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이 슈이치 X 버번

- 버번 원페이스 설정

- 모브남캐 등장

- 버번이 APTX4869를 먹고 신체 나이가 어려집니다. (대략 만 14-5세)

- 위와 같은 내용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의 열람을 권하지 않습니다.  


 




불길이 하늘로 높게 치솟았다. 타닥, 타닥. 무언가가 장렬하게 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폭음 때문에 먹먹해진 귀가 소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버번은 눈앞에서 장식장이 무너지고 동상이 쓰러지는데도 복도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았으므로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스카치가 아직 연구실에 있었다.

조직의 연구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간부들도 예외는 없었다. 조직 내에서는 보스의 개인 연구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온갖 비윤리적인 실험에 대한 소문이 몇 년째 부유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들고 달빛에 비춰보았다. 보스가 스카치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몰래 빼내온 것이었다. 소문으론 독약이라던데. 그의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그때, 그가 서 있는 반대편에서 폭음이 여러 차례 들렸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복도 창문을 깨부수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검은 연기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후로도 폭음은 몇 차례 더 났고, 그가 먹먹해진 귀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성 안이 불바다가 된 후였다.

스카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들이쳤다. 방법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는 복도를 내달렸다. 연구실은 1층 동쪽 복도 가장 끝 쪽에 있었다. 내달린 끝에 연구실 근처까지 도착했으나, 뒤에서 자신을 붙잡아오는 힘 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비참한 표정을 갈무리 하지도 못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라이가 있었다.

 

“가면 안 돼, 버번!”

 

라이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고 한 손에는 샷건을 들고 있었다. 저격수인 그가 샷건을 들고 있는 모습은 익숙했으나 머리를 묶은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고 있는 방탄복도 낯설었다. 가슴 부근에 FBI라고 적혀 있었다.

언제부터? 버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것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를 속였나. 그리고 언제까지 속일 작정이었나. 그는 라이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은 라이가 노크였던 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카치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라이는 더 센 악력으로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내 말 안 들려?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죽을 셈이야?”

“그럼…. 당신이 구해주세요. 당신이…. 제발……. 라이….”

 

애원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입술 사이로 힘겹게 삐져나온 말 곳곳에 눈물이 묻어나왔다. 버번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있는 힘껏 라이에게 매달렸다. 그의 방탄복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붙들고 스카치를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연기를 마신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고 눈앞은 빙글빙글 돌아서 자신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일렁이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성 밖에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숲과 연결된 문 앞이었다. 그는 천천히 기억을 되감아 보았다. 자존심도 버리고 라이에게 애원했었지. 스카치를 구해달라고. 수치스러운 기억 뒤로 라이가 자신의 손목을 놓아주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가 연구실로 달려갔고 자신은 반대편으로 달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었다.

라이는 대답을 해주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Irony

w. 비에

 

 

 


구름이 아이스크림 모양처럼 솟은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옥상에 이불을 널어놓은 채였다. 버번은 현관문을 잠글까 고민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불만 가지고 금방 내려올 생각이었다. 자신의 몸보다 무겁고 두꺼운 겨울용 이불 두 개를 낑낑거리며 겨우 집에 들여놓은 그는 현관에 털썩 주저앉아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역시 소년의 힘은 약하다. 그는 새삼 자신의 몸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불길을 피해 성 밖까지 나갔던 날, 그는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독약이라고 소문이 돌고 있는 약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약을 입에 넣었고, 꿀꺽 삼켰다. 죽기 위해서였다. 곧 몸이 타들어갈 듯 조였다. 눈앞이 캄캄하게 칠해질 때쯤엔 스카치와 지옥의 입구에서 만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상상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죽지 못했다. 대신 몸이 줄어들었다. 라이 개인 소유의 세이프 하우스로 추정되는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열넷 혹은 열다섯 정도로 보였다. 불길에 그을린 자국도 없었다. 이 현상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열심히 결론을 도출해보려고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라이, 그러니까 아카이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내가 널 지켜줄게.’

 

그 순간, 그는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카이가 내민 손을 힘주어 잡았다.

