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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하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덥지근하고 축축한 공기가 피부를 뒤덮어 요즘에는 하루에도 세 번씩 몸에 물을 끼얹곤 한다. 구름이 잔뜩 깔려 푸른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하늘을 창 너머로 내다보며 스가와라는 아직 물기가 남은 몸을 소파에 털썩 내던졌다.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굴어도 정작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 날들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그냥 시원하게 한 번 내리고 끝내지, 스가와라는 투덜대며 리모컨을 찾아 눌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텔레비전에는 그닥 볼 만 한 것이 없다. 휙휙 바뀌는 채널을 노려보다 화면을 꺼버렸다. 소파에 가로로 길게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하얗고 반듯한 천장. 이 집에서 산 지도 어느새 4년째로 접어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온 사와무라 다이치와는 서로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가게 되어 한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었다. 서로에게 충실하며 교제를 이어왔던지라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이면 가까이 있는 게 좋으니까, 먼저 졸업한 다이치가 이곳에 직장을 잡은 후 스가와라는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다이치의 직장 근처에서 일을 구했다. 그리고는 혼자 살기엔 조금 크다시피 넉넉한 다이치의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마침 자리가 났던 적당한 위치의 출판사는 전문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사무직을 구하고 있었기에 사회생활의 첫 걸음으로 삼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직장생활은 퍽 무난했다. 규모가 작은 곳이어서인지 별달리 바쁜 일이 없는 업무들도 그랬고,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랬다. 다이치와의 일상도, 직장생활도 변주 없이 단조로웠다. 너무 평화롭고 조용해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두 달 전쯤에 출판사가 망해서 백수 신세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해서 일터를 잃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거나 갑자기 일상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아침이 조금 덜 바쁘고, 하루가 더 여유로워졌을 뿐. 크게 바뀐 것은 없다.

