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왜 김태형이었냐하면,


이제껏 김석진은 공식적으로 애인이 없었다. 둘 사이를 알고있는 사람은 박지민이 전부였고 아무리 둘이 죽고 못살아도 최소한의 사회통념이라는 게 있었기에 적어도 내입으로 남들한테 먼저 사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형누나들이 옆구리 찌르며 누구 잘되가는 사람 없냐고 물어봐도 저는 그런거 없어요..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김남준은 달리 김태형을 의심해본적 없었다. 근데 만약 김석진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면? 을 가정했을 때.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가는 사람이 김태형 뿐이었다는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그냥 김석진이 비밀로 사귀던 사람이 김태형이었다고 가정하니 그간 자기를 보고 괜히 띠꺼운 표정으로 경계하거나 시비를 걸던 행동들이 다 이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남준은 석진 때문에 본의아니게 김태형과 안면은 있었다. 석진이 자주 얘기하기도 했고, 김태형이 동방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고. 물론 그냥 친구사이라기엔 김태형이 쳐대는 가드의 벽이 심히 극성이긴 했다. 특히 김석진이 동아리 사람들이랑 술 마실 때. 세번에 한번 정도는 김태형이 근처로 데리러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신나서 술마시던 애가 핸드폰화면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쭈뼛거리며 일어나 '저 죄송한데 집에 가봐야될거같은데...' 한다거나,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고 나간 애가 갑자기 집에 가버렸다거나 하면 백퍼센트 김태형 때문이었다. 


김남준도 몇번 본 적 있었다. 그날도 동방에서 신나게 달리는 중이었고, 새벽까지 놀다보니 안주거리가 다 떨어져 후배여자애들이랑 바람도 쐴겸 구내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가로등만 켜진 캠퍼스는 어두컴컴했는데 동방건물 앞에 어떤 남자애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게 보였다. 검은 후드 뒤집어쓰고 고개 숙인채 핸드폰 쳐다보고 있으니 여자애들이 저사람 뭐냐고 흘깃거리는데 가만보니 김남준이 아는 얼굴이었다. 저거 김태형인데. 쟤가 왜 여기있지? 


딱히 먼저 아는 척 할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김남준도 못본척하고 들어가긴했는데 속으로는 좀 이상했다. 워낙 김태형이 학교에서 유명해야지. 그런애가 어디 동아리 활동한다고 하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텐데 아직까지 김태형이 어디 동아리 입부했다는 얘기는 못들어봤고 저 유별난 성격에 지가 먼저 동아리활동 할만한 놈도 아닐 것 같은데. 더군다나 그때 시간이 새벽 1시쯤이었는데 이유없이 어슬렁거리기엔 시간이 한참이나 늦었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다 김석진 때문이었다. 


김석진은 그날 유난히 흥이 올라있더니 혼자 술마시고 신나서 의자위에 올라가서 춤추다가 술기운에 못이겨 쓰러졌다. 코를 도롱도롱 골며 잠들어버린 걸 선배들은 얘네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깨워서 집보내기도 귀찮으니까 여기서 재우자고 대충 겉옷 덮어주고 구석으로 굴려버렸다. 취해서 잠든 김석진이 당연히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확인해볼리 없었고 애가 술마시다말고 갑자기 연락이 안되니까 김태형 입장에서는 똥줄이 탔던거다. 안그래도 술마시면 헤롱헤롱 정신못차리고 사고치는게 동아리에서 술마신다고 해놓고 자정 넘으면서부터 연락이 안되질 않나. 더군다나 마지막 카톡이 


[ㅌㅏㅣ혀어ㅏ]

[나ㅏ러ㅏㅈ] 


이라서 더 빡쳤다. 


뭐라는거야 김석진. 그냥 취한게 아니라 존나 만취했잖아!


