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여러가지 일이 많다보니, 개봉 초기에 봤던 이터널스에 대한 감상을 이제야 정리해보게 됩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개봉을 앞두고 이터널스 감상을 쓰게 되는 것이 참 애매하지만...

이미 보실만한 분은 다 보셨을 것이고, 내용 상 커다란 반전이랄만 한 것이 없어서 편히 써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재미없다, 망작이다 소리도 듣고 있는 이터널스에 대한, 신화 덕후로서의 제 개인적인 옹호 겸 비판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터널스의 포스터, 신들의 여명같기도 하고 황혼 같기도 한 오묘한 색감이 마음에 들어 좋아하는 포스터입니다. 공교롭게도 영화 역시 신과 같은 존재인 이터널스의 (지구생활 기준)여명부터 황혼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터널스의 영화 속 설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셀레스티얼 중 하나인 '아리솀'의 명령을 받아 올림피아라는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며, 지구의 인류를 데비안츠라는 괴물들로부터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땅이라고 볼 수 있는 '가이아' 여신으로부터 태어난 신들의 자손인 '올림포스 신'들과 달리, 올림피아라는 행성(실제하진 않지만...)에서 왔다고 하는 이터널스들은 수메르 신화의 아눈나키(각주 1) 같은 느낌이 더 강하긴 합니다. 

고대 수메르 시대 속 문장, 가운데와 오른쪽 끝에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아눈나키를 의미합니다.

아마 가장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 알려진 수메르 문명에서 믿고 있던 신화의 이야기를 차용해야, 인류의 여명기부터 지켜본 이터널스들의 설정과 더 잘 맞을 것 같기에 선택한 것이 아닐까도 싶구요.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은 초기에 데비안츠라는 괴생명체와 싸워서 인류를 지키고 신으로 추앙 받는 것과 후반부에 지구를 멸망시킬 거인과 싸워 봉인시킨다는 컨셉 자체가, 티탄 신족이나 기간테스(우라노스의 피에서 생겨난 거대한 괴물)들을 물리치고 올림포스의 권좌를 차지하는 제우스 휘하 신들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를 참고해서 만든 것 같기도 하죠. 


특히 마지막 부분의 티아무트의 탄생과 봉인의 과정은, 올림포스 신들이 기간테스들과 싸워 이겨 화산 밑에 가두어서 그들이 요동칠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난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타노마키아를 묘사한 그림.기간토마키아 중 기가스를 무찌르는 포세이돈.


또한 티아무트가 바다에서 올라오다가 그대로 굳어 섬처럼되는 장면은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소금물(바닷물을 의미하는 개념인 것 같은)'의 여신인 '티아마트'가 마르두크라는 신과 싸우다 죽은 후, 그 몸이 양분되어 각각 하늘과 땅이 되었다는 이야기와도 닮아 보였습니다.

뱀의 형상을 지닌 티아마트.


이 외에도 고대의 싸움 장면 중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 문 앞에서의 전투는 길가메시 전설을 가져와서, 그가 싸웠던 훔바바란 괴물과 싸우는 것을 재연한 것 같아서(소머리의 괴물 등장) 다름 흥미로웠습니다. 나름 깨알 고증(?)인가 보다 생각했던 부분이라...

길가메시 및 엔키두와 싸우는 훔바바(가운데).


그러나 신화적인 깨알 고증과는 별개로, 전반적인 전투 장면에서 박진감이 떨어지고 뭔가 다들 약하게 나와서 조금 김이 새는 느낌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전투는 전투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어서 뭔가 마블 특유의 액션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었을 법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나 수메르 신화 내용을 생각해보면(다신교 신화의 특성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신들이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아니며 전투에 특화된 신도 있고 전혀 싸움과는 관계 없는 능력만 지닌 신도 있습니다. 기간토마키아 내용을 보면 헤라 여신 등은 기가스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하는 장면도 나오고, 기가스들과 싸우는 신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제우스, 아레스, 아테나, 그리고 신이 된 헤라클레스 등).


그러므로 이터널스 캐릭터들이 전투력이 애매한 경우가 대다수인게 신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진 않았습니다. 데비안츠와의 전투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인류 문명을 번성하게 하는 목적이라면 인간과 친근해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문명 발전에 도움을 주는 능력을 주는 멤버가 많은 것도 나름 이해가 되는 설정일 수는 있습니다. 


전투력이 약한 점은 차치하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이터널스들의 감정선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예 감정 없는 로봇같이 나오거나 셀레스티얼 수준으로 강력하게 묘사되었다면 인류가 납득할 수 없는 코스믹 호러적인 사고 방식을 보이는 것이 그럴 듯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인간적인 신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을 모티프로 하고 있고 영화 내내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류와 비슷한 사고 방식을 가진 것처럼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영화의 진행은 뭔가 애매하기 그지 없습니다.


차라리 에이잭스와 이카리스에 집중해서, 왜 세르시와 가장 인간적인 관계 맺기인 결혼까지 해봤던 이카리스가 아리솀의 명령에 더 충실한 파벌이 되었는지, 그에 반해 아리솀의 명령을 열심히 따르고 반복적인 셀레스티얼 탄생(자신들이 돌보아온 지적 생명체의 종말)을 지켜봤던 에이잭스가 갑자기 지구 인류는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는지에 대해 서사를 보충했다면 더 흥미진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과 같은 이터널스가 인류라는 유한한 생명을 지닌 생명체와 그들이 사는 터전인 지구와 사랑에 빠지는 묘사가 더 들어갔으면 좋았을 것이며, 이카리스는 왜 인간에게 충분한 애정을 느끼지 못했는지(아니면 아리솀이 이번 일만 끝내면 세르시와 영원히 둘이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고 꼬셨다던지...)에 대해 서사를 부여하고, 어차피 저작권 문제도 없으니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사라지는 인간들을 보며 슬퍼하는 이터널스들, 타노스와 용맹하게 싸우는 영웅들을 보며 심경에 변화가 생긴듯한 에이잭스의 모습 등을 넣어주었다면 어떠했을까란 아쉬움이 계속 떠오릅니다.


