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 줄 모르는 더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여름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더웠던 여름날 중 하루였던 그 날, 제일예고 예술제가 시작됐다.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체육대회 및 축제 부스 운영, 해가 슬금슬금 지려고 할 무렵 본격적인 예술제가 진행된다. 이렇게 더운 날 체육대회라니. 아마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이 메말라 죽어 버리기를 원하는 게 아닐까… 대충 구색을 맞추느라 체육복을 끼워입은 창균이 뽕따를 쪽쪽 빨아대며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딱히 출전하는 종목이 없어서 땡땡이나 칠까 했더니 본인은 축구 하러 나간다며 자신을 응원하러 와달라는 이준섭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파릇파릇한 나이와 체육에 대한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자들이었다. 이들에게 8월의 더위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기 시작 전 몸을 푼다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그들을 보며 창균은 고개를 저어댔다.


“존나 덥다, 그치?”


채형원이 어떤 종목에 나갈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그에 걸맞게 체육복 조차 입지 않은 형원을 보고 창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형원은 자연스럽게 창균의 옆자리를 꿰찬다. 나도 줘. 채형원이 임창균의 손에 들려있던 뽕따를 탐냈다. 이거 먹던건데. 알 바야.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빼앗겼다. 방금까지 본인이 물고 뜯고 했던 쭈쭈바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근잘근 씹어대는 채형원 때문에 귀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날이 많이 덥네. 갑자기 열기가 확 올라버린 탓에 애써 적당히 둘러댄다.


“민혁이 형은?”

“걔도 축구 해.”

“응원하러 왔어?”

“아니, 난 너 찾아왔지.”


채형원을 쳐다보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본인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임창균은 대충 채형원이 어떻게 여자들을 꼬신건지ㅡ본인은 딱히 그런 의도가 없었다지만ㅡ짐작이 갔다. 괜히 채형원의 콧대를 아프지 않게 밀어냈다. 어느덧 몸풀기가 끝난 건지, 운동장 가운데로 각각 다른 유니폼을 입은 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민혁이 형 무슨 색이야? / 빨간색. 어쩌다 보니 이준섭과 이민혁은 같은 팀이 되어있었다. 축구 팀 구성이 1, 2, 3학년끼리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고, 경기가 시작된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민혁이 득점을 했다. 저 멀리서 민혁이 창균과 형원이 앉아 있는 계단 쪽으로 손을 흔든다. 창균은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살짝 손을 올려 흔들어준다. 민혁이 형 축구 잘 하나 봐. / 쟤는 다 잘 해. 하나만 하는걸 제일 싫어하거든. 민혁이 형 답네.


“그래서 축제 때 뭐 해?”

“너한텐 안 알려 줘.”

“왜. 혹시 뭐 이상한 거 하는 거야?”

“그건 아닌데, 아무튼 몰라도 돼.”


임창균이 나름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왠지 축 처진 귀랑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은데. 채형원은 그런 모습이 썩 귀여워서 웃음을 참아냈다. 임창균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준다. 더우면 들어가자. 동아리방으로 피신가자는 이야기였다. 임창균은 저 멀리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민혁과 준섭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응원이라도 해야지. / 그럴까? 창균의 말에 형원 또한 운동장을 바라본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이 돌았다. 운동장의 소란스러운 소음만이 그들 사이에 맴돌 뿐이었다. 문득 임창균은 제 옆에 있는 채형원에게 시선이 갔다.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갑작스레 떠오른 게 아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었다. 왜? 채형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요즘은 좀 괜찮아?”


그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그런 것들. 채형원은 그 말을 듣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그저 느리게 눈을 한 번 꿈뻑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채형원은 그 속을 알아보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괜찮아.


채형원의 말을 믿어야 할 것만 같았다. 사실 더 캐묻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잖아. 임창균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뭐 하는지 안 알려줄 거야? 순식간에 대화 주제를 바꾼다. 비밀. 채형원이 특유의 그 능글맞은 투로 대답한다. 시간 되면 알겠지. 임창균이 다시 운동장을 쳐다본다. 그런 임창균을 채형원은 지긋이 바라본다. 목덜미에 맺혀있는 땀을 또 다시 손으로 닦아주었다. 더럽게 왜 손으로 닦아. 갑자기 펄쩍 뛰는 임창균이 귀여워서 채형원은 그만 웃어버렸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전반전이 끝난 듯싶었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자마자 이민혁은 지치지도 않는지 운동장에서부터 계단까지 단숨에 뛰어왔다.


