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탈은폐의 순간에 존재에서부터 드러난다(나타난다Ereignis)는 하이데거의 언명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음미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은폐와 탈은폐를 'The Play of hide and seek' -- 숨바꼭질 놀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진리는 술래가 풀숲 속에 숨어있는 사람을 찾았을 때 발견되는 것, 술래와 참여자가 바뀌는 과정을 우리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호명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곧바로 문제가 생긴다. 진리는 Truth,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이라는 조건이다. 명제의 참은 명제의 대응물인 사태가 변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참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와 근대철학 사이의 갈등(불화) 요소를 선취하게 된다. a-letheia(탈-은폐)와 truth는, 단어 이상으로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만화라는 예술 형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베 토모미는 신작 『바닷물이 날아오고, 아이는 춤춘다』(발매중, 기간 5권)를 그리면서 그 이전까지와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달라진 요소는 거의 없지만,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편 연재가 2권 이내로 연결되었던 지난번과 비교해서, 위 작품은 현재 5권까지 발매가 되었고 앞으로도 연재가 이어질 예정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아마 10권 이상으로 분량이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등장인물의 숫자가 과거의 만화와 비교했을 때 비교를 불허한다. 매 권마다 첫 페이지와 둘째 페이지는 인물들의 소개에 할애하는데 5권의 시점에서 등장인물의 수는 무려 53명이다. 전작 『월요일의 친구』가 다 합해서 10명 내외, 『치쨩은 조금 부족해』가 다 합해서 10명 내외 (추가 엑스트라까지 포함해도 20명을 넘지는 않는다), 국내 미번역작 『블랙갤럭시 6』가 20명 내외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53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53명에게 전부 이름이 있고 이야기 속에서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만든다. (모두에게 이야기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모두가 평등한 존재자라는 말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의 메인 스토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2권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미즈키와 모모세, 하마 씨의 대화 장면이라거나, 같은 반 친구들인 4명의 남자친구들이 해변가에서 농담을 하다가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추억하려는 듯한 장면 등이 있다. (여기선 8304가 떠오른다고 할 수 있을까?) 5권에서 이렇게 중요한 비중을 가진 에피소드를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맨 마지막화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화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인물들의 동역학과 감정의 흐름을 설명하는 게 독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테니까, 간략하게 설명해보겠다. 먼저, 위 에피소드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사이가(犀賀)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묘사가 이전부터 여러 차례 나온다. 사이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함께 묘사된다. 독자들 중에서는 사이가의 마음이 만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미즈키에게 향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 나도 동의한다. 여러 에피소드에 걸쳐서 사이가는 미즈키를 바라보고 있으며, 타야가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을 때 미즈키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고 사이가가 그 자리에 끼어드는 묘사(5권)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가 미즈키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럴 만한 이유가 물론 있다. 왜냐면 미즈키는 단지 소꿉친구이자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던 모모세와 사이가 좋기 때문이다. 모모세와 미즈키의 친밀한 관계에 감히 끼어들 수 없다고 생각한 사이가는 적극적인 구애를 하지 않는다. 그녀와 주변 사람들은 모모세 X 미즈키 커플을 공인된 커플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5권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전화통화로만 등장하는 토라미는 작중에서 우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한 묘사가 다수 보인다. 우사가 토라미의 손목에서 상처를 발견하고서 손목에 차고 있는 밴드를 토라미에게 줄 때도, 토라미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밝고 행복해보인다. 그 밖에도 토라미와 우사는 여러 에피소드에서 커플(인 것)처럼 엮인다. 그렇다고 해서 토라미와 우사의 관계를 마치 연인처럼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사는 다른 여자 등장인물에게도 매우 친절하게 대하고, 기본적으로 성격이 착하고 순수하다. 만화 속에서는 순수한 학생이 주로 하얀 머리색을 하고 있다, 빛이 선과 진리를 상징하고 어둠이 악과 무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하지만 만화에서 악한 캐릭터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닷물이 날아오고, 아이는 춤춘다』의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감상이 어떻든 간에 나는 단호하게 특이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 작품에서는 악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 뿐인가, 악인이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왕따, 폭력, 가해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불량(양키)처럼 보이는 무리가 반 내부에 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밝혀지는 걸 보면 모두 착하다는 게 명백하다.

