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회사와 약속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나지도 못하는 엄마가 아프다는 핑계로 나는 회사에 생떼를 쓰다시피 했다. 후임을 구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에 내려 한국 땅을 밟은 순간 나는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게 이렇게 쉬운 줄 알았다면, 왜 진즉에 결심하지 못했을까. 승진이나 일 따위...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내게 정말로 중요했던 건...형의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은 잘 지냈을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긴 통화음의 끝에 응답하는 이는 없었다. 초조함으로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형과 헤어진 이후로 형과 연락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형이 잘 지내는지, 못 지내는지, 나를 잊었는지, 잊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형, 요즘 석진이 형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아?’

 

남준이 말했을 때 물어볼 걸 그랬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우리 집. ‘우리’라는 말이 아직까지 성립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를 불렀다.

 

“멀리도 가시네. 적어도 8만원은 나올긴데.”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만 가주세요.”

“너무 빨리 가면 인생도 빨리 가는 수가 있어요. 적당히 빨리 가야지. 어차피 늦게 가나, 빨리 가나 도착하는 건 똑같은걸.”

 

내 속도 모르고 기사는 편한 소리를 해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도로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셨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삼십 년 가까이 본 풍경이 고작 몇 년 떠나있었다고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한 것이었다.

 

*

 

아파트 앞에서 형에게 한 차례 더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사실 내가 형이 받기를 원하는지, 받지 않기를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형과의 재회를 바라는 동시에 두려웠다. 당신의 미움, 당신의 원망, 당신의 거부에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할까. 용서해달라고 할까.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을는지. 아니,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리 강하지 않은 태양 아래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길바닥 위에서 돌돌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나를 뒤따라오는 수트 케이스의 무게가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후회할 짓 하지 마,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곳은 없다. 어차피 걸어온 길은 후회투성이. 나는 새로운 후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망설였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키패드 또는 초인종. 키패드를 누르자니 염치가 없었고, 초인종을 누르자니 너무 손님 같아서 나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문득 꿈이 떠올랐다. 자꾸만 비번을 틀려버려서 문 앞에서 어쩔 줄 몰랐던...여전히 내 생일일까? 호기심이 일자 확인하고 싶었다.

 

‘왜 비번을 내 생일로 했어?’

‘기억하기 쉬우라고.’

‘뭐를? 내 생일을? 아니면 비번을?’

‘둘 다.’

 

여전히 나 기억해요?

 

키패드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쿵쿵거리며 가까워진 발소리는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형이 내 앞에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맥주 말고 또 사와야 할 거 있어?”

 

목소리와 동시에 문이 발칵 열린 순간 나를 맞이한 것은 형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서려다 맞닥뜨린 낯선 존재에 경계심 서린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누구세요?”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주소를 잘못 찾아왔나?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잊었을 리가 없다. 그럼 형 친구?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자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누구시냐고요.”

“왜 그래, 재환아? 누구 왔어?”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단박에 남자의 어깨 뒤로 눈길을 돌렸다. 형이었다.

 

“몰라. 나가려는데 문 앞에 서 있잖아.”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형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알던 갸름한 얼굴도, 선한 눈도, 도톰한 입술도 그대로였다. 아, 석진이 형. 몇 년을 보아 새로울 게 없는 형의 얼굴을 나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속속들이 눈에 담았다.

 

“석진아, 아는 사람이야?”

 

형은 머뭇거렸다. 형의 눈 위로 떠 오른 난감한 감정을 읽은 순간 나는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왔나 봐요.”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뒤통수가 따갑도록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멍청이, 등신. 어쩌자고 대책 없이 여길 왔을까. 돌돌돌, 수트 케이스 바퀴 소리조차 날 책망하는 것 같아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멀리 달아나지도 못했다. 나는 아파트 단지 후미진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입에 뭐라도 물리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한심하다, 한심해. 뭘 믿고, 무슨 자신감으로 이곳에 왔나. 형이 어서 오라고 환영해 줄줄 알았나.

 

아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뻔뻔하게 받아줄 거라는 생각에 온 게 아니었는데. 그저 여유를 부릴 경황이 없었을 뿐이었다. 형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를 보던 곤혹스러운 눈빛이 재차 떠오르자, 가슴 속이 찌르르하게 아파왔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거기서 형이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했다면, 지금 기분은 더 엉망이 되었을 테니까.

