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의 붉은 깃발이 천지사방 휘날린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은 새빨간 주둥아리를 쩌억 벌리고 위국의 잿빛 하늘마저 집어 삼켰다. 주저앉은 지민의 눈 속에 붉은 화염이 홍기와 뒤섞여 살아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아아... 온 세상이 붉은 빛이다. 


  지민은 달아나기는커녕 몸을 숨길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불길이 점점 그 몸을 부풀려 제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커다란 인영이 지민의 여린 몸 앞을 가로막는다. 거대한 갑옷 위 검은 투구 사이로 보이는 칠흑같이 새카만 눈동자.   


  "찾았습니다!"

   

  그 순간 무자비한 손길이 뒤로부터 지민의 머리채를 틀어 잡는다. 



 


  



애절만가(愛切滿歌) 

w. 딜라일라







「성황 즉위 12년, 태자 태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위를 멸하다. 얻은 노예의 수가 수천, 수만에 이르니 황제께서 매우 기뻐하시다.」




  태가 투구를 벗어던지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 아래, 직전까지 피를 묻히고 돌아온 잔혹한 눈매가 친우를 보자마자 금세 풀어진다. 


  "넷이라지?"

  "...."

  "어찌나 대군들께서 요란을 떠시던지."

  "오늘과 내일 진을 정리하면 돌아가는 건 사흘 후 쯤이나 되겠어."

  "아하하, 집 안에 숨겨둔 정인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맘이 급해."

  "피 냄새가 좀 지겨워져서 그러네."

  "그런 사람이 전장에서는 그렇게 귀신같이 굴어. 그러지 말고, 우리 그 유명한 향인이나 구경하러 가세."

  

  태가 갑옷을 벗은 가벼운 몸으로 정국의 등 뒤를 밀고 나온다. 


  "고약한 취미. 나는 싫네. 가려거든 자네 혼자 가시게."

  "내 자네 좋은 구경 시켜주려 그러는 것이니. 혹시 아는가? 그 실한 물건 쓸 일이 있을지. 그렇게 썩힐 거면 그냥 나를 주시게."


  태가 넉살 좋게 웃으며 정국에게 음담을 던진다. 태자라는 고귀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정국에게 절대로 말을 높이지 못하게 하는 격없는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듯 정국은 결국 이 천진한 친우에게 두손 두발 다 들고 만다. 


  "그래봤자 그저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그 뿐이지 않는가.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글쎄, 그거야 모르지. 과거 건륭제가 향비에게 헤어나질 못하였던 것처럼, 혹시 아나. 자네도 그 향기에 취해 허우적거리게 될지. 어찌 됐건 이번에 그 진귀한 향인을 넷이나 찾았다 하니.."

  "거, 안 되었구먼."

  "적귀, 자네 입에서 안 되었단 얘기가 나오니 내 좀 우습네."

  "본디 여자와 아이를 포로 삼는 건 내 탐탁지 않아 했네."

  "하하, 자네 병이 또 도졌군. 사실 자네는 무릉도원 아래 밭이나 갈던 투덜쟁이 노선이었던 게야." 


  태는 전장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제 친우에게 다시 한번 농을 쳤다. 술도 좋아하지 않아, 계집도 마다해. 온갖 풍류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주제에 말 위에만 올라타면 검무를 추니... 태는 무자비하게 적의 목을 베어 내리는 정국을 떠올리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자네에게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말야.





  웃으며 막사의 휘장을 열던 태의 표정이 순간 굳는다. 정국은 반사적으로 태의 앞을 치고 들어갔다. 낯설지 않은 눈동자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제 아래 깔려 있는 남자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한 놈은 벌써 황천길로 떠났고."


   태가 흥미롭다는 듯이 막사의 광경을 둘러본다. 이미 죽어 나동그라져 있는 병사 하나와 어느새 목에서 핏물을 흘리고 있는 병사 하나. 그리고 저희 둘은 상관도 하지 않고, 제 아래 있는 놈의 목에 검을 꽂아 넣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정국이 대치 중인 둘 곁으로 다가가 검을 든 이의 손목을 힘으로 잡아 뗐다. 악귀처럼 제 앞의 놈만을 물어 뜯을 생각으로 발버둥 치는 이를 막사 한가운데 서 있는 기둥으로 끌고 가 손을 뒤로 하여 결박한다. 


