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신화 20주년 합작 " DOUBLE DECADE" 에 참여했던 글 입니다.  
링크를 첨부하오니, 캘리, 팬아트 등등, 다른 분들의 작품도 감상해 보세요. ^^
https://sh-20th-dd.postype.com/

신화 앨범, 9집 수록곡 "다시 한번만" 이란 노래의 가사를 토대로 작성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Chapter _  H.S

 

[혜성아? 너 내말 듣고 있어?]

"어? 어, 듣고 있어."

[요즘 왜 이렇게 멍해? 하는 말도 못 알아 듣고?]

".... 봄... 이라도 타나 봐."

[욕구 불만은 아니고?  너 동정도 못 뗀 숫총각 아냐?]

"이선호. 그런 농담 재미 없다고 했었다."

[자, 형아한테만 솔찍히 말해봐, 너 진짜.. ]

"됐어, 전화 끊어."

[알았어 알았다구, 농담도 못해? 재미 없어!]

"... 왜 꼭 그런게 재미 여야 하냐?"

[너랑 나와의 농담은 재미 없지. 애인하고는 완전 재미있지. 그걸 모르니 안타깝네.]

"난 너의 점심시간이 5분 남은게 안타깝다."

[5분? 정말? 아 진짜 짜증나, 김동완 이 악마가!!! 나만 뭐라고 하잖아!]

"그 악마님이 오랫동안 네 애인 인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애인? 헤어질거야. 이번에는 꼭! 헤어질거라고~!]

"어, 헤어진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해주면 고맙겠고, 4분 남았어."

[끊는다 끊어~~ 나 완전 튀어가야겠다.]

"그래."

 

 

 

귀에서 내린 핸드폰을 살며시 잡아 쥐며 이마를 유리창에 기댔다. 차가운 기운이 머릿속을 쩌릿쩌릿 파고 들어온다. 무언가 살며시 열이 올랐던 기운이 조금씩 식혀지는 기분이였다. 후.... 하는 깊은 숨을 몰아쉬자, 차분해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차츰 귀가 다른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 했다. 톡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오고, 이마를 통해 비의 시원함과 청량함을 전해주기에 살며시 눈을 떠 눈 앞을 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이슬 같은 빗줄기 너머로 비에 흠뻑 젖어진 도심이 보인다. 대낮인데도 햇살이 없는 비오는 날... 이런 날이 좋다. 시원하게, 청량하게. 그리고 푹 젖어드는 차분함과 우울함을 나에게 안겨주는. 이런날. 사람마다 느끼는 소리와 감정과 향수가 다 다르겠지만.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고층 오피스텔 안에서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혼자라는 안도감. 비에 젖어들어 잠식되어 가는 적당한 무게감.

 

 깜박 깜박이던 눈을 느리게 들어올린 혜성은 다시금 터덜터덜 걸어서 침대와 다름 없는 쇼파에 털석 기대어 누었다.  심각하게 우울증이라고 명명하기는 그렇지만, 미묘한 우울증의 선상에 있다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것 같으냐고, 무엇이 불편하냐고, 무엇이 싫으냐고, 이리저리 상담사는 물어왔지만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나는 모든 문제를 풀어 냈다고, 그런데 다른 이유 따위가 어디서 더 나오는지 알수가 없지만. 우울감에 이제는 익숙해 졌기에 상관 없다 생각 했다. 혜성은 쇼파에 옆으로 돌아 누으며 아직까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포근한 러그 위에 떨어진 핸드폰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음에  눈을 감았던 혜성이 미묘한 떨림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뜨면 다시 돌아 누워 천장을 바라다 보았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그가 다시 핸드폰을 잡아 든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통화중에 왔었는지 문자가 두개 와 있었다. 이번 주말에 잡힌 인터뷰 약속과 고등학교 동창회를 알리는 문자. [친구 좀 만나, 만나서 이번에 너 상받은거 가지고, 니 콧대 높은것 좀 세워봐.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 라고 했던 동완이형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집에만 있으니까 더 우울한것 일수도 있어....] 덧붙혀진 선호의 말까지....그 말뜻 아는데...

그런데.... 나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생각 한다..... 나는 정말....  괜찮은걸까..?

  

[욕구 불만은 아니고? ㅎㅎ 너 동정도 못땐 숫총각 아냐?] 

나도 남자지만, 저딴 농담이나 지껄이는 남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수가 없다.

혜성은 다시 똑바로 누우며 입고 있던 가디건이 마치 솜이불이라도 되는냥 몸을 감싸며 돌아 누웠다. 점심시간 따박따박 맞춰 사무실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하는 나랑 통화한 선호보다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해도 되는 내 일상이 좋았다. 마감이 있긴 했지만 이만하면 나를 위해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 한다. 창 너머에서는 톡톡톡 빗물소리가 스미고, 도심의 소리가 고요하게 올라와 점점 나를 꿈의 시간으로 인도하는것 같았다. 이런날을 좋아하지만, 또 이런날에는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해 몸과 마음이 느끼는 시키는데로 누워 눈을 감을 수 있는게 좋았다.

 비오는 소리와 함께 적당히 어두운 날씨. 비 맞은것도 아닌데 감기 기운 마냥 무거워지는 몸. 살짝 잠결에 스친 혜성이 거이 잠에 빠졌을 때.

의식이 희미해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살며시 느껴지는 감정들...

누군가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누워있던 그 미묘한 기분.

내 코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너의 향기.

 

"네가... 피..ㄹ 요해..."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신음에 가까운 음성.

빗물처럼 살며시 파고들어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나를 타고 빗물처럼 흘러 내려 나를 울게 되는 기억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할 기억 너머로 혜성은 더욱 깊은 잠으로 빠져 들때 쯔음. 그의 감긴 두 눈의 선을 따라 투명한 눈물 한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 내려왔다.

 

 

  

 

 공부를 잘했냐고? 사실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좋아하는 몇 가지에 대해서만 유독 관심이 높았지만, 그 덕분에 공부를 잘하는 척을 할수가 있는거였다. 고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하기 싫은 공부도 하는척 하니 성적이 좀 나오는 편이었고, 학년, 성적,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쓰게된 2인실 문을 딱 여는 순간 정말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어쩌면, 집을 벗어나고 싶다던 나의 답답함이, 내가 쓰게될 기숙사의 이 방에서 더욱이 퍼져 나왔으니까. 답답해 보이는 창문이 마치 감옥의 창살 같았고, 정돈되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방에 질식 기포가 가득한것 같았다. 게다가 책상 앞에 엎드려 수선스럽게 책장을 뒤적이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여기서 일년을 버티고 살아 나갈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짐을 가득 들고, 방에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한 나를 본척도 안하며 무언가를 찾아 들고 밝은 표정으로 쌩하니 나가던 그 학생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가, 겨우 한발을 방에 들이민 순간. "안녕"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낯선 학생이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씨익 웃는 그 모습, 그리고 서서히 퍼져오던 그의 향기에 나는 살짝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나의 입이 무의식 적으로 반응을 했다.

 

"안녕."

"나의 새로운 동거인이 너구나? 난 이민우야."

"...어... 난 신혜성"

"보시다시피, 비어있는 자리 쓰면 되, 나 급한일 있어서 다녀올게!"

 

자신의 할 말만 하고서 다시금 해맑은 표정으로 우다다 뛰어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제서야 나를 질식하게 하는게 저 녀석의 '향기'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거이 떨어뜨리듯 짐을 놓고서 자신의 침대가 될 침대에 털석 앉아서 대충 정리된 그....의 침대를 보면서 문득 무언가 틀어졌다는 기분과, 여길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함께 들었다.

 

 

 

 *

 

첫인상, 첫 이미지가 나빴다면 나빴다고 할 수 있는 동거인. 이민우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같은 학교를 2년이가 같이 다녔음에도 왜 자신이 그를 전혀 알지도 못했는지 그때는 이해를 못했지만, 사실 자신의 일. 자신 앞의 무언가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자신이었기에 어쩌면 가능했을 일이었다. 지저분한 방, 나를 쌩하고 내버려두고 간 것과 다르게 깨끗한 편이여서, 사소한것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오히려 나보다 나았다. 황사 없는날은 꼭 환기를 시키다거나, 이부자리를 아주 깔끔히는 아니지만 나름 반듯하게 정리하면서 세수하러 간 나 대신, 내 침대를 정리해 준다던가. 내가 흘린 물건을 챙겨 주는것 까지. 첫날의 질식 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였다.

 

"혜성아!"

 

아침잠도 많은데 비가 오거나 흐린날은 더욱 일어나기 싫은것 같았다. 그런날은 더욱 더 침대에 푸욱 빠져 있으면 저렇게 밝게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차분히 잠에서 깨어나면서 흐린 날씨에도 기분이 좋게 눈을 뜰수 있었다. "일어났어?" 네 목소리에 겨우 겨우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인 나를 내 침대 머리에서 내려다 보며, 내 앞머리를 흐트러트리면서 환하게 웃는 그를 살며시 올려다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오늘 모의고사 봐야는데, 늦잠 자면 안되지~"

"아... 모의고사구나... "

"눈 뜨자마자 시험이야기 해서 짜증나는거 아냐?"

"아ㄴ........ 잠.. 들ㄱ..... 싶어..."

 

아니.. 네 목소리가 좋아서.... 오히려 그 목소리 들으면서 더 잠들고 싶어.... 라고 잠결에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목까지 들어 올렸는데, 민우는 내 앞에 쭈구리고 앉아 내 머리칼을 지나 내 볼을 살며시 쓰다듬는거였다. 그리고 그가 오히려 조금은 더 가라 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잠들고 싶어도... 일어 나야지."

 

민우의 대답에 그때서야 제가 혼자 생각한게 아니라 웅얼거렸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낯설은 보드라운 손길이 볼에서 부터 데일듯 뜨겁게 퍼져나가 가슴이 크게 울려 충격을 먹은게 9월 모의고사. 그 때 였었다. 깜짝 놀란듯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혜성에 민우가 손을 떼며 어색하게 웃지만, 그럼에도 나를 보면서 다시금 자상하게 웃던 그 웃음. 그 웃음이 항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

 

"심란하게, 무슨 축제야. 정말. 코앞이 수능인데."

"왜 재밌잖아. 애들 재롱 부리는 것도 보고, 우리 데이트도 하고"

"... 데... 이트라고?"

"농담이야. 신혜성. 너가 그렇게 한심한듯 날 보며 말할 때마다, 나 되게 큰 죄 진거 같잖아."

 

한심한듯 말하지 않았어! 그냥.... 너가 모른척 하니까.... 단지 그뿐. 혜성이 민망한듯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에도 민우는 나를 보며 자상하게 웃었고, 내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 나를 제 품에 조금더 안았었다. 강당 2층 뒤쪽 자리라 누가 볼것도 아니었지만, 혜성은 괜시리 누가 우릴 볼까, 아니 우리 둘만의 시간을 누가 방해라도 할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민우의 손길을 어색해하며 꼼짝 않고 그러고 앉아 있었다. 민우의 스킨쉽은 누구에게나 같았다. 친한 친구들에게 어깨동무는 기본이며, 어떤 친구에게 기대서 졸고 있는 장면도 봤고, 한 여름에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를 물 장난에 상의를 벗고 친구들과 엉켜 있는 장면도 봤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하는 손짓 하나가 특별할 것도 없음에도 나는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었다.