그래서 자려고 누워있다가 성질나서 학교까지 뛰어온 김태형은 동방건물 앞에서 카톡보내고 전화하고 난리를 쳐봐도 김석진이랑 연락이 안되니까 직접 뛰쳐올라올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동방 문 벌컥 열고 쳐들어온 김태형은 씩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수십개의 눈알들따위 아랑곳않았다. 좌우로 휙휙 둘러보더니 대뜸 동방 구석진 자리로 쿵쾅거리며 들어갔고, 당연히 김태형 발걸음 끝엔 김석진이 있었다. 김태형은 김석진 몸위에 덮고있는 겉옷을 확 치우고나니 태평하게 잠들어있는 얼굴이 드러난다. 김태형은 자는 김석진한테 화내지도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열받은 모양새가 자는 김석진 멱살이라도 잡을 듯 했는데 멱살잡기는 커녕, 한쪽 팔을 들어 자기 어깨에 감더니 잠든 김석진을 고이 들쳐업어가지고 나갔다. 그 모든 상황이 3분도 안되는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벙쪄서 쟤 뭐냐? 했고 김남준은 김태형이 나간 문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유별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시작일 뿐이었다. 그다음에도 다다음에도. 김태형은 꾸준히 김석진 셔틀 노릇을 자처했다. 술집 화장실에 취해서 뻗은걸 갑자기 나타난 김태형이 질질 끌고간다던가, 동방에서 술마실때면 근처에서 짜증난 얼굴로 어슬렁거린다던가, '다가치 2차 가까요?' 하며 신나있는 김석진이 갑자기 등뒤가 서늘해서 돌아보면 김태형이 '가긴 어딜가' 하며 서있는다던가.. 전혀 김태형을 모르는 동방 사람들도 '쟤는 무슨 김석진 보호자냐? 가족인가?' 했었는데, 그렇지. 친구사이에 그러는 건 좀 이상했거든. 근데 사귀는 사이였다고 하면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 사겼어?


얼굴색 하나 안바뀌고 물어보는 말에 되려 당황한건 석진이었다. 저, 저희요? 하더니 어쩐지 창피한 기분에 약간 상기된 볼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한테 태형이 이야기를 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지민이랑 말할때하고는 또 다른느낌이었다.


십개월 넘은거같은데..


십개월?


네에


아.. 실은 아까 화장실에서 수건 찾다가 봤거든 콘돔


.........


석진은 침도 못삼키고 쳐다보다가 아, 거기, 그 그게 왜 있었지.. 버벅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안그래도 당황하면 반응이 떨어지는데 술까지 먹어서 더 그랬다.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도 어렴풋이, 이런 이야기를 서스럼없이 해도 되는건가? 싶었다. 서울이라 개방적이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형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남준선배처럼 나이를 몇살 더 먹으면 이런 것도 그냥 아무렇지않게 대화하게되는걸까? 이십일년 살면서 한번도 있어본 적 없는 상황이라 석진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낯설었다.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건가? 이런걸 말해도 괜찮은가? 태형이가 나중에 알고 화내는거 아닌가? 왜냐면 이건 내 사생활이 아니라 태형이 사생활이기도 한건데.. 석진의 머릿속엔 수십, 수백개의 생각들이 스쳤지만 약간 피해있는 고개 앞으로 남준이 불쑥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을때. 그 많던 생각들이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남준이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오니까 석진은 놀라서 고개를 뒤로 뺐는데 뒤로 도망간만큼 남준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또 뒤로 물러나고, 더 뒤로 물러나고.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소파위에 눕다시피 되어있었다. 김남준은 석진의 머리옆에 두손을 짚고 빤히 내려다본다. 석진아, 지긋이 쳐다보며 부르는데 석진은 눈만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너 남자를 좋아하는거야?


... 네?


김태형이랑 사귄다며


아.. 네.. 좋아하니까 사귀겠죠..?


그것도?


네?


남자랑 자는거


조..... 조았던거 같기도 하고....


