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을... 먹을..까.. 요. 

히나타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요'까지 왔을 때 '휘핑크림 추가 20엔'이 선택된 것을 보고 '딩동댕'까지 추가해야했다. 선택된 메뉴는 에소프레소. 제일 싼 메뉴였다. 

카페는 처음이기에 히나타가 아는 메뉴는 많지 않았다. 핫초코가 전부였다. 메뉴판에 적혀있는 M과 T라는 것도 사이즈를 뜻하는 것임을 사람들의 주문을 눈치껏 들어가며 파악한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인연 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 어린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히나타는 고민을 하다 에소프레소 한 잔을 시키려는 그 때 어깨가 잡혔다. 


"그거 너 못 마셔."

"전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난 알아. 그리고 발열 퇴장이 무슨 카페인이야? 핫초코나 마셔."

"그거랑 뭔 상관이에요. 싫어요. 에소프레소 마실래요."

"예나 지금이나 말 안 듣는 건 똑같네."


커다란 키, 떡 벌어져 믿음직스러운 어깨. 옛날과는 다르게 머리카락은 노란빛이 흘렀지만 다른 매력이라고 느껴진다. 눈코입이 뚜렷해서 멀리서 봐서 미남형이다. 하지만 히나타는 심술을 부렸다. 


"아츠무 씨...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날라리 같이 머리가 그게 뭐에요."

"내 머리가 뭐 어때서!"


아츠무는 머리를 죽 잡아당겨 확인했다. 아주 예쁘고 딱 알맞은 노란색인데! 언제봐도 저 자신감은 굉장했다. 변함이 없는 아츠무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면 아마 아츠무도 히나타에게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왜 키는 자라지 않았냐며, 신경을 긁어 놓을 장난이 금방 예상됐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여덟번째네요."

"...오랜만이야. 히나타."


둘은 빙그레 웃으며 이번에도 시작된 여덟 번째 질긴 인연에게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

"에퉷퉷...!"


기어코 에소프레소를 시킨 히나타는 코에서 비흠을 내며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는 쓴 맛에 먹는 것이라며, 텔레비전에서 본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커피 원액을 한 모금 들이켰다. 결과는 아츠무의 예상대로였다. 

아츠무는 입에 대지 않던 자신의 핫초코와 히나타의 작은 에소프레소 잔을 바꿔주었다. 아츠무는 에소프레소에 설탕을 듬뿍 넣어 한 모금 마셨다. 저렇게 먹어야 했구나! 눈을 빛내는 히나타를 보자 아츠무는 설탕을 탄 달달한 에소프레소를 다시 히나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모금. 


"에텟텟!"


커피에게 호되기 당한 히나타는 핫초코로 씁쓸한 혀를 쓸어 넘겼다. 어떻게 저걸 돈 받고 파는거야. 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혀가 아플 정도였다. 히나타는 뜨거운 핫초코를 다시 한 번 목 뒤로 넘기며 쓴 맛을 없애려 애썼다.

아츠무는 그런 히나타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세어나왔다. 


"넌 하나도 변한게 없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인걸요."


아츠무는 껄렁해보이는 이미지이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서 항상 첫인상을 좋게 받은 역사가 없었다. 이번에도, 옛날에도, 그 옛날에도 그러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어찌나 까칠한지 스스로 미움을 사는 스타일이 바로 아츠무는 꼬인 성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뻔했다.

항상 흑처럼 검었던 머리가 이번에는 샛노랗게 염색을 하면서 그 이미지는 더더욱 정형화된 것 같았다. 


"아츠무 씨는 안 그래도 눈이 부리부리한데 머리까지 이렇게 만들어 버리면 다가올 사람이 하나도 없겠어요."

"됐다, 됐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 나이도 아니고."

"아직 학교 졸업하려면 1년 남았잖아요! 새로운 친구가 생길 수도 있죠."


아츠무는 자신이 어떻게 히나타와 이리 질긴 인연이 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히나타와의 성격이 정 반대였다. 

 옛날에도 자주 듣던 이야기였다. 너희 둘은 성격이 180도로 다르면서 항상 붙어있는다는 지긋지긋한 그런 대사를 말이다. 


히나타는 겉보기엔 참 귀엽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커다란 눈. 히나타 본인은 귀엽다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어쩐가, 본인이 귀엽게 생기질 말던가. 그런 순진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다하고, 저돌적이고, 책임감 있다. 오히려 아츠무와 히나타의 첫만남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히나타의 많이 누그러든 성격이었다. 뭐, 그 옛날에는 먹고 살기 바빴으니 히나타도 그만큼 성격이 거칠었던 때였다. 


"아츠무 씨는... 우리가 왜 자꾸 이러는지 생각해봤어요?"


