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전정국을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다 잠이 든 지난밤이었다. 한 마디로 졸리고, 피곤하고 축축 처지는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전정국이 내 엉덩이를 만지며 흔들어대는데 놀랄 기운도 없었다.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 원.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침에 전정국과 함께 숙소를 나서다 박지민과 정면으로 마주치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설마 했던 상황이긴 했다. 그러게 먼저 좀 가라니까, 얘는 왜 말을 안 들어서는. 우리를 발견하기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던 그 눈빛이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선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박지민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래도 멤버들과 있을 땐 저 나름대로 나 생각한답시고 말을 꺼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단둘이 남아있을 타이밍만 죽어라 피하면 되는 셈이었다.

문제는 콘서트가 끝난 후인, 지금 같은 늦은 새벽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우리 할 얘기 있는 거 같은데?”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자,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 안으로 훅 들어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깊숙이 앉으며 여유로운 미소로 웃어 보였다. 그 순간 그게 꼭 최후의 자비, 뭐 그런 거로 보여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뻔했다.

 

“깔끔하게, 질질 끄는 거 없이. 무슨 말인지 알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을 테니 알아서 불어라, 이런 뜻이었다.

 

“전정국이 왜 거기서 나와? 아침이야, 밤이야?”

“뭐가?”

“걔가 니 방에 간 시간 말이야. 밤이지?”

“…….”

“이번엔 또 뭐래? 너한테 게임 하자고 갔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대뜸 미쳐서 사귀자고 간 것도 아닐 테고.”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지민 붙잡고 하소연 한 그 때 부터 잘못에, 잘못을 반복한 건 나였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괜한 눈동자를 연신 이러 저리 굴려가며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박지민이 더 이상 내 시선을 쫓아오지 않는다는 게 느껴지고 나서야, 우물쭈물하며 간신히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브이앱 할 때 귀신 얘기가 나왔는데, 하도 그러니까 신경도 쓰이고 무섭고 그랬나봐.”

“설마 전정국이 무섭대?”

“웅. 무섭다고 같이 좀 자달라고 그래서….”

 

박지민은 제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어쩌면 쟤가 나보다 곱절로 더 답답할지도 모른다. 나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찌 되었든 내 선택인지라 괜찮지만 박지민은 아니니까. 친한 친구가 친한 동생을 좋아하더니, 보여주는 모습이라곤 하루가 멀다 하고 한숨이나 푹푹 내쉬는 모습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전정국과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어찌 되었든 술 한 번, 아니 열 번은 더 사줘야 했다. 게다가 녀석의 입장에선 우리 둘이 같이 밤을 보낸 걸 알게 된 이상 스킨쉽을 물어볼 법도 한데 박지민은 일부러 묻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한 건지, 박지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내어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거나, 머리를 쓸어 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한참 만에 박지민 입에서 나온 말은 간략하고 깔끔하며, 제대로 직구였다.

 

“아직도 사귀고 싶어?”

 

이젠 잘 모르겠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는 거였다. 박지민은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정국이 얘기도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내가 사랑에 미쳐서 우정까지 내다 버린 놈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좋아하는 마음도 좀 줄어든 거 같으니, 그리 큰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서히 마음이 없어지는 중이니까, 나중엔 전정국과 키스해도 떨리지 않을 거다. 그저 어린 동생의 성적 호기심을 채워준다는, 그런 별거 아니라는 식의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비록 그게 말도 안 되는 논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럴 리가.”

“…그래. 그거면 됐다.”

 





“태형아 잠깐 얘기 좀 하자.”

 

남준이 형 방에서의 회의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날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윤기 형이었다. 다른 멤버도 아닌 윤기 형인지라, 생소함에 네? 하고 되물었다. 나만 놀란 건 아닌지, 멤버들이 빠져나간 방을 부지런히 정리하던 남준이 형이 우리를 흘끔 쳐다봤다. 그리고 그 뒤엔 나보다 저가 더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전정국도 있었다. 윤기 형에게도 그런 시선이 느껴진 모양인지, 형은 남준이 형과 전정국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 아는 애가 너 소개 좀 시켜 달라던데. 저번에 걔랑 아직도 연락하나 해서.”

“…네?”

“건너로 아는 애라 나랑은 친분 없거든. 그래서 거절해도 되긴 하는데… 여기서 얘기할 건 아닌 거 같고, 내 방으로 가자.”