미국에 살지만, 나랑 오랜시간 메일로 대화를 해서, 나의 일기장, 혹은 나의 분신같은 선호에게 내 감정을 말하거나 묻고 싶어도, 나의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고, 무언가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이민우! 거기 있었어? 방송반 애들이 귀신의 집 해놨데 구경가자!"

"내가 애냐? 그런데 안가."

"너네 동아리 후배들이 했다는데 선배가 얼굴을 비춰 줘야지!"

 

민우의 친한 친구 중 하나가 그렇게 저 멀리서 민우를 불렀다. 민우가 나를 돌아 보며 "같이 가자" 라고 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은.... 항시 이렇게 누군가의 방해로 끝이 났으니까. 당연한 거니까. 이민우가 이렇게 동급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잠들어 있는 이민우를 나 혼자 볼수 있는. 그의 향기을 원없이 맡을 수 있는. 나를 위해 시간을 쏟고 있다는 착각을 주게 하는. 기숙사의 좁은 우리 방을 좋아하는 나니까. 그러니까 나의 마음에 대해서 선호에게 물어 봐야지라고 결심을 하면서 혜성은 마지막까지 나를 한번 더 바라보는 민우에게 잘가라는 미소를 한번 지어주었다.

 

 

  

 *

 

갑작스레 열이 올라서 학교를 조퇴하고 병원에 들렸다가 기숙사로 돌아왔었을 때였다. 병원에서 링겔을 맞으면 열이 내릴거라고 했고, 집에 가봤자 부모님이 안계실거라서 혜성은 그냥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제는 기숙사가 더 편하고 좋다라는 느낌이 강해진 것을 애써 무시하며 침대에 파고 들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으며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딛쳤음에도 약기운을 취해 잠이 들었다. 

 

차가운 손길이 이마를 만지는 느낌에 설잠이 깼다. 그 손길이 내 볼살을 타고 흘렀다가 잠시 떨어지고, 다시금 차가운 손길이 이마에 와 닿는다. 혜성은 겨우겨우 무겁게 눈을 떠올리자 자신의 이마와 내 이마에 동시에 손을 올리고 온도를 재는 듯한 민우가 보였다. 살며시 웃음이 났지만, 웃기도 전에 드는 한기에 오들오들 떨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전혀 안괜찮은것 같아. 약은 먹었어?"

"어.... 아까 점심 때...."

"지금 열시야. 저녁밥도 약도 더 안먹은 거야?"

"....벌써... 열시야..?"

 

겨우 다시 눈을 뜨니, 민우가 다정스레 웃는다. 심리적으로는 몸살이 다 나은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지 몰랐어, 밥도 먹은줄 알았지, 초코우유라도 마셔. 시원한거 먹어서 열 내리고, 약 먹자."

 

나를 일으켜 세워 앉히자, 나는 머리가 핑 돌았고, 민우는 자신에게 기대게 한다음에 오는 길에 사왔는지 바닥의 봉지에서 우유를 꺼내 빨대도 꼽아 준다. 바로 앉으려 애쓰는 나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우유가 차가워 몸서리 치는 나의 어깨를 다정히 잡아 주는가 하면, 다 먹을 때까지 놓지 않겠다며, 내 몸과 우유를 꽈악 잡아 쥐어서, 나와 동시와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차가운 우유에 열이 식는가 싶다가도, 귓가의 스치는 그의 숨결에 몸살과 다른 열이 올랐다. 혜성은 우유를 마지막으로 다 빨아 먹기 전에 살며시 올려 민우를 바라 보았고, 그가 나를 보면 다정하게 씨익 웃었다. 분명 얼굴이 빨개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아파서 열이 들뜬 혜성의 볼은 불그스름 했다.

민우가 약까지 먹게 하고, 끙끙대는 혜성을 다시 눞히자, 돌아서 갈 줄 알았던 그가 바닥에 앉아 침대에 턱을 받치고 나와 같은 눈 높이로 나를 보고 앉았다.

 

"왜에... 너도 쉬어야지..."

"많이 아플까 봐."

"너가 바라보면... 아픈게.. 나아..?"

 

민우는 대답 없이 나를 보며 자상하게 웃었다. 그 눈매도, 그 입매도. 너무 자상하고 사랑스러워서... 혜성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기뻤던 마음으로 잠시 잊었던 뜨거운 열과 오한이 화르르 밀려와 몸을 떨며 웅크리다가 눈을 뜨니, 코앞에 이민우가 와 있었다. 놀라서 동그랗게 떠진 눈과 함께 잠시 숨을 참았다.

 

"혜성아..."

 

먼가 모르게 탁하게 막힌 목소리. 뭔가 모르게 대답을 못하겠는 혜성이 민우의 눈을 바라만보는데, 뭐랄까, 창 밖에 나는 빗소리마저 부유하게 하는 그런 기분?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열이 올라 뜨겁고 빨개진 혜성의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고 떨어져 나갔다. 그 가벼운 접촉에도 심장이 두근두근, 아픈것보다 더 많이 뛰었다. 어느틈에 멈춘 숨에, 숨이 찬건지, 아니면 이민우 때문에 숨이 찬건지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혜성은 제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민우를 올려다 보았다.

 

"너... 감기 옮아.."

"... 뭐라고?"

 

내가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의아한듯한 표정을 짓던 민우가, 하. 하며 맥빠진 소리를 하더니, 작게 하하하 웃어버렸다. 혜성은 말도 못하고 말똥말똥 눈만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금 드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민우가 침대위로 올라와 앉더니 내 이불을 들며, 내 옆으로 바짝 누웠다. 좁은 1인용 침대. 혜성은 뒤로 물러서며 공간을 만들었으나, 민우는 그런 혜성 앞으로 더 다가와, 머리 밑으로 팔을 넣어 머리를 받치고, 혜성의 몸을 살며시 끌어 안았다.

 

"너.. 감기...옮는다 고오..."

"밤새도록 추워서 끙끙 댈려고? 같이 자자... 대신에."

"...대신에?"

"내일은 꼬옥 감기 다 낫기."

 

어떻게 하룻 밤만에 다 나아... 라고 생각 했지만 나를 품에 안는 민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민우의 심장소리와, 어디다 둘지 몰라 배회하던 손을 잡아 민우의 등으로 편하게 옮겨줘서 저도 모르게 만지게 되는 그의 등의 라인과, 확 덮쳐온 민우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혜성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낯설지만 편안한, 어색하지만 포근한 느낌을 마음껏 느꼈다. 분명 열이나서 춥고, 오돌오돌 떨렸던 적도 없는것처럼 포근한 기분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저도 모르게 민우의 가슴에 제 얼굴을 더 묻었다.

 

톡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도, 새까만 어둠 속에 부유하는 습한 공기도, 아무것도 이 행복을 방해하지 못했다. 아픈 몸도, 잔뜩 오른 열도, 이민우란 사람의 향기에 나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모든게 행복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그립고 그리울.... 아늑하고 포근한 밤이 깊어져 갔다.

 

 

 

 

 

 

 
* Chapter _ M.W

  

"하아... 흐..흑... "

 

칡흙같이 어두운 방안에 침대에 푸욱 파묻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자그맣게 밷어내다가 결국은 억지로 눈을 떠올렸다. 원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꿈속에서 현실로 훅하니 당겨진 기분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서 뚜욱... 눈물이 흘러 내리자 다시금 눈을 감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깊은 숨을 몰아 쉬어도... 더이상 내가 그리워 하던 향기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꿈속을 헤매며 너를 찾아도, 나는 현실로 쫒겨나고 만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너 였는데.... 계속해서 손을 뻗어도, 다리가 아프도록 달려가도 잡히지 않는 너였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겨우 겨우 일으켜 침대에 걸쳐 앉으니 그제서야 삐삐삐~ 하는 알람이 울린다. 우리의 기상시간은 7시. 10분전인 6시 50분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의 포근함과, 너의 향기와, 잠든 너를 바라보면서 10분의 행복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살며시 일어나 너를 깨웠었다.

 

'일어나야지. 혜성아.' 나의 부름에 감긴 두눈이 살며시 떠지며 나를 올려 다 보며 작은 미소를 지을 때, 잠에 가득찼지만, 그래도 반짝이던 두 눈으로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다 볼 때....

 

민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 들어간다.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어둠속에서 세면대의 찬물을 틀어 그대로 얼굴에 뿌려 댄다. 계속해서 찬물을 얼굴에 뿌려대면서도 넘치는 눈물과 감정을 감추지 못해, 바닥으로 주저 앉아 버리고 만다. 차가운 바닥에서 부딛치는 아픔이 이제는 익숙해 질 정도다.

 

"하아... 아.... "

 

다시 한번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무리 곱씹어 말해도, 우리의 시간은 그때에서 멈춰 버렸단 사실을 알고 있는데, 민우는 수 없이 반복되는 꿈을 반복하고, 같은 시간에 잠이 깨고, 말을 반복하지만. 현실은 이렇게도... 차갑게 식어 버렸다는 사실을 몸서리치게 느끼며 민우는 제 무릎을 끌어 안아 고개를 숙인다. 아련히 느껴지는 너의 향기를 더 느끼고 싶은 지금과, 그게 아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공존 속을 부유하며 민우는 한참을 더 웅크리고 있었다.

 

"네가.. 필요해..."

 

다시 한번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벽부터 내린 빗방울이 유리창을 톡톡톡 두드리는 아침, 부유하는 공기속에서 조차 민우는 현실로 끌려오고 있었다.

 

 

 

 

 

*

 

 [도착 했어?]

"응. 저 앞에 입구 보이네, 왜 5분마다 전화해서 어디냐고 캐묻는 건데. 그럴거면 전화로 이야기 하지, 쉬는날 피곤하게...."

[너 쉬는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하고, 책읽고, 서치하고 할거 다하는거 알아.]

"나의 스케줄을 그렇게 뻔히 아는 사람이, 왜 갑자기 불러내는 건데."

[진짜 미안, 카페 들어갔지?]

"어."

[예약해놨어. 내 이름 대면 되.]

"예약...?"

[잘하고 와. 내 체면도 생각해 줘.]

"체면이 뭐...."

 

라고 말을 맺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허망하게 핸드폰을 내려다 보는 민우에게 종업원이 다가왔다. '자리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요. 하고 뒤돌아 나가고 싶었지만, 민우는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니, 종업원이 아주 친절하게 자신을 데리고 창가의 테이블에 데려갔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일그러지는 인상을 겨우 다 잡으며 앞에 풀석 앉은 민우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참아가며 억지로 웃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저는 이가람이라고 합니다. "

"네... 저는...이ㅁ.."

"문정혁씨 되시죠? 건축설계사 일하신다고 들었어요."