“야 봤냐, 봤냐?”

“처음에 골 넣은 거?

“너희 뭐 하고 있었냐? 나 2골이나 넣었는데?

“형은 축구도 잘 하네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임창균의 말에 이민혁이 어깨를 으스대며 말한다. 후반전만 남았으니까, 이거 끝나고 부스 구경하러 가자. 민혁은 숨을 고르더니 할 말만 남기고 그대로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보는 내가 숨이 다 막히네. 창균은 그런 민혁의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초콜릿 먹을래?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채형원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다 녹아서 포장지에 눌러붙은 그런 초콜릿. 임창균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한 채 채형원을 쳐다보았다. 다 녹았는데? 채형원은 상관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겨 그대로 자신의 입에 넣었다.


“나 먹으라며.


먹을래? 채형원이 혀를 내밀어 눌러붙은 초콜릿을 보여준다. 너무나도 얼탱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런 임창균을 보고 채형원도 따라 웃는다. 종종 그들은 별 시덥지 않은 얘기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채형원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아까와 똑같은 상태로 녹아있는 초콜릿을 꺼낸다. 이거 아침까진 괜찮았는데. 나름대로의 변명을 한다. 임창균은 그 초콜릿을 가져가 입안에 넣었다. 맛은 있네. 둘은 또 다시 웃었다.






제일예고의 예술제는 고등학교 축제 치고 꽤나 크게 열리는 편이었다. 교내 학생들이 여는 부스들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대학교 동아리들 또한 참여해 열리는 부스들이 꽤나 다양했다. 그리고 예술제의 꽃이라 불리우는 저녁 예술제에 이어서 마무리 폭죽 쇼까지. 그 명성 덕분에 제일예고의 예술제는 항상 수많은 인파로 미어터지기 십상이었다.


4 대 1 이라는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민혁은 아까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부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페이스 페인팅부터 풍선 터뜨리기, 사격, 물풍선 던지기 등등… 이민혁이 채형원에게 던진 것을 시작으로 채형원도 임창균에게 물풍선을 던졌다. 하지만 우리의 임창균이 누구인가. 그대로 바로 양손에 물풍선을 들고 이민혁과 채형원에게 무자비하게 던져 그들을 보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들은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채형원이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를 쓸어넘긴다. 아, 다 젖었네. / 야 니가 먼저 했잖아. 분명 먼저 물풍선을 던져놓고는 볼멘소리로 궁시렁거리는 민혁에게 형원이 으름장을 놓는다. 그들이 투닥대건 말건 임창균은 그저 옷을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저기요. 수 많은 인파 속에서도 유난히 소란스럽던 그들에게 누군가 말을 건네며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A대학교 사진동아리에서 나왔는데요.”


말을 건넨 남자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큰 명찰을 보여주었다. ‘A대학교 사진 동아리’, 꽤나 동안인 얼굴을 갖고 있던 남자는 교복을 입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들과 동갑처럼 보였을 것이다.


“세 친구 그림이 너무 좋아서 기념으로 사진 한 방 찍어드리려 하는데, 괜찮아요?”


뭐라 대답해야 할 지 고민 하기도 전에 민혁이 당연히 된다며 형원과 창균에게 할 거지?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형원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와, 근데 셋 다 진짜 잘생겼다. 뭐, 연영과 그런 거에요?”