  "왜 포로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느냐?"


  풀려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피가 흐르는 제 목을 감싸고 있는 병사에게 태가 물었다.


  "그게... 제대로 묶이질 않았... 억!!"

  "아니지, 아니지. 제대로 묶이지 않은 건 저기 뒈진 네 동료의 아랫도리지."


  금세 상황을 판단한 태가 병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아니... 생긴 건 틀림없는 계집인데... 복색이 하도 요상하여.."

  "그래서 확인해보려 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윽!"


  사내의 목에서 붉은 선혈이 튄다. 지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죽여 마땅찮은 놈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그럼 죽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태가 씩-웃으며 호응을 구하듯 지민을 향해 돌아섰다.


  붉다. 붉은 빛이다. 금세 붉은 피 웅덩이가 생긴다. 붉은 웅덩이는 점점 그 크기를 부풀려 어느덧 제 주둥이를 쩌억-하고 벌린 채 지민을 향해 달려든다. 지민의 동공이 순간 커다랗게 팽창한다.




  "뭐야, 혼절한 게야?"     


  죽이고 싶어하기에 죽여줬더니, 보람도 없이 픽 쓰러진다. 태의 표정도 순간 시무룩해졌다.


  "...사내 맞네."

  "응?"






  정국은 아직도 제 코 끝에 맴도는 은은한 난향에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힌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코와 입을 씻어 내렸다.


  "검을 쥐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했네. 계집이 그리 할 순 없지."


  표현에 서툰 자라 칭찬에도 대단히 인색한 정국이었기에, 태는 꽤나 흥미롭게 그런 친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집 저리 가게 미인이기도 했고."

  "..그러한가."

  "내 마음에 들어. 이 아이는 내가 가짐세."

  "..."

  "응?"

  "그걸 왜 내게 말하는가, 자네 뜻대로 하시게."

  "아하하, 나는 이런 자네가 참 좋네."


  태는 뭔가 심통이 났을 때의 정국의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태는 정국을 좀 더 골려주고 싶었으나, 금세 생각을 고쳐 먹었다. 고지식한 만큼 꽤나 뒤끝이 긴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나머지도 살펴보고 고르는 것이 좋겠지. 내 아이가 좀 거치니, 자네가 좀 지켜봐 주게. 나는 다른 아이들도 좀 보고 와야 하니."  


  태는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정국의 어깨를 툭 치고 막사를 나갔다. 자, 내가 판을 깔아줬으니, 어디 재미있는 일이 생기는지 기대해 볼까.


  





   

  


   태가 나가고 정국은 심란하기 그지없는 막사의 풍경을 주욱 둘러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막사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병사를 시켜 시신 두 구를 치워내고, 처참한 바닥도 대충 정리한다. 피 냄새. 미간을 찌푸린 정국이 기둥에 묶인 채로 바닥에 앉아 쓰러져있는 향인을 무심결에 바라보았다. 난향. 난향이었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정국은 지민의 맞은편 자리에 기대어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새벽녘, 막사의 가림막이 찬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체향이 정국의 코끝을 흔들었다. 


  핏내, 탄내 가득한 전장에서 꽃향이라... 정국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향인... 그 이름과 꽤나 잘 어울리다마는 네 신세도 그리 꽃밭은 아니겠구나. 정국의 미간에 내천자로 깊게 주름이 패였다.  




  "흐윽... 아버님..흐.."


  그때 향인의 몸이 들썩인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이냐... 그래, 꿈자리가 사나울 만도 하다. 정국은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온 몸이 뻐근했다. 차라리 말 위에서 적들을 베고 달릴 때가 낫지, 그 이후의 시간은 이렇게 못 견디게 지루한 것들이었다.


  "흐으..흑.."


  계속되는 울음소리에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정국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향인의 어깨를 잡아챘다. 


  "어이, 너.."


  정국이 향인의 어깨를 한번 흔들었을 뿐인데, 작은 머리통이 크게 앞뒤로 흔들렸다.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얼굴이 온통 엉망이다. 뭐야... 아직까지 혼절한 건가. 