여기에 타노스가 사실 이러한 셀레스티얼 부화를 막기 위해 우주 생명체 절반을 날린 거라는 이야기가 언급되었다면 나름 또 재평가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제가 이전에 썼던 캐릭터 분석 + 신화 원전에 대한 내용에 따라 다시 if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진행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전 캐릭터 예상 분석글 Link: https://asklepiade-you.postype.com/post/9941371>


1. 에이잭스: 이름의 어원인 '아이아스'가 트로이 전쟁 중, 자신의 명예가 손상된 일로 인해 자살을 택할 정도의 인물이라는 설정을 따와서 조금은 더 명예를 중시하는 무장 타입의 캐릭터로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힐러'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더라도 전사의 고결함을 중시하는 그런 인물로 만들었다면, 어벤져스들이 타노스와 싸워 이겨 다시 인구가 수복되었을 때 이들을 바로 셀레스티얼 부화에 소모해버린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게 보여졌을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용맹하고 희생적으로 싸우는 전사(히어로)들이 있는 지구의 인류를 그저 소모품 취급하는 것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아리솀에게 반기를 들게되는 것이죠. 자신이 이전에 봤던 지적 생명체 중에 이 정도로 용감히 운명과 싸운 존재들은 없었다는 식의 회상도 넣어주면 나름 인류뽕도 차오르고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2. 이카리스: 에이잭스가 아리솀에게 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처음엔 반기를 들려고 하다가, 세르시와 함께 영원히 기억을 지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아리솀의 제안에 넘어가 결국 티아무트 부화를 일으키기 위해 다른 이터널스와 적이 되는 설정이면 차라리 납득이 좀 되었겠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블 측은 나름 반전이랍시고 이카리스가 이터널스 동료들과 반목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끌고간 것 같은데, 사실 좀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 '태양 속으로(...) 장면'은 신화적인 컨셉을 살려보려다가 이상해진 느낌이었구요.


3. 세르시: 사실 특별히 어떻게 더 만들기 애매한 캐릭터 같기도 하지만 이름의 어원으로 생각되는 '마녀 키르케'와 비슷한 느낌으로, 이카리스와 헤어진 이후 여러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다가 현재 만나고 있는 데인 휘트먼의 조상격인 사람과도 만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도 재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좋아하였으나 그와는 이어지지 못하고, 훗날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또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4. 스프라이트: 갑자기 피터팬-팅커벨 드립과 이카리스에 대한 짝사랑 이야기를 넣는 것보다는, 중간에 잠시 나왔던 에이잭스와의 유사모녀 관계에 집중하여 본인도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고, 그를 위해 어른이 되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고 하는 게 차라리 괜찮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5. 킨고 & 파스토스: 킨고가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발리우드 배우 명가의 5대손이라는 설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름 재밌기는 했는데, 인간들과 가장 많이 어울려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갑자기 이카리스의 뜻을 따르겠다고 쿨하게 결정하는 모습이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차라리 전쟁 등으로 인간에게 실망한 파스토스가 과학과 기술을 멀리하며 어딘가에 은둔해서 살다가 이카리스 뜻에 따르는 것이 오히려 납득이 될 것 같은 느낌이...


6. 길가메시와 테나: 길가메시가 엔키두라고 하는 존재와 큰 우정을 나누고, 엔키두의 죽음으로 인해 불로불사의 약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테나'가 오랜 이터널스 활동으로 일종의 노화가 발생하여 쇠약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매드 위리라는 증상도 어떤 의미로는 오랜 삶에 따른 질병과 비슷한 상태이긴 합니다만) 친애하는 그녀를 고쳐주기 위해 생명공학을 하는 회사라든가, 스타크 인더스트리 생명과학부(같은 게 있으려나요?)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와도 그럴 듯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현대의 불로불사약을 찾고 있는 셈이죠. 그러다가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자신의 생명력을 준다든가 했으면 차라리 더 애틋한 우정과 애정 사이의 무언가로 보였을 것 같습니다.


7. 드루이그와 마카리: 영화 속에서 의외로 가장 상식적으로 나오는 커플이라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드루이그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제 예상과 달리 넘 훈훈한 캐릭터여서 놀라웠습니다. 악당이라고 오해해서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



어쩌다보니 이터널스에 대한 제 개인 소망-망상글이 되었는데, 기대가 컸던만큼 신화라는 소재를 잘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이렇게 길게 끄적여보았습니다.


신화는 이미 종교의 영역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읽히지 않는 신화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죠.

앞으로는 마블이 자신들의 영상 신화에 좀 더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해봅니다.




***각주

1. 아눈나키(Anunnaki) 수메르 및 아카드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집단을 가리키며, '아눈나'(Annuna) (50명의 위대한 신)와 '이기기'(Igigi) (작은 신들)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큰 신과 작은 신이란 개념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발라와 마이아들 같은 관계처럼도 보입니다. 아눈나키는 위대한 하늘의 신이며 도시 우르크의 수호신인 '아누'를 대표로, 아누의 자식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야기 읽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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