 

형이 멤버에게 연애 대상으로 누굴 소개 시켜준다는 얘기를 하는 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꼭 그 대상이 나라서 놀란 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에게도 그런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본인과 가까운 지인도 좀처럼 소개시켜 주지 않는 형이, 친분도 없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다니. 게다가 저번에 걔, 라는 게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최근에 연락한 거라고는 멤버들과 가족을 빼면, 보검이 형과 화랑 팀 형들이 전부였다. 이따금씩 고등학교 동창이나 민재 정도? 그 중 썸 타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고, 애초에 윤기 형과 단둘이 그런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암시롱도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형과 다르게 내 표정은 떨떠름함, 그 자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기도 했거니와, 얼핏 보이는 전정국의 저 표정이 신경 쓰였다. 나보고는 아랫입술 깨물지 좀 말라며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닐 것처럼 그렇게나 잔소리를 하더니. 제가 했던 말을 다 까먹은 모양인지, 지금은 도리어 전정국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간다. 쉬어.”

 

윤기 형은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내리더니, 깔끔한 말 한마디를 툭 남긴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옮기는 발걸음이 어쩐지 가볍지만은 않았다. 꼭 질퍽한 진흙 위에서 힘겹게 내딛는 것만 같은 기분에,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전정국의 표정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그만 좀 휘둘려야지.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무거운 걸음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마음 불편해?”


제 방으로 날 데리고 온 윤기 형은 시원한 콜라를 건네며 물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거 없는 무표정이지만, 묘하게 섞인 장난기가 눈에 들어왔다. 형은 의자를 끌어와, 소파에 앉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룸서비스로 주문한 레드 와인을 잔에 채우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레드 와인이 잔의 7할 정도 채울 때까지도 형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와인의 향을 음미하고, 느릿하게 한 모금을 마신 후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며 입을 열었다.

 

“주어 확실하게 해서 물을까?”

“…….”

“전정국 때문에 마음 불편해?”

“…….”

 

이제야 윤기 형이 의도한 바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주어가 확실해진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형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잔 줄까? 하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됐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애써 꽉 막힌 목구멍 저 아래에서 소리를 끄집어냈다. 내 말에 윤기 형은 그래? 하며 제 어깨를 으쓱였다.

섣불리 입을 열 순 없었다. 박지민한테 말할 때라고 뭐 그리 신중했던 것도, 만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실수인 것도 아니었지만 윤기 형은 달랐다. 멤버들 중 둘째라고는 하지만 그 이상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석진 형이 말했던, 윤기 형이 첫째였으면 장난 아니었을 거라는 말을 이해 못 한 사람은 없었다. 윤기 형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도 어쩌다 한 번씩 하염없이 어려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장문의 카톡과 함께 사랑한다 해 주었을 때 울었지.

다른 멤버들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형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사람이 바로 윤기 형이었다.

 

“너 연락 중인 사람 없는 거 알고, 나도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 없어.”

“…….”

 

형은 내가 물어보려던 말에 대해, 먼저 선수 치듯 요목조목 대꾸했다. 하여간 눈치 하난 엄청 빠른 사람이다.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 수 없는 탓에 여유로운 척을 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뭐라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방바닥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윤기 형은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소개해달라는 부탁이 아예 안 들어온 건 아니야. 너 잘생겼는데 안 들어 왔을 리가 없잖아? 평소 같으면 씨익 웃으면서, 형님이라고 맞장구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못 되었다.

 

“전정국이랑 연애해?”

 

순간 귀를 의심해야 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해야겠다는 생각은 다 내팽겨 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만 보는 내 모습에, 윤기 형은 입꼬리를 아래로 주욱 늘어뜨렸다. 속상하거나 화났다기보다는, 그저 뭔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아니네.”

“…네.”

“됐어. 난 또 내가 드디어 사귀는 커플한테 몹쓸 짓 했나 했지.”

 

요즘 잘 지내는 거 같길래, 긴가민가했거든. 윤기 형은 말을 덧붙이며 그새 비워진 잔에 또 한 번 와인을 따랐다. 내가 생각한 달짝지근한 포도 주스와는 완전 다르던데, 윤기 형은 쓰지도 않은 지 이렇다 할 안주 하나 없이 홀짝홀짝 잘도 들이켰다. 그런 형을 물끄러미 보며, 손에 들린 차가운 콜라를 마셨다. 역시 와인 앞에서 마시려니 영 폼이 안 난다. 톡톡 튀는 탄산 탓에 목 안 여기저기를 후드려 맞고 있는데, 윤기 형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국이도 맘고생 좀 해봐야지 않겠어?”

“…전정국이 왜요?”

“그러게, 왜일까?”

