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실은 저주였던 것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꾹 말아쥔 백해일은 비척비척 일어나 걷는다. 어디로 가는 거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잖아. 뒤에서 애들이 오고 있어. 알고 있었지만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에 시체가 채인다. 텅 빈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흘렀다. 


저벅, 저벅···.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단을 올랐다. 오르고 올라서 도착한 곳은 3학년 복도. 익숙한 공간에 익숙한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었다. 백해일은 시체들을 하나하나 칼로 찌르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능력을 완전히 잃기라도 한 건지, 저주가 완전히 풀리기라도 한 건지··· 혼자 힘으로는 사자들을 소멸시킬 수 없었다. 가만히 사자들을 보던 백해일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여러 장의 노란 종이를 꺼낸다. 그리곤 손에 묻은 피로 글자를 새긴다. 다시 그 이름을 부르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중얼거린다. 산의 어드메, 풀꽃이 많이 핀 그곳으로··· 산군님 은혜 가득한 그곳으로···. 그러자 복도에 널린 사자들이 하나둘 소멸한다. 백해일은 그렇게 복도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바닥에 널린 사체들을 소멸시킨다. 눈물 젖은 노란 종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왔다.'


마지막 사체가 파스스 흩어진다. 백해일은 제 뒤에 사자 하나가 나타났음을 알아챈다. 그 사자는 가만히 선 백해일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달려들지도 않았고, 잡아먹지도 않았다. 본능을 꾹꾹 억누르는 듯한 괴로운 소리가 난다. 백해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뒤로 돈다. 돌아선 백해일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옅게 웃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노을아."


백해일이 싱긋 웃으며 차노을에게로 다가간다. 차노을은 제 입을 틀어막고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 빨리... 나 죽이고, 가."


차노을이 자꾸 뒤로 물러나서, 백해일은 다가가던 것을 멈춘다. 


"가... 빨리."


시선을 피하는 차노을. 심장이 욱신욱신하게 아팠다. 죽어서 이럴 리가 없는데도, 가슴께가 아팠다. 백해일은 죽 흘러내린 눈물을 슥 닦으며 푸스스 웃는다.


"노을아, 나... 능력이 사라진 거 같아."


그 말에 차노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해일을 본다. 


"무슨, 소리야."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화도 안 나고 고맙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 그랬더니 사라졌어. 산군이 사라지니까, 능력이 사라졌어."


"..."


"이상하지. 저주가 풀린 것 같아."


사실은··· 산군님 말대로면··· 나는 저주를 받은 건데도···. 그냥··· 다··· 꿈같고··· 허상같아. 어쩌면 정말 저주를 받은 걸까···. 이제 나한텐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백해일이 후련하게 웃었다. 


"이제 하나도 안 무서워."


"..."


"괜찮아. 이제. 정말..."


백해일이 차노을에게 다가갔다. 차노을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백해일에게 안겼다. 다 부서졌던 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살살 안았어도, 뼛조각이 이리저리 튀는 탓에 통증이 몰려왔다. 차노을이 작은 신음을 뱉었다. 백해일은 문 너머로 들었던 차두리의 말을 떠올린다.


"...너도, 많이 아파?"


"..."


"...다시 돌아오지 말지. 나 같은 거... 보러 오지도 말지."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오지 말지."


백해일이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뺀다. 


"많이 좋아해."


푸욱···.


백해일이 작은 칼로 차노을의 등을 찔렀다. 차노을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이내 편안하게 감긴다. 


"사랑해, 사랑해 차노을..."


"...나도 사랑해..."


차노을의 몸이 파스스 흩어졌다. 이제 된 거야···. 이걸로··· 우린··· 할 일을 다 한 거지···? 백해일이 옅게 웃었다. 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린다. 피 냄새를 맡은 사자 하나가 기어나온다. 백해일은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흩어지는 차노을을 본다. 나··· 금방 갈게. 이번에는, 손잡고··· 가자. 내내 혼자 달려서··· 너무 외로웠어···. 사실은··· 무서웠어. 백해일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쓰다듬는다. 


으드득, 투둑, 뚝···.


질끈 감긴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 너무··· 외로웠어···.






조금 늦게 학교에 도착한 독고오공은 먼저 도착했을 백해일을 찾아 나선다. 오래 헤매지 않았다. 분명히 교실로 향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삐 계단을 올라 3학년 복도에 도착한 독고오공이 마주한 것은 사자로 변해버린 백해일이었다.


"...만났어요?"


독고오공의 물음에 백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오공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뱉어냈다.


"그리고 나... 능력이 사라졌어."


"...네?"