대충 말이 길어지기 전에 채형원이 네. 하고 대답하며 창균의 옆에 붙는다. 제 옆에 붙어오는 이민혁과 채형원 덕분에 졸지에 센터에 서게 된 임창균은 쫄딱 젖은 옷들끼리 부대끼니 그 느낌이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라며 혼자 속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카메라를 향해 적당히 웃어 보인다. 찰칵. 나중에 사진 인화해서 학교 측으로 보내줄게요. 인사를 하며 가는 남자에게 그들은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 대학생들한테도 먹히는 얼굴인가 봐. 민혁이 으스대며 말한다. 그들은 마저 부스를 둘러보다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 앞에 멈춰 섰다. 야 채형원, 점수 내기 콜? / 너 자신 있어? 예상외로 흔쾌히 받아들이는 채형원 덕분에 그들만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축제장 한복판에서 그 잘빠진 얼굴을 하고 꽤나 좋은 가창력으로 노래를 열창해대는 그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건지,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거 그냥 길거리 공연 된 것 같은데. 그들 앞에서 대충 주변에 있던 탬버린을 쥐고 흔들어대던 임창균이 점점 늘어나는 인파를 보며 말했다.


95 대 97. 물론 97이 이민혁이었고 95가 채형원이었다. 노래방 기계 점수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반박을 하려던 채형원은 자신을 꼬라보는 이민혁의 표정이 꽤나 얄미워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민혁은 벌칙을 이미 정해뒀다며 채형원과 임창균을 데리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타로 카드 -B대학교 타로심리동아리-’, 타로 카드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 부스였다. 형, 살짝 미신 같은 거 믿는 스타일이에요? / 너 우리 몰래 이런 것도 해? 임창균과 채형원이 이민혁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대충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채형원을 그 앞 의자에 앉혔다.


“누나, 이 자식 연애운 봐달래요.”


채형원이 순식간에 일어나려던 걸 이민혁이 어깨를 짓누름으로써 무마시켰다. 뒤를 돌아 이민혁을 야리는 채형원의 눈빛이 꽤나 서늘했다. 아마 이들에게 있어서 연애, 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벌칙’으로 통용될 만큼 가벼운 것이었나보다. 아 뭘 야려, 우리 형원이도 이제 슬슬 연애 해봐야지. 진실된 사랑 그런 거 있잖아. 누가 들어도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이민혁은 킥킥 웃어대며 이 상황을 실컷 즐기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질색을 하는 걸 보아하니 임창균도 나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딱히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채형원의 결과가 상당히 궁금했다.


“이 친구는 참 잘 생겨서 주위에 이성이 끊이질 않을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근데 길어봤자 이주일이더라고요.”


배를 잡고 웃어대며 말하는 이민혁 덕분에 대학생 또한 카드를 셔플하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수 많은 카드를 책상 위에 펼쳐놓은 대학생이 다섯 장의 카드를 골라보라며 형원에게 말했다. 채형원은 또 나름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다섯 장의 카드를 뽑아낸다. 그렇게 선택된 카드 이외의 것들은 전부 치우고, 뽑은 카드들을 하나씩 뒤집는다. 대충 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카드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음…”

“왜요 누나? 얘 죽을 때까지 혼자 산대요?”


민혁아, 좀 닥쳐. 끝까지 깝죽거리는 이민혁에게 채형원이 늘 그렇듯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 대학생은 곰곰이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리딩 결과를 조곤조곤 나열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카드를 보면, 잠깐만. 친구 이름이 어떻게 돼? / 채형원이요. / 그래. 형원이. 이 카드를 보면 형원이는 사실 이미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봐. 다만 이 카드 속 먹구름 그림 보이지? 이 먹구름 때문에 너와 그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순탄치는 않을 것 같네. 먹구름은 곧 내릴 폭우를 의미하거든. 이 먹구름은 본인이 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제삼자가 될 수도 있어. 또 이 카드를 보면, 풍요를 상징하는 카드인데. 이 먹구름만 걷힌다면 너와 그 상대는 만물에 풍요가 깃든 것처럼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가 있어. 참 좋은 카드네. 그런데, 먹구름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 카드 보이지? 방랑자라는 카드야. 방랑자라고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난다는 건 아니고. 여기에서 방랑자는 둘 중 한명이 어딘가로 떠난다는 뜻이야. 그건 단지 가까운 곳이 될 수도 있고, 거의 만날 수 없는 먼 곳이 될 수도 있어. 어쨌든 떠난다는 이야기야. 그래도 다행인 게, 마지막 카드는 재회를 뜻해. 어쨌건 둘은 결국 재회하게 되어있어. 다만 돌고 돌아서 말이야. 이 그림을 봐, 입구가 여러 갈래로 뻗어있어서 길이 미로처럼 엉켜있지만 결국 출구는 하나지?