석진은 말하기 싫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이 나불거려졌다. 왜냐면 그 상황에서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면 왠지 또 뽀뽀할 것 같아서. 아무리 취했어도 그건 절대 안될일이라는 생각에 석진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워, 원래는 안 좋았는데요 그거 되게 무섭고.. 그래서 그것때문에 태형이랑 싸운적도 있었는데 그래도 화해했거든요 천천히 해보자고.. 그랬는데 형누나들이 그 그거 좋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해보니까.. 네 처음엔 무서웠는데 조금 아프기도 했는데 근데 지금은.. 지금은 좋은것 같다고... 뒷말이 이어지지 못한건 김남준이 갑자기 키스를 해왔기 때문이다.






83. 어쩐지 잠 못이루는 밤


김태형은 계속해서 침대위에서 뒤척거렸다.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한데 도통 잠이 안온다. 혼자 핸드폰 컴컴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려고 눈 감았다가 얼마안있어 다시 눈뜨고. 왼쪽으로 돌아누웠다가 천정을 보고 누웠다가.. 왜 이렇게 잠이 안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보니 이유가 하나있긴 했다. 김태형은 조용한 핸드폰 화면을 켜서 괜히 카톡에 들어갔다가 메시지함에 들어갔다가 혹시 김석진한테 온 연락이 있는지 확인해봤는데, 있기는 개뿔. 김석진은 맨날 말로만 보고싶다고하지 이럴때보면 존나 쿨하다. 


한국은 새벽이라더니 김석진은 나없어도 잠이 잘 오는 모양이다. 얼마나 잘 주무시는지 카톡도 안해 나쁜새끼. 김태형은 애꿎은 핸드폰 화면만 노려보다가 침대 위로 훽 하고 던져버렸다. 이따 저녁때 누나들이 카지노구경갈거니까 미리 좀 자두라고 했는데 카지노고 나발이고 김석진이 보고싶어 아주 죽겠는거다. 한 5일만 더 참으면 한국 갈거긴 한데, 김태형은 그 5일 참는것도 못할것같았다. 지금도 죽겠는데 앞으로 5일을 더 기다려야한다니. 길어도 너무 길었다. 아무것도 보고싶은게 없고 뭘 봐도 감흥이 안오는데 이건 더이상 관광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미국이 아니라 감옥이었고.


침대위에서 잠못자고 뒤척거리던 김태형은 '시발!' 소리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박차고 일어난 김태형은 구석에 세워두었던 캐리어를 집어다가 자기 짐을 막 쑤셔담기 시작했고. 소파에 앉아 며칠전 클럽에서 꼬신 썸남이랑 통화중이던 셋째누나가 그모습을 보고 '너 뭐하냐?'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고 어이없다는듯 물었다. 


너 뭐하냐고


나 한국갈거야


뭐?


김태형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들리는 상태. 지혼자 캐리어에 옷이랑 물건을 대충 쑤셔넣더니 다짜고짜 호텔방을 뛰쳐나갔다. 셋째누나는 식겁해서 핸드폰 집어던지고 달려와 김태형의 뒷덜미를 잡았지만, 김태형한테 그나마 셋째누나는 쫌 만만하다. 붙어서 싸우면 이길만하다. 김태형이 진짜 미친놈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허공에 부웅 휘둘렀다. 나 한국 갈거라고 쫓아오지마!


미친새끼. 너 표는 있냐? 


몰라 누나카드로 긁을거야


내내 잠잠하던게 이상하다 싶었지. 김태형이 미친놈 본색을 드러내며 갑자기 한국가겠다고 지랄을 떠니까 셋째누나는 자기 힘으로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 다른방에 있는 첫째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이새끼좀 봐 미쳤나봐 갑자기 집가겠대. 언니가 와서 좀 말려보라고 통화를 하고 있으니까 김태형은 호텔복도에서 캐리어를 개봉.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자기 짐들 중에서 대충 지갑이랑 여권만 챙겨가지고 주머니에 넣더니 캐리어도 버리고 마구 뛰쳐나갔다. 이미 누나카드는 주머니속에 있었다. 어쩐지 아침에 누나들 담배 심부름하고 이상하게 카드를 갖고있고 싶더라니. 일등석이라도 남는거있으면 그냥 눈 딱 감고 긁어버릴 계획이었다. 내돈 아닌데 뭐. 나중에 갚던지, 등짝이나 불나게 얻어맞으면 그만이지 뭐! 


