놓으면 혈관이 굳어져 매일 서로 다른 곳에 주사를 놔야만 했지만 세 식구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어린 세운 조차도.

 

- 세운이. 오늘 우째 지냈나?

- 우리 연극하는데 나, 나무꾼 역할이다.

- 나무꾼? 선녀와 나무꾼 할 때 그 나무꾼?

- 웅웅. 근데 선녀가 누군지 알아?

- 누군데?

- 이민주.

- 이민주? 이쁘나?

- 이따만큼 이뻐!

- 니 민주 좋나?

- 이쁘댔지 누가 좋아한대?

 

약상자를 챙기며 우진과 세운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모가 쿡쿡 웃었다.

 

- 안 좋아하긴. 맨날 민주랑 결혼한다고....

- 할머니! 맨날 말하진 않았다. 오늘은 안했는데.

- 알았어. 오늘은 결혼한다고 말 안했지.

- 아빠한테도 안 비주고 결혼하나? 아빠한테 함 비주라.

- 연극할 때 꼭 와. 아직 민주한테 사귀자는 말 안했단 말야.

- 뭐라? 니 민주랑 사귀면 뭐 할라꼬?

- 손 잡아야지. 사귀면....선물도 주고...

 

요즘 애들 왜 이럼? 우진은 벙쪄서 웃음만 나왔다.

 

- 맞나? 사귀면 손 잡는 기가? 우리 세운이 싸나이네.

 

마치 커다란 회색늑대처럼 갸름한 눈꼬리가 휘어지고 큰 어깨를 들떡이며 웃는 우진을 보고 우진모가 혀를 찼다.

 

- 어째 애만도 못 하냐? 아홉 살짜리도 연애를 하는데 나이 먹어서 연애도 못하고.

- 아, 쫌 엄마!! 애 앞에서 몬 하는 말이 읎다.

 

우진이 정색을 하자 눈치빠른 세운이 일어났다.

 

- 아빠, 나 졸려. 재워줘.

- 오늘은 세운이 아빠랑 같이 자자.

 

우진이 세운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우진모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 햄. 이번 한번만 도와도. 내 일 하나는 잘 하잖아....뭐?....사고쳤냐꼬?...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 하나?....아, 뉴스 봤나?...그럼 긴 말 안해도 되겠제? 내 지금 글로 간다.

 

제 엄마에게 들킬까 싶어 피해 옆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통화를 하던 우진의 눈에 초라한 행색의 남매인 듯한 두 아이가 놀이터로 들어섰다. 누나인 듯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커다랗고 빛나는 까만 눈을 가진 소녀는 역시 창백한 어린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나타나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그네를 타는 소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건 소녀의 손등에 그려진 그림 때문이었다.

 

저게 뭐꼬...싶어서 바라보니 하얀 토끼 그림이었다. 우진은 요즘도 초등학생들이 저러고 노나 싶어 피식 웃었다가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딱 저 또래였다. 손목에 시계를 그리며 놀던...아련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 우진은 일어섰다. 그날 아이를 그렇게 놓치는 게 아니었다....

 

3개월 정직기간동안 감봉되는 급여 때문에 친한 형이 하는 수산물 도매가게에서 새벽부터 카트 가득 생선상자를 싣고 배달을 다니던 우진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선두에 윤반장과 은상이 탄 경찰차를 필두로 119 구급차가 급히 지나가는 걸 본 것은...바로 우진이 사는 옆 동네였다.

 

본능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감지한 우진은 그대로 구급차의 뒤를 쫓았다. 경찰들이 지키는 현장은 형사들과 감식반 요원들로 분주했다. 윤반장과 은상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취재기자들과 사람들 틈에 숨어 살피던 우진은 바디백에 담겨 119 구급대원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시신이 나오고 이어 어린 아이인 듯 부피감이 작은 들것이 실려 나오는 걸 보는 순간, 아이가 연루됐다 싶은 생각에 우진은 한쪽 눈썹이 움직였다. 아이를 건드리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들것이 나오는 순간, 취재기자들이 경쟁적으로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어 상기된 표정으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은상이 나오는 걸 본 우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은상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의 손등에 그려진 하얀 토끼 그림.... 어디서 봤더라...저 토끼...어디서 봤더라...

 

구급차에 아이를 실은 은상이 몸을 돌리는 순간, 우진은 얼른 제 몸을 숨겼다. 자신은 정직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 나와서는 안됐기에 들킬까봐 은상이 알아보기 전에 우진은 몸을 돌려 현장을 빠져나왔다. 하얀 토끼가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우진모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우진은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저녁뉴스를 틀었다. 옆동네 사건 났다면서...사람이 죽었다며...애들도 다치고...우진모도 알고 있는 걸 우진이 모른 척 하기도 그랬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수사 안 하고...

뜨끔한 우진이, 우리 팀 사건 아이다 하며 딴청부리자 우진모는 아무말도 없이 우진을 흘끔 바라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니가 말 안한다고 몰라....저 놈의 승질머리....

마침, 뉴스에 옆동네 살인사건이 리포트되고 낯익은 현장의 모습이 비춰지자 우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고 우진모 역시 걱정스런 얼굴로 옆에 와 앉았다.

 

- 오늘 오후 사체가 발견된 본동 현장입니다...피살자는 30대 중반 이모씨로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며, 감식반은 최소 사망한지 12시간 이상 지난 걸로 보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피살자 외에도 남매로 보이는 두 어린이가 중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병원에 옮겨진 두 어린이 중 동생인 남자어린이는 중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피살자의 주변을 탐문하면서 범인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역시 아이들도 피해자였다. 저항능력도 방어능력 없는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우진은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진은 현장에 갈 수 없다.