“마지막으로 한 장만 더 뽑아봐.”


형원은 그렇게 고민도 없이 마지막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이 카드는 연인이라는 카드인데, 이게 겉으로만 보면 굉장히 착각하기 쉬워. 연인 그림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양날의 검을 뜻해. 그러니까, 앞에 나온 카드들이랑 같이 해석해보자면 그 재회가 결국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혹은 하지 말았어야 할 만큼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어. 본인 하기 나름에 따라 달려있지만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리딩이 끝났다. 생각보다 심도 있네. 창균과 민혁이 눈빛을 교환한다.


“야, 채형원. 누구야? 이미 만났다는 게. 세희? 미연이? 혜정이?”

“니 전 여친 연희.”

“ㅈ까.”

“타로는 그냥 재미로만 보는 거 알지?”


대학생이 카드를 정리하며 그들에게 말한다. 누나, 고마워요. 타로 진짜 재밌다. 민혁이 대학생에게 웃어 보이며 말한다. 관심 있으면 나중에 우리 학교 왔을 때 동아리 가입해. 아, 거기 공부 잘하는 애들만 가는 곳이잖아요. 대학생이 웃으며 그들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그들도 대충 인사를 하고 부스를 빠져나왔다.


“야, 채형원. 축하한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임자는 만날 건가 보네.”

“너는 그냥 내 결과가 재밌지?”

“들켰네. 나 축구 뛰러 간다.”

“형, 응원은 마음으로 보낼게요.”


절대 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대충 느릿하게 변명을 덧붙인 임창균에 이민혁이 실눈을 뜨며 째려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너네는 좀 쉬든가 해라. 민혁은 인사하듯 손을 들어 보이곤 그대로 자리를 떴다.


“형도 슬슬 연습 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응. 나도 가봐야 돼.”


그렇게 축축했던 몸이 어느새 햇빛을 받아 바짝 말라 있었다. 너는 어디 가게? / 동아리방 가서 좀 쉬려고. / 가자, 데려다줄게. 굳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채형원은 데려다주겠다며 임창균의 손을 잡아 본인 쪽으로 당겼다. 그새 창균의 뒤로 큰 짐을 짊어진 누군가가 지나간다. 부딪힐 뻔했어. 채형원의 평소와도 같은 말투에 임창균은 웃음이 났다. 머리 다 말랐네? 형원의 큰 손이 창균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만지작거린다. 그래도 옷은 갈아입게. / 옷 가져왔어? / 여분으로 하나. / 준비성 철저하다. 수 많은 인파 속을 헤쳐나가며 그들은 서로의 옆에 꼭 붙어있었다. 문득 아까의 그 타로 결과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사실 이미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 지도 몰라. 채형원은 자신의 옆에서 팔을 쿡쿡 찔러대는 임창균을 한 번 쳐다본다. 우리 저거 딱 한 판만 하자. 창균이 가리킨 곳엔 야구공을 던져 핀을 쓰러뜨리는 게임이 있었다. 그래. 나름 신나 보이는 임창균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통수는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손짓을 한다. 빨리 와. 채형원은 그제서야 임창균의 뒤를 따라갔다. 나 야구 잘 하는데.