야 이 미친놈아 너 거기 안서?!!


머리하고 있던 고데기를 몽둥이처럼 들고 쫓아오는 첫째누나를 피해 호텔복도를 뛰어다니다가 로비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택시타고 겨우 쫓아오는거 따돌리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행운의 여신은 김태형의 편이었다. 운좋게 새벽비행기 남는좌석이 있었다. 대신 엌 소리나게 가격이 비쌌지만 미래따위는 생각지않고 순전히 오늘만을 사는 김태형은 뒷일따위 알게뭐야. 미쳐가지고 누나카드를 긁었고 비행기가 출발하는 새벽시간까지 열두시간을 공항 남자화장실에 숨어서 누나들 피해있다가 나중에 도피하듯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84. 그 키스의 느낌


김석진 인생에서 김태형을 제외하면 두번째로 겪어보는 타인의 혀였다. 술에 취해 둔해졌는지 뭉근하게 와닿는 혀의 감촉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김남준은 언뜻 봐서는 키스도 엄청 무뚝뚝할것같은데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아니, 잘했던것 같다. 김석진이 취해서라고 쳐도 달리 거북함을 느끼지 못했던 걸 보면 김태형만큼이나 키스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밀쳐내려고 잡았던 어깨는 어느순간엔게 목적의식을 상실했다. 취한 와중에도 석진은 입술에서 안주로 먹은 커피땅콩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커피 맛이었다. 그렇게 입안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취해서 홀린듯이 매달려있었는데 먼저 입술을 뗀건 김남준이었다. 얽혔던 침이 길게 늘어졌다. 한참을 빨아서 축축해진 석진의 아랫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웃는데 김석진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미쳤나봐 미쳤나봐 미쳤나봐, 머릿속에 미쳤나봐 네글자만 둥둥 떠다니는데 그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서 웃겼다. 


미안, 석진아. 나 취했나봐. 


..........


잊어버려


간단하게 말하더니 먼저 슥 일어난다. 김남준이 아무렇지않게 테이블 위에 빈 맥주캔을 치우고 있으니까 김석진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아 제가 치울게요. 부랴부랴 일어나 종량제봉투를 들고왔다. 


혹시 자고가도 돼?


아 아 네.. 밤, 시간 아니 늦었으니까요 


그럼 나 좀 씻고싶은데


네 씻으세요


혹시 칫솔같은거 있을까?


아, 있어요. 칫솔 쌔거 있는데 갖다드릴게요


김석진은 테이블 위에 안주를 치우다말고 또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뒷모습이 누가봐도 혼이 반쯤 나가있었다. 고장난 로보트처럼 질문을 입력하면 버벅거리며 고장난 대답을 출력해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석진은 거울 뒤 선반에서 새칫솔을 꺼내려고 열었다가 우르르 쏟아지는 콘돔을 보고 또 한번 얼굴의 화산이 폭발한다. 창피해져서 새빨개진 얼굴로 그걸 들고 어디다 숨길까 화장실 안을 서성거리다가 숨길데가 없어서 변기 뒤쪽 남은 공간에 되는대로 쑤셔넣었다.


여기 치,칫솔


고마워. 그럼 나 좀 씻을게


네에.. 


석진은 욕실문이 닫히는 걸 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다가 아 일단 갈아입을 옷을 드려야겠다, 하고 드레스룸을 열어 대충 남준이 입을만한 옷을 찾았다. 평소에 태형에게 주던 파자마를 꺼냈다가 뭔가 이상해서 그냥 자기꺼 트레이닝 복을 가지고왔다. 욕실 안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괜히 맹수앞도 아닌데 숨죽여 욕실문앞으로 다가간 석진은 살그머니 가져온 옷을 문앞에 내려두었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평소 석진의 성격이었으면 상대가 누구든 수학여행 온 기분으로 어차피 침대도 넓으니까 같이자요! 했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러면 안 될것 같았다. 열나게 닦아둔 바닥에 이불장에서 꺼내온 새이불을 깔고 침대의 먼지도 탁탁 털고, 잠시 고민하다가 바닥에 깔린 이불위에 누웠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선배를 바닥에서 재우는건 예의가 아닌것 같았다. 