 

맑은 얼굴로 웃는 그 아가씨를 보며 민우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문정혁 너 오늘 망신의 끝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오늘로서 세번째로 그 녀석 대타로 선자리에 나오게 된 민우는 정말 내일은 내가 당신을 반 죽여 놓고 싶다는 열의에 차서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의 대타로 나왔으니 당연히 할말이 없었고, 내 선자리 였어도 할말이 없긴 마찬가지라서 민우는 거의 말도 없이 대꾸만 겨우 하고 있었다. 이제는 비가 그친 창 너머를 보다가 주문한 쓰디쓴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망신의 끝을 보여주고 싶지만.... 사실 그러지 못할 내 성격인것을 나보다 문정혁이 더 잘았으리라.

 

"말씀이 없으시네요"

"... 죄송합니다."

 

따로 할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모금 더 마시고 내려 놓다가.... 민우는 문득 그 아가씨 너머에 앉아서 대화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지금에야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민우는 그 사람을 눈에 담은 순간부터 내 앞에 앉은 아가씨와, 그 사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무시하고, 작게 미소지으며 대화를 하는..... 그 사람을 보았다.

잘못 본 것일까. 내가 착각하는 것일까. 착각은 두서너번 했었는데. 오늘도 그럴까? 민우는 잠시 눈을 감아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의 시선이 잠시 나를 보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신혜성이다.

 

"정혁씨...?"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대화를 마쳤는지 맞은편 여자에게 인사를 하며 일어선 혜성을 따라 민우는 급하게 자리에 일어났다. 그래도 예의상 얼른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뛰쳐 나왔을 때, 저 앞에 성큼성큼 걸어서 멀어지는 그가 보였다. 민우는 사람들을 헤치며 달렸다. 한걸음 걸음이 멀게만 느껴져서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에 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길로 겨우 그의 팔을 잡았다. 손목을 잡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손목을 보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 보았다.

 

"신혜성!"

"....."

 

가까이서 바라본 신혜성은 새벽 아침마다 바라 본 그 얼굴과 달라진게 없는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다고 그가 아니란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속에 쌓인 이질감이라고 할까. 하지만 나의 신혜성이란 사실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두 눈을 마주한 시선이, 그의 두 눈이 나를 바라본 시선이 교차하며, 내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혜성은 자신의 팔에서 내 손을 떼어내고 휙 돌아서 나에게 멀어져 갔다.

 

나의 뇌에게 물었다. 네가.. 잘못 생각 한거니...?

나의 눈에게 물었다. 네가... 잘못... 본거야?

나의 심장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로.... 날 착각하게 한거야?

 

이민우는 다시 한번 다시 그 뒷모습이라도 보았다.

신혜성. 너 맞잖아.....

 

 

 

 

 *

  

자신의 책상에 앉아 모니터 끝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집에 와서 더이상 아무일도 못 하고, 출근한 이후에도 이렇게 쭈욱. 나는 너를 생각 한다.

누군가와 약간의 미소로 대답을 하던 너와, 나를 보며,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조금은 성급하게 내 팔을 떼어 내면서 뒤돌아 섰던 너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앞에서 사라진 너에 대해서....  

주루룩. 바퀴 굴러 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책상에 무언가 쿵하고 와서 부딛친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또 하나. 왜냐하면 언제나 같은 패턴이니까. 민우는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민우가 한숨을 깊게 쉬면 입을 뗀다.

 

"왜, 또, 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왜, 또, 뭐가 어쨌길래 이민우씨께서 이렇게 죽을 상이야?"

"너네 문정혁이...."

 

탕비실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던 문정혁이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딱 한번만... 이란 손짓을 하며 싹싹 비는 포즈를 취하다가, 전진이 고개를 휙 돌려 바라보니 베시시 웃는다. 진이 쫘악 째려보자 정혁은 내가 뭐! 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민우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일하는 부분의 결과물만 빼면 바보같은 놈인데, 결과물과 진행능력과 재력이 뛰어나 젊은 나이에 사업을... 그것도 잘 운영해 나가는 내 직장의 사장님이라 민우는 입을 닫기로 했다.

 

"너네 문정혁이랑 어제는 즐거웠냐?"

"그거랑 너가 죽을상인거랑 무슨 상관인데?"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던 민우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제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전진. 너 이니까. 민우는 모니터에 다시 고개를 박는 문정혁과, 나를 천진난만하게 바라보는 진을 번갈아 보며 조심히 입을 떼었다.

 

"난 어제... 내 첫사랑 만난것 같거든...."

"같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

"분명 봤는데... 잡았는데... 고개 돌리고 가더라고...."

 

분명 문정혁에 대한 무슨 말을 더 해보라고 꼬치꼬치 캐물어야할 진이, 다시금 꺼낸 나의 말에 그냥 조용히 입을 닫았다.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다가 결국 또다시 같은 말을 했다.

 

"기다릴 수록... 너만 더 아플거야."

"...."

 

고개를 비틀어 진을 바라보자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앉은체로 제 의자를 끌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진은 항시 말해왔다. 내 스스로 아픈 길을... 선택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그러는 너는 그렇게 되더냐고 되물었을때. 진은 한참을 말이 없더니 씁쓸히 웃으며 그랬다. '나도 안되긴 하더라...'

그런데 진아. 그냥 나는... 그를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 되지 않아. 많이 아픈데. 그를 생각 하는 시간이 아깝지가 않아.

그렇게 뒷모습의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핸드폰을 보던 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정혁에게 달려드려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민우는 그제서야 눈을 돌렸다.

 

 

 

  

 

 

 * 

수능 전날이었다. 일찍 학교를 마치고 고사장을 한번 둘러보러 가려 했는데 혜성과 나는 다른 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기숙사에 들려 짐을 놓고 나가려고 들렸는데, 수험표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던 녀석의 옆에 앉자 그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멎적게 웃었다.

 

'시험 잘 봐.'

'너두 잘 봐.'

 

혜성도, 민우도 서로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민우는 그랬다. 수능시험을 봐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일이면 끝난다는 홀가분함. 그리고 이제는 굳이 기숙사에서 생활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설사 내가 여기 남아 있더라도, 혜성이 여기 남지 않을것 같았다. 그러면 같은 학교를 2년이나 같이 다니고도, 서로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게 멀어지는 걸까...

휴... 하는 한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민우가 다시 혜성을 바라보니, 혜성이 작게 미소지으며 민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끝이다.'

'뭐가."

'뭐긴 뭐야. 지긋지긋한 공부가 끝이지. 학교 안나와도 되고, 야자 안해도 되고, 늦잠 자도 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니 결국 말끝을 흐리던 혜성이 민우에게 좀 더 몸을 돌려 바라 보았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의 얼굴이, 꽤 가까이에 있었다. 습관처럼 그에게 어깨 동무를 했던 내 팔안에서 그는 나를 더 바라보는 순간, 나는 다른것보다 그의 눈동자, 그의 숨결을 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재잘거리는 입술까지도.

 

'너.... 는 좋겠다.'

'너는 안 좋아?'

'조금은.'

 

아쉬움이 잔뜩 묻어난 민우의 말투에 혜성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 내 눈이 감기기 직전 그의 동그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열에 달떠 뜨거웠던 입술과 다르게 그의 폭신한 입술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심장이 정말 빠르게 뛰면서 가만히 있는 그를 좀 더 끌어 당겨 안았다. 마치 그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나에게 까지 전해 지는듯 했다. 내가 힘을 줘 그를 안았는데도 내 손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몇시간 같은 몇초의 입맞춤이 끝이 나고, 민우는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떠 혜성을 바라보았다.  저번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맨정신에 이러면... 기숙사에서 짐을 빼듯, 나도 그의 마음의 자리에서 완전히 빠지는 걸까.

 

'그... 어..... 음...'

'.......'

'가... 가볼게. 너...너도 가 봐야지.'

 

그렇게 떠듬떠듬 말하며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선 혜성이 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가방을 훌렁 매고 방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혜성을 따라 벌떡 일어선 민우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마지막 일까봐... 민우는 조금 겁이났다. 

문 앞까지 걸어갔던 혜성이 머뭇거리면서 다시 뒤돌아 오더니 민우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품에 안겨 들었다. 내가 갑자기 입맞출 때는 언제고... 갑자기 품에 안겨 드니 어쩔줄 몰랐던 민우는 저도 모르게 굉장히 세게 혜성을 끌어 안아 버렸나 보다. '윽' 하는 그의 신음소리가 들려서 급하게 팔을 풀렀으니까. 그리고 나를 보며 생긋 웃던 그가 손을 흔들며 '화이팅' 이러고 가버렸다. 적어도... 잘못된건 아닌것 같아 기분 좋게 웃으며 민우는 방을 나왔다. 방 정리는 최대한 천천히 하리라 마음 먹으면서. 수능이 끝나고, 시험 잘 봤냐고 연락을 했을 때에는. 자주 메일을 쓰며 너무 좋아하던 선호인지, 뭔지 하는 동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완전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행복의 끝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 괜찮아 질거라고 생각 했다. 고등학교때 친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락 안되는 사람도 많았고, 남은 인생도 많았고, 딱히 너무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만... 무언가 공하하고, 무언가 무기력하고, 무언가 감정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했었다. 어느날 길 한가운데에서 나를 좋아한다던 사람과 함께 가다가, 신혜성이 아니었는데도 신혜성이라 착각하고 차도 한복판으로 뛰어든 사건 이후로 내가 이렇게 공허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나를 돌아섰을 때, 내가 막아서야만 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행복은 그때 끝이 났다는 사실을... 인정 해야만 했다.

 

 

 

 

 

 

 * 

주르륵 탁. 자신의 책상에 부딛치는 진의 의자 소리에 그를 한번 쏘아보지만, 그는 개구장이 같은 미소와 함께 눈짓으로 내 핸드폰을 바라본다. 열심히 울리는 진동 소리도 못듣고, 이 회사 사장이 인터뷰 하신 잡지를 찾으려다 무심히 넘기기 시작해 이제 3분의 2도 넘게 넘겨버린 잡지를 책상위에 두고,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네, 사장님. 변경사안 메일로 넣어 드렸는데 보셨습니까? ......."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진은 그렇게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내가 펴 놓은 잡지를 보고 있었다. 쓰윽 바라보니, 문정혁 사장님의 기사가 아닌 다른 페이지였다. 그나저나, 이제 문사장님 얼굴 팔려서 대타로 선보러 안나가도 되는건가? 민우는 그런 생각을 굳이 진이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볼거면 가져가서 봐. 너네 문정혁씨 나왔으니 아예 잡지를 10부씩 사던가"

"너 책도 좋아하잖아. 이 책 봤어?"

"무슨 책인데?"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기분에 대해서 말을 늘어 놓기 시작하면, 할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고, 말하자니 아깝고, 말 안하자니 답답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째든, 쉽게 말을 하고 싶진 않아 민우는 진의 말을 대꾸 하는 척 했다.

 

"너도 읽어봐. [열병]이라고 이번에 어디 문예공모전에서 우수상 타서 핫하게 뜨는 작가야. 약간 로맨틱 소설 같은 느낌이 나긴 해도 줄거리가 탄탄해서 완전 재밌어. 이 사람 원래 시나리오 작가 였다는데. 나도 지금 보고 있는 중이라.....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이 중얼 거리는 진을 보다가 그가 펴고 있는 페이지를 보니, 잘생긴 문사장님 얼굴이 대문짝만하네 실릴거라고 자랑하던 것처럼 작가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리진 않았다. 아마 다른 관련있는 사진들만 잔뜩 있는것 같았다. 민우는 눈을 떼고 다시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진이 잡지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전화주신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부응해야 할 시간 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민우야"

"응."