 

윤기 형은 내게 저답지 않은 말장난을 걸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되물으려는데 때마침, 묵직한 쿵쿵 소리가 방문을 울렸다. 문 바로 옆에 뻔히 초인종이 있을 텐데, 키가 엄청 작거나 큰 게 아니고서야 안 보일 리도 없는데 상대는 굳이 이 야밤에 문을 두드렸다. 그것도 시끄럽게.

스텝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외부인이면 어떡하지? 숙소까지 따라온 극성팬이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층을 착각한 만취한 아저씨는 아닐까?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윤기 형을 바라보자, 형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가 이렇다 하고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었다.

 

“태형이 형 여기 있어요?”

 

애먼 사람 심장을 철렁이게 한 범인은 다름 아닌 전정국이었다. 형은 전정국이 올 거란 걸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정작 소파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나만 화들짝 놀란 셈이었다. 뭐라 표현 못 할 머쓱함에 눈썹 부근을 긁적였다.

작은 목소리로 전정국과 몇 마디 주고받던 윤기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태형아, 너 데리러 왔다는데? 윤기 형 목소리엔 여전히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저 형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는 모양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뒤꿈치가 잔뜩 구겨진 신발에 발을 꾸겨 넣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질질 끌며 문 앞으로 걸어가자, 형은 슬쩍 몸을 비켜주었다.

 

“형, 가요.”

 

나와 이렇다 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정국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윤기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 나만 모르는, 둘 사이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뭐라 대꾸하진 않았다. 괜히 고래 싸움에 꼈다가, 내 등 터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전정국은 성큼성큼 복도 한가운데까지 걸어가더니, 우뚝 서서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기 형에게 어정쩡한 굿나잇 인사를 남기며 지나치려는 순간,

 

“근데… 정국아 그때 브이앱 하고 형들 방은 왜 안 왔어?”

 

윤기 형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물음에 윤기 형도, 정국이도 누구 하나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때 갔다가 형들 자거나, 작업 중이라 내 방으로 왔다고 그랬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 걸까. 미간을 찌푸리며 윤기 형을 바라보자, 형은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대답해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거겠지 뭐.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묵묵히 서 있는 전정국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간 다들 제대로 말해 줄 생각 있는 거 아니면, 애초에 운도 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을 삐죽이며 내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윤기 형이 작게 킥킥 웃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곧장 제 방으로 향할 줄 알았던 전정국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잔뜩 굳어진 얼굴로 땅만 보며 걷는 녀석에게 네 방으로 돌아가라 말하기 뭐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 방에 들어와서도 전정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적막감을 기다리다 못한 내가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불편하게 있던 전정국이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그것도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형 술 마실래요?”

“…아니.”

 

길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당연히 오케이를 외칠 줄 알았던 건지, 전정국은 살짝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정국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최근에 내가 정국이가 하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던가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전정국이 저렇게까지 놀라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예스맨처럼 하는 말마다 오케이를 외치던 인간이 갑자기 노, 선언을 했으니 경중을 떠나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던 정국이는 바닥에 벗어둔 제 슬리퍼를 신지도 않은 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하얀 양말에 먼지 다 묻을 텐데. 평소 같으면 그렇게 깔끔 떨었을 녀석이 어쩐 일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온 전정국은 서로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럼 키스는 해도 돼요?”

 

전정국은 제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덕분에 정국이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이 내 윗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다 할 소음 하나 없이 적막하기만 하던 내부의 공기가 갑작스레 달라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닿을락 말락 하던 코끝이 뭉근하게 닿고, 운동으로 단련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얇은 잠옷 속에서 잔뜩 긴장한 서로의 아래가 맞닿으려는 순간, 팔을 들어 전정국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저지에 그대로 멈춰선 전정국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도무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단호한 내 대꾸에 전정국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떨어질 줄 알았던 녀석은, 오히려 내 허리를 휘감은 제 팔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가슴부터 배, 그리고 아래까지 전정국과 완전 밀착한 모양새가 되고야 말았다. 이런 적은 처음인지라 뭐라 해야 할지 영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형한테 뭐 하는 태도냐고 혼이라도 내야 하는 걸까. 내가 얘한테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위치긴 할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녀석을 쳐다보자, 전정국은 도리어 제가 더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하겠다면요?”

“…싫겠지.”

 

주어는 없었다. 전정국도, 전정국과 하는 키스도 싫을 리가 없기에 주어를 넣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나조차도 내 속내를 모르겠는데 이걸 정국이한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자신이 제일 싫은 걸지도 모른다.

다만 언제나 자신감과 자존감 넘치던 내가, 그랬던 예전의 내가 더 이상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좋은 사람으로만 비춰지길 바랐으니까. 그렇게 해서 정국이에게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있다면, 쓰잘데기 없는 허세라고 해도 상관없다.

