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백조를 사냥할 순 없다.


포획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귀한 존재 백조. 혹여 집단 서식지라도 발견되면 기삿거리가 되고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수많은 포토그래퍼들을 출사하게 만들어 그 앵글에 고이 담긴다. 비단 이 나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귀하디 귀한 존재로 어느 왕국에선 종 자체가 여왕의 소유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여기엔 국경을 초월해 인정받는 아름다움도 한몫할 것이다. 


이렇듯 백조는 진귀하고 희귀한 생물이다. 백조는 소유할 수 없고, 애완할 수 없으며, 심지어 욕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백조는-


“천연기념물 씨, 잘 지냈어요?”


천연기념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어떻게 해야 백조를 가질 수 있을까.


“아, 작가님.”


멍하니 앉아있던 희조가 벌떡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은 하는데 기분은 섭섭하네.”

“네?”

“또, 또.”


우리 말 놓기로 했었는데. 여자가 장갑을 벗고는 희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 그러나 희조에겐 단연 짧게 깎인 손톱과 손가락 마디마디 붙여진 습윤 밴드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희조야.”

“응? 네? 어? 아…….”

“풉.”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악수를 위해 내밀었던 여자의 손이 그대로 희조의 눈가로 향한다. 속눈썹 묻었네.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

“가만, 떼줄게.”


여자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희조의 한쪽 눈꺼풀이 절로 슬며시 감겼다. 최소한의 메이크업만 한 희고 말간 얼굴. 거기에 가득 담긴 피곤한 기운이 한쪽 눈만 살포시 감고 있는 희조를 어째 꼭 잠에 겨워 눈을 비비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게 서른여섯의 얼굴이라니. 유독 여성에게 나이 운운하길 좋아하는 세상의 시선에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하곤 했던 여자는 희조를 마주할 때마다 내심 딜레마에 빠져야 했다.


그건 불편하고도 야릇한 감정이었다. 현재 문화 예술계의 대표적인 인플루언서로 추앙받으며 온갖 매체에서 ‘선한 영향력’의 심벌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여자는 이따금 직설적으로 제 소신을 밝히면서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예술가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가 각종 미디어에서 자주 피력했던 것 중 하나는 ‘여자에게 나이를 들이대지 말라’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말에 담긴 여자의 신념은 희조를 만날 때마다 어째 흔들리고 마는 것이었다. 


정작 자신이 한 여자의 나이를 떠올리며 그 아름다움을 경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섯. 그 나이가 ‘서희조’라는 여자를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스럽게 만드는지 여자는 다시금 새롭게 깨달았다. 앳되다 싶으면 표정과 시선처리가 한없이 능란했고, 원숙하다 싶으면 그 농익은 말과 행동과는 완전히 극에 있는 청순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디테일. 여자는 희조의 매력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희조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여자였다. 스스로 부단히 훈련해 만든 것만 같은 절제된 말투, 올곧은 등과 허리, 최소한의 손짓과 제스처만으로 제 속을 전달하는 겸손함까지……. 한 사람의 매력이 만남을 거듭할수록 그 파워를 갱신한다는 건 실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쁘지나 말지.


여자는 지금 간만에 희조를 보며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내적인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제 취향인 애가 어째 그 얼굴과 아담한 체구까지 완전히 자신을 타깃으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때문에 그동안 일부러 보지 않고, 찾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너도 많이 바쁜가 보네.”

“네?”

“마스카라.”


안 했잖니.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싱긋’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산뜻하고 세련된 눈웃음이었다. 어딘가 시원시원하고 당당한 여자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청량한 느낌의 미소이기도 했다.


“우리 서 팀장님, 그때 그랬잖아. 정말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땐 두 가지를 포기한다고.”


식사와 눈 화장. 특히 마스카라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아, 그건…….”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으려다 희조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제 눈앞의 여자는 최소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아니, 실로 그랬다. 언젠가 여자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그녀가 가진 공식적인 직업만 무려 네 개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바쁜 스케줄을 해내면서도 스케줄러 하나 쓰지 않고 오롯이 기억에 의존해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사실에 희조는 천재가 따로 있음을 실감했었다.