히나타의 두손으로 쥔 머그컵을 살짝 돌렸다. 마쉬멜로가 수면 위에 떴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핫초코를 듬뿍 머금은 마쉬멜로와 함께 한모금 삼켰더니 코가 찡할 정도로 단맛이 올라왔다. 혀는 녹아버릴 정도로 달아졌다.

히나타의 질문에 아츠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아츠무와 히나타가 어째서 여덟 번이나 인연을 계속하는지, 항상 이 시기가 되면 만나는지는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죽고 살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마고우로 성격이 잘 맞지도 않았다. 지금을 제외하고 일곱번째까지 셈을 하자면 그 중 3번은 쌍욕을 내뱉으며 다음 생엔 보지 말자며 헤어졌고(정말로 죽을 때까지 서로의 얼굴을 안 봤다.) 그럼에도 다음 생에는 앙금이 풀려 나름 싸우는 횟수를 줄이고 나름 잘 살았더랬다. 

여섯번째에는 30년간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나 재회한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 보고싶어 미치겠다라는 흔하디 흔한 감정도 없었다. 지금까지 못 만난걸 보면 재수없게 피난길에 휘말려서 죽었구나라는 안 좋은 상상을 했었다. 


"글쎄. 나도 정말 묻고 싶네. 왜 하필 우리 둘인가."


좋은 인연으로 마무리 된 생이 있었다면 반대로 나쁘게 끝낸 적도 있었다. 막상 좋아하는 단계로 돌입하면 죽기보다 사랑했는데,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철전지간 원수가 따로 없었다. 

아츠무와 히나타는 이것을 단순명료하게 좋은 관계, 나쁜 관계라고 정의했다. 어떤 관계가 되는지는 완전한 랜덤이라 그때그때 운에 따라야 했다. 좋은 관계가 되려면 의외로 많은 조건이 맞아야 했다. 

문명, 사회, 계급, 분위기 등등.

죽이네 사네 했던 세번째와 네번째는 각각 계급의 차이와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엇갈렸다. 평민과 왕족이었고 왕정파와 귀족파였다. 일곱번째는 반란분자와 군인이였더랬다. 문명, 사회, 분위기가 골고루 버무러져 그만큼 혼돈의 세계도 없었던 것 같았다. 

물론 일곱번째 삶의 결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츠무가 설치해놓은 트랩에 히나타는 아츠무의 앞에서 죽어버렸지만 반란이 성공하여 혁명이 되자 아츠무는 혁명단에게 잡혀 사형을 당했다. 너도 뒈져버렸으면 좋겠어. 일곱번째 히나타의 마지막 말이었다. 결국 히나타의 뜻대로 된 것이다. 


"언제 죽었어요?"


히나타는 서비스로 받은 쿠키를 반으로 쪼개며 물었다. 갓 구워서 따끈따끈한 쿠키가 손가락에 녹아들었다. 아몬드 향과 손가락에 진득하게 묻은 초콜릿을 쪽하고 빨았다. 


"너 죽고 1년 뒤쯤?"

"흐음... 반란 성공했어요?"

"야, 반란 아니다. 혁명됐다고."


아츠무는 웃으며 말했다. 사형 당했으면서 본인이 통쾌하다는 표정이였다. 좋은 소식을 들은 히나타는 '와하하'하고 웃었다. 비록 자신이 꿈꿔온 세상은 보지 못했지만 반란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날듯이 기뻤다. 


"그렇게 좋아?"

"그때 정말 목숨걸고 죽기살기로 살았는 걸. 당연히 기쁘죠. 그리고 사실... 당연히 당신도 나랑 같을 줄 알았어. 네번짼가 세번째때는 평민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굴렀잖아요? 그때 정말..."


히나타는 말을 흐렸다. 너무 오래되어서 바랜 과거가 되어서 세세한 것은 기억이 안났다. 그때 남은 지독한 감정과 얽힌 사건들만 순서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결코 좋지 못했던 일들이기에 입 밖으로 나마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너 노예로 팔 때는 좋게 끝났는데, 안 그래?"

"전 죽을 뻔 했거든요. 당신이 날 얼마나 부려먹었는데."

 "그래도 나 과거 청산하고나서 우리 둘이 숲속에 오두막 짓고 오순도순 살았잖아."

"비오면 비내리고 눈오면 눈내리고 바람불면 문이 날라가던 그 집 말이죠..."

"부정적이네, 쇼요군."

"그리고 우리 둘만 산게 아니죠. 지네랑 바퀴벌레랑 거미랑..."

"비둘기랑 부엉이랑..."

"낭만적이게 말하려고 하지 마세요. 부엉이가 쥐 놓고 가서 난리 난거 기억 안나요?"