FBI 저격수로서의 아카이는 집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이 불규칙했다. 이틀 내내 집에만 있을 때도 있었고 일주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지 못할 때는 버번에게 자신의 부재를 알려주었다. 며칠 집을 비우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장기간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라이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카이도 그런 것을 보니,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번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것 또한 새삼스러웠다.

그는 짧았던 휴식을 끝내고 일어나 이불을 번쩍 안아 들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 두꺼운 이불을 두 번이나 세탁할 뻔했다는 생각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 하나는 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카이의 것이었다. 그는 아카이의 침대에 이불을 내려놓고 옷장에서 이불 커버를 꺼냈다. 베개부터 시작해 침대와 카펫까지 온통 검은 것이 참 아카이 답다고 생각했다.

 

“뭐, 전부 내가 고른 거지만.”

 

수 년 간의 장기임무를 마치고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온 아카이는 제일 먼저 집을 샀다. FBI 본부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외곽 지역의 작은 아파트였다. 그가 부동산에 건넨 조건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방이 두 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적이 드문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조건 모두 버번을 위해서였다. 아카이는 FBI에 버번의 존재를 보고하지 않았다. 버번은 몸담고 있는 조직에 모든 것을 보고하지 않는 것이 라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종 아카이 슈이치와 라이를 저울에 올렸고, 무게를 재었다. 무엇의 무게를 재려고 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아카이와 라이를 비교하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카이에게서 라이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과거 라이의 모습에 아카이가 있음을 깨닫곤 할 때마다, 그가 뛰어난 연기자인지 철저한 이중인격자인지 추리해보는 것이 특히 재미있었다. 새로 산 집에 침대와 스탠드형 옷걸이만을 덜렁 놓고 이만하면 됐다는 얼굴을 했을 때는 영락없는 라이의 모습이어서, 그는 낯선 환경 속 작은 익숙함에 안도했다.

결국 아카이와 버번은 함께 가구점에 갔다. 버번은 자신의 것을 고를 때보다 아카이의 이불이나, 옷장, 카펫을 고를 때 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카이가 적당히 고르고 돌아가자고 말하자, 우스꽝스러운 문양이 박힌 것으로 골라 실컷 놀려주기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는 중이니 말 시키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이 뻔한 핑계였음을, 버번도 아카이도 알고 있었다.

버번은 자신이 고른 검은색 카펫 위에 올라 자신이 고른 침대 위에서 자신이 고른 이불을 침대 모서리에 맞춰 정돈했다. 방 안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아카이의 책상 서랍 속 USB마저도 버번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아카이가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긴 것은 버번에게 편하게 작용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버지가 워커홀릭이라 외로워요.’ 하고 목소리에 애교까지 섞어가며 투정을 부린 적도 있었으나, 결코 진심은 아니었다. 그는 아카이가 좀 더 오래 밖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러나 밖에 머물기만 하는 것은 곤란하다. 가끔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돌아와서 정보를 갱신시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버번이 능숙하게 노트북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USB를 포트에 꽂자 그 날 성에 투입되었던 요원들의 명단이 나타났다. 아카이를 제외한 다섯 명의 요원들을 빠르게 훑던 그는 이내 자신이 찾던 얼굴을 발견하고 그의 사진을 더블클릭했다. 남자의 이름과 함께 그의 삶의 행적이 펼쳐졌다.

 

“에이드리언 웨인.”

 

스카치를 죽인 남자였다.

 

 



 



명령을 받은 자판기가 캔커피를 퉁, 하고 출구로 내렸다.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한산한 복도를 울렸다. 자판기가 스스로 낸 소리가 아니었다. 아카이는 자판기를 주먹으로 치고 있는 조디에게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나온 캔커피를 뽑아들었다. 즐겨 마시던 블랙커피는 아니었으나 최근 들어 입맛이 변하고 있어서인지 달달한 라떼도 나쁘지 않았다.

버번과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요리는 자연스럽게 그가 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그에 따라 아카이는 주방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조직에서 함께 작업을 하며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을 때도 버번과 스카치가 돌아가며 음식을 만들었다. 그 시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했으므로, 아카이는 그들이 만드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무뚝뚝한 말로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어놓고 방으로 들어가면 버번이 부러 큰 소리로 ‘재수 없는 자식.’이라며 혀를 찼다. 그 뒤로 스카치가 그러지 말라며 그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만드는 음식을 입가로 가져가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부터였나. 아카이는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들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저 재수 없는 자식!”