“그런데 오늘 안 했네, 마스카라.”


아, 네. 그게…….”

“가만, 설마 식사도?”

“…….”

“밥도 못 먹었니?”


희조는 대답 대신 몇 초간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있었다. 막 딸꾹질을 터뜨린 아이마냥 멍하니 여자를 바라본 채였다. 뒤늦게야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어머, 정말?”

“…….”

“seriously?”

“그게…… 네.”


사실 여자는 진작 희조의 사정을 눈치채고 있었다. 본디 셈이 빠르고 기민한 결단력을 가진 이로 정평이 난 사람이니 당연했다.


다만 여자는 희조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늘 차분하고 쉽게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희조의 새초롬한 포커페이스가 살짝살짝 흔들릴 때마다 저 청초하고 고고한 백조 모습 안에서 귀여운 병아리 새끼를 보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 한참 지났는데.”

“깜빡했어요.”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얼마나 바빴으면 속 빈 것도 잊고 그러니. 여자가 희조를 위아래로 크게 훑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그러고 보니 못 본 새 살도 좀 빠졌다, 너.”


더 빠질 것도 없는 애가! 여자의 말에 희조는 그저 곱게 눈을 휘어 접어 보였다. 예의상 보이는 잘 정제된 미소였지만 진심이 담겨있기도 했다. 비록 형식적인 것이라도 여자로부터 들은 걱정의 말은 내심 고맙게 여길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법했다. 희조는 제 끼니를 걱정해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회사에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바쁨이 당연한 관리자의 위치에 있었고, 회사 밖에선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얼굴이 좀 못해요. 괜히 심려 끼쳐 드…….”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때였다. 손사래를 치는 희조의 손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맞대고 깍지를 낀 여자가 그대로 앞서 걸었다.


“가자.”

“네?”


잡힌 손의 아귀에 꽉 들어차는 여자의 손가락 하나하나엔 이 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있었다. 덕분에 희조는 당황하면서도 차마 끌려가는 몸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밥부터 먹자.”

“네? 하, 하지만…….”

“나 배고픈 사람이랑은 대화하지 않는 주의야.”


서로한테 실례잖니. 그리고-


“난 다시는 너 안 굶길 거야.”


희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내 전시 준비하면서 우리 천연기념물 씨 나 때문에 무지하게 굶었잖니.”


일 많아서.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아, 아뇨 그건……!”


적어도 이 센터 안에서만큼은 남의 말에 좀처럼 당황한 적이 없던 희조였다. 한데 지금, 어쩐지 여자의 한 마디 한 마디엔 대꾸가 난감했다.


“저, 저기 작가님!”

“안부 인사도 식후경이에요, 천연기념물 씨.”


그러니 그냥 따라와. 이윽고 또각또각, 여자의 어기찬 걸음만큼이나 단호하고도 막힘없는 구두굽 소리가 이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지없이 드러나는 긴 다리와 보폭 때문이 아니더라도, 넥라인을 살짝 드러낸 채 은은하게 말린 C컬의 중단발과, 허리라인으로 잘록하니 들어갔다가 A라인으로 우아하게 떨어지는 여자의 올리브색 케이프 코트가 그 늘씬한 몸의 선과 큰 키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자, 잠시만요. 작가님……!”


그러나 여자보다 키가 반뼘은 작은 희조는 그야말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마침 잘 됐다. 이번에 신관 리뉴얼하면서 들어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어제부터 가오픈이라고 들었거든.”


총괄 셰프님이 정식 오픈 전에 꼭 한번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네 덕분에 갈 수 있게 됐어. 여전히 멈추지 않고 앞서 걷느라 뒤통수만 보인 채 여자가 말했다. 