"풀렸어... 산군이 사라지니까."


알아들을 듯 말 듯 한 말을 하는 백해일의 표정은 누구보다 편안해 보였다. 백해일은 주머니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 독고오공의 손에 쥐여준다. 이거··· 분명히··· 필요할 거야. 너라면···. 백해일이 옅게 웃는다. 그러다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독고오공을 본다. 


"저기... 이기적인, 부탁...해서, 미안한데... 나 좀... 보내주라."


백해일이 옅게 웃었다. 미안해. 나 스스로는··· 소멸이 안 되더라···. 백해일의 미소에 독고오공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웠어요. 애들한텐... 그냥... 같이... 잘 갔다고, 말해둘게요."


"고마워... 나도, 걔 보면... 너는 잘 있다고 말해줄게."


"...네."


"나 이제, 가야겠다."


"...잘 가요. 꼭, 만나서 가고."


"응, 너도, 너무 많이 아프지 마."


"네. 그럴게요."


말을 마친 독고오공이 제 칼로 백해일을 푹 찌른다. 사랑해요, 꼭 사랑받아요. 형. 독고오공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백해일이 후련하게 웃으며 흩어졌다. 잘 가요···. 독고오공의 말 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멀쩡히 산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남은 건 이제 우리 뿐이 아닐까. 태산관 쪽으로 간 애들은, 살았을까. 독고오공이 피식 웃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계단을 모두 내려온 독고오공은 갈 곳을 잃었다. 그래서 그냥, 현관 앞 계단에 털썩 앉았다. 차하나와 권세모가 올 때까지 그대로 기다릴 셈이었다. 그러다··· 오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고. 독고오공은 옆에 칼 한 자루를 세워 둔 채 가만히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까만 밤하늘에 노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자 뿌옇게 번진다. 여기저기 긁히고 찢긴 몸이 욱신거렸다. 






"...늦었네."


독고오공이 멀리서 걸어오는 차하나와 권세모에게 손을 흔든다. 사자가 쏟아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미소. 얼굴이며 몸에 피가 튀어있는 차하나와 권세모가 황당한 듯 헛웃음을 뱉는다.


"드디어 미친 거지?"


"그런 거 같다."


"...안에는,"


"거의 없어. 다 죽었나..."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독고오공. 권세모가 짧게 한숨을 쉰다.


"우리, 태산관에 다시 갔었어."


"거길 왜?"


"그냥... 밀려서."


"거기 사람 많지."


"...아니, 사자만 한가득..."


권세모가 말끝을 흐린다. 독고오공이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탁탁, 제 옆자리를 두드린다.


"앉아. 다리 안 아파?"


독고오공의 말에 차하나와 권세모는 눈빛을 주고받곤 옆자리에 착 앉는다. 나란히 앉은 셋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포슬포슬 조용히 내리는 눈을 그저 바라본다.


"...근데,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해일이 형은?"


정적을 깬 차하나. 불안이 살짝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는다. 독고오공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다. 


"만났어. 그 형들."


"..."


"잘 갔어. 둘 다."


눈송이 하나가 독고오공의 손에 내려앉았다가 사르르 녹는다. 찬 바람이 휘잉 불었다. 차하나와 권세모는 말없이 허공 어딘가를 본다. 만났구나. 잘 갔구나. 인사도 못 했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여간 둘 다 좀··· 제멋대로라니까. 차하나가 옅게 웃는다. 권세모는 노랗게 뜬 달을 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괜찮대?"


"...어."


"다행이다..."


권세모가 안도하는 숨을 휴우 내쉰다. 그리곤 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말로 하지 않아도, 셋 모두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괜찮았으면 좋겠는 사람들. 달빛이 하얀 눈을 비춘다. 바람 소리가 잔잔하게 깔린다. 가끔 가끔 들려오는 사자 소리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잠이 왔지만, 잘 수는 없었다. 꾸벅꾸벅 졸다 스르륵 눈을 감으면···.


'오공아!'


어딘가에서 꼭 환청이 들려왔다. 그러면 알면서도 괜히 한 번씩 휙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돌아본 곳엔 그저 피가 묻은 벽, 혹은 눈이 내리는 하늘 같은 것만 보였다. 그게, 당연했다. 


'...뭐였지...?'


권세모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 그거, 뭐였더라···. 뭐였지··· 그거. 한참을 되짚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늘 외우고 다니던 성서의 구절들. 신학이라는 과목명으로 수업을 듣고 암기를 하고 시험을 보던 나날들. 그런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언젠가는 산군을 정말 절박히도 사랑했던 것 같은데, 이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기 바빠서 까먹는, 딱 그 정도. 살고 싶어서 떠올리지도, 죽이고 싶어서 품고 다니지도 않는. 그냥··· 그저 그런 존재. 권세모의 안에서 산군이 흐려져간다. 그러다 어느 시점엔··· 폭, 하고 터져 사라져버린다. 


