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2차 관해가 끝나갈 무렵 드디어 골수검사의 일정이 통보되었다. 지난번 검사에서는 완전관해 소견이 보이지 않아 2차 항암치료를 시작했었기에, 이번 결과는 기대되면서 한편으로는 두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



아현은 골수검사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불안한 증상을 다리를 떠는 것 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지석은 침대가 덜커덩 거리는 소리에 자기까지 더 예민해 지는 것 같았지만, 당사자가 가장 힘들 거란 것을 알았기에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아현의 다리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아현아. 괜찮아.”



쉴 세 없이 움직이는 아현의 오른쪽 무릎을 감쌌다. 무릎으로 전해오는 따스한 기운에 아현도 점차 진정되는 것 같았다.



“걱정되니?”

“응.”

“괜찮아. 요즘 혈액 검사 수치도 좋았고. 체력도 많이 나아졌잖아? 미리 걱정하지 말자. 괜히 나쁜 감정 씨앗에 물주지 말자!”

“틱낫한? 마음이란 밭 안에 긍정의 씨앗이 있고 부정의 씨앗이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여전히 건재하네. 우아현.”



아현은 싱긋 웃었다. 어릴 적부터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책을 읽었던 아현은 지석이 기억하는 한 구절을 읊자마자 전구(全句)를 말했 다. 그 말이 다시 자신에게 긍정의 주문이 되었는지 아현은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 나 요즘은 아프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었으니까.” 

“응. 맞아.”

“이번에 꼭 다시 퇴원해서 공고들어가기 전에 실컷 놀다 올 테야. 영화 \도 잔뜩 보고 텔레비전도 잔뜩 보고 다시 힘내서 치료 받아야지.” 



이번에는 지석이 웃었다.



“우리 검사 전까지 뭐하고 놀까?”

“요즘 지석이 일은 어떻게 되어가나 듣고 싶어.”

“나? 글쎄……. 우리 우아현씨 옆에 껌 딱지 마냥 붙어있고 싶어서 요즘 공연은 안하고 있지. 대신에 학교에서 배운 작사, 작곡을 써먹어보는 중이야. 그래서 오히려 요즘은 내가 보컬리스트의 자질보다 이쪽 자질이 더 있는지 고민한다니까. 아, 어제 나 하는 거 봤지? 그건 태희 형이 맡 긴 편곡 작업들! 대체 이 형은 왜 맨날 편곡만 필요한지 모르겠어. 곡이라도 쓰면 돈이라도 더 잘 들어 올 텐데 말이야.”



아현의 기분이 좋아지자 지석도 절로 수다스러워졌다. 늘 옛날부터 아현 은 말이 없는 축이였고, 시끄럽게 구는 것은 지석이었다. 물론 아현도 마 음을 열면서 점점 말을 많이 하고는 했지만, 부동의 수다 1위를 차지하던 것은 항상 지석이었다. 그런 지석의 노고 덕택에 아현이 마음을 열게 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편곡은 잘 되가?”

“물론이지. 내가 빵빵하게 돈 벌어서 우아현씨 드시고 싶은 거 다 사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살찔 준비부터 해두시죠.”

“편곡 잘 되는가 물었더니 무슨 수식어구가 그렇게 많아.” 

“이게 다 잘 한다는 걸 빙글 빙글 돌려서 말하는……. 아파!”



지석의 말이 길어질 기세를 보이자 아현은 귀를 막고 있던 손으로 지석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꽤나 두툼한 입술이라 그런지 때리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아현도 그 소리에 놀라 지석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아 진짜, 우아현 또 힘세졌어!”



지석이 제 입술을 문지르며 신경질을 냈다. 아현은 ‘때리는 건 아프라고 때린 거지 뭐.’라며 혀를 날름거렸다.



“진짜, 폭력적이야. 너 그러……. 잠깐만.”



아현에게 한바탕 구박을 퍼부으려던 지석은 엉덩이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진동에 말을 멈추었다. 곧바로 화면을 보자 문자가 떴다. 지민이었다.



아현이 궁금한 듯 고개를 쓱 내밀었지만, 지석은 긴팔을 멀리 하며 자기 혼자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뭐야, 누군데 몰래 문자를 확인해?” 

“여자.”

“우와. 나쁘다.”

“나한테 여자가 어디 있겠냐. 맨날 너한테 붙어있는데.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안 읽은 책이나 읽고 있어. 이래서 기자 노릇해서 나 먹여 살리겠나?”

“아, 누구 만나는데!”