희조는 어떻게 여자가 센터에 새롭게 생긴 레스토랑까지 훤히 꿰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잠깐 얼굴만 좀 보자’던 가벼운 약속이 졸지에 일대일 대면 오찬 간담회가 될까 봐 걱정을 해야 했다.


“저, 저기 작가님……!”

“지금 가면 늦지 않을 거야. 점심때만 전복 내장과 감태를 끓여 만든 죽이 나온다고 들었거든. 그게 셰프님 시그니처야. 정말 일품이거든.”

“아뇨, 잠시만요!”


희조가 다급하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팔을 꼬옥 잡았다.


“응? 혹시 선약이라도 있니?”


있었다. 희조는 숨을 고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누구랑?”

“네?”


그때였다. 여자가 몸을 빙글 돌리더니 또 한 번 ‘싱긋’ 소리라도 낼듯한 예의 그 다정하고도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랑 선약이 있냐고 물었어.”


다소 섬뜩한 질문. 그러나 그 말투는 너무나 다정해서 희조는 어리둥절했다.


“작가님?”

“내가 맞춰볼까, 서희조 팀장님?”


뭐?


“네?”

“내가 맞춰볼게, 서희조 ‘전’ 팀장님.”




* * *




희조의 선약이란 사실 업무의 연장이었다.


어제 비서로서 첫 출근이 다소 허무하게 끝나자마자(자기소개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희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장실을 나왔더랬다. 문을 제대로 닫기 위해 살짝 몸을 돌렸다가 짧은 순간 언뜻 승아의 복잡 미묘한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앙 다문 입술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피차 더 할 말이 없었다. 서로 더 말을 나누긴 왠지 민망해져 버린 까닭이었다. 


달칵. 희조는 꼭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기분이 찝찝했지만 닫은 문을 다시 연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었다. 원래라면 성격상 앞으로의 근무 일정에 대해 조목조목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하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못 살아.”


그럴 수 없다. 닫힌 관장실의 문 손잡이를 내려다보며 희조는 파르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좋아하면 새겨들어.’


‘난 친절한 사람이 이상형이야.’


‘그러니 앞으로 조금만 더 살살 대해줘.’


‘오늘처럼 싸가지 없이 굴지 말고.’


‘그래야 넘어가, 너한테.’

……왜 그런 말을 했지.


……어째서 그런 유치한 말이 나온 거야, 도대체.


웃기지도 않았다. 어쩐지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제게 비상식적인 일만 일어난다 싶더니 제 머리까지도 그리되었나 보다. 희조는 씁쓸함보다 한심함을 느꼈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백승아의 언행을 두고 싸가지 없네, 이상하네, 할 것도 없었다. 


괜히 그런 말을 했나.


후회와 시원함이 뒤섞여 묘한 기분. 관장실을 나서기 직전, 꽤나 냉정하고 도도하게 이런저런 말을 뱉긴 했지만 사실 희조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과 물음표로 뒤범벅이었다. 도대체 저 백승아가 원하는 비서란 무엇인가. 애당초 백승아에게 비서는 왜 필요한가. 백승아는 어째서 제게 엿을 먹이는 하고많은 방법 중에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선택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날 밤, 백승아의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서희조 씨.]


열 시를 십 분 정도 앞둔 시각. 깊은 밤이라면 깊은 밤. 메시지가 왔다.


[모레부터 관장실로 바로 정식 출근해요.]


인사말 하나 없이 수신된 메시지는 다짜고짜 정식 출근 일자를 알려왔다.


[하지만 내일도 회사에 오긴 해야 해]


[요.]


[서희조 씨 후임으로 올 사람한테 간단히 인사만 해주면 돼요.]


[단, 절대 회사 바깥에서 만나진 말고]


[요.]


메시지는 언뜻 지나치게 사무적인 것 같기도, 꽤나 무게 있는 당부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관행상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요]


응?


[인수인계 과정은 따로 필요 없어요. 서희조 씨 후임자로 올 사람은 그런 거 안 따를 사람이니까]


[요.]