그렇게 채형원은 임창균을 동아리방까지 데려다주었고, 임창균은 미리 챙겨온 반팔티로 갈아입은 뒤 그 위에 얇은 후드 집업을 걸쳤다. 아무래도 동아리방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놨더니 살짝 싸늘하단 말이지. 그렇다고 온도를 올리기엔 또 금세 더워졌다. 여름이란 참 지랄맞은 계절이었다. 결국 창균은 온도를 최대한 낮추고 후드 집업을 걸치는 것으로 타협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되어있었다. 오후 2시 46분. 마침 낮잠 자기 딱 좋은 시간인데. 임창균은 채형원의 소파라 불리우는 그 곳에 자연스럽게 몸을 뉘었다. 아 맞다. 이준섭도 축구 뛸 텐데, 응원 한 마디 안 하고 왔네. 대충 속마음으로 민혁과 준섭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 정도면 전해졌겠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도 나름 좋은 휴식 시간이었겠지만, 임창균은 자리에서 일어나 dvd가 보관 되어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잠을 자더라도 영화를 틀어놓고 자는 건 기분이 더 좋거든. 잔잔하면서도 킬링 타임 용으로 딱 좋은 영화. 그렇게 생각하다 결국 집어 든 것이 트루먼 쇼였다. 명작이라는 타이틀은 괜히 붙는 것이 아니다. 뭘 볼까, 라고 생각이 들 때 자연스럽게 손이 가거든. 그렇게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시켰다. 다시 소파로 가서 몸을 던졌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있으니 서늘했던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열기가 가시니 절로 온 몸이 노곤해져 온다. 창균은 눈을 끔뻑거린다.


「모코코아 한 잔 타 드려요?

천연 카카오 씨로 만들었고,

인공 감미료도 안 넣었어요!」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끔뻑거리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알람을 맞춰놓고 잔 덕분인지, 정확히 예술제가 시작되기 20분 전 쯤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어둑해진 분위기였다. 창균은 대충 머물던 자리를 정리하고 동아리방을 빠져나왔다. 준섭에게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얼마 가지도 않아 대뜸 어디냐며 묻는 준섭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 지금 가는 중. 너는? 준섭은 이미 야외무대에 도착해있다고 한다. 자리를 맡아 뒀다고 하니 대충 야외무대 쪽에 가면 다시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채형원에게 카톡이 몇 개 와있었다.


나 지금 연습 중 오후 3:12

자? 답장이 없네 오후 3:27

이따 보자 응원 제일 크게 해 알겠지? 오후 4:56

사진 오후 4:57


채형원은 흔히 말하는 그 거울샷을 찍어 창균에게 보냈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쥐고, 한손에는 휴대폰을 쥔 채로 거울에 비친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마이크와 채형원이 상당히 안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그냥 채형원의 사진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느 새 야외무대에 도착한 창균이 준섭에게 전화를 걸며 그 많은 인파를 훑어본다. 와, 사람 진짜 많네. 낮에 운영했던 부스에도 사람이 참 많았지만, 예술제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 훨씬 많은 듯싶었다. 준섭이 전화를 받는다. 나 여기, 손 흔들고 있는데. 보여? 사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거 마냥 힘들었지만, 저 멀리 가운데 쯤에서 점프까지 해대며 손을 흔들어대는 준섭 덕분에 금방 찾을 수가 있었다. 창균은 지나갈게요. 하며 준섭의 옆자리에 도착한다.


“사람 겁나 많다.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자리 꽤 좋은 데 잡았다? 일찍 왔어?

“야, 말도 마. 그냥 축구 끝나고 나서부터 여기 있었어.

“그 정도야? 축구는 어떻게 됐어?

“물론 이겼지. 이민혁 형이 결승전에서 3골이나 넣었어.


안 봐도 지금쯤 축구 썰만 10번 넘게 하고 있겠지? 싶었다. 근데, 뭐. 잘 했으니까. 창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형 존나 멋있는 것 같애. 준섭은 어쩌다 보니 민혁에게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경기 때의 그 리더십과, 폭발적인 공격력, 그리고… 나 태클 걸렸는데 심판이 경고 안주고 넘어가니까 바로 달려가서 따지는데, 존나 멋있었어 민혁이 형. 준섭이 아까의 축구 경기를 생각하며 박수를 친다. 그뿐만 아니야, 경기 끝나니까 잘했다고 팀원들 다 챙기더라… 얼굴도 잘 생겼어, 성격도 좋아. 그리고 이번엔 밴드부 보컬까지… 이준섭의 주접에 창균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그래.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준섭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건 말건, 임창균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예술제 팜플렛을 자신의 손으로 가져왔다. 팜플렛에는 공연 순서가 나열되어있었다. 와, 초대 가수도 돈 냄새 나네. 그렇게 차례차례 순서를 읽어가던 창균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춘다. ‘복면가왕, 미스터리 음악쇼! / 실용음악과 보컬부 2학년 B반 2조’ 아마 제가 알기로는 B반 2조에 채형원이 속해있을 터였다. 복면가왕? 임창균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래서 나한테 안 알려주려 한 거구나. 새삼 떠오르는 채형원의 얼굴이 너무 웃겨서 임창균은 그렇게 또 비집고 나오려던 웃음을 애써 참아냈다.