“누나 만난다. 누나!”

“그래? 그럼 갔다 와.”



누나라는 말에 아현이 헤헤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석은 그런 모습에 아이를 보는 어른처럼 웃음을 터뜨리곤, 책을 들어 살짝 머리에 콩 하니 내리쳤다. 아현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가 책을 쥐어 잡았다.



“이 오라버니가 돌아올 때 까지 50페이지는 읽어 놓도록.”

“알았어. 오늘은 어지럽지도 않고, 기분도 좋으니까 100페이지는 읽겠다.”



꽤나 두툼한 소설책이 반 정도 지나 펼쳐졌다. 아프지 않을 때라면 이틀 이면 금세 읽어버릴 정도의 책이 병원에 입원한 후 아직도 끝을 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녀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스스로 책을 잡고 읽고 있었 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지석이 소리 내어 읽어주기도 했다.



토끼 같은 표정으로 아현이 손을 흔들었다.



지석은 슬쩍 시계를 확인하며 지민과의 이른 점심식사로 혹여 골수 검사 전까지 돌아오지 못하나 싶어 걱정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지석은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아현과의 장난으로 지 민이 나오라고 하였던 장소가 1층 로비였는지 식당 이였는지 헷갈렸기 때 문이다.



— 점심 사줄게. 급한 일 없으면 지금 1층 로비에서 만나자. 물어볼 말도 있고.



“아, 로비구나.”



지석은 지하에 있는 식당에 가려고 B1을 눌렀다가 다시 1을 눌렀다. 보호자 휴게실에서 대충 햇반으로 아침을 때웠더니 아직 벌써 슬슬 배가 고파졌다.



문이 열리고 지석은 사람들에 섞여 밖으로 나왔다. 오늘 따라 진료가 많은 것인지 유난히 병원이 바글바글한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 직 지민이 보이지 않아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빨리 내려와. 지금 만나자는 사람이 늦네.

 


전송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석’하는 부름과 함께 등에 알싸한 손맛이 느껴졌다. 순간적인 아픔에 지석은 어깨를 오그렸다. 지민이 낄낄거리면서 지석의 옆에 섰다.



“일찍 내려왔네. 아, 뭐야 그새를 못 참고 문자했냐?”



웃던 지민이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지석의 팔뚝을 다시 한 대 쳤 다. 그 손이 꽤나 매웠는지 지석은 팔뚝을 문질렀다. 그런 지석을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민이 팔을 잡고 끌었다.



“아오, 어제 회식하고 늦잠자서 아침도 못 먹었다. 그나마 오늘은 점심시간 전보다 조금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그래? 요즘은 좀 할만 해?”

“뭐 늘 똑같지. 뭐 먹을래? 한식? 중식? 일식?”



계단을 타고 흐르는 지민의 발자국 소리가 각각의 음절에 맞춰 낮게 울 려 퍼졌다. 지민이 세 계단 정도 앞서 내려가고 있었다.



지석보다 한참 작은 지민이었는데 그녀는 늘 자신보다 커보였다. 단순한 나이의 차이 때문이었는지, 그 듬직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지민은 지석이 전혀 넘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삶의 무게로 인해 지석이 크지 못하고 작아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누나는 여전히 크네.”

“뭐? 너 지금 나 살쪘다고 놀리는 거냐?” 

“한식 먹자. 김치찌개 먹고 싶다.”



마저 계단을 내려오는 지석을 향해 지민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윗입술이 따라 올라가 꽤나 성내는 듯 하는 표정이 되었다.



지민이 김치찌개와 불고기정식을 계산하고 전자의 식권을 지석에게 건넸 다. 아직 점심시간 직전이라 그런지 식당은 환자들의 가족들로만 붐볐다. 금세 줄은 줄어 두 사람은 나란히 식사를 받아 마주보고 앉았다. 지민만큼 지석도 허기가 졌었는지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밥만 먹고 있었 다. 서너 수저정도 먹어서 허기가 가시자 지민이 불고기를 입에 넣고 말 했다.



“백지석, 요즘 밥은 잘 먹고 다녀?”

“그냥 똑같지 뭐. 대충 아현이 옆에서 때울 수 있는 음식 먹거나, 아현이가 좀 제대로 먹으라고 잔소리 해대면 식당 와서 먹고.”

“잘 챙겨먹어. 현이 먹는 것만 신경 쓰다가 너 몸 상하지 말고.” 