사박··· 사박···. 


멀리서 누군가 눈을 짓밟으며 걸어온다. 비척비척 걷는 걸음은 많이 지친 사람이거나 이미 부서진 사자. 휘이 불어온 바람에 눈을 찌푸렸다가 뜨니 보이는 실루엣은 팔이 꺾여있고 목의 각도가 이상하다. 아마 저건··· 사람이 아닌 사자. 더 가까이 와서 누구인지 확인해버리기 전에 죽이는 게 낫겠다. 판단이 선 독고오공은 옆에 세워둔 칼을 빤히 보다 손끝에 불꽃을 타닥타닥 일으킨다. 그리곤 칼을 꾹 잡고 사자에게 휘익, 던진다. 바람을 가르고 곧게 나아간 칼은 사자의 몸 정중앙에 푹 꽂히고, 하얀 눈 위로 녹아내린 검은 사자를 향해 독고오공은 악에 받친 듯 사랑한다고 소리를 지른다.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소리를 지르고 나니 시원해져야 맞는데, 숨이 턱 막히는 것은 대답을 들을 사람이 저 사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고요하고 시끄럽던 숲에 메아리가 친다. 하···, 하아···.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잘못 던졌으면 산불 났겠다."


"어쩔 수 없어. 총 쓰던 새끼라."


"...너 원래 칼 잘 안 썼지."


"전면전은 귀찮으니까."


독고오공이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차하나가 피식 웃는다. 


"거짓말. 칼은 나랑 배우고 총은 차두리랑 배워서 그런 거겠지. 가서 니 칼, 주워 와." 


차하나의 말에 독고오공은 들켰네, 하며 웃었다. 차하나는 칼을 주우러 걸어가는 독고오공의 뒷모습을 빤히 본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멍하니 앞을 보는 권세모를 흘끔 본다. 그리곤 기다란 숨을 내쉰다. 저와 함께 총을 배운 건 권세모다. 만약··· 총을 배우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너는 여전히 총을 썼을까? 너는, 언제까지 나한테 묶여 있을까? 이번에도 내가 다치··· 아니, 죽어버리면, 너는 칼을 버릴까? 괜시리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너한테 나는, 뭐였어?


"하나야."


권세모는 차하나의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듯 기막힌 타이밍에 차하나를 부른다. 차하나는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응? 하고 답한다. 


"있잖아."


"응."


"방금 오공이가... 능력을 썼던가...?"


권세모의 물음에 차하나의 표정이 파삭 구겨진다. 


"당연히 썼지."


"...안 보여."


···뭐? 차하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한다. 세모야, 너···. 차하나가 권세모를 불안하게 본다. 권세모는 그런 차하나를 빤히 보다 제 쪽으로 슥 끌어당긴다.


"키스해도 돼?"


"...응."


볼을 감싼 손이 차다. 능숙하게 다가와선 익숙하게 겹쳐지는 입술. 차하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뜬다. 독 때문에 입안이 벤다. 아, 다행이다. 차하나가 옅게 웃었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권세모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쉰다.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느껴져. 아직 있어."


"...아니, 없어."


권세모의 말에 차하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어째서 제겐 느껴지고 권세모에겐 없어졌는지, 그런 건 차하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차하나는 권세모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사랑하면, 다시 믿으면,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에 권세모는 그저 옅게 웃었다. 권세모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이제 딱 하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제 앞에서 다른 신을 믿으라 종용하는 신을 권세모는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사랑해."


"나 말고."


"..."


"괜찮아, 너는... 안 죽을 거야."


"..."


권세모는 말없이 차하나를 꽉 끌어안았다. 독고오공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는다. 독고오공은 이걸 그대로 저기 던질까··· 고민하다 꾹 눌러 참는다. 그리곤 알아챈다. 너는, 풀렸구나. 사라졌구나. 그러다 이상한 화가 난다. 산군을 먼저 버린 건 난데, 어째서 아직 남아있는 건지. 


···아아악···!


저 멀리 태산관 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린다. 고요한 세 시선 사이 시끄러운 눈바람이 분다. 하나둘 풀려간다. 남은 사람은, 어느쪽일까. 복수를 믿거나, 구원을 사랑하거나. 비우지 못해서, 아직은, 아직 우리는, 산군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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