이불에 멍하니 누워있으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쌕쌕 내뱉는 숨결에서 술냄새가 났다. 그날 하루는 고사하고 조금 전 일조차 너무 멀게 느껴졌다. 석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위에 손을 가져다댔다가 애써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으니 머릿속에 태형이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태형이.. 태형이가 알면 엄청 화낼텐데. 사귀는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한다는게 석진의 지론이었지만 왠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 엄청 싸울것 같았다. 두번 다시 술도 못 마시게 하겠지..? 동아리도 못가게 할거고.. 화나서 남준선배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해.. 말 못 할것 같은데.. 큰일이다.. 


그리고 큰일이라고 생각한지 몇분. 너무 급격한 충격으로 방전이라도 된건지 김석진의 정신은 그대로 로그아웃 되어버린다. 도피하듯이 잠들어버렸다.




욕실문을 열고나온 남준은 문앞에 놓인 트레이닝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 씻고 갈아입으라고 가져다둔건가? 당연히 거실에 있을 줄 알았던 석진은 거실에도 주방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우다말고 어딜 간건지. 테이블 위에 치우지않은 안주랑 쓰레기가 그대로 있었고 굴러떨어졌는지 빈 맥주캔이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다. 남준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일단 테이블부터 치웠다. 베란다에 재활용품 상자에 분리수거도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다 치우고도 안나타나서 김석진이 대체 어디를 갔는가 했더니, 혹시 몰라 슬쩍 방문을 열어보았는데 김석진은 거기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채 잠들어있었다. 쌕쌕 고르게 퍼지는 숨소리에 남준은 방에 불을 키려다말고 스위치에서 손을 뗀다. 창밖에서 어렴풋이 들어오는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곤해보였다. 잠깐 사이에 깊게도 곯아떨어졌구나. 문고리를 잡고 서있던 남준은 잠시 쳐다보다가 방안에 들어왔다. 쟤가 왜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서 잘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보고 침대에서 자란 소리인것 같았다. 


누워있어봤자 잠도 오지않을것 같아서, 남준은 그냥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기만 했다. 자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잠든 와중에도 눈꺼풀 위가 따가웠는지 석진의 잠든 콧잔등이 귀엽게도 움찔거린다. 이불속에서 불편하게 뒤척거리길래 남준은 목끝까지 올라온 이불을 어깨만큼 내려주었다. 석진은 얇게 솜이 들어간 이불을 몸에 둥글게 만채 자고있었다. 꼭 엄마뱃속의 아기처럼. 






85. 디데이


녹화는 무사히 끝마쳤다. 유달리 긴장해있던 석진은 떨려서 안무 다 까먹은것같다고 발을 동동 구르더니 또 막상 슛들어가니까 언제 그렇게 떨었냐는듯 자기몫을 잘 해내주었다. 춤출때는 프로같더니 다 추고나서는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다음부터는 에에 연예인이다 우와 세트 엄청 멋있다 카메라 엄청 많다 요러면서 화장실 다녀온다고 지혼자 나가더니 한참을 안와서 얘 변기에 빠진거 아니야? 했더니만 나중에 남준의 폰으로 연락이 왔다. 


[형 저 길 잃어버린거 같아요ㅠㅠ] 


메시지 본 형들이 어처구니 없어했고 남준도 피식 웃으며 '내가 가서 찾아올게' 했는데.. 그렇게 나간 김남준도 이번이 겨우 두번째 와보는 방송국이었다. 김석진을 만나기는 했는데 돌아가는 길을 몰라서 둘이서 방송국 복도를 30분이나 빙빙 돌았다는 이야기.. 암튼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빼면 녹화도 잘나오고 석진은 녹화끝나고 강호동아저씨한테 싸인도 받았다. 걸그룹도 아니고 같은 남자한테 싸인받은게 그렇게나 좋은지 돌아가는 차에서 핸드폰으로 싸인받은걸 연사로 30장이나 찍고도 부족했는지 옆에 앉은 형들한테 부탁해서 싸인들고 인증샷까지 찍고. 그사진을 또 여기저기 카톡으로 보내서 자랑질하고.. 아무튼 혼자 제일 신났다. 