"현우가 그러던데 너네 오늘 동창회라며?"

"동창회? 그게 오늘 이었나...."

"어. 킥킥킥. 내가 이 작가 이름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가명이였다네, 아쉽다.... 근데 이 작가 신상은 알려진게 하나도 없나봐"

"어... 너는 그만 돌아가서 네 일이나 하는게 좋겠다."

 

진은 회사에 입사 후 친분을 나눈 사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의 친구였었다. 그래서 소문이 돌고 돌아 이렇게 전해지는 일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민우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성의 없이 대꾸를 해도 진은 옆에서 계속 그 책에 대해서 떠들었다. 귀를 닫으며 클라이언트가 했던 말을 되세기려 노력하며 관련 파일을 열어 보는데 진이 두꺼운 잡지책을 탁 덥으면서 그랬다.

 

"아무튼 읽어봐! 근래에 본 책 중에 최고였어. 인터뷰한것 보니까 진심으로 좋아했던 첫사랑을 생각하며 썼대. 로맨틱하지 않냐?"

"그거 로맨틱 소설이라며, 당연한거지."

"환타지 소설인데. 로맨틱한 요소가 있다고. 너도 읽어봐. 주인공들이 남자니까."

 

민우가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 보았다. 참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다. 남자 주인공의 로멘스가 주가 아니더라도 그런 이야기가 공모전에서 상도 타고, 인기도 많고.

아니지, 어쩌면 주가 되지 않았기에 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일수도 있다. 최우수상이 아닌 우수상인 이유일수도 있겠지. 그리고 진이 진지한 눈빛과 표정으로 추천하는 것을 보니 읽을 목록에 추가 하는것도 괜찮아 보였다.

 

"현우가 오늘 동창회 꼭 나오라던데? 장소 시간 알지?"

 

두서없이 말하는데 천재라니까, 그래도 주제가 두가지 중에 하나라서 오늘은 다행이지, 아무튼 문자를 지우지 않았으니 장소 시간을 알아내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동창회... 작년까지는 혜성이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올해는.... 그가 나올까...?

 

 

작지만 간절했던 기대는.  고요하고 차갑게 부셔졌다. 그렇게 부셔진게 비단 어제 뿐만은 아니였다.

수능 다음날이 학교를 쉬었음에도 나는 신나고 활기차게 하늘을 날듯이 기숙사에 들어섰다. 수능이 끝나서가 아니고 혜성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어서였다. 방 문을 열자마자 품어져 나오던 그의 향기에 신나서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들어섰다. 그의 침대를 손으로 쓸었다가, 내 책상에 앉아 어제 산 새로운 캠코더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른 친구가 불러서 캠코더를 놓고 나갔다 왔을 때. 방에 혜성이 와 있었다. 그리고 혜성은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불행하게도 그날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잊고 싶어서 잊은건지, 놀라서 잊은건지 잘 모르겠다. 어째든 그렇게 혜성은 방을 나갔고, 내가 없는 틈에 혜성이 있었다는 흔적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든 짐을 가져가 버렸다. 학교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졸업식날도 오지 않았다. 건너건너 들은 말로는 미국에 갔다고 했다. 그 친한 동생이라던 선호인지를 따라 간것인지, 여행을 간것인지는 건너건너 들은거라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기억도 잘 안나지만, 지금은 확실한 사실을 하나 안다. 나는 그때, 뒤돌아 섰던 너를 잡아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

 

주르륵 쿵. 익숙한 소리.민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꾸를 했다.

 

"왜, 또, 뭐."

"형아가 널 위해 선물을 준비 했어!"

"필요 없다고."

 

아주 기운 없이 느려진 내 말투가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진은 내 책상위에 책 한권을 쾅하고 올려 두었다. 곁눈질로 옆을 보니, [열병] 며칠전 그가 말한 그 책이었다. 책과 진을 번갈아 보니 진은 빙그르르 웃는다.

 

"신혜성!"

".... 뭐?"

"오~ 역시 니 첫사랑이 신혜성이구나?"

"너.. 뭐야. 너!"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혜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심장이 저리게 아프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내 감정을 인정한지가 몇년 되지 않아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사람도 없었고, 어쩌면 내 사랑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했던 사람은 오히려 진이 유일 했지만, 그건 그의 존재. 내 감정이었지, 그 이름을 입에 올린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 이름을 알고 있지? 놀란 민우와 달리, 다 안다는 듯한 진이 빙긋 웃었다.

 

"현우가 전화해서 니 욕을 엄청 하더라. 동창회라고 나와서 니 스스로 먼저 꺼낸 말 한마디는 '신혜성 연락되니?' 이거 하나 였다고."

"룸메이트.. 였거든.."

"그래서 그 룸메는 좋아만 하고 고백이나, 연애는 못 해봤구나?"

 

다 안다는 듯이, 마치 어린애 달래듯 말하는 진. 그래도 사무실의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다른 여직원이 음악을 틀어둔 것이 우리의 말이 멀리 퍼지지 않게 도움이 되어서 진이 오히려 대놓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저 멍청한 표정과 콱 막힌 목구멍을 가지고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네 말투, 행동. 좀 의아한 부분이 있었어. 무언가 너가 말하려는게 "여자친구"라는 느낌은 좀 없었지. 정혁이 형이랑 나랑 대하는거 봐도 이쪽에 거부감도 없어 보이고... 뭐 아무리 니 사장이 문정혁이래도 말야."

"...."

"아무튼 난 신혜성은 모르지만 넌 응원해 줄게. 대신, 너만 응원하는거야. 니가 그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면 난 그 사람이 미워."

"... 그래.."

"너희들 자꾸 땡땡이 치지?"

 

진은 화들짝 놀래는 시늉을 하면서 해실해실 웃었다. "아이구 사장님 우리는 일적인 대화 중이였어요" 하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진은 나에게 "읽어봐. 마음이 따뜻해 질거야" 라고 작게 말하고, 다시 의자를 주르륵 밀고 나에게 멀어져 갔다. 한심한듯 진을 바라보던 정혁이 소리쳤다.

 

"걸어 다녀! 보드라도 되냐? 의자라고 의자!"

"바퀴달린 의자의 바퀴를 굴리는 건데. 왜?"

 

그렇게 투닥거리는 소리에 저쪽에서 음악을 틀어놨던 직원까지 시선을 들어 이쪽을 보고 웃었다. 정혁은 "성북동 빌딩에서 문제 생겼어. 얼른 가봐" 라면서 진을 내쫒았고 진은 "거긴 왜 매번 문제라는 건데!" 라며 짜증을 내며 짐을 챙겨 일어섰다. 저런 사소한 투닥임 마저 부러워진 민우가 아련히 그들을 바라보다 진이 사무실을 나가자 마자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고개를 돌리다가 진이 두고간 책을 바라 보았다. [열병] 어쩌면..... 나는 아직도 열병을 앓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너는 가평 좀 다녀와."

"가평?"

"사모님이 거기다가 전원주택을 하나, 멋지게 짖고 싶으시다고.... 너가 다녀 와."

"그쪽은 사장님 전문 이잖아요. 이 바닥에서 사모님이 사장님 얼굴 보고 계약서 싸인 한다는....."

 

탁, 하고 어깨에 무거운 손길이 내려 앉았다. 민우는 네네, 하며 더이상 아무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자랑하고 다닌건 오히려 사장님 본인이면서.

 

"요즘 계속 저기압 이던데, 바람이나 쐬고 와. 그 사모님 고상하신 분이고, 까탈스런 분도 아냐"

"......"

"그 옆이 친구집이라 거기 계시다니까, 가서 연락 드림 되. 나 빚하나 갚은거다?"

 

빚. 그를 대신해서 나간 맞선 자리들... 그렇게 빚이라 말하며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사장님이라 어쩌면 맞선 자리에 대신 나가 앉아 있어도 투정 어린 말 밖에 하지 못했던것 같기도 하다. 정혁이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내가 계속 일에 집중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음에도 정혁은 타박이 아닌, 기분 전환을 권하니 어찌 미워 하겠는가. 민우는 결심이라도 한듯 한듯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서 하던 일을 저장했다. 그리고 짐을 챙겨 나가려다 말고, 진이 준 책도 같이 집어 들었다. 

 

 

 

 

 

 *

 

봄에는 유독 비가 잦은것 같다. 오늘도 대낮인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새까매졌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창밖의 가로등으로 어스름히 빛나던 방안과, 그 안에서의 열에 달뜬 뜨거운 숨결과, 처음 느껴보는 좋아하던 이의 뜨거운 입술을 느꼈던. 시린 비가 창문을 톡톡톡 두드리던 초겨울이 생각이 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냥 이런 부유하게 습한 기운이 비슷할것 없는데도 그 날을 기억나게 했다. 그날의 달뜬 기분에 열이오르듯 제 입술을 핥던 민우가 다시금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빨간 신호등 앞에 정차 중이기도 하고, 그를 느끼고 싶기도 하지만 괴로움이 몰려올게 뻔해 생각을 돌리려, 민우가 고개를 돌려 보조석을 보자, 정혁이 프린트 해준 자료들. 내 가방 그리고 진이 주었던 어두운 남색에 금색 테두리의 거울 같은 곳을 바라다보는 남자가 거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진, '열병'이란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읽어봐. 마음이 따뜻해 질거야'

 

민우는 그 책을 집어 표지를 가만히 바라다 보았다. 거울안에 있는 남자가 거울처럼 똑같은 모습 임에도 조금 비켜서 그 남자가 들어오게 인도하는듯 했다. 자신의 세계로, 자신의 옆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는... 것일까...? 내가 혜성, 너의 옆에 이렇게 다가서면... 안 되는 것일까?

 

민우가 자꾸만 날씨와 감정에 취해 들어가는 자신을 느낀다. 더욱이 짙어지는 향기와 아련한 기억에 숨이 막힐듯한 민우가 이렇게 빠져 버리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정신을 놓을까봐, 다시금 숨을 깊이 내쉬며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다가 건너가는 사람들의 끝을 보는 순간. 민우의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신혜성이다.

신혜성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빵빵, 경적소리가 꿈을 깨우듯 민우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민우가 재빨리 신혜성을 다시 바라보면서, 최대한 빨리 갓길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렸다. 반대편에 있는 혜성은 멍하니 앞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축 늘어진 손길,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 커다란 가디건 때문인지 어깨가 굽은듯한 모습. 내가 알던 혜성은 저렇게 기운 없게 멍하니, 앞만 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알 수 있다. 그가..... 내가 아는 신혜성이란 사실을.

 

 

 

 

 

 

 *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가 천천히 한발을 내딛이면, 나도 한발을 같이. 그가 잠시 멈춰 서면, 나도 같이 멈춰 선다.

그가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면, 나도 하늘을 같이 바라다 보고, 그가 길가의 꽃잎을 만지고 지나자, 나도 그의 손길이 닿은 꽃을 바라 본다.