 

형 옆에 있던 남자는 아마도 지금 애인이겠지. 한때는 우리의 집이었던, 이제는 형의 공간에 허락된 사람. 형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오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일 정도로 형은 마음 정리가 다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둘 서로 말도 놓고 친근해 보였지. 언제부터 만난 사이인 걸까. 한달? 두달? 아니면 나랑 헤어진 직후?

 

나는 무의미한 질문을 해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애인이 있는 줄 알았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텐데. 무작정 공항에서 달려오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수트 케이스까지 끌고 온 나를 형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발치에 버티고 선 수트 케이스를 보자, 거세게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수트 케이스를 걷어찼다. 작은 바퀴가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졌다. 그러나 수트 케이스는 얼마 굴러가지 못했다. 타인의 손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움직임으로 수트 케이스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우리 아파트 금연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내 앞에 서 있었다. 형은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뭐야? 왜 여깄어?”

“나 돌아왔어.”

“...”

“아주 돌아왔다고.”

 

당신에게 돌아오려고 모든 걸 접고 왔다고 하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형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말간 이마 위로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형은 한참을 침묵하다 물었다.

 

“그래서?”

“...”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형이 뜻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나는 할 말을 쉬이 찾지 못했다. 나를 향한 직선적인 시선은 이 상황을 의미 없게 만든 건 너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속이 타들어 갔다. 형이 수트 케이스를 나에게 내밀었다.

 

“돌아가.”

 

거절이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납득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 사람 만나는 사람이야?”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형은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돌아섰다. 차디찬 뒷모습은 정말로 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헤어졌을 때보다 더 나는 이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붙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당한 구실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물건 여기 있잖아.”

 

나는 형의 뒤에 대고 외치다시피 말했다. 형이 멈췄다.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내 옷이랑 책, 쓰던 물건 다 여기 있잖아.”

 

나를 돌아본 형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만은 형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나는 형과 오래 살았다. 누적된 세월만큼 우리의 공간에는 나의 흔적이 넘쳐났다. 그것이 나에 대한 채무라는 것은 별개라고 치더라도 그 흔적을 처리하지 않고는 형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연락할게. 그때 가져가.”

 

형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나에게서 멀어졌다.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치엔 아까 떨어뜨렸던 담배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였다. 연락할게. 나는 그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형은 날 붙잡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다음이 있었다.

 

*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 형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재촉하는 것 같아 기다렸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형에게서는 문자 하나 없었다. 무시하기에는 명확한 부채가 집안 구석구석 있을 텐데 어째서 나를 잊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형에게 먼저 연락했다. 형의 답장이 머지않아 왔다.

 

「오늘은 안돼. 나 늦게 들어와.」

 

일? 아니면 애인과 시간을 보내다 늦게 오는 것일까. 설명은 없었고, 나에겐 물어볼 권리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키판을 눌렀다.

 

「그럼 언제 괜찮아?」

 

형은 이번엔 답하지 않았다.

 

대화창 위로 우리가 오래전에 주고받았던 대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화면을 밀어 올려 지나간 대화를 읽었다. 건조해진 지금의 말투와 사뭇 다른 말투로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어느 날은 퇴근 후에 뭘 먹을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느 날은 내가 아팠는지 형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의 상태를 물었다. 문장이 길건, 짧건 우리에겐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을 새워 메시지를 전부 읽었다. 대화창의 맨 첫줄에 이를 때까지 형에게서 답장이 오는 일은 결국 없었다.

 

그 이후로도 형은 번번이 핑계를 대며, 내게 짐을 돌려주는 것을 미뤘다. 피곤해서, 약속이 있어서, 여행을 가서. 철저하게 나를 피하려는 것처럼 거절하는 이유를 대면서도, 가능한 날짜는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형의 이유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는 것이 껄끄러운 재회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미련이 있는 사람이 을일 수밖에 없다. 나는 형이 한 번쯤 나라는 매듭을 돌아봐 주길 바랐다. 엉킨 채로 그 자리에 둘 순 없잖아. 풀던지, 잘라 버리던지.