 

드디어 조디가 죄 없는 자판기에 화풀이하는 것을 멈추었다. 아카이는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자판기에 넣고 물을 받았다. 뚜껑을 열고 그녀에게 건네었더니, 그녀는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 마냥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는, 제임스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에이드리언 웨인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에이드리언이라는 남자 자체도, 그가 제임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오늘 오전 회의에서 아카이가 하는 말마다 꼬투리를 잡았다.

 

“슈, 당신은 열 받지도 않아? 에이드리언 저 인간이 사사건건 당신을 괴롭히잖아.”

 

아카이는 대답을 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조디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휴식 끝!’이라고 외치며 뒤를 돌았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카이는 자체 휴식 시간을 조금 더 늘리기로 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포악했다. FBI가 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범죄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아카데미 교관들 사이에서 돌곤 했다. 그들은 그를 수사관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어디까지나 겉모습을 그럴싸하게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포악한 성정을 숨길 줄 알게 된 것뿐, 없애지는 못했으므로 그것이 결국 스카치를 죽게 만들었다. 아카이는 그 날, 연구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스카치를 보았다. 다급하게 버번의 눈을 가리고 그만이라도 도망치게 했으나 분명 그의 두 눈동자에는 친구의 비참한 모습이 사진처럼 남았을 것이다.

아카이가 스카치의 맥을 짚었을 때는 이미 그가 사망한 뒤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죽은 이의 눈을 감겨 주었다. 불길이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번져갔다. 곧 연구실도 화마에 휩싸여 스러질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시체를 밟으며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 창문을 깨부수고 밖으로 탈출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카이는 문득, 스카치가 버번 몰래 만들어 주었던 면 요리를 떠올렸다. 그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낯을 가리는 아카이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메밀로 만든 국수라고 했다. 일본에서 소바라고 부르는 음식인데, 자신과 버번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아카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 하지 못했다. 그때 그 말을 했더라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복도에 짙은 고요가 깔렸다. 아카이는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라떼를 만지작거리다가 재킷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식은 캔이 손난로처럼 손을 데웠다. 따뜻했으나 버번의 손보다는 차가웠다. 그의 손은 대체로 뜨거웠다. 뜨겁지 않을 때는 이유 없이 열이 날 때뿐이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열이 올랐을 때, 아카이는 상비하고 있던 해열제를 꺼내 그에게 먹였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체온을 재고, 물수건을 갈았으며,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열이 올라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그는 ‘으…. 아빠, 추워요.’ 하며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원래도 다소 능글맞은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장난스럽게 구는 것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함이리라. 아카이는 버번이 잠든 사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로 그의 아버지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속이 쓰렸다.

 


 


 



시내와 다소 거리가 있는 외곽 지역에는 나무가 많았다. 종류도 다양해서 나뭇잎의 색깔로 계절의 변화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었다. 열흘 전쯤 내린 폭설의 흔적은 이제 사람이나 기계에 의해 치워지거나 저절로 녹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던 날, 버번은 몇 번째인지 모를 열병을 앓았다. 아카이가 막 출근을 하려던 때였다. 그는 외투를 벗고 조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폭설 때문에 출근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하던 차였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OK.’라는 답장이 왔다. 아카이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버번을 안아들었다.

버번의 방은 아카이의 방만큼이나 단출했다. 침대 하나와, 스탠드를 놓은 협탁이 하나, 베이지색 카펫과 그보다 조금 진한 갈색의 원목 옷장. 벽에 걸린 시계와 의미 없는 풍경 사진을 넣은 벽걸이 액자가 아카이의 방과 다른 점이었다.

아카이는 색색거리며 숨을 마셨다가 내쉬는 버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얌전하게 아카이의 품에 안겨있었고, 침대에 눕혀져 이불이 덮일 때도 얌전했다. 아카이는 저항하지 않는 그가 싫지 않았으나 동시에 불안했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좀 더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줄어든 몸에 당황하기 바빴던 때도, 그 이후로도 아카이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숨죽여 증오하지도 않았다.