하늘이 여전히 우중충하다. 스가와라는 상체를 일으키며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오늘도 비는 안 오려는 모양이다. 시침이 어느새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어나고부터 먹은 것이 없어 슬슬 배가 고팠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물병을 깜박 잊고 냉장고에 넣어놓지 않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미지근했다. 빈 컵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연다. 다이치가 해놓은 소고기볶음이며 메추리알조림 같은 반찬이 몇 있지만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뒷목을 긁적이며 냉장고를 훑어보다 결국 우유만 한 팩 꺼냈다. 찬장에서 먹다 남은 시리얼 봉지를 꺼내와, 빈 그릇에 시리얼부터 쏟아넣었다. 공기 하나 통하지 않게 꼼꼼히 잘 봉해놓은 솜씨를 보니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다이치였나보다. 시리얼이 담긴 그릇에 우유를 붓는다. 날이 습해서인지 시리얼이 평소보다도 빨리 눅눅해지는 것 같았다. 다이치가 접어놓은 자국대로 봉지를 따라접고 그 위로 스티커를 붙인다. 접착력이 조금 약해진 것인지 스티커가 곧 떼어질 것 같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다시 찬장에 집어넣었다. 식탁에 혼자 앉아 시리얼을 씹는다. 스가와라가 내는 소리 이외에, 집 안에선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깨작대며 숟가락을 움직이는 스가와라는 일부러 달그락 소리를 낸다. 이 고요와 식탁 앞에서도 내다보이는 흐린 하늘과 몸을 감싸는 습기 같은 것들이 그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식탁에 들러붙은 팔이 쩍하고 떨어진다. 씹던 것들이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아주 오래 씹고 또 씹어서 더 이상 씹을 것이 없을 지경이 되었음에도 자꾸만 씹다가, 결국 싱크대로 가 입 안의 것을 뱉어내고 물을 틀어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다 누져버린 그릇 안의 것들도 쏟아버리고 다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대강 걸쳤던 옷들을 벗어던지고, 오늘로 몇 번째 마주 보는지 모를 화장실 거울 앞에 선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낯은 젖어있는 공기와는 반대로 무표정하고, 건조하다. 그는 얼굴부터 물을 뿌렸다. 오늘은 다이치가 몇 시쯤 올까. 직장에 다닐 때도 느긋했던 스가와라와는 다르게 다이치의 회사는 야근이 잦았다. 어제는 12시에 들어왔고, 그제는 새벽 3시, 엊그제엔 새벽 1시. 그에 반해 스가와라는 집에서 지내며 활동시간이 수시로 바뀌는 탓에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주치는 일이 적었다. 아침인사는 문자로 대신하고, 집에 들어와 기절하다시피 잠드는 다이치에게 짧게 입맞추는 것으로 하루의 안부를 전한다. 이전에는 나가며 스가와라 몫의 아침을 차려놓고 가던 다이치는, 여름이 되며 그가 늦게까지 잠들어 차려놓은 음식을 먹지 않아 그것들이 상해버리는 일이 잦아지자 더 이상 식탁 위에 반찬들을 줄세워놓지 않았다. 수시로 전화며 문자를 주고 받던 장거리 연애를 할 때보다도 대화는 적지만, 그래도 다이치의 잠든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건 좋다. 감겨있는 눈, 반듯한 코, 단정하게 다물린 입. 다이치는 잠버릇이 없어 얼마를 자도 잠이 들 때와 같은 자리에서 거의 같은 자세로 일어난다. 그래서 내내 옆에서 구경할 수가 있다. 가끔은 손끝으로 살짝씩 얼굴을 쓸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다이치가 잘 깨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이 어깨를 적신다. 차가운 것이 몸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에 작게 소스라쳤다. 몸 구석구석에 샤워기를 들이대며 끈적거리는 불쾌감을 씻어냈다. 여름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오늘은 유독 시간이 안 가는 것 같다. 씻고 나와 무얼할까, 하고 소파에 멀뚱히 앉아있다가 노트북을 켰다. 그래도 별다르게 할 건 없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뉴스나 몇 줄 읽고, 지역 공개채용공고란에 접속했다. 대부분이 집에서 너무 멀거나 25세 이하 대상이었다. 대강 훑어보다 미야기현 쪽으로 넘어간다. 다이치와 스가와라가 나고 자란 곳. 어느새 생각은 화면을 떠난다. 이맘때면 마당에 어머니가 가꾸시는 과꽃이며 수선화가 가득 피어있을텐데. 집에 돌아가지 않은지도 한참 되었다. 작년 명절 때 잠깐 찾아 뵙고, 올해 들어서는 간 적이 없다. 노트북을 닫고 다시 창문을 바라본다. 여전히 흐린 날씨는 이제 땅거미가 다 졌다. 다이치에게 문자를 한 통 넣었다. 언제 와? 하고. 답장이 금방 오리란 기대는 않는다. 침대로 가서, 다이치의 자리에 휴대폰을 던져놓고 드러누웠다. 사위는 조용하고 불을 켜지 않은 침실은 어두워서 그렇게 자고도 또 노곤하게 잠이 밀려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후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옆자리에선 다이치가 자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돌아누워 있어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자른 지 좀 되었는지 목을 반쯤 덮은 뒷머리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 단단한 등을 쳐다보다가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아까 침대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새벽 2시 37분. 갑작스런 빛에 눈이 부셔 시간만 확인하고 화면을 꺼버렸다. 침대를 빙 돌아 다이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이치는 어떤 표정도 움직임도 없이 조용하게 잠들어 있다. 코 끝을 눌러보려다, 그만두고 방을 나와 문을 닫는다. 어중간하게 깨버려 다시 잠들기에는 그른 것 같다. 어느새 냉장고에 들어가있는 물병을 꺼내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고양이 세수를 했다.