 

- 아빠....

 

그때, 하얀 토끼를 손에 든 세운이 울망울망한 얼굴로 우진에게 다가왔다.

 

- 이거 민주 주려고 산 건데 오늘 민주 학교 안 왔어.

- 속상했겠네. 그치? 근데 이건 뭐꼬?

- 액션토끼. 민주가 좋아하는 거.

 

우진은 눈이 동그래졋다. 하얀 토끼...액션토끼...현장에서 은상 품에 안겨 나왔던 아이의 손등에 그려진 인형이었다. 이제 기억났다. 액션토끼 그림을 현장에서 처음 본 게 아니었다. 며칠 전 놀이터에서 봤던 소녀의 손등에 그려진 액션토끼...우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민주네 집에 나쁜 사람이 들어왔대. 민주랑 동생도 많이 다쳐서 병원에 있대.

 

그날 자신이 봤던 여자아이가 맞았다. 그 아이와 동생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우진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다른 모든 범죄와 가해자들이 싫었지만 우진이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동 대상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그 아이가 세운이 좋아하는 친구 민주였다니...자신이 좀 더 민주를 지켜보았다면 어쩌면 민주의 불행을 막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또 다시 자신이 놓쳐버린 손 때문에 우진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 아빠가 그 나쁜 사람 잡을 수 있지? 아빠는 경찰이니까.

 

세운은 우진에게 확답을 바라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우진은 순간 제 처지가 부끄러웠다. 이제 자신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 그치?

 

 

가로등 불빛만 희미한 허름한 동네였고, 낮에까지는 사람들로 분주하더니 그 새 경찰들이 철수했는지 현장은 노란색 폴리스라인만 쳐진 채 조용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진은 경찰이 없는 걸 확인하고 현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아이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다. 범인을 잡을 수 없더라도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해서 제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우진의 어깨로 손을 뻗는 순간 촉이 좋고 움직임이 빠른 우진이 그대로 그림자의 손목을 낚아채 꺾어 벽으로 밀어붙였을 때였다. 형! 나야, 나. 은상이. 우진에게 몸이 눌린 채 벽에 얼굴을 박힌 은상이 고통스러운지 낮게 소리쳤다.

 

- 와 니가 여 있노?

 

우진은 얼른 은상의 손을 풀어줬다.

 

-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와? 들키면 어쩌려고.

- 야!!

 

우진이 은상에게 한마디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작스런 랜턴 불빛에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상대는 랜턴 불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 누구야 하는 묻는 그들은 현장 순찰 중인 경찰들이었다. 은상이 마이 안주머니에서 형사증을 꺼내 들자 랜턴 불빛을 비춰 신원을 확인한 경찰들은 수고하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 형. 제발!! 세운이도 챙겨야 할 거 아냐!! 3개월 정직으로 끝난 게 어딘데.

- 고 새파란 이검사가 낼 엿맥일라고 정직 처분 내린 거 아이가!

- 뭔 말이래. 이검사님이 3개월 정직으로 쇼부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나?

-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 형 한번만 더 사고치면 검사님도 커버 못 쳐.

- 좡난하나? 누가 누굴 커버쳐? 개 풀 뜯어먹는 소리 고마 해라.

 

우진은 다시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가늘고 마른 몸에 기집애같이 새침한 얼굴을 한 대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터치는 내가 하는 거죠. 박형사님은 받으시는 거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던 대휘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빡친 우진이 현장으로 향하려는 순간, 은상이 우진을 그대로 골목 끝까지 밀어냈다.

 

- 진짜 오지 마!! 한번 더 보면 가만 안 둔다.

 

3개월...너무 길다...우진은 한숨이 나왔다.

 

 

단지 내를 서성이던 우진은 세운이 잠들었을 거라 짐작하며 느지막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저를 기다리는 세운을 보고 놀라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 헉! 왜 안 자는데? 아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 잡았어, 아빠?

- .....

- 뻥쟁이!! 아빠 미워!! 형사라면서 도둑도 못 잡고, 챙피해!!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세운을 보며 우진은 오도 가도 못하다 다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어둔 밤길을 무작정 걷던 우진이 걸음을 멈춘 곳은 민주를 처음 만났던 놀이터였다. 어둠속에서 흔들리는 그네에 민주가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손등에 하얀 토끼를 그린 민주가...

우진은 다시금 자신이 놓쳤던 작은 손이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민주를 구해야 했다. 세운이를 위해서 또 자신이 놓쳐버렸던 작은 손들을 위해서....

 

우진은 현장인 민주의 집 앞에 다시 섰다. 순찰 돌던 경찰이 조금 전 지나간 걸 확인한 우진이 조용히 폴리스라인을 걷어내고 으로 들어섰다가 창밖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얼른 랜턴을 끈 채 안쪽 방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이고 그림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우진은 현관문이 열리고 발소리 죽여 들어서는 그림자에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선 시끄럽게 하기 싫은데...그러나 그림자가 방으로 들어오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검사...님...?”

“박형사님?”

 

흐트러진 옆머리를 꾹꾹 눌러 정리한 대휘는 우진을 맑고 투명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 우진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제 풀에 기가 죽은 대형 사모예드 같았다.

 

“말씀 좀 해보시죠. 징계중인 박형사님이 왜 사건현장에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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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이밍글입니다.

 

소재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따왔으나 내용이나 설정은 100% 허구이며 상상임을 밝힙니다. 수사물이다 보니 잔혹한 장면도 있으나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모든 연재물에서 제가 고민하는 주제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이며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는 여전히 아프고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힘듦을 회피한다면 미래는 바꿀 수 없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눌러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구독해주시는 분들...감사합니다.

 

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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