죽고 싶었던 것이리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APTX4869라는 이름의 약은 독약이었다. 약이 존재하는 목적이 오로지 죽음뿐이었으므로 버번이 그 약을 먹고 죽지 않은 것은 행운이나 기적이 아니라 단순한 부작용이었다. 죽지 못한 그가 여전히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카이는 불안을 느꼈다. 그가 열병을 앓을 때마다, 약기운에 잠겨 두 눈을 슬며시 감을 때마다 아카이는 얼굴을 숙이고 그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했다.

마을의 작은 공원을 지나면 지어진 지 오래 된 티가 나는 아파트 세 채가 나온다. 그 중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아파트의 2층이 그들의 집이었다. 아카이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끼이익, 하는 낡은 소리도 났다. 늦은 시간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했으나 그가 시내를 빠져나왔을 때 이미 날짜가 바뀌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일 것이다.

거실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신발장 위에 열쇠를 두고 현관에 멈추어 섰다. 버번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왔어요?”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스탠드 불빛이 그의 희미한 미소를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아카이는 다시 불안해졌다. 성큼성큼 걸어 소파 근처까지 온 그를 올려다 본 버번이 책을 덮었다. 그가 즐겨 읽는 홈즈 시리즈였다.

 

“왜 안 자고.”

“오늘은 집에 들어온다고 했으니까요. 기다렸어요.”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

 

다시 한 번 옅게 웃은 버번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자신의 방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같이 잘래요?”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기 때문에 아카이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문득, 그의 몸이 어린 소년의 것임을 깨달았다. 손목과 발목이 가녀렸고, 뒷목 또한 그랬다. 아카이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녀린 뒷목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가 가볍게 웃었다. ‘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농담입니다.’라는 말도 들렸다. 충동이 깊게 가라앉았다.

 

“Good night, daddy.”

 

버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으므로 더 이상 거실에 서 있을 이유가 없다. 아카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가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USB를 꽂으니 프로그램이 윙윙, 돌아갔다. 곧 화면에 노트북 전원이 켜진 시간과 노트북을 통해 열린 문서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모두 자신이 집에 없을 때였다. 문서를 열람한 사람은 버번이었다.

그에게 보여준 자료는 요원 에이드리언의 정보였다. 더불어 폴더에는 일주일 뒤, 에이드리언이 참석할 파티 시간과 장소도 넣어 둔 상태였다. 그는 파일을 완전히 삭제한 뒤 USB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새벽 노트북과 함께 조각내어 강에라도 버릴 작정이었다.

버번은 에이드리언을 죽이고 싶을 것이고, 아카이는 그에게 정보를 뿌렸으나 에이드리언을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동료애 따위가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은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야 한다. 너무 잘 살아서도 안 되고, 동정심이 생길 만큼 비참해져서도 안 된다.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고통스럽게, 그러나 숨은 확실하게 붙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버번의 증오가 되어야 했다. 증오가 그를 죽지 못하게 했으므로.

어려운 일이었다. 늘 ‘적당히’가 어려웠다. 적당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를 적당히 사랑하는 것 또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조직원으로서 그가 행해온 죄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저울 위에 올려 무게를 재곤 했다. 여타 범죄자와 다를 바 없는 그를 혐오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울은 단 한 번도 평형이 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연구실에서 입수한 자료는 과학적으로 허무맹랑한 것들뿐이었다. 모든 파일을 그대로 불길에 던져도 될 만큼 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실험이었다. 호기심으로, 자신의 발치에서 나뒹구는 조직원에게 약을 먹여봤으나 역시 소용없었다. 독극물을 먹고 사망한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이 전부였다면 시시했겠지만 그는 실험 이상으로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실험에 투자한 사람들. 그들의 이름이 파일 구석에 나열되어 있었다.