히나타는 반 쯤 먹은 쿠키를 흔들며 말했지만 아츠무는 그 때 참 좋았지~ 라며 되도 않는 환상을 쫓고 있었다. 아츠무는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새초롱하게 빛나는 하늘을 묘사하려 했지만 히나타는 태풍으로 지붕이 날라가서 부엉이와 비둘기와 벌레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밤바람 때문에 오들오들 떨던 기억만 난다. 마지막으로 부엉이가 먹으려던 쥐를 놓치는 바람에 히나타의 얼굴로 추락까지. 본인이 쥐를 안 맞아서 봐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난 행복했는데 넌 안 그래?"


아츠무는 턱을 괴며 히나타의 손을 톡하고 쳤다. 어서 동의하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어떻게 말할까. 히나타의 눈이 장난기로 웃음짓다가 이내 쿠키를 모두 입에 쏙 넣고서 손을 탁탁 털었다. 

똑바른 대답은 없었지만 긍정이리라. 아츠무는 세상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우리 이러는 걸 보면..."

"그래, 아무래도 이거..."

"근데 아츠무 씨는 저~기에 살고."


히나타의 검지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가고, 다른 반대손으로는 위쪽을 향했다. 


"나는 조~기에 사는데. 이거 되요?"

"뭐... 난 널 노예로 팔아먹으려고도 했고 우리 서로 상처 낸적도 있는데 그 때도 잘 살았잖아?"


말이 좋아 상처지 평생 장애를 지고 살았다. 그 땐 어떻게 그렇게 됐더라. 히나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기억해내보려 했지만 흐릿했다. 그 생의 기억은 의외로 행복한 색으로 점철되어 있어 잠깐의 불행을 떠올리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거부하는 것처럼  떠오르려다가도 가라앉곤 했다. 이웃집에서 치즈를 얻어와 딱딱한 빵 위에 얹어서 나눠먹던 기억만 난다. 부자도 아니였고, 끝내주게 가난했더랬다. 툭하면 도둑이 들정도로 치안이랄 것도 없던 세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붕이 날라가던 그 집보다도 더한 폐가였다. 그 집이 무너져서 깔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낡고 비틀린 집이었다. 그래도 뭐가 그렇게 좋았던지. 

가슴 속에서 파스텔 톤의 솜사탕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히나타의 눈가가 붉어졌다. 


"우리 이번에는 '좋은 관계'인가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직 먹지 않던 과자를 먹기 좋게 잘라 히나타의 입으로 쏙 넣어 주었다. 자연스레 과자를 받아먹은 히나타는 식어버린 핫초코와 함께 과자를 목 뒤로 넘겼다. 


"저 이제 가봐야할 것 같아요."


도쿄로 올라가기 전, 잠시 시간을 내어서 온 것이다. 아츠무는 벌써 올라가냐며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둘은 학생인지라 이런 전국 대회가 아니면 볼 기회가 힘들었다. 그 비싼 신칸센 비용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츠무 씨네는 언제 출발하는데요?"

"내일 오전에. 이왕 온거 시상식까지 보고 가자고 하더라고."

"받는 것도 없을텐데 왜 있어요?"

"쇼요군, 정말 부정적이 되어버렸어."

"사실이잖아요."


히나타의 텅빈 머그컵과 비운 에소프레소 잔을 들고서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아츠무는 헤어지기 싫다는 듯이 느릿느릿, 어슬렁 어슬렁 카페를 휘젓다가 히나타가 손을 잡고 끌고 나오자 그림자처럼 쫓아나갔다. 

우리 다음에 봐요. 히나타의 인사에도 아츠무는 표정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입에 자물쇠를 걸어잠군 것처럼 입을 딱 다물고선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달 뒤에 봐요.

인사를 조금 수정하자 아츠무가 활짝 웃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성격이 좋은 걸 보면 이번 생에는 콩깍지가 껴도 단단히 꼈나보다. 

아츠무의 표정은 밝았지만 히나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목까지 쥐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내려오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죽 미끌어지다가 손톱 끝을 간신히 잡았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히나타와 향과 체온을 손에 담으려는 듯이 거의 빠져나간 히나타의 손을 다시 잡고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애매하게 허공에 떠있는 아츠무의 손이 아쉽다고 말하고 있었다. 


"연락해요."

"전화할게."


한 달 뒤에. 아츠무는 소리 내지 않고 히나타를 향해 입을 벙긋 거렸다. 약속을 잡는 것 뿐인데도 입에서 단내가 났다. 분명 쓰디쓴 에소프레소를 마신 입에서 말이다. 


히나른 혹은 흑우 주인공른 글 올라와요! @rego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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