 

“싫어요?”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정국은 그제야 내게서 순순히 떨어졌다. 어쩌면 내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전정국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제 뒷목을 쓸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그럼 윤기 형이….”

“…….”

“아녜요. 갈게요.”

 

전정국은 내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마저도 어찌나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내뱉던지 하마터면 내가 거절한 것도 잊고 따뜻하게 안아줄 뻔했다. 날 붙잡으려던 손도, 전정국의 시선도 함께 바닥으로 떨구며 뒤돌아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이 기회라면 기회 아닐까.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뚜렷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축 처진 정국이의 어깨만큼이나 힘없이 닫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울컥, 이유 모를 감정이 치밀었다. 우리 관계가 괜찮다면, 딱 한 번만 안아주고 싶었다. 물론 지금 그랬다간 키스가 하고 싶어질 테고, 키스를 하면 그 이후까지 하고 싶어질 것만 같아서 꾹 참아야 했다. 정국이의 넓은 가슴팍에 연인으로 안기고 싶은 거지, 친한 형으로 안기고 싶진 않았으니까. 성적 호기심을 위해, 혹은 경험 삼아 해볼 수 있는 스킨쉽의 수준은 키스가 끝이었다. 고지식한 형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겐 그랬다.

전정국 덕분에 홧홧해진 몸을 식히기 위해 이 야밤에 찬물로 한 번 더 샤워해야 했다.






얼마나 잤더라.

피곤할 때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더 많이 자는 편인데, 오늘이 딱 그랬던 모양이다. 꽤 오래 잤다는 걸 어렴풋이 인지는 하고 일어났다만, 이렇게나 오래 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는 내내 침대 위를 굴러다니기라도 한 건지, 사방팔방으로 뻗친 머리를 빨간색 캡 모자로 꾹 눌러 썼다. 시계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오후 4시가 막 지나고 있는 시간이었다. 전정국 때문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이래저래 뒤척이다 늦게 잠들긴 했다만, 이렇게나 오래 잤을 줄이야.

목덜미를 긁적이며 방을 나서자, 때마침 복도를 지나치던 형들과 마주쳤다. 하나, 둘, 셋, 넷. 다 같이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으러 가는 모양인데 딱 둘만 없다. 전정국과 박지민. 퉁퉁 부은 얼굴을 긁적이며 바라보자, 호석이 형이 말했다.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애들은요?”

“걔네 볼 일 있다고 잠깐 나갔다 온다던데. 아마 곧 있으면 올걸? 같이 먹기로 했거든.”

 

등골이 서늘한 게 느낌이 좋지 않다. 몇 시간을 내리 잔 탓에 배가 고프긴 하다만,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건너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좋은 호텔 음식 먹고 체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차라리 이따 박지민이랑 전정국이 들어온 거 보고 나서, 그 후에 먹는 게 배는 곯아도 마음은 편할 거 같다.

하여간 박지민 오기만 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애 데리고 나갔냐고 쉬지 않고 닦달할 거다. 왜 사전에 말도 없이 사람 놀라게 그렇게 행동했냐고, 미안한 줄 알면 스테이크 네 돈으로 사 라고도 해야지.

 

“저기 오네.”

 

윤기 형의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둘은 100m 밖에서 봐도,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특히 전정국이 그러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내 눈에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인지, 형들도 말이 없어졌다.

앞장서서 걸어오던 박지민이 가까이 오면 데리고 방으로 가려 했는데, 뒤에 따라오던 전정국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내 소매 자락을 꽉 쥐며 날 쳐다봤다. 어찌나 꽉 쥐고 있던지, 오른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정도였다. 소매 자락이니 망정이지, 손목을 쥔 거였다면 분명 시퍼렇게 멍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야.”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는 전정국을 박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전정국도 박지민도 누구 하나 표정이 좋지 못해서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형들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잠시 잊고 있던 형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막내 셋이 참 잘하는 짓이다.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주변을 살피자, 윤기 형과 눈이 마주쳤다. 윤기 형은 제 어깨를 으쓱이더니, 남준이 형을 시작으로 다른 형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자. 막내들끼리 풀고 얘기해 주겠지.”

 

일 났다. 이렇게 된 이상 나중에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텐데. 이걸 대체 뭐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형들만큼은 절대 모르길 바랐건만. 아무래도 올해 내 사주에 망신살이 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지. 형들의 걸음이 멀어지는 걸 막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전정국이 꽉 쥐고 있던 내 소매 자락을 흔들었다. 꼭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것 같은 재촉에 조심스럽게 전정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 이제 싫어요? 얘기도 하기 싫을 만큼?”

 

전정국은 세상에서 제일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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