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들도 문을 닫고, 일찍 문을 여는 가게도 아직 열리지 않은 어중간한 시간. 어둑한 거리를 비추는 건 주황색의 가로등뿐이다. 지금처럼 바빠지기 전에는 다이치와 종종 이 길을 걷곤 했었는데, 생각한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새벽이라고 해서 특별히 서늘하거나 하진 않지만, 적어도 부는 바람은 낮보단 시원했다. 스가와라는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 몇 개를 찾아내 자판기에서 커피 한 캔을 뽑아들고 벤치에 앉았다. 몇 년을 오가며 익숙해진 거리, 새벽의 공기냄새, 다시 찾아올 무미건조한 아침. 스가와라는 슬슬 집에 가고싶다고 생각했다. 남은 커피를 입 안에 털어넣고 캔을 구기며 일어섰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다이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을 살짝 열어 고르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창 밖은 어둡고 날은 흐렸다. 이대로는 해가 떠도 이 하늘 그대로 명도만 높아질 뿐 어떤 극적인 일출 같은 건 없을테지. 햇빛을 본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의 리듬에 맞춰 호흡해보았다. 이 집은 두 사람의 취향에 따라 대부분이 차분한 색이었지만, 그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푸른 것이 있다. 거실 구석을 차지한 난초 화분이 그것이다. 물을 주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아 물 반 그릇을 떠와 흙 위에 고르게 뿌려주었다. 이 화분은 스가와라가 이 집에 갓 들어왔을 무렵에 놀러왔던 두 사람의 지인이 집이 너무 삭막하다며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햇수로는 한 4년째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잎만 커지고 꽃이 필 생각은 도통 하질 않는 난이었다. 혹시 원래 꽃이 피지 않는 종이냐고 선물해주었던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그건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저 언젠간 피겠지, 하는 수 밖엔 없었다. 난에 물을 주고도 다이치가 일어날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스가와라는 간만에 아침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한 건 없다. 평소에도 요리는 거의가 무난한 맛을 내는 다이치 쪽이 도맡았기 때문에. 스가와라는 냉장고를 한참 들여다보다 미소장국을 끓이기로 정했다. 두부와 미역, 그리고 미소만 넣어서. 반찬은 그냥 있는 것을 데워내면 될 터였다. 아마도 어제 두부부침을 하고 남았을 두부 반 모를 꺼내 썰고, 미역은 양이 잘 가늠이 가지 않아 대강 한 움큼을 꺼내 불렸다. 끓는 물에 육수용 멸치를 두어마리 집어넣고, 미소를 풀고. 미역은 조금 많아보였지만 맛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스가와라보다는 다이치의 입맛에 가까운 맛이었다. 다 쓴 도마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알람이 울렸고, 이윽고 다이치가 부은 눈을 하고 방을 나왔다. 일어났어, 응, 하는 간단한 문장을 주고 받으며 다이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스가와라도 말없이 주방을 마저 정리하고 반찬을 꺼냈다.

두 사람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는 것도, 이렇게 아침을 함께 하는 것도, 스가와라가 주동적으로 음식을 한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렇다고 어색한 것은 아니었고, 조금 새삼스러웠다. 젓가락으로 미역을 헤집던 스가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이치, 나 미야기로 돌아갈까 해.”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못 간 지 한참 되기도 했고. ‥짐은 가져갈 거야. 다시 일을 구할 때까지 본가에 있거나, 아예 그곳에 머물면서 하고싶은 걸 찾아볼까 하고.”

“….”

“….”

다이치는 그래, 하고는 더 아무 말 않고 밥만 먹었다. 일어선 자리를 보니 밥 반 공기 정도가 남아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는 다이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어떤 진득한 애정 같은 것이 담겼다기엔 담백한 인사. 문이 닫히고 스가와라는 빈 현관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반댓쪽 팔을 주물렀다. 뜨거운 손바닥이 끈적였다. 이번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 익숙하게 일상에 스며있어 되레 더 변치 않을 것이다. 그건 다이치도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둘은 세상이 무너진 듯 통곡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헤어짐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때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둘은 모두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지 얼마나 되었더라, 스가와라는 현관에서 눈을 떼고 뒤돌아 난초잎을 쓰다듬었다. 아마 이건 죽을 때까지 꽃을 피우지 못 할 것이다. 밀도 높은 공기가 숨통을 짓누르듯 밀고 들어간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스가와라는 옷을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흐린 하늘에서,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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