교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제일예고의 예술제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꽤나 유명한 초대 가수의 무대부터, 연극영화과 의 뮤지컬, 무용과의 댄스 공연, 역대 실용음악과 장학생들의 합동 무대 등등 확실히 전문성이 돋보이는 무대들이었다. 창균은 준섭이 건네준 야광봉을 예의상 대충 흔들어댔다. 그래도 마냥 이 시끄러운 현장이 싫지만은 않았다. 무대가 끝날 때마다 열렬히 환호하는 수많은 관객들과 함께 앉아있으니 괜히 본인 또한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군중 심리에 빠져든 건가.


“자, 다음 무대는 어떤 무대가 준비되어 있죠?”

“제일예고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이죠. 바로 실용음악과의 무대입니다!”


진행을 맡은 두 학생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매년 실용음악과 무대 퀄리티 만큼은 죽여준다던데. 옆에 있던 준섭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이전의 무대들과는 다르게 말 그대로 퀄리티가 상당히 두드러졌다. 뭐랄까, 어느 정도 창의성과 지루하지 않은 무대 구성,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 실력? 괜히 실용음악과. 실용음악과 하던 게 아니었네. 방금 막 끝낸 무대에 박수를 치며 창균은 혼자 생각했다. 드디어 채형원 차례인가. 준섭이 마시던 물을 빼앗아 크게 한모금 넘긴다. 야, 창균아. 이번에 복면가왕이래. 존나 재밌을 것 같지 않냐? 다음 무대를 알리는 사회자들의 말에 첫 번째 복면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오, 가면이랑 의상 준비 엄청 잘 했네. 준섭이 무대를 보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한다. 첫 번째 참가자는 본인을 정확히 ‘목소리에 발린 꿀’이라고 칭하며 꿀통 모양을 한 가면을 쓰고 나왔다. 와, 대단하네. 채형원이 저런 모습을 하고 나올 걸 상상하니 상당히 기대가 됐다. 동영상 찍어서 놀려야지. 그렇게 꽤나 듣기 좋은 꿀의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은 대충 그 복면 속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챈 건지, 그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관객들을 진정시키며 다음 참가자의 닉네임을 호명했다. 채형원은 몇번쯤이려나.


그렇게 한 네명정도가 무대를 끝낼 무렵, 드디어 낯이 익은 실루엣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에, 서 있는 모습이 딱 채형원이었다. 그러니까 채형원의 닉네임은… ‘심장 폭격 카사노바’. 씨발, 진짜 존나 웃기네. 임창균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준섭은 엎드려서 끅끅대는 창균을 바라보고는 혹시 어디 아프냐며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 괜찮아. 너무 웃어제낀 탓인지 눈에는 눈물이 고인 것만 같았다. 저거 아마 민혁이 형이 지어준 것 같은데. 그건 또 그거대로 이민혁의 농간에 꼼짝없이 당해버린 채형원이 너무 웃겼다.


“네, 심장 폭격 카사노바씨. 이름이 상당히 화려한데요. 이름을 지은 의미가 따로 있나요?”

“아는 놈이 지멋대로 지어준 거에요.”


뻘쭘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 카사노바의 말에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변조된 목소리지만 적어도 임창균의 귀에는 정확히 채형원의 목소리가 필터링을 거쳐 들리는 듯했다.