 

나에게 대충 답장을 보낸 휴대폰을 구석에 밀어놓고 그 남자의 품에 파고들 형을 상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형이 어떤 표정으로 사랑을 속삭이고, 어떤 얼굴로 입맞춤을 받는지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얼굴을 해 보인다고 생각하면 속에 불길이 일었다. 내 손안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상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나는 형과 헤어지고 처음으로 깊은 상사병을 앓았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나는 잠을 자는 대신 형을 그리워했고, 꿈을 꾸는 대신 추억을 곱씹었다. 필름에 맺힌 상이 인화 과정에서 점점 선명하게 올라오듯이, 수백, 수천개의 형의 상이 내 안에서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의 형을 갈망하고 그리워했다.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형이 원망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내가 더 미웠다. 나는 천천히 지쳐갔다.

 

「나 당분간 집에 계속 늦게 올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나를 거절하는 문자를 읽으며, 나는 문득 어떤 생각에 이르렀다. 만약 형이 그 남자와 같이 사는 거라면? 그렇다면 계속된 거절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인과 같이 사는 집에 구 애인을 들여놓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떠났고, 나의 빈자리를 타인이 채웠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목적지를 잃은 달리기처럼 맥이 탁 풀렸다. 피니쉬 선이 보이지 않는 레이스를 뛰어왔던 근육이 풀어지며,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심장이 새까맣게 쪼그라들었다.

 

기약 없는 답을 기다리다 말라죽기는 싫었다. 이젠 정말로 형 곁에서 사라져야 할 때였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형 바쁘면 그냥 형 없을 때 가서 짐 가져갈게. 그편이 형도 낫잖아.」

「그래.」

 

한참 후에 온 형의 답은 간결했다. 그래,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괜찮으면 내일 낮에 가서 뺄게. 비번만 알려줘.」

 

답이 올 때까지 나는 휴대폰을 손톱으로 초조하게 두드렸다. 톡톡톡, 두드리던 손길이 금세 돌아오는 답장에 멎었다.

 

「비번 그대로야. 네 생일.」

 

속이 욱신거리는 이상한 기분에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비번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형은 그렇게 많은 걸 기억하는 사람이 아냐. 네 생일이랑 비번 두 개 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같은 거 하나만 기억하는 게 덜 귀찮잖아.’

 

비번이 그대로였던 건 형이 날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나를 떠올리지 않고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될 정도로 나의 부재에 무감각해졌기 때문이었다.

 

*

 

한때 형과 내가 살던 집은 작지만 아늑했고, 새집은 아니었지만 살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우리는 돈을 벌게 되면 더 좋은 집에 이사 가자고 약속했었지만, 그 누구도 우리 집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기에 자기 위안을 삼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니, 서로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너 있을 때는 꽉 찼던 집이 너 가고 나니까 허해 보이더라.’

 

내가 일본으로 떠난 직후 첫 전화통화에서 형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순전 형 기분 탓일거라고 웃어넘겼었는데, 지금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찾은 집은 공허한 느낌이 났다. 낮 동안 데워진 공기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온기가 없는 빈집은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잠시 짐을 가지러 온 것도 잊고 집안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앉았던 소파, 함께 보았던 티비, 같이 조립했던 이케아 서랍장. 벽에 걸린 달력 외에는 내가 떠나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이 낯섦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정말로 내가 있을 곳이 아니어서 내 몸이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손끝에 느껴지는 소파 가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오래 감상을 느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낮에 형이 보내준 메시지를 떠올렸다.


「네 짐은 드레스 룸이랑 서재에 따로 모아뒀어. 거기 있는 거만 가져가면 돼.」

 

서재에는 책과 잘 안 쓰게 된 물건들을 두었을 테고, 드레스 룸에는 내 옷들을 정리해뒀으리라. 나는 침실로 향했다. 함께 오래 지냈던 곳이건만, 가장 은밀한 공간에 발을 딛는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방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형의 체취였다. 오래간만에 맡아도 그것이 형에게서 나던 것과 같은 냄새라는 걸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형의 냄새. 형이 없는데도 방안에서 형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해서 나는 한참 눈을 깜박거렸던 것 같다.