다들 피곤했지만 그냥 돌아가기 아쉽다고해서 동방에 소품이랑 의상만 대충 갖다놓고 밖으로 나왔다. 출연료 받은걸 고깃집에서 다 쓸기세로 고기를 시켰다. 녹화를 거의 열시간 넘게해서 점심도 부실했고 허기질수밖에 없었다. 진짜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미친듯이 고기를 입속으로 쓸어담고나서는 2차도 달렸다. 누나들은 오늘은 그냥 머리풀고 달리는 날이라며 진짜로 머리까지 풀렀다. 다들 부어라 마셔라 미쳐서 마시는데 안어울리게 김석진이 조신했다. 이런 분위기에 다들 들떠있기도 하고 기분도 좋고, 평소였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술 들이붓고 일빠로 취해서 귀여운짓 하며 모두에게 웃음을 주었을 김석진이었는데 말이다. 너 왜이렇게 조용하냐? 옆에 앉은 형이 옆구리 찌르며 물어보는 말에도 석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새벽 한시쯤 형누나들이 딴데로 자리옮기자, 노래방 갈까? 하는데 김석진은 조용히 김남준 옆으로 찾아갔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형. 


남준이 의아한듯 돌아보았다. 


벌써?



왜?


아.. 저.. 


머뭇거리더니 품안에 소중히 안고있는 에이포용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동이아저씨 싸인 구겨질까봐여


석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남준은 그말을 비웃지도 못했다. 이제껏 옆에서 지켜봐온 바로 김석진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애였다.


내가 가방에 넣어줄게. 같이 노래방 가자


아.. 안돼요. 형꺼 가방에 넣어도 꾸겨질거같은데.. 노래방은 다음에 갈게요


.. 집에 혼자 갈수있겠어?


네. 저 오늘 술도 많이 안마셨어요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석진은 고개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조금 걷다말고 석진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어디로 갈지 결정했는지 형누나들이 와르르 시끌벅적하게 저만치 사라져가는게 보였다. 그 무리중에 남준도 있었고, 키가 커서 훌쩍 눈에 들어왔다. 석진은 사실 알쏭달쏭했다. 그때 분명히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것같은데.. 키스까지 했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남준은 이미 집에 없었고 거실은 깨끗이 치워져있었고 테이블 위에 숙취해소제랑 포스트잇만 한장 붙여져있었다. 


'오늘 연습 한시부터니까 한시까지 와'


그리고 한시에 동방 앞에 도착한 석진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괜히 손톱 물어뜯으며 복도를 서성거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문열고 나온 김남준이 '뭐하고있어? 빨리 들어와. 연습해야지' 아무렇지않게 말해서 얼결에 끌려들어갔다. 그뒤로 저녁먹을때에도 김남준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똑같이 연습했고 똑같이 야식먹고 똑같이 헤어졌다. 평소랑 달라진게 하나도 없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정도로 남준의 태도는 평온 그 자체였다. 그렇게 아무일도 없이 이틀이 더 지나고나니 석진은 '혹시 형이 나를 놀린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나 놀리려고 거짓말한거 아닐까? 솔직히 선배같은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건 처음부터 말이 좀 안됐다.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은 형이 왜 나같은걸 좋아하겠어. 나는 여자도 아니고 예지누나보다 훨씬 못생겼는데. 


그치? 나 놀린거지? 형이 나를 좋아한다니 말도 안되잖아. 그래 나 놀린걸거야. 그냥 장난친걸거야. 근데... 원래 남자들끼리 그런 장난도 치나..?  