파티는 공식적으로 날짜가 바뀌기 전에 끝났으나 그의 파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다음 주면 뉴욕 지부장으로 취임할 것이었으므로 그 전까지는 밤을 실컷 즐길 작정이었다. 이미 윗선에게 여자와 마약을 준비시키라고 협박한 뒤였다. 술에 취해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으나 그는 설렘을 충분히 즐기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복도가 춤을 추듯 일렁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방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호화로웠으나 동시에 썰렁했다. 윗선이 준비해두겠다고 했던 여자와 마약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빠르게 정장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주소록에 그가 이대로 입 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는 오늘의 파티를 준비한 정치가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그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으로 내리치기 위해 팔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때, 뒤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언 웨인.”

 

자신의 등 뒤에 닿은 것이 총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그대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핸드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다른 한 손도 머리 위로 올리며, 등 뒤의 괴한이 정치가가 고용한 청부업자라고 생각했다. 진부한 전개였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으나 지금은 괴한의 말을 잘 듣는 척 살기를 죽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숨소리도 죽인 채 괴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괴한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을 때 그의 복부를 가격한 뒤 방을 나갈 생각이었다. 머릿속에서 몇 번 시뮬레이션을 해 본 에이드리언은 팔꿈치를 괴한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괴한이 텁텁한 숨을 뱉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등에 닿은 총구의 느낌이 사라졌다.

에이드리언은 그대로 문으로 내달렸다. 다른 곳이었다면 괴한을 죽였을 테지만 이곳은 호텔이었다. 그것도 유명 정치가나 관료들이 종종 머무는 고급 호텔이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로서도 별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괴한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분했으나 어쩔 수 없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린 순간,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

 

“슈!”

 

아카이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같은 편이 생겼다는 사실에 에이드리언은 표정을 풀고 그의 뒤로 몸을 옮겼다.

 

“마침 잘 왔어. 지금 안에 웬 개새끼가 있어.”

“… 그래. 내가 마침 잘 온 것 같네.”

 

그는 제 뒤로 숨은 에이드리언의 멱살을 잡고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에이드리언이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이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눈은 녹색일 터인데. 당황한 뇌가 급변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을 쏟아냈다.

 

“그 사람 이리 넘기세요, 아카이.”

 

버번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에이드리언의 뇌는 아직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구가 다시 한 번 겨눠졌다. 이번에는 에이드리언의 머리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눈 버번의 시선은 타깃이 아니라 아카이에게 가 있었다. 아카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버번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음을 깨달았다. 그가 조직으로부터 부여 받은 코드네임을 버리고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간 뒤로, 버번은 그를 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부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부르지 못했다. 라이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속으로나마 자신의 기억 속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남자를 ‘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돌아왔을 때는, 그를 라이라고 부르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버번이 아카이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했다. 주로 ‘당신’ 아니면 ‘저기’였고, 익살스럽게 장난을 칠 때면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호칭 중 ‘아카이 슈이치’는 없었다.

너는 마침내 라이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었나. 그렇다면 그 풍화된 마음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는 버번의 마음이 그대로 휘발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증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증오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으므로.

 

“버번. 나는 네가 사람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아.”

 

권총 끝이 잘게 떨렸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 아카이는 귀가할 때가 되면 반드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시쯤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그 시간에 맞춰 몰래 하던 짓을 정리하라는 신호처럼. ‘아, 그렇구나.’ 하는 확신이 생긴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그는 일부러 자신에게 에이드리언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도, 무엇을 할지도 다 안다는 것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한편으로 이것이 그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의심은 그가 내게 하고 있는 것이던가. 버번은 계속해서 아카이가 주는 정보를 받았다. 함정이라는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함정이면 뭐 어때. 당신 손에 놀아나면 그만이지.’ 하는 체념이 들어서 있었다. 체념 뒤로 진 그림자에는 신뢰가 들어 있었다.

결국 아카이가 바라던 상황은 이것이었다. 증오를 상기시키는 것. 잊지 말 것. 둥실둥실 떠오르지 않게끔 중력에 증오를 더해 땅 위에 곧게 설 것.