 

과연 형의 말대로 내 옷은 드레스 룸 한쪽에 모여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본에서 지내는 데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웬만큼 필요한 옷은 가져갔기 때문에 없어도 그만인 옷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형이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유행이 지난 와이셔츠와 물이 빠진 청바지를 가져온 여행 가방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도 나는 이곳에서 옷들을 똑같은 여행 가방 안에 짐을 꾸려 넣었다. 그때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지금은 돌아오지 않을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로 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예전 물건들을 정리해 나가려는 구 애인의 모습 따위는 청승맞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형이 첫 월급으로 사준 붉은 스웨터를 발견했을 때는 조금 울컥했기에 한참동안 옛 감상에 젖어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반쯤 채워진 가방 안을 보며 피로한 허리를 두드렸다. 꽤 옷은 남겨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가방 한 개를 다 채우지도 못했다. 나는 남은 옷의 양을 가늠해 보려고 행거 앞에 섰다. 내 옷이 걸린 행거 오른편에는 아직 계절을 맞이하지 않은 형의 옷들이 걸려 있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마친 형의 패딩 잠바가 곱게 비닐 커버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커버 밖으로 삐져나온 후드에 달린 보드라운 털을 만졌다.

 

나는 이미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의 원인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형의 흔적은 있지만,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내는 흔적은 없었다. 내가 두고 간 짐을 제외하면, 오로지 형의 옷과 형의 손을 탄 물건들만이 있었다. 형의 신발만 놓인 현관을 보았을 때부터 나는 이곳은 형 혼자만이 살고 있다는 걸 조금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 형은 그 남자와 같이 살지는 않는 것일까? 나는 우습게도 조금 안도했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이 팔짱을 끼고 드레스 룸 초입에 기대어 날 보고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누가 집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내 옷 걸려 있나 살피고 있었어.”

“네 건 그 옆에 있어.”

 

형은 내가 만지작거리던 자신의 잠바를 깊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형은 왜 왔어?”

“너 네 물건 다 못 찾을 것 같아서.”

“회사는 어쩌고?”

“외근 갔다가 일찍 끝났어.”

 

옷걸이를 뒤적거리는 형의 목덜미가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나는 형이 서둘러 집에 왔음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거 말고 내 옷 또 있어?”

 

등 뒤로 다가가자, 형이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딱히 뭘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급작스러운 형의 반응에 나는 괜히 겸연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꺼내줄게. 너는 이것 마저 정리해.”

 

형은 쌀쌀맞게 말하고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조금은 날 보러온 걸까 기대했던 마음이 위축되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다시 가방 속을 정리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행거에 걸린 옷을 차곡차곡 개어 넣을 동안, 형은 서랍장에 숨어있는 옷들을 꺼내어주었다. 오래전에 사두고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옷들이 형의 손에 이끌려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았다. 형이 건네준 옷에서는 희미한 섬유유연제의 냄새가 났다. 내가 다시 돌아오면 입을 거라 생각하고 옷을 세탁해두었을 형을 생각하니 뭉클해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형의 말처럼 형의 정성과 배려는 이제 와서 아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내가 형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하고 말았다. 나는 형이 준 옷을 가방 안에 넣었다.

 

형은 옷을 정리하는 동안 딱 한 번 내게 물었다.

 

“너 왜 일찍 돌아왔어?”

 

서랍 안을 뒤적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은 채 무심한 말투였지만, 나는 그마저도 좋았다.

 

“3년 안 되지 않았나?”

 

내가 대답하지 않자, 형이 고개를 들고 덧붙였다. 비로소 날 본다.


“그럴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나는 말 없이 형만 빤히 보았다. 당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부담만 주는 것 같아서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형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나는 형의 안부를 물었다.

 

“형은 잘 지냈어?”

 

이번엔 형이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손을 놀렸다. 나는 손이 느렸기 때문에 형이 건넨 옷이 발치에 계속 쌓여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비좁고 에어컨도 없는 드레스 룸은 두 사람이 있기에는 더웠다. 어느 새 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형이 준 옷을 가방 속에 옮기던 나는 형의 옷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내 거 아닌데? 형 거잖아.”

 

나는 분홍색 가디건을 형에게 내밀어 보였다. 형의 생일날 내가 형에게 선물한 옷이었기에 내가 잊을 리가 없었다. 나는 형이 옷을 짚다 실수를 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형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필요없어. 너 가져가.”

“이거 내가 형한테 준 거잖아.”