조금은 더 말라 보인다. 학생때는 또래보다 더 어려 보이고 무언가 꽉 차보이는 행복감을 주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어려보이지만 쓸쓸하고 비어 보였다. 그저 하염없이 계획없이, 목적도 없이 걷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서 민우는 뒤에서 그만 보고 걸었다.

 

어쩌면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나고 오롯이 너만 생각 하던 나에게 화를 내고 가버리는 그를 잡지 못했다. 나에게 분명 핸드폰 번호가 있었음에도 딱 한번 꺼진 전화에 전화를 하고, 음성도, 문자도 남기지 못했었다. 오해를 풀라던지, 잘못했다던지... 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더 후회되고, 더 미련이 남았을지 모른다. 한동안은 그를 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에, 톡톡톡 창을 울리는 빗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새벽마다 허무하게 잠에서 깨어나고, 소리없이 흐르던 눈물의 의미를 알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알고 나서는 잊으려고도, 그를 찾으려고도 노력하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이 사라진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용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가 보고 싶어 울고, 울고, 울었다고. 나를 돌아설 때 막아서야 했다고 그렇게 생각 했으면서도....

나는 또 이렇게 용기 없이 너의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멈춰 섰다. 한참을 앞을 보더니 그 앞에 있는 횡단보도가 아니라 옆에 있는 횡단보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우는 그 자리에 서서 혜성을 바라 보았다. 무심한듯 옆을 보던 혜성이 그제서야 민우를 발견했다. 서서히 내 쪽으로 조금 돌아선 그가, 표정도 없고, 말도 없이 나를 바라 보았다. 학생때의 맑게 웃는 얼굴이 아니라, 더 하얗고 무심해진 감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전 무표정한 표정 그대로였지만 나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나도 온전히 그만 바라보았고, 그도 나를 곧이 바라 보았다.

지금 너와 나의 거리는 2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마음은, 아마도 더 없이 멀리 떨어져 있겠지?

 

 

"뭐해?"

 

한참만에 먼저 용기를 내어 말을 건것은, 혜성이었다. 아주 작고, 입 모양도 거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민우는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소리. 시끄러운 도심 안에서도 나는 그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신호등이 두번이나 바뀌고,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번잡한 길 가온데에서. 우리는 마치 멈춰진 시간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한참을 서로만 바라 보고 있었다.

 

 

"너... 보고 있었어."

 

단순히 그랬다. 나는 그냥 너를 보고 있었다. 용기도 없고, 두렵기도 했다. 이번에도 내가 널 잡으면 학생때처럼, 얼마 전처럼, 네가 내 손을 뿌리치고 갈까 봐. 내가 지금 너를 보고서도 네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걸까 봐. 하지만 좋기도 했다. 신혜성이란 사람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도, 너가 나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도. 단지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너무 행복했다. 길거리 한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와 나를 이상하게 바라 보아도, 나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서 다시금 학생때의 기숙사 방에서처럼 부유하는 공기에 감싸여 붕 뜨는것 같았다.

 

"왜?"

 

비어버린 목소리로, 비어버린 표정인 그가 물었다. 민우는 그를 따라오면서 놓치지 않던 시선을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 지금도 너무 행복한데, 네가 왜냐고 물으니.... 내가 대답하는 것에 따라 다시 나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야 할까...?

하지만 민우는 제 입술을 꾸욱 닫아 물었다가  곧이어 시선을 들었다.

 

 

 

 

 

 

 

 

 

 

 

 

 

 

 

 

 

 

 

* Chapter _ M & S

 

비가 한방울씩 톡톡톡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톡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기 시작하면서, 자리에 앉은 혜성은 몸인지 마음인지 모르지만 더욱 무거워 짐을 느꼈다. 비오는 날도 좋지만, 비오는날이 주는 무게감에 우울감에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몽롱하고 무거운 기분에 사로 잡힐것 같아 혜성은 제 몸보다 훨씬 큰 가디건을 더욱 단단히 움켜 쥐었다. 그럼에도 의도치 않게 혜성은 회상에 빠져들었다.

 수능이 끝나고, 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선호 였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친동생보다 가까웠던 선호가 말도 없이 날 보러 한국에 왔기에 너무 놀라고, 수능이 끝난것 보다 더 기뻤었다. 그 다음날까지 들뜬 마음으로 기숙사에, 민우를 보러 왔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것은 다름 아닌 민우의 소문이었다.

 

'이민우 여자친구 있다는거 진짜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한지 한참 된것 같던데? 얼굴을 봐라 그게 고3얼굴이야? 맨날 화창했잖아'

'캠코더도 샀다는데 혹시 알아? 거기 여자 친구랑 키스하는 거라도 찍어둔거 아니야?'

'야, 캠코더도 샀는데 키스 하는것만 있겠어?'

 

선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귀는 '김동완'과 사귄다고 나한테 일년이나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국 사람은 보수적이라는 것. 그래서 막상 한국에서 유학 온 동완을 만나고 사귀고 하는 과정에서도 난관이 수두룩 했다고 했다. 수능 끝난날 선호가 나를 만나서도 그랬다. 미국에서 조차 동성은 많은 난관이 있으며, 아웃팅 당할 뻔 한적도 있다고 했었다.

그때는 내가 이민우가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던 때라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도 되는 말에 내가 과민 반응 했었다. 그와 나눈 키스와 포옹이 좋았는데, 그것들이 돌고돌아 이렇게 소문으로 남아 나를 조롱하고, 아웃팅 당하는 것은 나 혼자 일것 같았다. 여자친구도 있는데 입을 맞춘 동성 친구라면서, 나를 얼마나 비웃을까, 얼마나 나를 쉽게 보았을까. 그런 혼자만의 시나리오에 빠져서 헤메였었다. 그때 당시 유명 연예인 동영상이 유출되서 떠들석 했던 때라, 나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밖에 못했었다. 어리석고, 바보 같았는데도..... 그때 나는 그랬다.

 

 

 

 

"어디... 아픈거야?"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혜성이 눈앞에 새까만 커피를 내려 놓는, 익숙하고 마른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들어 커피를 준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이민우... 이민우가 있었다. 내가 아는 이민우가 맞는걸까?

 

가끔 이렇게 할일 없이 길거리를 헤메이곤 하는데 헤메일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한번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선호에게 전화를 해서 이선호와 김동완이 기겁을 해서 데릴러 온 적도 있었다. 이럴땐 정말 선호가 한국에서 살아서 다행이었다. 방금도 그랬다. 그냥 하릴없이 헤메이다 정신 차리고 집에 오는 길이었고, 눈앞에 이민우가 있었지만 환영을 보는것인지 아닌지 몰라서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던것 같다. 그 시간이 한참이었던것 같으면서도 짧았던것 같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불분명 했지만 상관하고 싶지도 않고, 상관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이민우가 앞에 있는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기분이었다. 비가 와서 붕 떠버린 공기처럼, 내 마음도, 내 몸도, 내 정신도. 모두 다 뭉트러져 붕 떠있는것 같았다.

 

"혜성아, 어디가 아픈데?"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온몸에 가벼운 전율이 흘렀다. 그로 인해 생긴 가벼운 현기증을 몰아내려 그러기도 했지만, 딱히 아픈것도 아니기에 혜성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앞의 뜨거운 커피잔을 양손으로 잡았다. 손안에 따뜻한 온기가 퍼져 올라왔다. 커피의 향긋한 향도 은은히 퍼져 올라오니 조금이나마 각성이 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끝나버린 우리의 시간이, 내가 그때 어리석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지금에야 다시 이렇게 만나서 다시 할 이야기가 있을까?

내 앞에 있는 이민우가, 내가 아는 이민우인지 확신을 못하는 것처럼, 이민우도 그러겠지? 내가 아는것보다 모르는 시간을 더 많이 살아오고, 내가 알던 시간보다 더 성숙해지고, 변해버린 그가.... 내 앞에 있겠지?

방금도 그런 상황이었잖아. 본적 없는 양복을 입고, 본적 없는 머리 스타일에,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이민우 인데, 이민우 아닌듯한 낯선 느낌의 얼굴로 내 손목을 잡고 카페에 들어와서 주문을 하면서 '초코우유...'라고 말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멎적게 웃으며 '뭐.. 마실래?' 라고 물은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아는것보다 모르는게 더 많고, 너무 많이 변해 버렸겠다.....

그런 너와 내가  왜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

 

비가 한두방을 떨어졌지만 혜성은 아무상관도 하지 않는것 같았다. 민우는 신호등이 켜지는 것을 핑계삼아 그의 팔을 잡고 뛰었다. 내 손길에 얼결에 따라온 그는 바로 횡단보도 앞에 있는 카페에 발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작게 헉헉거리는 그 숨결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민우는 저도 모르게 혜성의 팔목을 조금 더 세계 쥐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 쉽사리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커피를 앞에 놓고 입도 대지 않고 창밖만 무심히 바라보는 혜성을 바라보니 그런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잡으려 항시 손을 뻗어도 잡지 못한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런것 같기도 했다. 현실을 보면서도 옛기억이 하나 둘 떠오른다. 아침이 오기전 어스름한 새벽녁에 눈을 떠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곤히 잠들어 있는 네 모습. 가만히 감긴 두 눈과, 얼굴의 곡선의 솜털부터, 숨쉬느라 오르내리던 가슴까지도, 다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렇게 바라보니 진하게 풍겨나오던 너의 향기마져도 내가 묻고, 잊으려던 노력까지도 허물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세세하고 기억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대상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과거로 빨려 들어간듯 하고, 더없이 행복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그가 움직이면 다시 화들짝 현실로 끌려왔다.

 

"비가... 안왔으면. 나랑 여기 안왔을 것 같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파 보이는 혜성이 지금이라도 휙 쓰러질까봐 겁부터 났다. 더워지려는 날씨에도 두껍고 커다란 가디건에 몸을 감싸고 있었고, 커다란 가디건 끝에 삐죽 나온 하얗고 마른 손가락, 얼굴은 너무나 창백해 도자기 인형 같아 보았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그가, 내 눈앞에 있는 그가, 움직이는 그가, 참 다행이고, 행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조금은 무서웠다. 커피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그가. 날 완전히 무시한것 같아서 참 아팠다. 날 이렇게 무시하듯이, 너는 지금이라도 일어나 이 카페를 나가 버릴까? 그때 우리의 마지막 순간처럼 , 네가 그냥 일어나 나가버리면 나는 아파서... 다시금 오늘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까? 기억이야 잃어도 좋다. 나는 널 잃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번에는 거절하기 어려울것 같아서 따라 왔을 뿐이야."

 

도저히 대답이라곤 하지 않을것 같던 혜성이 그제서야 민우를 바라보며 대답을 했다. 그것도 대답과 동시에 시선은 커피를 향했지만.

얼마전, 문정혁 대신 선 보던날, 네가 맞았구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날 두고 돌아섰던 날, 네가 맞았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다. 네가 맞아서....

민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행복했다. 어째든 지금은 혜성이 내 앞에 앉아서, 내 말에 대꾸를 하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그날 혜성의 앞에 앉아 있던 여자는 누구 였을까?