지석이 찌개 속의 햄을 들어올렸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여서 그런지 누가 봐도 허겁지겁 먹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잔소리는 이미 우아현씨에게도 지겹게 듣고 있거든요.” 

“역시 우리 현이 듬직해. 저런 여동생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미 지겹도록 데리고 다니면서 인형놀이 했잖아.”



그 말에 지민이 웃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도 나는 데다 성향도 반대라 자신을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던 지석과 달리 아현은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에 꽤나 살갑게 굴었다. 아마 그 것은 두 여자 모두 공부벌레과라는 성격을 공유해서 일지도 몰랐다.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다시 둘은 나란히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남자라고 지석의 밥그릇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좀, 천천히 좀 먹어. 앞에 앉은 사람이랑 속도는 맞춰줘야지.”



아직 밥이 반은 남은 지민과 달리 거의 바닥을 보여 가는 지석인 터라 지민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아현이 골수 검사란 말이야. 근데 물어볼 말이 뭔데?” 

“골수검사야? 아 이번에는 꼭 완전관해여야 하는데……. 그리고 일단  나 밥 좀 마저 먹고 말하자.”

“거참, 의사선생님 천하태평하시네.” 

“나 이제 나름 쿨하게 사는 거 몰라?”



지민이 마저 식사를 계속했다. 이미 지석은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지석은 너무도 열심히 먹는 지민 탓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병원에만 있다 보면 세상의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나마 이 렇게 짬짬이 뉴스라도 챙겨 읽으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 정치 이런저런 글을 클릭해서 보고 있는데 지민이 참으로 요란하 게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지석이 슬쩍 화면에서 눈만 치켜뜨니 만족한 표 정의 지민이 보였다.



“가자. 기분이다. 누나가 후식까지 쏜다.” 

“나 빨리 올라가 봐야 된다니까.”

“어차피 아직 검사 시작도 안한다니까.”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출구에 그릇을 내려놓고 지민이 이끄는 데로 병원 안 카페로 향했다.



“지난번과 똑같이?” 

“어.”

“아메리카노랑 카페라떼 레귤러 사이즈로요.”

“테이크아웃으로 해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이 묻기도 전에 지민의 곁에 서있던 지석이 냉큼 말했다. 지민이 그런 그를 흘겨보았지만, ‘빨리 올라가 봐야한다니까.’를 중얼 거리는 지석을 더 이상 나무랄 수는 없었다.



커피 두 잔을 받아든 지민이 한 잔을 지석에게 넘겼다. 카페에서 다시 중앙 병동 쪽으로 걸어오는 긴 복도, 지민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지석아. 요즘 병원비 좀 힘들어?”

“어?”

“병원비 힘들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누나한테 말해. 너 집에 말해봤자 불호령만 떨어지니까. 혼자 돈 만들어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것 같은데. 2달치 밀려놓고 앞으로는 어쩌려고. 돈 잘 버는 누나뒀 다 뭐해. 현이도 나한테는 예쁜 동생인데. 그거하나 못 도와주겠냐? 가끔 밥 사달라고 연락도 하고. 잘 챙겨 먹기는 하냐?”

“어? 병원비? 아냐. 아직 빠듯하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아직 원룸 내놨던 돈이랑 나 일하면서 받고 있는 것도 있고……. 두 달이나 밀렸다고? 나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구나.”



지석이 뒤통수를 헤집어 놓았다. 머리가 까치집처럼 엉망이 되었다. 



“뭐야? 원무과에서 너한테 몇 번 전화했다는데? 병원비 수납 안 되었다고. 내가 다른 환자 때문에 원무과 갔다가 현이 병원비 밀렸다고 해서. 내가 내고 왔는데?”

“누나가 냈다고? 이상하다, 전화 온 기억 없는데?”

“뭐야, 걱정했네. 난 갑자기 너 병원비 밀렸다 해서 배 굶고 사는 줄 알았지.”

“아냐. 거참 이상하네. 전화 안 왔는데. 병원비는 내가 다시 누나 통장 으로 보내줄게.”

 


지민이 지석의 팔뚝을 세게 내리쳤다. 그 바람에 지석의 커피가 흘러나 와 손등을 적셨다.



“아야! 또 왜!”

“뭘 또 다시 보내준다고 그래. 돈 아껴놔. 맨날 병원비 도움 좀 준다는 거 괜찮다고 빡빡 우겨서 못했는데. 이번에 관해 성공하면 현이 맛있는 것 사주고……. 공고 치료도 더 해야 되니까, 아껴놔. 정 싫으면 나중에 현이 공고도 다 끝나고 완쾌되면 그 때 일해서 갚던지.”