“알아. 그러니까 가져가라는 거야.”

“...”

“헤어진 마당에 내가 가지고 있어 뭐해.”

 

나는 서운했지만 대꾸하지 않고, 가방 바깥에 조용히 옷을 내려놓았다. 이 옷을 선물했을 때 형이 기뻐하던 표정이 선해서 더 가슴이 아팠다.

 

“왜 안 넣어?”

“형한테 준 거야. 내가 가져갈 이유 없어. 필요 없으면 형이 버려.”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메마르게 튀어나왔다. 형은 하얘질 정도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툭. 내 무릎 앞으로 곧 모자가 하나 떨어졌다. 이 정도 커플룩은 괜찮다며 같은 디자인으로 샀던 모자였다. 내 건 여행지에서 잃어버렸지만, 형의 모자는 그대로 형이 가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것도 가져가. 너랑 관련된 물건 집에 두고 싶지 않아.”

 

나는 형의 말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관련된 물건은 보고 싶지 않다며, 비번은 여전히 내 생일이었다. 그거부터 바꿨어야지, 형.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이 집의 작고 큰 모든 요소가 나와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을 터였다.

 

나는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형에게 물었다.

 

“또 있어? 버리고 싶은 거 또 있냐고.”

 

형이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았다. 형은 벌떡 일어서서 서랍장 안에 손을 쑥 넣더니 옷가지를 한 아름 꺼내 바닥에 던졌다.

 

“버리고 싶은 거? 너랑 지냈던 시간 전부 다 버리고 싶어. 알아?”

 

나는 사귀는 동안에도 형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꾹꾹 눌러 참았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처럼 형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 나는 조용히 형이 던져 바닥에 굴러다니는 옷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왜 돌아왔어? 염치도 없이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에 오려고 할 수 있어?”

“미안해.”

 

나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내 목소리는 형의 귀에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형은 내게 소리 질렀다.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떻게 내 얼굴을 보러 와? 가장 필요한 순간엔 없었으면서!”

 

내가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자, 형이 내가 밖에 놓아둔 분홍색 가디건을 집어 여행 가방 속에 패대기쳤다.

 

“가져가! 네가 가져가서 버리든지, 말든지 해.”

“형, 이러지 마.”

 

나는 형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형은 멈추지 않고, 모자까지 가방 속에 던졌다. 개어두었던 옷들이 형의 발에 채여 와르르 무너졌다.

 

“이것도 가져가. 꼴 보기 싫으니까 다 가져가!”

“형, 잠깐만! 진정 좀 해봐.”

 

흥분한 형을 말리는 건 역부족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형은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내 가방 속에 던져넣었다. 나중에는 행거에 걸어둔 자신의 목도리, 겉옷까지 모조리 나에게 던졌다. 드레스 룸 바닥이 온통 옷가지로 엉망이 되었다.

 

“형, 제발!”

 

나는 형의 몸을 붙들려고 하였지만, 옷자락만을 간신히 붙잡았다. 투둑. 실밥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형의 셔츠에서 퉁그러져 나온 단추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잡아당기는 손길에 셔츠 앞섶이 뜯어진 모양이었다. 내 손을 뿌리치려던 형이 뒷걸음치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밟을 순간 형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형!”

 

나는 형을 당겼다. 하지만 무게 때문에 우리는 뒤엉킨 채 드레스 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가 쓰러지며, 일으킨 옷가지의 먼지가 두둥실 방 안에 떠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밑에 깔린 형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비켜.”

 

훤히 열린 앞섶 속에서 가슴이 크게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형은 목 아래까지 온통 벌겠다. 나는 형의 두 손목을 바닥에 눌렀다.

 

“형 지금 너무 흥분했어.”

 

형을 놓아주면 형이 다시 난동을 부릴 것 같았다. 나는 형이 숨을 고를 때까지 형의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나 역시도 형을 말리느라 꽤 기운을 쓴 후였다.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서로에게 눈을 맞췄다. 나는 계속하여 붙잡은 형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거세게 맥박치는 손목을 쓸어주는 동안 형의 눈동자 위로 분노, 슬픔,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왜 지금에야 온 거야?”

“형 만나러.”

 

솔직한 나의 말에 형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형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늦었어.”