살아갈 것.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살아가되,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것.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 위협에서 멀어진 에이드리언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아카이의 손이 더 빨랐다. 에이드리언은 뒷목을 강타 당해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은 감겼으나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샌디에이고에는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름은 선선했고 겨울은 따뜻했다. 왜 사람들이 휴양지로서 샌디에이고를 찾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주로 선선한 여름에 몰려들었는데, 그들이 자주 찾는 곳은 바다였다. 서핑보드에 올라타 파도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고, 바다표범과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파라솔 아래 누워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아카이는 샌디에이고 지부로 발령받은 지 1년이 지났을 때, 익명의 발신인으로부터 우편을 받았다. 봉투 속에는 사진이 한 장 들어있었다. 그의 사진이었다. 등 뒤로 고등학교 교문과 건물이 찍혀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는데 아마도 조금 부끄러운 듯했다. 아카이는 가볍게 웃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사진을 액자에 넣어 보관하려고 했는데 집에 액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잔소리가 그리워졌다. 그가 썰렁한 집을 보았다면 황당해하며 당장 가구점에 갈 것이었다. 그때처럼 침구와 카펫, 옷장을 고르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그와 관련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겨우 사진 한 장 받아보았을 뿐인데도 이 꼴이었다. 아카이는 액자 사기를 그만두었다. 사진은 다시 봉투에 넣어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액자는 사지 않기로 했으나 어차피 슈퍼는 가야 했다. 식사를 대신할 에너지 바가 다 떨어진 참이었다. 그의 거주지는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슈퍼 또한 그 근처였다. 피부에 달라붙는 바닷바람이 끈적거리지 않아 견딜 만했다. 갈매기들이 어디에선가 모여들어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길을 따라 걸으며 해수욕장의 사람들을 살폈다. 여름은 진즉 지나갔으므로 서핑을 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대신 모래 위에 돗자리를 깔고 바다가 주는 낭만을 즐기는 이들은 늘어났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가 슈퍼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아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그에게 부딪쳤다.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있던 아이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씩씩하게도 울지 않고 벌떡 일어나 ‘죄송합니다!’ 힘차게 사과했다. 아이의 뒤로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와 다시 사과했다.

 

“어. 어어, 아카이 씨?”

 

아이의 아버지는 FBI 샌디에이고 지부의 직원이었다. 아카이보다 다섯 살 어린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하여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다친 곳은 없느냐 물었다. 아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에게 ‘괜찮아.’ 하고 말했다. 아이는 아카이의 인상에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지 괜찮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카이는 슈퍼에 들어가는 대신 우연히 만난 부자와 해변가를 거닐기로 했다. 긴장을 푼 아이가 그의 바짓단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아이를 떼어내 보려고 했으나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거렸다. 결국 그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목말을 태우는 것으로 아이를 달랬다.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는 해변을 산책하는 내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남자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더니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곤란하다는 표정과 기특해 죽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동시에 드러났다. 아이는 자주 말을 하다 말고 아빠를 불렀는데, 그것이 또 아카이로 하여금 그를 생각나게 했다.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아카이를 아빠라고 부르곤 했다.

 

‘당신이 나만한 아들이 있으려면 음…. 열일곱에 애를 낳아야 하는군요. 아빠, 솔직하게 말 해봐요. 비난 안 할게요. 숨겨진 애 있죠? 아니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당신은 모를 수도.’

 

그가 아카이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것은 그 날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그의 존재는 FBI에 알려졌다. 예상했던 결과였으므로 아카이는 순순히 그를 FBI에 넘겨주었다. 아카이는 샌디에이고에서 지부에서 2년 간 근무할 것을 명령받았다. 일종의 징계였다. 윗선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그에게 새 신분을 주고 절차적인 감시가 끝나면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떨어졌다. 확답을 받고 나서야 아카이는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날, 에이드리언이 구속되었다.

해가 져 주위가 캄캄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는 가로등과 상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그나마 거리를 밝게 비춰주었다. 더 이상 해변을 뛰놀 수 없게 된 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으나 곧 수긍했는지 얌전히 남자의 품에 안겼다. 남자가 아이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아카이 씨, 이제 내년이면 복귀하시네요. 아쉽네요. 계속 여기 있어주시면 안 돼요?”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있어.”