“고마워, 누나. 사실 좀 빠듯하긴 했지. 진짜 내가 나중에 꼭 갚는다.”

“거참, 다른 사람은 힘 좀 보태준다면 ‘예 감사합니다.’ 할 텐데. 지 지리도 고집도 세지. 아주 둘이 똑같아.”

“아현이가 힘든데, 나도 열심히 일해서 정신 차리려고 그런 거야. 정 나중에 죽고 못 살겠으면 그 때는 진짜 부탁할게.”

“진짜, 의사 누나를 두고 제대로 써 먹질 못하네.”

“아냐. 뭘. 이 정도 신경 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먼저 올라간다.”

“백지석! 잠깐만!”



지민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지석의 얼굴에 있는 눈, 코, 입이 모두 동 글동글해졌다.



“왜?”

“이거 가져가.”



그를 불러 세운 그녀가 주머니에서 꺼내 건넨 것은 조그만 플라스틱 카드였다. 지석이 받아 살펴보니 ‘백지민’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용카드였다.



“이건 왜?”

“너 밥도 가끔 사먹고 할 때 쓰라고. 나는 바쁘니까, 오늘처럼 못 챙겨 주잖아.”

“에이, 괜찮아. 이 정도는 아냐.”

“그리고 너 말고 현이도 좋은 거도 좀 사주라고.”



지석이 신용카드를 빤히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에 올려져있 는 가벼운 플라스틱 조각이었지만, 지석과 아현을 생각해주는 지민의 깊은 마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 그리고 현이한테는 나중에 놀러간다고 전해줘. 난 너 마이너스 통장 만들고 있나 해서 걱정했더니. 역시 그래도 내 동생 능력남이네. 올라 가봐.”

“고마워, 누나. 잘 쓸게.”



지석이 손을 저었다. 저층 엘리베이터가 먼저 도착하여 지민이 올라탔 다. 맨 안쪽에 끼여서 탄 지민이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이 닫히 자마자 지석은 뒤돌았다. 아직도 고층 엘리베이터는 높은 층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직 반쯤 남은 커피를 홀짝이다가 방금 전 지민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의 원룸을 처분하면서 까지 병원비는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해결했 는데 두 달이나 미뤘다는 것이 제 자신조차 이상했다. 요즘 병원비를 깜박할 정도로 바쁘게 지낸 일도 없었는데 아현보다 자신이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지석은 곧바로 올라탔다. 휠체어를 탄 아이와 그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 한명 그리고 불혹의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연이어 탔다. 지민보다도 더 널찍하게 탔다.



10층에 한번, 11층에 한번 멈추어 서고나자 엘리베이터 안에는 지석만이 남아있었다. 지석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문자나 전화가 오지도 않았지만 그저 혼자 있는 공간에서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지석이 원무과 전화가 생각나 다시 통 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누나, 누나, 태희 형, 태희 형, 누나, 누나, 영제 형…….



몇몇 이름만이 횟수를 달리해가며 반복해서 놓여있었다. 곡 작업을 받아 오고 있는 태희와 누나, 그리고 종종 아현과 동시에 알고 있는 지인 몇이 간간이 등장했다. 지석의 시선이 02로 시작하는 번호에서 멈추었다. 핸드 폰에 저장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서울권의 같은 번호 두 개가 날짜를 달리 하여 띄엄띄엄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 지민이 말한 원무과의 번호인 듯 했다.



“어라, 이때 전화 못 받았나?”



지석은 통화목록을 다시 눌렀다. 3분 52초, 4분 3초라는 두 개의 통화시간이 눈에 들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지석은 멍하니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의 기억 속엔 그 통화 내역이 남아있지 않 았다. 마치 술을 많이 마시고 필름이 온전히 나간 것 마냥 기억이 통째로 끊어져있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 못하는 술 마신 다음날, 무슨 실 수를 했는지 두려워하는 아침의 침대 위에서처럼 지석에게 순간적인 공포 가 찾아왔다.



지석이 우두커니 서서 무( 無 )기억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찰나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이 묵직해지는 기분 탓 에 지석도 곧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4층을 지나가고 있었 다.



다시 일층에서 문이 열리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지석이 내려오기만을 빤히 쳐다보자 그 민망함에 그는 엘레베이터를 내려왔다. 아무래도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자꾸 깜박깜박하네. 정신 줄을 놓고 다니나 보다.”