 

"그날은 왜 모르척 했는데?"

"......"

"내가 아직도 미워?"

 

 

미워? 혜성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지며 의아한듯 민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날 보니 내가 조금 심각하게 우울증이더라. 원인이나 이유는 몰랐어. 그런데 길거리를 한참 헤메이던 어느날, 비에 흠뻑젖어 쓰러지기 직전, 나를 보며 웃는 너를 보았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순간 나의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지.

그땐 내가 어렸어. 너무 어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너는 너무 좋은데, 우리가 행복해지는 일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여서, 나를 제대로 인지 하지 못하고,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 그런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바보같던 나의 행동을 인정하고, 너를 인정하며, 널 진정 놓아줄 수 있었어. 그래서 이번에 공모전에 당선된 내 책 [열병]을, 내가 너를 사랑하고, 그 감정을 진실로 알고, 잘못을 빌며 너를 보냈기에 완성 할 수 있던 글이었다고. 그런데 우습게도.... 공모전에 당선된 책 때문에 잡지사 인터뷰 하는 자리에서 널 만났는데, 한눈에 알아봤는데, 네가 날 잡았는데도. 난 널 모른척 했어.

  

"네가 미울 이유가 없지."

  

그 앞에서 수줍게 거울을 보며 널 기다리던 아가씨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더, 너를 놓았던거라고. 말을 할 일은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무심한듯 민우를 보지 않고 대답했던 혜성을 보면서 민우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한번 잘게 씹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니"?

"... 그래."

"하나도 안변했어, 신혜성"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혜성의 시선이 이제서야 올곧이 나를 바라보았다. 신혜성.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 이민우는, 너 정말 사랑했었어. 네가 옆에 없어도. 연락이 되지 않아도. 널 그리며 살아 왔었어. 그랬기 때문에 난 너에 대해서 많이 알아. 그리고 널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모든게 다시 떠올라. 넌 내 눈을 바라보지 않을 사람이 아냐. 대답하기 곤란하면 앞을 흐린다는것도 알아.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네가 생각 하는 것보다는 널 잘 알아.."

"네가 뭘 알아. 안다 해도 그건 아주.... 아주 아주 오래전..."

"오래 전인데,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잖아."

"변하지... 않아?"

 

소낙비가 거이 그쳤다. 덕분에 카페 안은 다시 한가해졌다. 처음엔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오히려 말꺼내기 불편했지만, 비가 그쳐가니 사람들도 하나둘씩 다 나가고 제법 한가해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비로 인해 부유해진 밖의 소리.  진동하는 실내 공기와 생각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감정 속에서도 나는 너만 보았고, 너는 나만 바라 보았다. 우리가 알던 시간은 아주아주 오래오래 전인데, 우리는 서로만 바라보았다. 

여전히 민우는 혜성이 초코우유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내가 억지를 쓰며 말을 흐린다는 것을 알았고, 19살, 그때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졸린눈을 비비며 겨우 눈을 뜨면, 나를 잔잔히 내려다 보던 민우의 눈빛을.... 몇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다시 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변하지 않은 것일까?

 

"그날. 아무 감정도 없기 때문에 날 그렇게 모른척 했어?"

"...."

 

나는 그때 너를 잡았어야 했어. 나는 그때 너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너에게 물었어야만 했어. 그때 내가 어리고, 어리숙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그렇게 놓치지 않았겠지. 너를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보고, 너를 이리 오랬동안 그리워 할 줄 알았다면... 바보같이 멍하니 네 뒷모습만 보고 있으면 안되었었어. 그때 나는 너와의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보고 있어도 그립고, 네 움직임, 숨소리, 행동 하나도 내 눈에, 내 마음에 담지 못해 속상했었단 사실을 몰랐었단 말이야.

지금도 톡톡톡 빗방울 소리가 창가를 두드릴 때면....  너의 보드란 살결과, 네 뜨거운 숨결이 내 살을 간지럽히던 날. 내 품에 안겨 눈을 꼬옥 감고, 살며시 떨리던 손길이 보드럽게 내 허리를 끌어 안던 그날. 그날이 떠올라....  나는 그날을 절대 잊을 수가 없어.

 

"혜성아...."

 

나의 입술에 천천히 다가와 맞닿았던 그날의 너의 보드란 입술도, 날 품에 안으면서 확 밀려 들었던 그 향기도. 내 열보다 더 뜨거웠던 네 체온도.

너를 인정하고, 내 잘못을 인정하고, 너를 지워냈기에 쓸수 있던 글이라고 자신했는데...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보드러운 그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단어 하나에.... 나는 내가 너를 잊었다면 자신했던 과거를 산산히 부수어 버렸다. 나란 사람은 아직도 바보같이 몰랐던 것이다. 비가 오면 그 달뜬 기억에 숨이 막혀와, 잊기 위해 잠에 빠지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찾던 너의 향기와, 너의 포근함을 그리며 포근한 가디건이나 이불에 내 몸을 뉘인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를 이렇게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는 것이, 너란 존재 였다는 것을 나는 바보같이 울고 울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다정했던 너의 목소리 하나에 나는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데도....

 

혜성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다른 감정이 내 몸을 지배 하는듯했다. 그 열기가 나의 무기력하던 몸에 열을 불어 넣었다.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

"혜성아."

"...."

"다시 한번만.... 널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

 

 

 

 

 

 

톡톡톡. 빗방울이 창가를 적셔 온다. 그리고 그 빗방울이 나를 적셔 온다. 그리고 그 빗방울이 내 몸 안에 숨어있던 옛기억들, 그리고 현제 진행형인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의 말한마디에 나의 하얀 손끝에서 분홍 꽃잎들이 피어 올랐고, 쓴커피의 향이 향긋하다 생각 했든데, 더 달콤하고 보드랍게 나의 코를 적셔왔다. 그리고 그 향이 이민우의 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비오는날 다 잊고자, 잠들어 버리면서도 어렵풋이 생각나던 그 향기의 끝은 너의 향기였고, 내가 행복하다고 아련히 느꼈던 그 기억이 너의 향기로 시작해, 너의 품안에서 잠든 그날이었다는 것을, 네 향기 하나로 알게 된다. 내 몸안이 따뜻해 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무언가, 하고 싶다던 기분을 고등학생 이후로 처음 느끼게 해준 사람이, 다름아닌 그때 좋아했던, 잊고 지워서 아무것도 아닌 추억이라고 생각 했던...... 바로 내 앞에 앉은 이민우라니... 혜성은 제 양손을 말아 쥐며 큰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

 

혜성이 비틀 거리며 겨우 일어섰다. 카페 들어오면서 부터 유독 아파보이는 혜성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니 쓰러질까 불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그를 부축하려 손을 뻗다가 민우는 제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내가 잡으면 나를 다시 뿌리칠까...?

'그땐 어렸어, 그때는 세상에 시험이란것 밖에 없고, 친구들 밖에 없었어. 그때는 다 착각이였어. 그리고 너무 오래전이야... ' 이런 말 하면서 나를 뿌리치고, 군중들과 시간 속으로, 나의 과거 속으로 다시 돌아가 버릴까? 나를 현실에 버려두고, 가버릴까? 

나는 너를 다시... 놓아야 될까? 

 

힘겹게 발을 내딪여 내 옆에 선 혜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그의 약한 숨결이 내 볼을 스쳐왔다. 휘청히던 혜성과 달리, 너의 작게 벌어지는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나는 그대로 내 무릎이 꺽혀 무너질까.....

 

 

 

"나와, 키스하고 싶어."

 

민우의 고개가 휙 돌려 졌지만. 혜성은 어느 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카페를 나가고 있었다. 잘못 들었을까? 훨씬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혜성이 내는 목소리가 맞을까? 나의 착각은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민우는 이미 카페의 문 앞까지 걸어나간 혜성에게 그대로 달려가 그의 등을 확 끌어 안아 버렸다. 휘청이던 몸짓이, 그러나 자신을 끌어안은 민우의 손을 가만히 잡아드는 손길에, 그의 체온이 시렸던 민우의 가슴까지 스며들어 왔다.

 

 

 

  

 

 

 

 

 

 

 

*Epilogue

  

[이민우! 여기야 여기!]

 

친구들의 부름에 그쪽으로 발길을 옮긴 민우가 자리에 앉자 마자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물론 처음에는 수능을 잘 봤냐 였지만,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고' '우선 밥을 먹고, 우리 뭐하고 놀까?' '아주 밤을 새는거야' 이런 저런 생기넘치는 웃음과 말소리에 수능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묻혀 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의 수능을 위해 몇년을 공부에만 매진하고 살았더란 말이냐.

 

[야, 미래의 내 애인에게 영상편지 보낼거니까, 야 너는 머리 정돈하고 응?]

 

민우가 그렇게 말하며 처음 산 캠코더지만 방송부 출신답게 자연스럽게 녹화을 누르는 동안, 친구들은 그세를 못참고 떠들어 댄다.

 

[너 애인 있었어?]

[병신아, 미래의 애인이래잖아. 그래서 언제 고백해? 오늘 가는거야?]

[갈꺼면 아까 갔어야지. 누군데, 너 한테 수능 잘보라고 선물줬던 후배냐?]

[아니라고, 이민우 뒤에서 쫒아다니던 그 단발머리 여자애도...]

[아 시끄럽고, 녹음 할거니까. 빨리 내 칭찬 좀 해봐.]

 

이미 녹음 버튼을 눌렀지만 단정하게와는 거리가 먼, 칭찬은 한마디도 없는, 왁자지껄 난리법석, 혼잡의 결정체만 캠코더에 남았다. 이민우가 '내 미래 애인한테, 공손하게...' 라고 아무리 말해도 친구들은 장난치느라 바쁘기만 했다.

  

 

 * 

말이 일년이지, 2월 말부터, 9개월을 동안 같이 살았던 기숙사 방안을 둘러본 민우가 아련히도 방을 둘러보다가 자기 책상위에 캠코더를 설치하고 의자에 앉았다. 긴장된 마음에 마른침을 삼키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민우가 드디어 녹화 버튼을 누르고 의자에 잘 앉는다. 멎적어 웃음을 터트리고서는 다시금 표정을 단정히 하고 말을 잊는다.

 

[어... 혜성아 안녕?]

 

아무도 없는 방 인데도 누가 보는듯 민망해 죽을것 같았다. 하지만 민우는 다시금 마른침을 삼키며 카메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이민우야..... 아이씨, 그럼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는데 내가 이민우지  딴 민우겠어? 아 정말 이, 멍청아.]

 

이렇게 자책하고서는 다시 캠코더를 껐다가 한숨을 푸욱 쉬고, 굳어버린 얼굴 근육을 풀려고 헛웃음을 지었다가 다시금 캠코더를 켰다.

 

[안녕 혜성아, 나 민우야..... 알았어 너 민우인거 알고.... 아무튼 다시.]

 

자꾸만 말을 하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혼잣말로 그렇게 상황을 얼버무리며 민우는 세번째로 다시 캠코더 녹화 버튼을 눌렀다.

 

[혜성아! 안녕! 나.... 너 사랑해!]