 

남자가 ‘그러시구나.’ 하며 아쉬운 듯 웃었다. 아카이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길가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슈퍼는 이미 문을 닫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문득, 냉장고에 들어 있던 야채가 생각났다. 며칠 전, 얼떨결에 이웃에게서 받은 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리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됐으니까 장이나 같이 봐요. 저 텅 빈 냉장고 채우려면 살 게 많으니까. 요리는 못해도 짐꾼은 잘 할 수 있죠?’

 

그는 징계가 끝나고 복귀하는 즉시 FBI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를 찾아야 했다. 어디에 있든, 살아있기만 한다면 평생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커플들 뒤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아카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안드레가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본부에 제출할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 네가 나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버번.”

“지금은 레이Ray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뭐… 그렇게 하세요.”

 

레이. 낯선 이름이었다. 아카이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세 번 더 되뇌어보았다. 역시 그 정도로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무심코 그를 버번이라고 불러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버번으로 살아가던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2년 전에 비해 키가 조금 컸다거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거나, 혹은 근육이 붙었다던가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1년 전, 익명으로 받았던 사진 속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므로 지금은 열일곱일 터였다.

2년 전, 아카이는 어린 소년의 몸을 한 그에게서 스물아홉의 버번을 보곤 했다. 의식하지 않으면 그의 몸이 열넷 혹은 열다섯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열일곱의 ‘레이’였다. 스물아홉 버번의 모습이 많이, 아주 많이 옅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올려 아카이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리고 ‘조금 길었네요.’ 하고는 웃었다. 아, 그 나이대의 아이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구나. 아카이는 그의 손을 입가로 옮겨왔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자 그가 다시 웃었다.

 


 


 



시내와 다소 거리가 있는 외곽 지역에는 나무가 많았다. 나무들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면 지어진 지 오래 된 티가 나는 아파트 세 채가 나온다. 그 중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아파트의 2층이 그들의 집이었다. 레이는 2년 전 이후로도 줄곧 이 집에 살고 있었다. 아카이의 검은색 베개, 검은색 침구, 검은색 카펫도 모두 그대로였다. 레이의 방도 침대와 협탁, 카펫, 옷장, 벽걸이 시계가 놓여 있어 단출한 것이 2년 전과 똑같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진이었다. 그의 벽에 걸려 있던 의미 없는 풍경 사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듯 새로운 사진이 걸렸다. 그 중 하나는 아카이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같았다.

레이는 신발장 위에 열쇠를 올려두고는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아카이는 또 놀라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뒤늦게 그의 멍한 얼굴을 발견한 레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많은 일이 있었다고. 당신이 없는 동안.

아카이는 짐 가방을 현관에 아무렇게나 둔 채 소파에 앉았다. 레이가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그의 옆에 앉았다. 컵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당신이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요.”

 

알고 있다. 아카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색이 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라떼였다. 그는 속으로만 가볍게 웃으며 이제는 진한 블랙커피보다 더 손이 가게 된 라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레이는 아카이가 샌디에이고에 있던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아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몰랐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몰랐던 이야기는 대부분 레이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는 FBI로부터 ‘레이’라는 열여섯 소년의 신분을 받았다. 신분과 함께 거주지도 제공 받았으나 그는 이 집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다.

거주지를 제외하고도 그의 신분 혹은 처분에 관해, FBI 내부에서는 종종 논쟁이 일어났다. 쟁점은 그가 몸만 어려졌을 뿐 기억은 스물아홉의 조직원 버번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몸과 함께 기억도 열여섯 살 때로 돌아간 세계를 상상했다. 그대로 아카이의 호적에 올라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내 웃음이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졌다. 그만큼 웃긴 상상이었다. 유쾌하고, 황당하고, 평화로운 날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일상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국 물을 터였다. 스카치는 어디에 있느냐고. 기억이 깡그리 사라지지 않는 이상 분명 그럴 터였다.

아카이의 대답에 대해, 여러 가지 패턴으로 나누어 예측해 보았다. 조직의 실험에 대한 것부터 스카치의 죽음까지에 대한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고, 그저 스카치의 죽음만 알려줄 수도 있다. 혹은 그의 죽음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지도. 어떤 패턴이든 자신이 스카치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뒤로 그는 다시는 자신의 기억이 몸과 함께 열여섯으로 돌아간 세계를 상상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미 그 날의 기억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약의 부작용 중 하나인지 그 안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영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인이 어찌되었든 그가 기억해내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그럼…. 당신이 구해주세요. 당신이…. 제발……. 라이….’