다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면서 지석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현의 식사 기록, 편곡 작업의 마감 날, 그리고 이번 병원비 수납까지 요즘 들어 자꾸만 깜박이는 일이 많아졌다.



“나도 피곤이 쌓였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최근 들어 집에 돌아가서 쉰 기억조차 가물가물했 다. 특히 2차 관해에 들어가면서 아현의 항암제에 대한 부작용 증상이 심 해지면서 쉽사리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밤에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선잠에서 깨어 그녀가 코피를 쏟고 있지는 않은지 열이 치솟아 오르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지석은 누구보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자신이 이렇게 헤매고 있다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이렇기에 보호자가 환자보다 때로 힘들 때가 있나보다.



결국 지석은 내려온 새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잠시 걸음을 돌렸다. 지 난번 오렌지 주스를 샀던 그 편의점에 들어가서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다 이어리와 펜 하나를 쥐어들었다. 일기 쓰는 것이나 할 일을 이런 식으로

 


적는 것에는 버릇이 없었지만, 요즘처럼 깜박이다가는 아현의 병이라던 가, 겨우 받아오고 있는 태희의 곡 작업에도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어디보자. 얜 너무 두꺼운데.”



지석은 꽤나 깔끔한 검은색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가 생각보다 두터운 탓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렇게 많은 다이어리를 다 쓸 때 까지 아현의 병이 낫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얘가 낫네.”



다시 집어든 것은 고동색의 두꺼운 종이로 된 표지의 작은 크기의 노트 였다. 수첩이라 하긴 어울리지 않고 다이어리라 말하기에도 얇았다. 지석 은 삼색의 펜과 그 노트를 계산하고 로비의 의자에 앉았다.



노트의 맨 앞에는 작은 월간 노트가 있었다. 지석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고 빈 달력에 숫자를 채워 넣었다. 머리털 나고 여자아이들처럼 이 렇게 다이어리를 적는 것은 처음이었다.



“으으……. 이런 건 우아현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날짜를 모두 채워 넣은 지석은 우선 오늘 있는 일부터 달력 칸에 채워 넣었다.


  • 2달치 병원비: 누나 계산
  • 아현 골수검사


한참동안이나 다른 주요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던 지석은 아직 다른 많은 일이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다는 것을 깨달고 살짝 씁쓸한 웃음을 지었 다.



방금 전 마신 달달한 커피 향이 아직 입안에 남아있었지만, 기분은 너무 도 쌉싸름했다. 마치 커피가 아닌 한약 한 사발을 들이켜 마신 것 같았 다.



지석은 혹여 또 해야 할 일을 잊기라도 할까봐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 했다. 머릿속에서 쇠구슬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그치, 맞다. 태희 형 곡 작업.”



그는 정확히 일주일 뒤의 공란에 ‘태희 형 곡’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 후로도 ‘병원비 수납일’, ‘기타 아르바이트’, ‘월세 내는 날’과 같은 몇몇 개의 알림이 더 적혀져 내렸다.



이제 더 이상 쓰일 내용이 없어져서야 지석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시간을 많이 보냈는지, 이제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 얘 점심도 깜박하고 이러고 있었네. 백지석, 진짜, 머리가 백지가 되어가네.”



지석이 급하게 노트를 주머니에 꽂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이미 3대 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한 대를 보내고 두 번째서야 그는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느 때와 같이 손 소독을 하고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아현의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에 들어서니 수저를 막 입에 넣고 있는 아현이 보였다. 민머리로 웃으며 지석을 보는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싸했다. 곧 있을 검사결과가 걱 정되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여기저기 볼일이 있어서 좀 늦었네. 이 오빠 없어도 아현이 밥도 잘 먹고 있고, 오빠 없어도 되겠다.”

“오빠는 무슨, 실없는 소리 하긴.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어?” 

“응. 누나랑 병원 식당가서 김치찌개 먹었어.”

“근데 왜 그렇게 비밀스럽게 굴었데?”

“뭐가?”

“지민이언니, 평소에는 맨날 여기 와서 너 데려갔잖아.” 

“아. 글쎄 내가 너무 너한테만 붙어있어서 질투 났나?” 

“또 실없는 소리 하긴.”



지석이 큭큭 거렸다. 그에 따라 그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그녀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숨기 고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던 아현은 이렇게 늘 솔직하고 때로는 뻔뻔하기 까지 한 지석이 부러웠었다. 가끔은 ‘좋은 집에서 자란 사람은 다르구 나.’ 라는 느낌에 먼 사람이라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몇 시에 한다는 말 없었어?” 