석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느라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도 몰랐다.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탁탁탁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왁 하며 끌어안는것이다. 그냥 달밤에 누가 조깅하는줄로만 알았는데 뒤에서 덥썩 끌어안으니 김석진은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누누누누구세여?? 돌아보려고 하는데 꽉 안고서 안놔주고 얼굴도 안보인다. 누구세여 누구신데여어. 석진이 겁먹어서 같은말을 열번쯤 반복해서 물어보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힘껏 끌어안은채로 귓등에 뒷목에 마구 뽀뽀를 해대는 것이다. 석진은 끌어안고있는 팔을 풀어내려고 낑낑거리며 몸부림을 쳐댔고 그바람에 품안에 고이 모셔져있던 호동이 아저씨 싸인이 거침없이 구겨졌다. 한참을 끌어안고 실갱이를 했는데 


김석진


아아아 놔주세여어어!


나야


놔주ㅅ....


나라구


.... 태형이?


후들후들 떨며 돌아보니까 뒤에서 씨익 웃고있는건 김태형이었다. 진짜 김태형이었다. 석진은 무서웠던데다 놀라기까지해서 김태형 얼굴을 보고나니 반가움보다도 긴장이 탁 풀리면서 다리가 반으로 접혔다. 후들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으려하니까 김태형이 키득거리며 김석진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받쳐주었다. 


일어나 일어나.


씨 김태형.. 나빠써.. 사람 놀래키구


진짜 놀랐는지 눈물이 다 글썽거리고 있었다. 원래는 김태형도 이렇게까지 놀래켜줄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김석진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김태형은 일단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해서 한숨 잤고, 자고 일어난 다음에는 허기가 져서 혼자 라면을 세개나 끓여먹었다. 배부르고 나니 슬슬 김석진이 돌아올 시간인것같아서 대충 운동화 구겨신고 집밖으로 나왔는데 집근처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다보니 저멀리 어정쩡하게 걸어오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어쩡어쩡거리는게 멀리서봐도 딱 김석진이었다. 그거 보면서부터 김태형 입가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당장에 야! 하고 부를생각이었는데 가만보니 애가 반쯤 얼이 빠져보였다. 안어울리게 무슨 깊은 고민에라도 잠겨있는 표정이었다. 앞도 안보고 홀린듯이 걷느라 5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떨어져있는 김태형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또 품에는 무슨 하얀 종이떼기같은걸 고이 껴안고오는데 저게 대체 뭐냐고. 삐뚜름히 눈썹 구기고 쳐다보던 김태형은 점점 가까워지는 김석진에 일단 자동차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부터 조용히 뒤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한 십분을 걸었나. 그래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으니까 김태형은 그게 너무 싫었다. 김석진은 단순하고 명랑한게 매력인데 저 얼빠진 뒷모습은 뭐람. 전혀 김석진스럽지 않고 낯설었다. 그래서 냅다 달려가 끌어안고 뽀뽀해준건데 


나 보고싶었어?


하고 물어보는 김태형 얼굴을 가만 보고있자니, 석진은 괜히 눈물이 울컥했다. 이유도 없이 코끝이 찡하고 서러워졌다. 나 어떡해.. 태형의 얼굴을 보니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나 태형이 모르게 딴 사람이랑 키스했어. 내가 태형이 배신한거야. 난 진짜 나쁜놈이야.. 김석진이 뜬금없이 수도꼭지 틀어놓은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려대니까 당황스러움은 오직 김태형의 몫이었다.


야.. 너 울어? 


흐으으


진짜울어?


흐어어엉 태형아어ㅏ아아


김석진은 엉엉 울면서 김태형을 끌어안았고.. 얼결에 끌어안긴 김태형은 왠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이었다. 짜식. 아무리 내가 보고싶었어도 그렇지. 이렇게 엉엉 울정도로 보고싶었던 거야? 김태형은 자꾸 웃음이 나는걸 애써 숨기며 어른인 척 했다. 우는 석진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울지마 김석진. 니 맘 다 아니까 그만 울어. 뚝! 






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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