  정국은 향인의 몸을 바로 세우고 이마에 제 손을 얹었다. 빌어먹을... 불덩이잖아..정국은 쯧-하고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팔자에 없는 간병 신세로군. 

  정국은 기둥 뒤로 둘러진 지민의 손목을 풀어 바로 옆 바닥에 지민을 눕혔다. 잠시 허리춤에 손을 짚고 지민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살핀 후, 능숙하게 주변의 물건을 정리해 어설프나마 편한 잠자리를 만들어 낸다. 칫, 귀찮게 하는구먼... 정국은 귀찮은 듯 휘적휘적 지민을 옮기면서도 잠시나마 자신을 괴롭히던 편두통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차마 인지하지 못했다. 


  




  한편 지민은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 속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 낯선 풍경. 헉, 정신이 번쩍 든 지민이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며 경계한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다.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내 널 헤치진 않을 테니."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적을 공격할 무언가를 찾았다. 사내가 순간 코웃음을 친다. 


  "네 놈은 목숨이 여러 개인 게야, 아니면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게야."


  사내가 고개를 들어 똑바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새까만 눈. 지민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현실을 직시해. 위는 멸했고, 위족들은 죽거나 잡혔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


  어떻게 말이오. 진족의 노리개로 말이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등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세 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 쓰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

  "혹시 말을 못하는 것이냐, 내 제법 네 실력이 나쁘지 않아 보여 묻는 것이니."

  "...."

  "..되었다. 쉬거라."

  "..형님께 배웠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기대하지 않았던 지민의 대답에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정국은 그 이상 딱히 물을 말이 없었고, 지민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 저 치 말이 옳다. 살아야 한다. 우선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지민은 크게 한번 눈을 감아 눈 속에 남은 눈물을 모두 흘려보냈다. 눈물에 씻긴 눈동자가 일순 단단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으리께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무어?"


  지민이 자세를 바로 고치고 제 앞의 사내에게 부탁했다. 생각지도 못한 당돌한 발언에 정국의 두 눈이 일순 커진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니 나으리께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허!"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맹랑한 구석이 있구나. 정국은 아까부터 자기가 자꾸 헛웃음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 자네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네. 그래, 이 아이 상당히 재미가 있어. 내 인정함세. 


  정국은 순간 태에게서 이 아이를 데려오려면 제가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셈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낯선 감각에 그래, 조금은 이 순간이 신이 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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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1.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향비(용비)이야기에서 착안. 향비는 아름답고 총명했으나 언제나 몸에서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해요. 원래는 카슈가르의 공주였다고도 하고, 어느 족장의 아내였다고는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여인을 전쟁의 전리품으로 건륭제가 가지게 된 거지요. 이미 남편 혹은 정인이 있었던 이였기에 항상 단검을 지니고 건륭제를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결국은 황태후를 통해 자결하도록 명 당했다고도 전하고... 국민이들이랑 넘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찌통이 땡길 때가 있지요... 마음이 약해서 과연 내가 얘네들을 잘 굴릴 수 있을 지 그게 좀 걱정이 되네요. 내 가슴만 찢어지는 거 아니야? 찌통은 찌통스러워야 찌통인데... ㅋㅋㅋㅋㅋ 본격 이 궁서체스러운 게 써보고 싶어 쓰는 장르!!


tmi 2. 당연히 태자 태의 본명은 태형입니다. 국민이지만 김태형 포기 못해. 이번 글은 가완삼 아니네요. 국민 찌통글임. 하지만 저는 태형이 얼굴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어떻게든 지분을 넣고 만다 ㅋㅋㅋ


tmi 3. 정국이는 모든 싸움이 끝난 후의 시간을 싫어해요. 피비린내에 늘상 편두통도 심하고. 무장 대 무장으로 싸우는 것은 좋지만, 전쟁 후의 참혹한 현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타입. 



혐생으로 인하여 다소 느리게 연재될 예정ㅜㅜ 좀 더 플롯 탄탄히 짜서 올리고 싶었는데, 나 댓글 포기 못해! 결국 이렇게 올리고 마네요ㅋㅋ 나 이 구역 관종인가봐..


오늘도 자라나는 연성러에게 따뜻한 댓글과 하트 부탁드립니다. 













enfp 자라나는 연성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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