“아니, 한 두시 쯤?”

“한 시간 정도 남았네. 마저 먹어 밥.”



아현이 다시 익힌 김치 조각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 조그만 입술이 토끼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사이에 벌써 진통제 한통이 링거액 사이에 매달려 아현의 몸으로 들 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자신을 버려두고 지민과 있다 온 자신에게 또 입이 튀어나 와 있을까 싶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아현은 꽤나 태평하게 굴고 있었다. 특히 골수 검사를 앞둔 그녀가 예민하지 않은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그만큼 지석은 아현의 고통에 대한 절망에 익숙해가고 있었다. 그는 괜히 아현의 식판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맞아야 할 매라면 미리 맞고 끝 내는 것이 나을까 싶어 괜히 아현을 자극했다.



“이제는 골수 검사 안 무섭나봐?”

“바늘 찔리는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마취하고 하니까 견딜 만 해. 골수 검사 보다 끝나고 나서 가만히 서너 시간 동안 가만히 있는 시간이 지겹긴 하지만. 어때, 꽤나 어른스러워졌지?”

“낼 모래 앞자리 숫자 바뀌는 여자가 이제야 어른스러워지면 쓰나.” 



덤덤하게 굴던 아현이 나이 이야기에 눈을 흘겼다. 아프지 않다는 아현의 말에 지석은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장난을 걸고 있는 지석이다.



아현의 수저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지석의 이마와 만났다. 계란 껍데기가 깨지는 그런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지석은 곧바로 제 이마를 부여잡았고, 동그랗게 부어오르는 그의 이마를 본 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입안에 있던 밥알 몇 개가 지석에게로 튀어나왔다.



“아, 더러워!”

“너 이마!” 

“때려놓고 웃지 마!”



지석은 살짝 부어오르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 둥근 부분이 뜨끈해진 것 같았다.



“이거나 치워줘. 다 먹었어.”

“어디 봐. 조금이라도 남겼기만 해봐.” 

“다 먹었거든?”

 


지석이 과장되게 눈두덩에 힘을 주어 쌍꺼풀을 만들어 냈다. 지석의 표정을 보고 아현이 더 크게 자지러졌다. 쌍꺼풀까지 만들어 크게 뜬 눈을 부라렸지만, 오늘따라 식판은 깨끗했다.



지석은 괜히 구박할 기회를 잃었냐는 둥, 꼭 이런 날만 잘 먹느냐는 둥 구시렁거렸다. 혼잣말로 장난스런 투덜거림을 하던 지석이 식판을 들려고 아현에게 오자, 그녀는 아이를 다루듯이 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으, 변태!”



지석이 고의적으로 몸을 떨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 장난스러움에 허리를 꺾으면서까지 웃음을 터트렸고, 그 바람에 새로 들어온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잠에서 깨었다.



“부부가 금슬이 좋네.” 

“예?”

막 잠에서 깬 할아버지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그 간병인으로 있던, ―아 마도 그 분의 딸이었을 것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아마 아현의 엄마가 아직도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딱 그 여자의 연배 정도 되었을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된 그 얼굴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오 르게 했다. 아현의 웃음이 멈추었다. 호수에 던진 돌로 인해 동그랗게 물결이 퍼져나가는 것 마냥 아현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웃음이 점점 사그라졌다.



그 어색함은 지석이 다시 들어옴으로 인해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만 해도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어대던 아이가 맹해져있으니 지석의 얼굴에 갑자기 걱정이 떠올랐다.



“왜? 무슨 일 있어?”



천천히 지석에게 돌리는 아현의 얼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미소가 피었다.



“저기 어머님이 우리 부부 금슬이 좋다고 하시는데?” 

“부부 금슬?”



지석의 표정이 맹꽁이처럼 변하더니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 했다.



“어머, 미안해라. 내가 실수 했구나. 누나, 동생 아니면 오빠, 동생인가?”



두 사람이 시선을 나누며 광대가 슬금슬금 올라가자 여자는 자신이 실수 라도 한 것 마냥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현은 지석의 입 꼬리 끝이 장난기로 꼬물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지석은 엉덩이를 아현의 옆으로 쑥 들이 대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부부 맞아요. 잘 어울리나요?”

“그래! 형제자매 같지는 않더라. 두 사람 너무 예뻐.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어?”

“저희요?”



지석이 눈동자를 하늘로 치켜 올리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손가락을 접었다. 아현은 그의 품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다섯 손가락은 이미 한 번씩 접히고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17년이요.”

“17년?”