기본 설정을 그렇게 짰다고 할 수 있을 테고, 1권에서 밝혀지는 설정은 배경이 되는 효고현의 고등학교가 '진학교'라서 공부를 어느 정도로 하는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고등학교 입시가 있기 때문에, 연초에 시험을 봐서 통과를 해야만 레벨이 높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고등학교 내부에서 가해나 왕따 등이 (적어도 겉으로는) 벌어지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학교는 편차치가 높은 학교인 것이다. 물론 이런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들이 추방된 곳은 오직 천국=하느님 나라밖에 없다. 아베 토모미는 시골 고등학교를 천국처럼 그리려고 했던 걸까? 질문에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지만 깊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에 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금 논할 것이다)

이제 5권의 마지막화, 제55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설명하자. 도시(코베시 산노미야역)에 가서 쇼핑을 하기로 약속한 우사(右佐)와 마에지마(前島)가 열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에지마는 콘택트 렌즈를 끼고 "오늘은 나안(裸眼)에 도전해봤다"라고 우사에게 말한다. 그리고 산노미야역이 보이고, 다음 장면에서 마에지마가 '특전이 붙은 신간 만화'를 사 온다. 마에지마는 특전이 갖고 싶어서 우사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거다. 마에지마는 우사에게 "전국 버서커의 특전이 붙은 신간도 있는데 필요 없어?"라고 물어본다. 우사는 "나는 작품 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특전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대답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피규어를 몇 개나 뽑았다. 쇼핑을 마친 둘은 셔터가 많이 닫혀 있는 아케이드형 상가를 벗어나 이번에는 산노미야 주변에 있는 <코스프레 찻집>을 찾아서 분주히 돌아다닌다. 둘은 고풍스러운 코스프레 찻집 앞에서 누가 먼저 들어갈 것이냐의 문제로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건물의 문을 열고 갑자기 나타난 사이가와 마주친다. 알고 보니 사이가는 이 가게에서 메이드복을 입고 일하고 있었던 거다. 사이가는 둘의 주문을 받으면서 "반에서 내 아르바이트 직장이 유출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그럴 리 없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이가는 우사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주문을 받는다. 케이크와 커피가 도착하고 나서 사이가는 우사에게 (방금 가챠에서 뽑은) 피규어를 선물받는다.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사이가가 "난 토라미가 아냐? 정말로 나한테 (피규어를) 주는 거야?"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가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토라미에게 전화를 건다. 갑자기 뜬금없이 우사는 토라미와 통화를 하게 되는데, 우사는 토라미와 전화하면서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짓는다. 마에지마는 웃으면서 우사의 손에 있는 쓰레기를 가져간다. 사이가는 우사가 통화를 짧게 끝내는 걸 보면서 "근데 알겠어 우사. 짝사랑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니까"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주문을 받는 사이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마에지마와 헤어지고 나서 우사는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가다 결심을 내린 듯 어느 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인파 속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우사는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자 머쓱함, 부끄러움을 느끼고 머리를 긁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55화는 실로 암시로 가득한 에피소드이다. 암시가 아닌 문장과 대사, 암시가 아닌 장면들을 찾아내는 게 오히려 더 쉽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한 해답을 경유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우사의 뒷모습이 의미하는 것에 대답해 볼 생각이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작업은 만화 평론이라기보다, 오히려 문학 평론에 가까울지 모른다. 만화라는 텍스트를 문학으로 번역하고 번역된 텍스트를 해석/비평한다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허나 그런 작업이 어떤 경우에는 절실하게 요구되고, 또한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한번 걸어가 보자. 먼저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아래와 같다.