“알아.”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웃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짐은 핑계였다. 여행 가방 한 개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옷들을 보며 짐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라도 형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당신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았다. 비록 원하던 건 이런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렇게야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었다.

 

“나 너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났어.”

“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은 결연하게 말을 이었다.

 

“잠도 잤어.”

“그래.”

“섹스도 했다구.”

 

다른 사람과의 연애와 섹스를 말하는 형이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형이 밉지 않았다. 형이 어떤 말로 나를 상처입힌다 하더라도 나는 형을 미워할 수 없었다. 단지 그 말을 내게 전하는 형이 시리도록 에였다.

 

예뻐서 아팠다. 사랑스러워서 슬펐다. 나는 형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형, 내 이름 한 번도 안 불러준 거 알아? 나는 형이 ‘윤기야’라고 불러줄 때가 좋았어.”

 

이마부터 어루만진 손이 귓가를 지나 볼까지 내려왔을 때 손끝은 젖어 있었다. 속눈썹에 엉겨붙은 눈물이 깜박이면 또르르 고운 얼굴 위로 미끄러졌다. 나는 앞으로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것을 내 손으로 잃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순간을.

 

나는 마지막으로 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로 끝이었다. 나는 그대로 제 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땀이 밴 이마에 가볍게 눌렀던 입술을 떼고, 형의 마른 몸 위에서 일어나 그대로 형의 인생에서 걸어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려는 순간 형이 턱을 치켜들었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각도가 엇갈리고 서로의 코끝이 가볍게 스쳤다. 숨결이 엉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형을 마주하는 것이 오랜만이어서 나는 이상한 감정에 빠져 형을 내려다보았다. 형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서로의 눈동자를 쫓았다.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를 뺀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좁은 드레스 룸에 떨어진 우리의 옷도, 조금은 더운 방안의 공기도, 우리의 만남도, 이별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이곳엔 오로지 형과 나만이 있었다.

 

형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말랑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정지한 시공 속을 표류하던 영혼이 일시에 육신의 세계로 떨어졌다. 나는 우리가 드레스 룸 바닥에 누워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부적절했다. 헤어진 연인이 나누기에는 부적절한 입맞춤이었지만, 부적절했기에 달콤했다. 나는 다시 그 달콤함을 느끼려 형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탄식과도 같은 형의 숨소리가 새자, 가슴 속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가볍게 새가 쪼는 것 같은 입맞춤을 거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가 익숙하지만 떠나보내야 할 감정에 취해 있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형이 머뭇거리며, 나의 등 뒤로 손을 둘렀을 때 외면했던 욕심이 표면으로 비집고 올라왔다. 조금 더 원하면 안 돼?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분명히 이건 위험했다. 이곳에는 단 둘 뿐이었고, 감정이 제대로 갈무리 되지 않은 육체는 젊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어떤 결과로 치달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형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내가 너무 깊이 들어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뜨거운 피가 빠르게 몸 안을 돌았다. 우리는 막다른 길에 와있었고 돌아갈 곳은 없었다.


형이 길 잃은 아이같은 표정을 지었다. 

 

“윤기야.”

 

이름을 불린 순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린 너무 오래 외로웠다는 것을 말을 나누지 않고도 깨달았다. 형이 나를 끌어당겼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전보다 더 깊이, 더 오래. 입술이 포개지고, 서로의 몸을 기억하는 두 손이 상대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숨쉬는 것을 잠시 잊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당신 안에서 살았다.

 

나는 오래전 우리의 대화를 떠올렸다. 


‘형은 그렇게 많은 걸 기억하는 사람이 아냐. 네 생일이랑 비번 두 개 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같은 거 하나만 기억하는 게 덜 귀찮잖아.’

‘그럼 나에 대해 기억하는 건 안 귀찮아?’

 

그때 형이 뭐라고 답했는지 겨우 알았다.

 

‘그럴 리 없잖아. 너에 대한 건 머리에 들어온 날부터 잊혀질 리 없는걸.’

 

형은 귀찮았던 게 아니다. 형 안에 나를 채워 넣는 대신 다른 것을 버렸던 것뿐이다. 내가 떠난 집이 공허했던 것은 채워 넣었던 것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입술이 열렸다. 경계가 무너지고, 입속이 멋대로 엉켰다. 나는 당신의 빈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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