 

이렇게 말해놓고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던 민우의 얼굴이 점점  빨개져서는 '아휴, 내가 미쳐 정말' 이란 소리와 함께 방의 문이 잘 닫혀있는지 뒤돌아 보고서는 한숨을 푸욱 쉬며 캠코더를 껐다.

 

[아니 뭐야. 말 한마디 하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데. 바로 사랑... 한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아.......... 어떻게 고백하지? 좋아해? 사귀자?]

 

혼자 주절주절 떠들던 민우가 한숨을 푸욱 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먼저 입맞췄는데도 가만 있었고, 수능 전날은 내품에 먼저 다가와 안기기도 했는데. 혜성은 나에 대한 감정이 뭘까. 막상 내가 좋아해, 사귀자. 이런 식의 말을 하면 날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는거 아냐? 

아냐... 아니라고. 혜성이도 분명 나한테 관심 있어...  있을거라고!

아니......... 있나? 아닐까?

혼자 수만가지 물음과 확신을 머릿속에 떠올리던 민우가 결국 결심한 듯, 다시금 거울을 보며 머리랑 옷을 단정히 하고는 설치 해놓은 캠코더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 신혜성..... 나 이민우.... 되게 어색하다... 하.. 하...하...]

 

다시 얼굴이 빨개진 민우가 캠코더를 끄려다가 나중에 내 동아리인 방송반에 몰래 잠입해 편집하던지, 프로그램 받아서 편집하려 마음을 접고 캠코더를 끄려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수능 잘 봤어? 수능이 끝나니까, 우리가 같이 있던 이 기숙사 방도, 너도... 안녕이네.]

 

껐으면 어색해져서 더 말하지 못했을 말이, 그냥 한번 이어 나가고 나니, 조금은 편안하게 말이 나왔다. 괜시리 뒤도 돌아보고, 눈동자를 돌리고선 민우는 빨개진 제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나서는 카메라가 마치 혜성이라도 되는듯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헤어짐의 인사 말고, 다시 시작하는 인사를 하면 좋겠어. 너.... 좋아해... 우리....]

 

마른 침을 사귀던 민우가 얼굴이 조금은 더 붉어진체로 캠코더를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방안에 산소가 부족한듯 숨이 막혀왔다. 그럼에도 회피하지 않던 민우가 결국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사귀자.. 나랑... 너.... 악!!!]

 

벌컥 열리는 기숙사 방문에 민우가 경악을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캠코더를 쓰러트리며 캠코더를 끄려 했지만, 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민우는 캠코더만 숨기면 되는줄 알고, 허둥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방안으로 고개를 내민 친구가 티없이 밝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며 문에 메달려 있었다.

 

[뭐하냐? 혼자서?]

[야. 노크도 안하고 너!]

[너 수상해 수상해~ 암툰 현우가 A양 몰카 2탄을 받았데, 한번 보러가자.]

[야, 그 저질스런거 너네나 봐.]

 

하하하 하고 크게 웃던 친구가 방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당황한 민우가 얼버무리며 어설프게 뒤돌아 가방을 뒤집어 책을 우르르 쏟아내며, 책으로 마구 덮어 숨겼다. 당황스러우니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웠고, 결국 휙 고개를 돌려 친구 앞으로 다가갔다.

 

[뭐야, 너 왜 얼굴이 빨개]

[뭐가 빨개... 문 닫아서.. 더... 더웠나봐.... 청소 할라고...]

[수상한데... 너도 보고 싶은데 튕기는거지? 가자~ 빨리 이민우. 늦게 가면 자리 없어.]

[놔. 나.. 그거 말고....]

 

녹화 마져 해서 혜성이 한테 고백할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안타깝게 방안을 바라보던 민우가 결국 친구의 고집스런 손길에 끌려가고, 아직도 녹화가 되고 있는 캠코더가 빈 방안을 찍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 열려진 문을 열고 터벅 터벅 들어온 혜성이 침대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한숨을 푸욱 쉬었다. 방안을 그냥 휙 둘러보던 혜성이 한숨을 쉬며 민우의 침대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다 말고 의아한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발걸음을 옮겨 캠코더가 있는, 민우의 책상위로 다가와 책을 치우고 캠코더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혜성은 캠코더가 녹화 중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방문이 열리며 민우가 들어왔고, 혜성은 카메라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

  

"이거... 왜 보여 주는거야?"

"나 저날 이후로 이 캠코더 구석에 처박아 뒀거든."

"그래서 지금 나보고 미안해 죽으라는거야?"

 

어제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 했던 카페 건물 위에 혜성의 작업실이자 혜성의 집인 오피스텔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는 그것도 모른체 건물 복도에서 정할 한없이 키스를 나눴다. 설레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으며, 환상이나 꿈이 아닌지 자꾸만 의심스러웠어도, 그럼에도 내 앞에 있는건 신혜성이 맞았으며, 나의 목을 끌어 안으며 메달려 오는것도 신혜성이 맞았다. 내 코끝에 전해지는 향기가 신혜성이었으며, 나의 영혼을 행복하게 해주는게 신혜성이 맞았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혼자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때도 꿈이 아니었으며, 잠결에 깨어서도 너란 존재가 꿈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으며, 회사에 출근해서도 꿈이 깨지 않았고, 반차를 쓰고 도망나와서 올 수 있는 곳이 혜성의 오피스텔이었고, 내 눈앞에 있는것이 혜성이 맞았다. 변하지 않는 그의 존재가 나를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미안해. 미안하다고. 어리석어서 미안하다고!"

"그런거 아니라니까아..."

"미안하니까."

 

사실 미안하라고 방구석에 처박아두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처다보지도 않았던 캠코더를 꺼내온것은 아니였다.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산 캠코더라 소중했고, 이곳에 너에게 고백을 하려 했으니 소중했으나, 나의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위해 묻어 두었고, 잊지 못했기에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넘어가는것보다. 오해의 여지가 있으면 그 틈을 남겨두고 싶지않았던것 뿐이었다. 나는 어렵게 되찾은 너를 지켜야 하며, 조금의 틈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보다, 어제 만났을 때보다 무언가 훨씬 밝아진 표정과 목소리로 신혜성이 무뚝뚝하게 미안하다 하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갑자기 이렇게 얼굴을 확 들이 미는 것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다시 만난지 겨우 24시간이 지난 지금... 그의 존재가 날 행복하게도, 불안하게도, 놀라게도 한다.

 

"키스 해줄께. 용서해줘."

"뭐어..? 용서라니... 자.. 잠까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꼬리를 올려 웃는 혜성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안겨들었다. 침대와 같이 넓고 편안한 쇼파 구석으로 나는 몰렸고, 혜성은 그런 나를 쫒아와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마주했다. 그리고 잠시 떨어진 입술을 두고, 내 두눈을 보고 웃었다. 너무... 미친듯이 행복했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인지, 내가 환영에 사로잡힌 것인지 상관없이 그저 막연히 행복 하기만 했다. 그래서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허리를 더욱 꽈악 움켜 쥐었다. 그의 체온과 무게가 나에게 쏠리자 더없이 행복했다. 이제 그가 내 사람이 된것 같았다.

 

 

 

 

 

자판위를 춤추듯 움직이던 손가락들이 서서히 멈추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잘 안풀리는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팔을 늘어트리며 잠시 숨을 고른다. 굳어진 목을 스트레칭 하며 고개를 들어 창너머를 보다가 창틀에 놓여져 있는 자신의 책. '열병'에 시선이 닿자, 한숨을 푹 쉰다. '정필교'란 필명으로 그냥 내본 것이였는데, 공모전 우수상을 받은 저 책은 지금 보니 교만과 자만에 휩싸인 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금 책을 쓴다고 앉아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이민우란 존재 때문에 베시시 웃음이 나는건 어쩔수 없었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 기지개를 피며 혜성은 눈의 피로도 풀겸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조금 열린 창 너머로 포근한 햇살과 찰랑이는 바람결이 흘러 들어오자, 혜성은 마치 바람결을 잡기라도 하듯 손을 뻗었다. 이민우의 향기가 흘러 들어오는것 같다. 이민우의 체온이 남아 있는것 같다. 아픈듯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기억이 아니라, 현실의 이민우가 곧 있으면 나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살짝 들떴고, 그런 제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울고, 아프고, 후회하던 그 지난날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의 행복이 너무 어색해 수줍게 웃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웃는것도 오랜만이라 마음이 시키는데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이민우 앞에서도 그럴 생각이다. 지난날처럼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마침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혜성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급하게 달려 나와서 누군지 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려다 말고, 현관문 옆에 있는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뭐, 아까부터 씻고 머리 빗고 옷갈아 입고 다했지만 그래도 이민우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마지막 점검을 하고서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혜성아!"

 

깜짝 놀란 혜성이 동그란 눈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선호를 바라본다. 분명 선호가 올거라는 예상이 없어서 놀랐지만, 사실 이 집에 마음데로 드나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은 선호였고, 가끔 올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물론 평소 같으면 들어오라고 했겠지만, 혜성은 현관문 앞에서 비켜서지 않고 선호가 계속 보아왔던 무덤덤한 표정으로 선호를 바라 보았다.

 

"김동완이랑 헤어졌어."

"어, 그래서 이번엔 정말 헤어졌어?"

"헤어 질거야!"

 

복도에서 소리를 치거나 말거나, 혜성은 콧방귀도 안뀌며 씩씩거리는 선호를 두고, 마침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호가 의아한듯 혜성을 바라 보았지만, 잠시후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니 이커플은 분명 완전히 끝은 아닌것 같았다.

 

[어, 혜성아]

"동완이형, 선호랑 정말 헤어진거지?"

[그 자식 또 너한테 갔지? 그렇지, 이선호가 너한테 가지, 어디 갔겠어.]

"그러니까, 둘이 정말 헤어진건지, 싸우는 중이라 아직 안 헤어진건지 둘 중 하나만 대답해요."

 

선호가 아주 심통맞은 표정으로 혜성을... 사실은 전화기 너머의 김동완을 쏘아보았다. 표정에 다 보였다. 둘이 뭘로 싸웠던지 간에, 선호는 헤어질 마음까지는 없는 것이다. 물론 혜성도 알고 있다. 지금 동완도 같은 생각인 것을. 오랜 연인의 투닥거림은 오래 전부터 봐왔고, 또 그 투닥거림보다 아직은 애정이 더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혜성은 완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두고 봐야지. 이선호 저게 갈수록...]

"네네, 그건 두분이 마져 이야기 하시구요. 헤어지면, 반드시 둘 중 하나가 바로 알려주시리라 믿고. 이만 전화 끊을게요."

[어어~ 이선호 거기 가만 있으라고...]

"두 사람 알아서 만나면 되겠네요."

 

라며 동완의 말도 다 듣기 전에 확 전화를 끊은 혜성은 선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김동완이 데릴러 오겠데? 나 안가, 완전 짜증나... 등등등 말을 쏟아내야 하는 선호가 팔짱을 끼고 무언가 굉장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성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그 표정 그대로, 가만히 서있으니, 선호가 이제는 확신을 한것처럼 입술을 앙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너 이상해."

"안 이상해, 너네 사랑 싸움이 하루 이틀이야? 이제 날 빼고 싸워 줄래?"