“카사노바 씨가 부를 곡이 참가자 중 처음으로 팝송이네요?”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무대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귀로 직접 듣는, 웃음기 하나 없이 부르는 채형원의 노래는 처음이었다. 창균은 저도 모르게 허리가 바짝 서는 게 느껴졌다. 채형원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자고로 임창균은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름 이렇게 평가했다. ‘어떠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이 들면 그 음악이 바로 임창균의 취향에 부합했다.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임창균은 지금 채형원의 노래를 들으면서, 머릿 속에 그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 상상 안에서 적어도 채형원은 상당히 행복해 보였다. 그 곳의 배경은 흰 눈이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미 폐쇄 되어버린 어떤 역에서 채형원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코 끝은 이미 빨개진 지 오래였다. 새어 나오는 입김을 일부러 더 크게 내뱉으며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는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채형원은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표정을 짓고는 그 실루엣에 다가간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관객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소리에 임창균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채형원의 목소리는 흰 눈 같았다. 담백하면서도 버석버석함이 느껴지는. 무슨 개소리인지는 임창균도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랬다는 거다. 암튼 결론은 존나 좋다고. 냅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 누굴까. 너 혹시 누군지 알아? 임창균은 굳이 유난 떨고 싶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했다.


“과연 카사노바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사회자가 마이크를 관객석 쪽으로 갖다 댄다. 모두가 긴가민가 하고 있을 때, 잠시 채형원의 무대를 구경하러 대기실에서 나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이민혁이 큰 소리로 외친다. 우윳빛깔 채형원!! 난데없이 채형원의 이름 석 자를 외쳐댄 이민혁 덕분에 관객들이 술렁인다. 그리고는 이내 모두가 채형원의 이름을 외쳐댄다. 카사노바는 예의상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무대 뒤로 내려갔다. 그 이후로 몇 명의 참가자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결국 가왕의 자리는 ‘참외롭지 참외’가 차지했다. 그렇게 복면가왕에 참여했던 모든 참가자가 나오고, 하나씩 복면을 벗어던졌다. 그때마다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다. 채형원이 가면을 벗어던지자 이때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터질듯한 환호소리가 야외무대에 울려 퍼졌다. 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면을 벗자마자 웬 땀에 젖은 머리 마저 잘생긴 왕자님이 등장했다고. 채형원은 그 환호소리가 나름 웃겼는지 살짝 미소가 서려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인사까지 마친 그들이 무대 뒤로 내려간다.


와, 저게 채형원 형이었어? 준섭이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나쵸 과자를 입에 넣으며 창균에게 묻는다. 그러게. 무대가 슬슬 정리되고 순서는 다음 무대로 넘어간다. 민혁이 형은 언제 나오지. 창균이 팜플렛에 적힌 순서를 다시 살펴본다. 와, 마지막이네. 민혁이 일회성으로 속해있는 밴드부의 이름은 당당하게도 마지막에 위치해 있었다. 순간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란 인영이 사람들을 비집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형원이었다.


“어, 카사노바다.”


임창균이 채형원을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채형원은 대충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임창균의 옆에 앉았다. 그 이름 부르지 마. 이민혁 개싫어. 땀에 범벅이 되어버린 채형원이 임창균의 손에 있던 팜플렛을 빼앗아 부채질을 하기 시작한다. 준섭은 난데없이 등장한 형원에 과자를 먹던 손을 멈췄다. 형, 노래 진짜 잘 하시더라구요. 사회생활 만렙을 진작에 찍어버린 준섭이 두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형원에게 말을 건넨다. 형원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준섭에 어어, 아니야. 하고 손사래를 친다. 곧 있으면 이민혁 차례지? 창균에게 묻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섭이 재빠르게 넵. 세 팀 남았습니다. 하고 친절하게 대답을 한다.


“응원 제일 크게 하라길래 했어.”

“진짜?”

“마음속으로.”


형원이 창균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았다. 안 더워? 창균이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가리킨다. 아무리 낮이 더웠다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늦어지다 보니 낮만큼 덥지는 않았다. 창균이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인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꽤나 멋지게 차려입은 민혁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야, 창균아. 나 맨 앞자리 뚫으러 갈게. 비장한 준섭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힘내라고 대답했다. 준섭은 그렇게 민혁의 공연을 가까이 보기 위해 수 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민혁 세 곡이나 한대. / 목쉬는 거 아니야? 무대 위의 이민혁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그러니까 마침내 제 모습을 보이는 것만 같았다. 완전 무대체질이네. 적당한 팬서비스와 함께 민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창균도 들고 있던 야광봉을 나름 높이 들어 민혁에게 호응해주었다.