1. 사이가는 우사의 선물을 받고 나서 왜 뒤돌아보았을까?

우사가 중복된 피규어를 사이가에게 선물하는 컷 다음 컷에서, 사이가는 한번 뒤를 돌아본 다음에 "그 우사가 나에게?!" 하면서 크게 놀란다. 자, 여기서 사이가가 뒤를 돌아본 이유를 추리해 보자. 독자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배경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다. 사이가는 미즈키를 좋아하고 있으며, 우사와 토라미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가는 자신 뒤에 실제로 있는 누군가를 돌아본 게 아니라는 것. 사이가가 뒤를 돌아보는 행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사에게 피규어를 받는 일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을 조금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의 시선을 두려워한 걸까? 뒷장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핸드폰으로 라인 메시지가 오고, 사이가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토라미에게 전화를 건가. 전화기를 건네면서 짓는 사이가의 표정은 짓궂다. 이제 그녀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가상의 시선을 마음속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시선의 주인은 그녀의 친구 토라미일 것이다.


2. 우사는 역 앞에서 누구를, 왜 기다리고 있었나?

마에지마를 집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문득 결심한 것처럼 우사는 역 앞에서 올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그 사람이 찾아오지 않고, 우사는 포기하고 나서 밤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힌트를 찾아보자. 앞장에서 이런 대화가 우리의 귀에 들려온다. (이 대화는 무론 우사도 옆에서 듣고 있다) 사이가 "미안해. 오늘 거기에 돌아가는 거 8시쯤이 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사이가의 전화 상대는 토라미라는 게 밝혀졌다. 역 앞에서 토라미와 사이가는 만날 약속을 하고, 약속 시간은 저녁 8시다. 그리고 마에지마를 배웅할 때 우사와 마에지마는 다음의 대화를 나눈다.

마에지마: 나도 아르바이트를 할까? 어른 같아 보여. 게임이나 만화도 갖고 싶은 게 많으니까.

마에지마: 미안 우사. 네가 집에 도착할 때는 8시를 넘기는 거 아니야? 통금은 괜찮아?

우사: 애 취급하지 말라고. 휴일은 7시까지 괜찮아!

마에지마: 안 괜찮거든.

마에지마와 우사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7시를 넘겼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사가 역에 도착하면 8시 가까이 될 것이다. 이제 우사가 기다린 사람이 누군지 명백해진다. 그는 사이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사이가에게 할 말이 있었으므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역에서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 우사의 뒷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사이가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한 우사의 감정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가 사이가의 말을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함께 의미한다. "짝사랑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니까"라고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다. 어쩌면 우사는, 그녀의 짝사랑 상대가 자신이라고 오해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역 앞에서 만나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하려고 밤 늦게까지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독자는 사태를 알고 있다. 미즈키를 좋아하는 사이가의 마음을.

우사는 사이가의 표정과 말에서 탈-은폐되는 진리를 붙잡아서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켰다. 거기까지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진리는 도대체 단 하나일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우사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이란,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진리를 구하는 철학자처럼 우사는 기호와 표현의 의미를 찾아서 해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술래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숨바꼭질의 게임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만화가는 작품 속에 수많은 암시를 집어넣고 독자는 암시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바닷물이 날아오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평화로움과 기쁨을 만끽하는 고등학생들은 진리를 그대로 체현하는 듯 보인다. 진리-사건은 언제나 새롭게 개시된다. 마치 과거를 추억하는 것처럼 빛이 바랜 흑백만화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시간과 기억 속에 담긴 무한한 의미를 추출해낸다. 첫 번째 시도이면서 결단인 우사의 기다림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사는 진리-찾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두의 사랑이 탈-은폐될 때까지, 『바닷물이 날아오고, 아이는 춤춘다』 속에서 만남의 순간은 영원히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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