"맞아, 하지만 적어도 네 집에 들어가서 구박했는데, 왜 날 복도에 세워두는거지?"

"선약이 있어서."

"선약? 너네 집에서?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알았어. 모태솔로 앞에서 사랑 싸움 하는 내가 미안하니까, 좀 비켜봐 ,나 들어가게."

 

하지만 혜성은 현관문에 기대서서 비켜 서지도 않고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선호에게 턱짓으로 선호 너머를 삐죽 가르켰다. 선호가 말도 안되, 뭔가 이상해. 재가 저렇게 웃을 리가 없어. 물론 혜성이 왜 이런 상태인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여전히 좋아하지만, 저렇게 웃는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내가 잘못본거 일거야. 아니면 혜성이 미친걸꺼야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 입고, 어울리지 않게 한손에는 여러종류의 봉지와, 한손에는 커피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가지고 쭈뼛쭈뼛 서있는 잘생긴 남자가 서있었다. 물론 김동완이 스무배는 더 잘생겼지만. 아무튼.

선호가 그 남자를 위에서 아래까지 스캔을 하고 특이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고개를 혜성 쪽으로 휙 돌려 코앞까지 성큼 다가갔다.

 

"누군데? 뭐하는 놈인데? 왜 너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와 나의 오늘 볼일은 끝난것 같으니 그만 가."

"신혜성, 너... 너!!"

 

혜성은 빙그르 미소를 지으며 마치 이리 오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민우도 같이 빙그르 웃으며 혜성에게 다가왔다. 민우가 가볍게 선호에게 목례를 하고, 선호도 얼결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에, 혜성은 민우만 쏘옥 제 집에 넣고 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허망하게 문을 바라보던 선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신혜성은 저런 남자를 어디서 만난거지? 저 남자가 뭐길래, 단 며칠 사이에 얼굴에 웃음꽃이 필수 있는거지? 저 남자 뭐 사기꾼이라던가, 그런거 아냐? 그런 걱정이 마구마구 솓아나지만, 그럼에도 혜성의 얼굴에 오랜만에 피어난 미소와, 너무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라 다시 문을 열고 묻기 보다는 둘을 내버려 두는 쪽을 택하고 발걸음을 돌리며 바로 핸드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형, 상의 할거 있어. 신혜성일이야."

[넌 내가 중요하냐? 신혜성이 중요하냐? 니가 지금 잘했다고 나한테 전화..]

"시끄럽고. 신혜성이 왠 남자를 집에 들이더라니까? 자기 집에 사람 안 들이잖아!"

[누구? 누군데? 다단계 아냐? 그걸 내버려 뒀어?]

"그런데 신혜성 표정이 완전 만개한 꽃 같았다니까? 형?"

[다단계네, 사이비 종교 같은거는 아닐까?]

 

선호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동완과 혜성에 대해 걱정을 나누며 혜성의 집에서 멀어졌다.

 

 

 

  

"누구야? 친한 사이 같던데?"

"이선호."

"이선호? 그게 누군데?"

 

민우보다 한발 늦게 들어온 혜성에게 그렇게 물으며 뒤돌아 서자, 혜성은 베시시 웃으며 당연스럽게 민우의 목에 팔을 둘러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다가오는것도 어색한데, 그 사람이 내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신혜성이란 사실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지는것은 어쩔수 없다. 혜성은 너무 자연스럽게 민우의 입술에 쪼옥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나에 대해 다 기억 한다며?"

"...다? 이선호?... 그 선호!"

 

이제야 기억 난다는 듯이 민우가 눈마져 동그래지며 입을 벌리자, 혜성이 더 베시시 웃었다. 선호가 말한 만개한 꽃 같다는 웃음. 그 웃음이었다. 민우가 그 표정에 더 기쁜 나머지, 아직도 양손에 봉지와 캐리어를 든체로 혜성을 안으려다가 '잠시만 이거 놓고' 라면서 얼른 가서 식탁 위에 물건을 내려 놓는다.

 

"너 맨날 영어로 메일쓰고 하던? 이제 한국 살아?"

"응."

"밖에서 말해주지 그랬어."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 졌어도, 아직 친구에게 소개시킬 단계는 아닌가? 우리 다시 만난지 정말 몇일 안된거는 아는데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보다 나의 기분에 대해 더 잘아는 전진이 대체 무슨일이냐고 며칠째 나를 달달 볶고 있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혜성이 너무 소중해서 내가 말을 꺼내면 마치 닳아 없어지라도 할듯이, 민우는 혜성이 그렇게 소중했다. 그런데 너한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으나, 다시금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혜성이 베시시 웃으니..... 서운한것은 기억도 안나게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정말 내가 알던 학생 신혜성이 아닌, 그냥 사랑스런 존재. 신혜성이 내 앞에 있고, 내가 만질 수 있고, 나를 보며 안겨든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했다.

 

"이선호가 그때 나한테 일년이나 연애하는거 숨겼단 말야. 나도 약올려야지. 지금 궁금해서 동완이 형이랑 난리 났을껄?"

"아, 그런거야?"

"응. 그런거야."

 

베시시 웃는 혜성이 너무 좋아서, 민우는 제 마음껏 혜성을 꼬옥 끌어 안았다. 그러자 민우의 볼에 다시 쪼옥 키스를 하는 혜성. 짜릿한 기분에 민우는 더욱 혜성을 끌어 안자, '윽. 야~' 하는 혜성의 신음소리에 민우는 얼른 팔을 풀며, 하하 웃고 말았다. 앞으로 신혜성을 끌어안을 때는 조심해야겠다 다짐했다. 정말 옛말대로,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자려고 누워도, 일하다 말고도 문득문득. 정말 내가 아는 신혜성이 지금 나와 연락이 되나, 내가 보러 가면 볼수 있나, 꿈일까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너무 행복함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싶어 안달하고 더 다가가면, 꽉 쥐어버린 모래알처럼 모두 사라져 버려서 혜성이 없어질까봐. 기대를 하고, 행복했던 시간에 나의 행복을 잃었던 학생시절 처럼. 지금도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손을 한번 더 뻗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민우는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뜨거운 제 가슴이 창피해 시선을 살며시 돌리며 제가 사온 봉투를 뒤적거렸다.

 

"뭐 좋아해? 밥 먹자. 너희 집 냉장고에 먹을거 하나도 없더라, 나가기도 싫다며."

"배.. 안 고픈데?"

"안되 먹어야되, 뭐 좋아해?"

"너 좋아해."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혜성이 내 물음에 무심하고 평온하고 당연한듯 그렇게 말하자, 민우가 손길을 멈추고 혜성을 보며 입만 벌리고 말을 못했다. 그리고 조금 뒤 얼굴이 더 빨개져 가고 있었다. 그러자 혜성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살며시 잡았다.

 

"너 얼굴 빨개진거 처음 봐, 나한테 키스하고서도 너 안그랬잖아."

"야.. 야! 너무 담담한거 아냐?"

"뭐가?"

"하..... 하하하"

 

결국 터져버린 웃음에 민우가 소리내어 한참을 웃었다. 민우가 웃으니까 거짓말처럼 내 기분이 좋아졌다. 전에는 붕 뜬 기분이 몽롱한 것에 가까웠다면. 민우를 바라보며, 민우와 시선을 맞추고, 그를 보는 나의 기분이 땅위에 서서 바르게 중심을 잡는 것 같아서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신이난듯 기뻐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했던 아주 단순한 말 한마디가, 아주 이상 야릇한 말로 들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선호가 했던, [너랑 나와의 농담은 재미 없지. 애인하고는 완전 재미있지.] 라는 말을 내가 몸소 경험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얼굴 빨개져서 당황하는 이민우도 재미있고, 어릴적에는 조심스러워 한발 물러서있던 나의 태도가 너무 후회가 되니까. 아주 책을 쓰면서 마음먹고 마음 먹은데로, 내가 먼저 다가가서, 내가 먼저 손내밀고, 내가 먼저 끌어안고, 그렇게 이민우를 사랑하고 싶었다. 너를 잊지 못한시간이, 아팠던 지난 시간이, 나를 기다려준 너의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하나도 안변했다고 했는데, 신혜성 다 변했어. 내가 알던 혜성이 맞아?"

"....."

"왜 그래, 그냥 좀 적극적이라고..."

 

다정스럽게, 그냥 한 말이였는데 혜성의 표정이 살며시 굳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 '맞아, 너가 좋아하는 신혜성이 나라구' 이런 종류로 말을 받아 칠거라 생각 했는데 혜성의 의외의 반응에 민우가 저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며 그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걱정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이번엔 민우가 혜성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변하면, 너도 변해?"

 

혜성의 말을 들은 민우가 잠시후 부드럽게 웃었다. 혜성의 굳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우가 그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 당겨 품에 꼬옥 안았다. 혜성의 체온이 전해졌다. 혜성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비오던 날, 아팠던 혜성의 뜨거운 열기와는 다르지만 그날이 아련히 떠오를 만큼. 나는 혜성의 기억이 다 떠올랐다. 이렇게 포근하고, 따뜻하게 내 품에 안겨들어오는 신혜성이란 존재를.

 

"혜성아."

"응."

 

우리가 다시 만난날은, 정말 너가 심각하게 아픈것 같아서 걱정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건강해서 다행이야.

너 스스로 너는 우울증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괜찮아.

오랜 시간이 흐른만큼, 너도 변하고, 나도 변했겠지. 내 기억에서 너는 초코우유만 좋아했는데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무덤덤하게 마시는 모습처럼 말이야.

그리고 지금 너의 모습이 내가 알던, 학생이 아니라, 많이 변해버린 신혜성이란 존재라는것 나도 알고있고, 너도 학생 이민우가 아닌 오랜시간이 지난 나의 모습이란걸 알고 있을거야.

 

 

 

"너의 낯선 모습도, 네가 변한 모습도 포함해서 너란 존재 자체를 사랑해."

"...."

"너도, 이민우란 존재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어?"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물이 차올랐나 보다. 나는 그를 잘 보내주었다고 장담하고 책을 썼는데, 결국 이민우란 존재가 그런 내가 바보 같았다 느끼게 해주더니. 이번에는 이민우를 놓지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모습보다. 나란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알고, 나를 더 사랑해 줄 존재같아서 혜성은 더욱이 민우의 존재가 좋았다.

혜성은 저도 모르게 민우를 더욱 끌어안았다. 민우도 혜성의 허리를 꽈악 안아 들었다.

  

"대답 안해도 되. 그냥 내가 잘할게. 내가 다 할게. 네가 알아주기만 하면 되."

"... 알아."

 

꽈악 안겨 들었다가도 살며시 고개를 드는 혜성이 나의 눈을 마주한다. 그 마주한 눈길이 너무 사랑스럽고, 진심을 가득 담고 있어서,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나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일생을 살면서, 다시 한번만의 기회를 잡은 사람은 몇 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잡았으니까. 후회 없도록. 미련 없도록,  아팠던 시간이 흉터로 남지 않도록, 기다렸던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사랑, 그거 원없이 하자.  

 




 

신화의 신혜성, 이민우 님을 좋아합니다. 주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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