두 사람의 삶의 길이에 반은 넘어 보이는 그 숫자에 여자의 눈이 동그래 졌다. 지석이 웃으며 다시 팔을 풀었다.



그녀가 그런 그의 등을 내리쳤다. ‘아파’하며 몸을 꼬는 지석을 향해 아현은 다시 손바닥을 휘둘렀고, 그는 냉큼 몸을 빼며 옆으로 물러났다. 다시 아옹다옹 다투는 어린 부부 탓에 여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만 을 지으면서 그 파릇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침대 근처에서 잡기놀이에 열중이던 지석은 아현이 던진 물티슈 뭉치에 얻어맞고서야 다시 얌전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그 뭉치를 올려놓았고, 그녀는 이불을 배 밑까지 끌어당겼다. 



“책 줘봐.”

“또?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너랑 놀면 마음의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아. 네가 얼마나 시끄럽게 웽웽 구는 걸 아냐.”



아현의 한마디에 지석은 잔뜩 풀이 죽었고, 곧 그녀의 손에는 거의 끝을 내어가는 소설책이 쥐어졌다. 식사용으로 펼쳐졌던 식탁은 이제 식판대신 에 책을 올려놓고 있었다.



끝의 내용이 2할 정도 남겨져서 한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그 세계 속으로 아현은 빠져들었다. 그 새로운 세계에는 아현을 괴롭히는 병마도 없고, 고통도 없다.



지석은 책을 건네주고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골수 검사를 준비해가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아현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책에 질투가 났다. 이 책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고등학 교 때까지 일 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런 것을 보니 사람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현은 치료 받는 내내 비실거리는 탓에 글씨라고는 제대로 읽지 못하였 는데, 최근 나아진 몸 상태 덕택에 책 진도도 한참 나갔던 것이었다. 그는 실은 질투보단 다행이라는 감정이 더 컸다. 마치 그 책의 대단원의 끝 을 보게 되는 날, 아현 또한 이 지긋한 병원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했다.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이나 지석은 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머리에 입술도 모두 부르튼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리 고아 보일 수 없었다. 아현의 손에 한 장, 한 장 종이가 넘어가면서 지석은 그에 따라 눈을 깜 빡였다. 배부른 채로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어느 봄날의 늦 은 오후의 춘곤증처럼 꽤나 나릇 해졌기 때문이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 다가 천천히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아현이 바짝 고개를 들어 그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움직임에 선잠에서 깨어나서 보니, 골수 검사를 위해 아현을 데리러 온 간호사였다.



지석은 여전히 몽롱한 채로 아현을 따라 나섰다. 그 짧은 사이에 잠이 든 것도 아니었는데 아현이 손등을 찰싹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껌벅 껌벅 감기고 있었다. 검사실의 앞에서 아현이 잠시 멈추어 섰다.



“너 기절할 것 같아. 나 검사 받을 동안 가서 좀 쉬고 있어.” 

“아냐,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잘 하고 와.”

“뭐 내가 할 게 있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 되는 건데. 다녀올게.” 



아현이 손을 흔들면서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석은 검사실 가까이 놓여 있는 의자에 가서 주저앉았다.

이제 그녀는 옆으로 누워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구부려 조그만 새우처럼 몸을 웅크릴 것이다. 그리고 화한 소독약이 그녀의 엉덩이를 쓸어내리고 골수 검사의 시작을 알리듯 긴 바늘로 인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마취주사가 놓일 것이다. 의사들은 등골에 감각을 잃고 가만히 누워있는 아현의 장골능에 그 긴 바늘을 집어넣어 골수를 빼내게 될 것이다.



지석은 그 바늘이 제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엉덩이가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피검사만으로도 그 따끔함에 몸서리 치고는 했는데, 얼마나 아프기에 마취까지 하여 바늘을 집어넣을까 생각 했다.



아현은 자신의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것이 싫다며 지석이 검사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극구 말렸다. 아픔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어도 연인으로서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 의지는 아현에게 사라지지 않는 듯 했다.



아마도 그 것은 옛날부터 자신의 마음은 넝마가 되어도 이름처럼 늘 우아해 보이고 싶었던 아현의 몹쓸 강박증상이 아닌가 생각했다.