[거기다 그 사람, 자신만의 방식으로 업무를 보고 조직도 새롭게 개편하겠다는 조건으로 초빙된 외부 전문가라]


[조언이랍시고 이런저런 이야기해 줘도 안 들을 테니까]


[요.]


[그러니 형식적인 인사 외에 불필요한 사담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아니, 하지 않도록 하죠.]


[언더 스탠?]


[아]


[영어는 존댓말이 없는 거 알죠?]


얘, 왜 이래. 희조는 기묘한 형태로 계속 올라오는 메시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괜히 사내 예절이랍시고 친절하게 미주알고주알 살뜰하게 알려주지 말란 말이야]


[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렵지 않죠?]


[이해했어요?]


[서희조 씨.]


[서 선배.]


답장을 하려고만 하면 다시 메시지를 보내오는 승아 때문에 희조는 번번이 대꾸의 타이밍을 놓쳤다.


[지금 뭐 하는데?]


[요?]


[전화가 편할까?]


[요?]


[서희조]


[씨]


결국 희조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승아가 메시지로 더 재촉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답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하면 회신하세요.]


[짧게라도]


[요.]


그리고 메시지는 더 올라오지 않았다. 그때야 희조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네, 관장님. 숙지했습니다.]


그리곤 간결하게 이었다. ‘감사합니다.’


맺음말이자 마지막 인사였다. 이런 투가 바로 평소 희조의 스타일이었다. 업무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선 의도적으로 최대한 간단하고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려 노력했다. 일부러 저자세의 태도를 취하거나 친절하려 애쓰지 않았다. 예컨대 할 말을 길게 늘려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친목을 위해 잘 하지도 못하는 유머를 섞지 않았다. 물론 희조에겐 그럴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희조는 늘 바빴고 효율적인 의사 표현만이 가장 바람직한 소통이라 믿었다.  


승아는 희조의 메시지를 바로 확인한 것 같았다. 계속 연타로 올라오던 메시지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


희조는 짧게 한숨을 뱉고는 들고 있던 휴대폰의 액정을 껐다.


두 사람의 필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응?”


-라고 생각했는데,


[싸가지 없었어요?]


금세 다시 환해진 희조의 휴대폰 액정.


음? 희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제 휴대폰을 들었다.


[나 말투 원래 이래]


[요.]


“……?”


희조는 잠자코 있다가 ‘네?’하고 보냈다. 승아는 조금 전까지 희조가 미처 답장을 쓸 틈도 없이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던 게 무색하게 한참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요.]


아니야요는 뭐야. 희조가 제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


다시금 잠잠해진 메시지 채팅창.


“…….”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희조는 잠시 곰곰 생각에 잠겼다.


답을 보낼까.


[친절히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관장님.]


이 정도면 될까. 받은 메시지들을 쭈욱 올려보며 희조는 생각했다. 확실히 요 며칠 제게 보였던 승아의 언행을 생각하면 지금 메시지들은 제법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했다.


[친절했나요?]


응?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답.


[그럼 다행이고]


[요.]


곧 승아는 좋은 밤 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화는 진짜 끝났다. 뭔가 중요한 당부를 들은 것 같긴 한데 그 순간 희조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승아가 스스로를 두고 싸가지 없었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런 질문을 한 걸까, 애는? 당연히-


“싸가지 없지, 넌.”


곧 희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삼 백승아의 싸가지 없음을 되새김질하며 딴 생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승아가 신신당부했던 내용이 뭐였더라.


“……후임자.”


그랬다. 후임자. 그를 만나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라는 것이었다. 원래 제 자리였던 학예 1팀의 자리에 새롭게 올 사람.


희조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벌써부터 난감했다. 동시에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에 휩싸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속이 어수선해지는 느낌이었다.


“…….”


혼잣말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 정말 잘린 거구나, 와 같은 대사는.