첫 번째 곡은 락 음악이었다. 하드한 락 말고, 나름 락발라드 느낌이라 해야 할까. 아무래도 마지막 순서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밴드부라서 그런 건지, 관객들의 호응이 이전보다 더욱 커진 게 느껴졌다. 이민혁 저거 안 지치나. 그렇게 한 곡을 가볍게 완창해버린 뒤 바로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가는 민혁을 보며 형원이 속으로 생각한다. 아마 이 모든 공연이 끝나면 곧 폭죽이 터질 예정이었다. 형원은 야광봉을 든 채 무대를 보고 있던 창균의 귀에 바짝 다가가 말을 꺼낸다.


 옥상 갈래?


그렇게 임창균과 채형원은 울려 퍼지는 민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옥상으로 향했다.






이 옥상에서는 야외무대가 어느 정도 한 눈에 들어왔다. 창균은 나름 기분 좋게 흩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난간으로 다가갔다. 야, 그러다 큰일 난다. 형원이 금세 뒤따라간다. 둘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야외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관객들이 앵콜을 외쳐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와, 여기 자리 되게 좋네. / 그치, 나 담배 펴도 돼? 채형원은 굳이 임창균에게 물어보았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이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볼이 깊숙이 패여 들어간다. 잔뜩 머금은 담배 연기를 그대로 내뱉는다.


“축제 엄청 크지?”


임창균은 신입생이었기에 이번 예술제 참여가 처음이었다. 반면에 채형원은 이미 작년에 한번 참여했었고. 아마 그때 마지막 폭죽 쇼 시간에 채형원은 이 옥상에서 혼자 담배를 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민혁이 지 여자친구랑 따로 본다고 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창균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외무대에서는 어느덧 마지막 앵콜곡을 열창하고 있었다.


“노래 좋더라.”

“진짜?”

“응.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형원이 연기를 내뱉으며 푸스스 웃어댔다. 사실은 기대하고 봐서 더 좋았어. 진심이었다. 연이어 들리는 말에 형원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창균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한 동안 아무 얘기도 주고받지 않았다. 어느덧 마지막 앵콜 곡이 끝나고, 사회자가 클로즈 멘트를 하는 것으로 예술제가 완전히 끝이 났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관객들이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10, 9, 8…


“근데 창균아, 그거 알아?”


7, 6, 5…


“뭔데?”


4, 3, 2…


난데없이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형원에 창균은 그대로 형원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을 그대로 머금은 채형원의 얼굴이 썩 보기 좋았다.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1…


“니 생각 하면서 불렀어, 그거.”


화려한 폭죽이 큰 소리를 내며 연신 하늘로 솟아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밝게 수놓은 여러 색깔의 폭죽들이 터져대며 형원과 창균의 모습을 짧게 짧게 비춰댄다. 임창균이 먼저 손을 내민다. 채형원은 그 손을 자연스럽게 그러쥐었다. 폭죽 소리가 유난히 더 시끄럽게 울려댔다. 폭죽이 하나하나 터질 때마다, 심장 또한 유난히 뛰는 것이 느껴졌다. 깊어가는 한여름 밤 아래,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간직한 채 눈부시게 타오르는 불꽃들을 눈에 담았다.






분량 조절 실패...

아무리 그래도 학원물인데 어두운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 하는 것 같아서 밝은 분위기를 써보자 했는데 이렇게 분량이 초과되고 말았네요 하하

타로 하나도 모르는데 내용 상 필요해서 억지로 적어봤어요 혹시나 타로 잘알 분들이 이걸 보셨다면 눈 감고 넘어가주세요... 채꿍적 허용 부탁드립니다

아직 밝은 분위기는 조금 더 남아있구요

아마 그게 지나고 또 다시 무언가 지나가면 슬슬 마지막화가 찾아올 겁니다(?)







@hw_ck__ https://peing.net/ko/roong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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