 

라이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 그가 기억해내고 싶은 것은 두 개였다. 스카치의 숨이 끊기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시신조차, 유품조차,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친구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기억해야 했다. 그것만큼은 사는 내내 가지고 가야 했다. 그는 기억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마침내 기억해냈다.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연구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친구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을 때, 그는 전에 종종 앓곤 했던 열병을 앓았다. 아카이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그가 없기 때문인지, 단순히 곁에 돌봐주는 이가 없어서인지, 열이 떨어지는 속도가 더뎠다.

그렇게 두 개 중 하나를 기억해냈으므로 남은 것은 하나였다. 라이의 대답은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에이드리언 얘기는 들었어.”

 

아카이와 레이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는 에이드리언의 죽음이었다. 그 날 이후 다른 죄명으로 구속되어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반년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자살이었다. 정확하게는 자살로 처리되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으나 누구도 그의 자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카이는 증오의 대상을 잃은 버번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의 사진을 받았다. 그는 예약했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아카이 슈이치, 나를 의심하고 있나요.”

 

그는 대답 없는 아카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웃었다. 그 순간 아카이의 눈에 들어온 옆얼굴이 스물아홉의 버번을 닮아 있었다.

 

“확실히, 예전의 내가 쓸 법한 방법이죠. 죽여 놓고 자살로 위장하는 거. 뒤가 깔끔하잖아요. 다들 그렇게 했고.”

 

아카이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씩 홀짝이던 라떼도 입에 대지 않아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의 컵과 아카이의 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달라질 것과 달라지지 않을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기 때문에 불변의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언젠가는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만이 고귀해보이기 마련이었다.

 

“내가 아닙니다.”

“…… 그래.”

“당신이 날 바꿔놨잖아.”

 

라이, 그리고 아카이와의 관계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많은 것이 달라졌듯 앞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의 불변은 그 속성대로 달라지지 않고, 희석되거나 풍화되지도 않은 채 남을 터였다.

 

“짐승에서. 사람으로.”

 

레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카이 앞에 섰다. 그는 손을 뻗어 레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열이 나고 있는 것이었다. 해열제를 먹여야 하는데. 아직도 같은 곳에 해열제가 있을까. 아카이는 해열제를 찾으러 가는 대신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를 안는 것은 두 번째였다. 처음 안았을 때는 어떻게든 그를 살리기 위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지금 안아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이 어려졌음을. 이제 두 번 다시는 그에게서 스물아홉의 버번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 너를 믿어.”

 

사람의 품 안이라는 것이 이렇게 뜨거웠던가. 다른 이에게 안겨본 적이 없었으므로 레이는 더 이상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온도를 기억하기로 했다. 언젠가 변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란다고 전부 이루어지지 않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도 바라고 싶었다. 버번이었다면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온도였으므로.

그는 아카이의 품에 안겨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때마다 다른 기억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버번이 아니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헤어지던 순간의 기억과, 끝내는 권총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기억과, 그를 아빠라고 불렀던 밤의 기억과, 가구점에서 함께 가구를 골랐던 기억과, 세이프 하우스에서 눈을 떴던 기억과, 지금처럼 그의 품에 안겨 숲을 빠져나가고 있던 기억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기억은 현재로 돌아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중력이 무거웠다. 그는 아카이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카이의 어깨에 기댄 이마가 뜨거워질수록 미처 떠올리지 못한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럼…. 당신이 구해주세요. 당신이…. 제발……. 라이….’

 

제발. 애원했으나 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버번은 라이가 스카치를 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스카치가 이미 죽어버린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못했다. 도망친 것은 라이가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라고 했기 때문이었고, 복수하지 못했던 것은 아카이가 살아가되 인간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가 아카이의 어깨에, 그리고 등에 기대는 신뢰는 또 하나의 불변이었다. 그것은 스카치의 마지막 순간처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나를 믿기 훨씬 전부터 계속 그랬어.”

 

희석되거나 풍화되지 않은 채.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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