막연히 마주하고 있던 불쾌한 일이 일말의 자비 없이 기정사실화되면, 인간은 많은 경우 극심한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법이다. 희조 역시도 거기서 피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이 ‘후임자’라는 사람에 의해 자신은 밀려난 것이었다. 내쳐진 것이었다. 패배한 것이었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적어도 아직은. 입사 때부터 대표이사는 그 의중을 헤아리기 힘든 상사였다. 설령 그의 결정이라도, 아니면 신임 관장인 승아의 결정으로 제가 갑자기 비서가 된 것이라 해도 어찌 되었든 그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자신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건지.


또 하나,


단숨에 자신을 밀어내고 들어온 새로운 ‘후임자’는 도대체-


“누굴까.”


누구일지.




* * *




“네?”

“네 선약 상대 말이야.”


누군지 맞춰본다고, 내가. 여자와 희조는 어느새 로비 한가운데 우뚝 멈춰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가며 두 사람을 힐끔댔다. 특히 센터 소속 직원들은 대놓고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보기 드문 광경인 동시에 다소 진귀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센터 내 실무 최고 책임자였다가 한순간 신임 관장이 된 후배의 비서로 전락한 여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업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 얼굴을 익숙하게 알아챌 정도로 유명 예술가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것이었지만, 지나가는 이들에게 그런 사정까지 보일 리 만무했다.


“네 후임으로 올 사람 만나는 거 맞지?”


희조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시에 어깨를 살짝 올렸다.


“그걸 어떻게…….”

“그런 거라면 괜찮아. 아니-”


괜찮을 거야, 팀장님.


“그러니 가자, 다시.”

“네?”

“밥 먹으러.”


다시 여자가 앞서 걸었다. 이번엔 희조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더 완강히 조인 채. 


“저, 저기 작가님!”

“그 사람도 너 밥 먹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할걸.”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희조가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천고가 넓고 탁 트인 전시 센터의 로비에서 희조의 차분한 목소리는 등을 보이고 걷고 있는 여자에겐 잘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기, 작가님!”

“…….”

“작가님!”

희조가 다시금 여자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어느새 여자의 어깨너머로 과연, 새롭게 들어섰다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보였다. 언뜻 봐도 상견례나 비즈니스 중역 미팅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게 느껴지는 압도적인 외관이었다. 


“작가님!”


여전히 답 없이 불도저처럼 앞서갈 뿐인 여자. 


“사하라 작가님!”


결국 희조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업무적 관계에서 될 수 있으면 이름을 올리지 않던 희조로선 드문 일이었다.


“맞아, 나 사하라야.”


여자가 우뚝 몸을 멈춰 세운 건 그때였다. 미처 관성을 이기지 못한 희조의 몸이 여자의 몸에 그대로 부딪혔다.


“이번에 새롭게 학예 1팀을 맡게 된 사하라예요.”


다음 순간, 희조는 제 머리통이 포옥- 하고 안겨드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아니-


하라는 제 등에 그대로 이마를 부딪힐 희조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리드미컬하게 몸을 돌려 살짝 그 품을 연 것이다.


“아?”


희조는 제가 생각해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기실 놀란 탓이었다. 방금 하라가 제게 한 말과, 지금 얼떨결에 하라의 품에 안겨버린 꼴이 된 상황 모두가 그랬다.


“자, 작가님?”

“반가워요, 서희조 ‘전’ 팀장님.”


내가 바로 당신 후임자예요.


“많이 가르쳐줘야 해요?”


하라가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밥부터 먹죠.”


이것 봐, 너무 말라서 안아도 마냥 기쁘지가 않아. 하라가 희조를 안은 두 팔을 한순간 꽈악 조였다가 푸스스 웃으며 눈을 맞추었다. 


“어? 저 사람 사하라 아니야?”


그 모습이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을 얼마나 잡아채는 광경으로 연출되는 지도 모르고.


“대박. 맞아, 사하라야.”

“가만, 근데 저기 안겨 있는 사람은?”

“서희조 팀장님 아냐?”


그리고 그들 중엔-


“서희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첫 실무 회의 겸 간담회를 가지기 위해 막 신관 로비에 들어선 신임 관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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