잠시 과거로 빠져들었던 지석은 귓가에 울리는 아현의 끙끙거림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그 소리가 실제로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골수 검사는 꽤나 무시무시한 명성치고는 이삼십 분이면 끝나는 생각보 다 간단한 검사였다. 하지만 시간이란 존재는 그 사람에 따라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는 듯,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영겁과도 같았다. 금세 끝날 것 같으면서도 일 분, 일 초는 느리게 지나갔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뒷주머니에 끼우고도 티셔츠로 덮인 후엔 그 본인조차 불편한 엉덩이의 감촉이 아니었다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터였다.



“빨리 곡 작업해서 넘겨주고, 아, 퇴원하기 전에 먼저 가서 집 정리 좀 해두어야겠다. 공고 전에 다시 필요한 것도 사놔야 하고.”



다이어리와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듯 지석은 저 홀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월간 노트에는 ‘집 정리’와 ‘물품 구비’같은 단어들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아직도 멀었네.”



지석은 다시 다이어리를 옆에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검사를 끝내고 아현이 파리한 표정으로 나올 것 같았는데 고작 10분도 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는 저의 시간이 더 길까 제 몸에 바늘이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누워 있는 아현의 시간이 더 길까 그는 고민했다. 그러 다간 차라리 아무 고통 없이 있는 자신의 시간이 길기를 바랐다. 아픈 것 도 모자라서 그 시간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두려울까 생각했다.



괴로움과 두려움,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기에 괴롭고 두려운 것이었다.

지석은 오랜만에 오백 원


짜리 동전을 꺼내들었다. 지갑의 주민등록증의 사이에 고이 모셔놓은 것이었다. 그 후로 힘이 들 때마다 얼마나 홀로 그 동전을 만져 댔는지 많은 사람의 손을 타서 반짝임을 잃었던 동전이 지석 의 손끝에서는 빛나고 있었다.



“나 담배 폈을 때 그 때, 숨차 죽을 것 같던 것 보다 네가 더 힘들겠지?”



동전이 마치 아현인 마냥 말을 걸었다. 동전은 지석의 손가락 사이에서 앞면과 뒷면을 나란히 내보이며 손가락 앞뒤를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용 케도 아슬아슬하게 동전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었다.



동전은 수십 번도 넘게 지석의 손위에서 검지와 새끼를 왕복했다. 그 무의식 적인 행동을 의식적으로 느꼈을 때야 그는 그 행동을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이동 침대에 누운 아현이 밖으로 나왔다. 허리에는 오늘도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지혈을 하고 있었다. 지석이 곧바로 아현의 옆 으로 붙었다. 아직 부분 마취가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쌩쌩했다. 



“괜찮았어?”

“응. 뼈 뚫는 이 기분은 늘 싫지만. 그래도 적응하나봐. 괜찮아.” 



아현을 실은 침대는 금세 병실로 도착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모래주머니가 불편한지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아현이 몸을 비튼다. 그녀에겐 미동도 없이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게 어지간히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지석이 멍하니 아현을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에 낯간지러워진 아현이 얼굴을 붉혔다.



“왜?”

“아니. 아팠어?”

“안 아팠다니까 몇 번을 물어! 마취하는데 뭐, 사실 바늘이 안보이니까 조금 덜 무서워.” 

“불편하겠다.”



푸른색 모래주머니를 찬 복대 위를 지석의 손이 쓸어내렸다. 그 따뜻함 이 배를 덥히는 것 같았다.



비쩍 말라있던 아현의 몸도 항암치료가 막을 내려가며 다시 살이 오르고 있었다. 갈비뼈가 훤히 보이던 가슴팍도 이제 사람답게 두꺼워졌다. 다시 살이 붙으면서 체력도 많이 좋아져서 이제 혈액암 병동 산책 한 바퀴는 가뿐히 해내었다.



“차라리 항암치료보다 이게 훨씬 안 아픈데.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게 너무 싫어.”



허리복대가 몸통을 빳빳하게 고정하는 탓에 아현은 발끝만 까닥인다. 그 덕에 이불 끝자락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한숨 자.”

“잠이 안 오는데?”



물고기가 파닥이는 것 마냥 아현의 발이 엇갈려 움직였다. 지석이 발을 잡아 흔들자 아현이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벌써 심심하다. 빨리 재밌게 놀아줘.” 

“뭐 해줄까? 아까 읽던 책 다 읽었어?” 

“아니! 읽어줘!”



지석이 팔을 뻗어 아까 내려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던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왜?”



그런 그의 행동에 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상해. 왜 이게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인지 모르겠어.” 

“왜?”

“음, 스칼렛은 너랑 완전 반대잖아. 난 스칼렛이 결국 제멋대로 이기만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결국 버틀러 선장도 떠나갔고.”



아현은 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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